〈 63화 〉암투(暗鬪)
요나는 칼린을 계속 끌고 가고 있었다. 칼린은 매가리없이 끌려 다니면서 영주의 눈치를 보다가, 사교장을 나와 회의실로 가는 회랑 복도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왜 그렇게 화나신 거죠?"
회랑은 달빛에 젖어 오묘한 빛을 내고 있었다. 고작 태양빛의 반사광이지만 지금 그들에게는 눈이 시릴 정도로 밝았다.
그 정가운데에서, 요나는 칼린을 잡아 끌던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뿌리치듯 놓았다.
"내 피를 빨아라, 칼린."
그녀는 거칠게 입고 있던 정복을 풀어 헤쳤다. 그리고 칼린만큼은 아니지만, 달빛 아래에서 투명하게 비칠 정도의 피부를 드러냈다.
"영주님, 회의에 가시는 게..."
"이견을 허락한 적 없다."
요나는 분노하고 있었다. 칼린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저 강압적으로 자신의 목을 들이밀고 있는 요나를 향해 두려움이 담긴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칼린은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댔다. 그녀의 투명한 목덜미에서 미약하게 과일주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마침내 송곳니가 그녀의 목덜미를 꿰뚫고 피를 빨아내자, 칼린은 흡혈할 때의 특유의 몽롱함과 그녀에게서 야릇하게 섞인 향수냄새, 과일주의 향기에 오랜만에 술로 취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영주는 고개를 위로 꺾으며 그의 머리를 잡아 눌렀다. 다른 손으로는 그의 허리를 둘러 잡아 마치 피에타의 성녀와도 같은 자세로 그를 잡았다. 아니, 거기에 들어간 힘을 생각한다면 도망가지 못하게 잡았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칼린은 약간의 압박감속에서 술을 즐기듯 그녀의 피를 빨았다.
평소보다 조금 짧게 흡혈을 끝마친 그는, 잠자리를 끝낸 남성의 특유의 어색한 동작으로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아직 여운에 잠긴 듯한 요나를 바라보며 칼린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왜...그러시는 건가요?"
요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조용히 운을 띄웠다.
"칼린."
"네."
"그년이 널 만지게 하지 마라."
"누구..."
"미망인말이다."
그게 얼마나 큰 멸시표현인지 칼린은 알고 있다.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칼린을 바라보며, 요나는 조금 진정했는지 옷 매무새를 정돈하며 단추를 잠구기 시작했다. 다만 여전히 그녀의 눈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미망인. 불가해주(不可解呪)인. 뭐라고 부르던, 그년이 어떤 저주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것은 여전하다. 저주라는 건 본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야. 주변인들까지 같이 수렁으로 밀어 넣는 류도 있다."
칼린은 저주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 너무 한정된 지식이었기에 리쿠르트에게도 자세히 들어본 적이 없다.
"알레프에게 이리하의 정보를 찾아오라고 했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나에게 찾아와서 그러더군. 아무것도 없었다고."
"그렇다면..."
"칼린, 그 정도의 실력자가, 불가해주인이 그 어떤 과거도 없었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그년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거다."
확실히 그녀는 미등록 마법사이다. 칼린은 그녀가 숨기고 있는 것의 편린을 알고 있다.
"그년과 거리를 두거라. 약속해주겠나?"
요나는 그렇게 말하며 칼린을 바라보았다. 칼린은 거기서 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떨구며 쥐어짜듯 답했다.
"...네."
"착하지. 이제 하나의 우상이 될 부대이기에 남겨두고 있다만, 그래. 굳이 부대원들과 가까워질 필요는 없는 것 아니냐."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리고 풀 죽은 칼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맞습니다."
"그래, 칼린. 내가 연설 때 선택에 대해 이야기 했었지. 하지만 가장 나를 바꾼 선택은 언급하지 않았었다."
그녀는 가면을 벗은 칼린의 대리석조각같은 피부에 손을 갖다 대었다.
"나의 가장 무겁고, 성공적이었던 선택은 너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서 요나는 완전히 등을 돌렸다.
"가자. 아직 이르지만,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좋겠지. 가면은 다시 쓰거라."
"하지만 회의 중에는 벗어야 하는 것이-"
"알아.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다."
거대한 원탁에 아홉 명의 영주가 앉아있다. 전쟁 전 까지만 하더라도, 요나는 이 원탁에 자신이 앉을 일이 생기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각자의 영주 뒤에는 그들이 총애하는 가드가 한 명씩 서있다.
"자, 그러면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흰머리가 섞이기 시작한, 아마도 그 아홉 명중 가장 연로자인 남성이 입을 열었다. 각지게 정돈한 수염이 그의 엄격함을 보이는 듯했다. 이번 회의의 진행을 맡은, 무역의 도시 데버만의 영주이다.
"네 종자의 무례에 대해 이야기 하고싶군. 그 가면은 뭐지?"
칼린은 그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요나는 당황하지 않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지금 벗기도록 하죠. 칼린."
칼린은 바로 벗길 거라면 왜 굳이 지금 벗게 하는지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요나라면 분명 뭔가 뜻이 있어서 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확실히 뜻이 있기는 했다.
칼린이 가면을 벗음과 동시에 짧은 탄식과도 같은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체통과 규범으로 나라의 녹을 먹고 사는 자들이, 한순간이지만 고작 아름다움에 굴복했다.
요나는 그저 그게 보고 싶었다.
"...가면을 벗겼으니 더 문제를 제의하지는 않겠다. 그럼 이번 회의를 시작한다. 벨카의 영주도 원탁 안에서는 부디 존칭과 존법을 생략해주기를 바란다."
"알겠다."
대영주의 원탁회의, 누가 주가 되지 않는 이 회의장에서 서로에 대한 존칭은 금지된다. 적어도 지금 요나는 그들과 같은 급의 귀족으로서 있었다.
"이번 안건은 남쪽 접견지에 계속해서 침입해오는 '충'족에 대한 것이다만... 정말 미안하네만 요나경의 종자는 다시 가면을 써주겠나?"
"아, 죄송합니다."
"아니, 우리가 부족한 탓일세."
노련한 영주는 그 가드의 외모가 회의에 방해될 것을 알고있다.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으며 시야를 돌리지 않는 영주들을 제치고서 라도, 그들의 가드들이 헤이 해지고 있었다.
"그럼 충족에 관해서인데... 전쟁으로 혼란할 때를 노린 것인지 그들의 침입이 더 잦아졌다. 가벼운 타협으로 넘어가니 이들의 오만이 하늘을 찌르며 최근에는 그 흙 발굽으로 윌레인 최남단의 영지에 깃발까지 꽂았다고 한다."
무겁다, 라고 칼린은 생각했다. 단어 하나하나가 똑바로 박히는 느낌. 역시 대도시의 영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재빠르고 음습하다. 지나는 길마다 협상 없는 학살을 일삼고 부대가 결성될 듯하면 자리를 피하지. 언제나 50명정도의 소수 정예로 활동하기에 결합도 분산도 빠르다. 그렇다고 그들의 본진을 치자니 유목민의 땅은 너무 넓다."
"공습으로는 안되는 건가?"
심한 곱슬머리를 한, 두꺼운 안경을 쓴 여성이 그렇게 말했다. 기계산업으로 가장 선두를 달리고 있는 라티아의 영주였다.
"말했다 시피 땅이 너무 넓다. 그리고 민간인과 우리의 포로까지 휩쓸리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윌레인 땅을 노략하고 있는 약 150의 약탈부대이다. 그들을 전부 쓸어 없애면 다시는 우리 영토를 밟지 않겠지."
"난 반대다. 공습 쪽이 나아. 남쪽에 상시 병력을 대기시키며 최고 경계태세를 세울 것이 아니라면 바로 그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
갸름한 금발의 미남이었다. 윌레인의 남단에 위치하는 관광도시, 네르바의 영주였다.
"...윌레인에는 국격이 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윌레인이 일개 변두리 유목민들과 싸우기 위해 마도의 집합채를 꺼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명예라는 허실때문에 남단의 피해를 무시할 샘인가? 지금 당장도 충족이 몰려오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라티아의 영주가 매섭게 쏘아붙이자, 데버만의 영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만약 공습에 라티아의 무기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고 이 자리에서 약조한다면, 그때는 한번 더 고려해 보도록 하지."
그녀는 벌써 속셈을 들켰다. 기술 개발 투자에는 유능하지만, 이런 손 패를 감추는 것은 그녀의 전문이 아니다. 그녀는 짧게 혀를 차며 등을 기댔다.
"... 충족이 네르바의 땅을 밟는 것이 눈앞이다. 공습이 안된다면 다른 제안할 방법은 없는가?"
네르바의 영주의 말에 긴 앞머리가 눈가까지 내려온, 어두운 인상의 여성이 손을 들었다. 그녀는 반투명한 실크 장갑을 낀 손으로 앞머리를 넘기며 말했다.
"책봉형태로 그들과 교류를 시작하는 것은 어떤가?"
종이 제조로 최근에야 급부상한 조닐의 영주였다.
"그들로서는 받아들일 이유가 없지. 굳이 상하관계를 만들지 않아도 우리의 남단을 노략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으니까 말이야."
"결정났군, 폭격하고 조공 책봉관계를 만든다."
"급하게 판단하지 마라."
"뾰족한 의견이 없다면 그냥 받아들여라. 회의를 질질 끌려는 시도로밖에 보이지 않는군."
회의장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데버만의 영주가 손을 들어 조용히 제지하는 것으로, 회의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조용해졌다.
"...떠오른 대안은 있다. 그렇기에 이번 회의에 요나경까지 초대된 것이다."
"우리 부대에 일을 맡길 생각인 건가."
요나의 말에 데버만의 영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국가에 직속 되어있는 전후 복구부대라면 물자사용에 대한 문제에서 가장 자유롭다. 이번 네크로맨서를 토벌해낸 것으로 그 실력도 증명해냈지."
"아무리 그래도 너무 무리한 일을 시키는 군. 이쪽의 부대원은 10명이다."
요나의 말은 합당한 것이었다. 물론 비등록 마법사 토벌에도 터무니없이 적은 수였지만, '충'이라는 훈련받은 기마병 50을 10명으로 상대하는 것은 애초에 개념이 다르다. 언데드를 죽이는 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일이다.
"그래. 이기라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들과 팽팽한 진영을 유지해 주기를 바란다."
"팽팽한 진영?"
"이 제안을 수긍할 경우 8도시의 영주들은 각자의 사병을 10명씩 지원하겠다. 도합 80의 병력이 이동할 동안만 버티면 된다."
각 도시의 영주들이 그 말에 크게 반응했다. 사전에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이며, 보통 영주의 사병은 이런 일에 이용되지 않는다.
"처음 듣는 말인데, 사전에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이유가 뭐지?"
"이 계획안이 드러날 경우 애초에 요나를 회의장에 참여시키지 않게 수를 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명은 이 말이 조금 찔리겠지."
"... 정확한 계획을 말해봐라."
"최남단까지 각 영지의 모든 사병이 모이는 데에는 글쎄, 한 3주일이 걸릴 것 같다. 요나의 10인이 충족과 팽팽한 대형을 유지하며 그만큼 버틴다면 그 때 모아둔 80의 병력으로 침입한 전원을 몰살한다."
무거운 침묵속에서 요나가 입을 열었다.
"10명만으로 50의 기마부대를, 그것도 충족을 3주간 상대하라는 거냐?"
"그래. 가능한가?"
칼린은 그녀가 제발 이 임무를 받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요나는 조금 생각하다가 담배를 꺼내며 자신 넘치게 답했다.
"아. 그렇고 말고. 우리 부대원들은 유능하다."
칼린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런 요나의 반응에 모두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주목. 사병 10명은 각 영지에서 자랑하는 전사들로 보내는 것으로 한다. 그리고 이번 임무에는 요나도 참가하도록. 이견이 있는 자는 지금 말해라."
"왜 부대원 80을 한번에 보내지 않는 것이지?"
"남단의 학살과 약탈은 현제진행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며, 80이 한꺼번에 몰려온다면 그들의 경계를 부르기 때문이다. 50씩 몰려올 때 80의 숨은 병력으로 치는 것이 핵심인 작전이다."
"그 병력들의 숙박은 어떻게 책임지려는 것이지?"
"모두가 받아들인다는 전제하에, 네르바에서 80을 수용한다. 접경지까지 왕도마차로 두시간이면 닿을 거리니 문제는 없다."
"우리 영지가 그걸로 이득보는 것은?"
"물자를 전부 무상으로 지급하라고 하지 않았다. 본 작전이 허용되면 각 지방 사병들에게는 전하께서 직접 발부한 어음이 지급될 예정이다.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건 네르바겠지."
질문은 그걸로 끝이 났다. 모두의 침묵이 곧 암묵적인 결정이었다.
"그렇다면, 전후복구부대의 세번째 임무는 충족의 공격기마부대 박멸이 되었다. 작전은 어음이 발급되는 대로 시작할 것이다. 충족들이 쳐들어오는 시기와 맞춰서 보면 약 2주정도 후가 되겠지. 미리 준비하도록."
데버만의 영주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회의의 진행자는 네르바의 영주가 맡게 될 것이다. 이만, 윌레인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그 말을 마지막으로, 길었던 회의가 끝났다.
"그런 임무를 무턱대고 받으시면 어떡해요!"
칼린은 반쯤 은 비명을 섞어 요나에게 말했다. 요나는 태평하게 담배를 꺼내며 대답했다.
"진정해라, 칼린. 이 회의에 참가한 순간부터 나에게 거부권은 없었어. 영주가 사병을 지원한다고까지 말했다. 여기서 뒤로 빠졌다면 다시는 왕궁을 못 밟게 되었을지도 몰라."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성냥을 발로 밟아 껐다.
'아이델, 그 늙은 여우가...'
데버만의 영주, 아이델. 무역도시의 영주로서 그는 좋든 싫든 다임 상회와 멀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분명 이렇게 무리한 명령은 에테롬의 손길이 거친 것이리라.
"좋게 본다면, 이번 임무도 성공하면 그 때야 말로 우리 위치가 견고해진다. 단순히 진격하지 않으며 농성으로 3주를 버티는 건 2면 마법사, 네크로맨서 사살보다도 쉬운 일이 될 것이다."
칼린은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요나는 그 마법사가 세상에 복수하려는 미치광이 마법사이긴 커녕, 아들을 찾으려고 돌아다니던 성격 좋은 늙은이였다는 것을 모른다.
"남들이 절대 못 먹을 것들을 덥썩 집어먹으며 몸을 불리시는 겁니까. 마치 하이에나 같은 꼴이로군요, 요나경."
요나는 그 신경을 긁어내는 듯한 목소리에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안색을 바꾸며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미쉘님."
8대도시중 바나루크의 영주, 미쉘이었다. 윌레인에서 상회를 통해 판매되는 약품들은 거의 그녀의 도시를 거치며 만들어진다.
"당신을 보는 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 것... 은 아니죠. '전차' 요나가 죽을 것을 예고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종자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예? 저요?"
칼린이 당황해서 되묻자 요나는 빠르게 그를 뒤로 세웠다.
"종자와 주인을 떼 놓고서 대화한다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품위를 목숨처럼 하시는 미쉘경이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놀랍군요."
"... 딱히 요나경이 있어서는 안될 이야기도 아니긴 합니다만, 전 그냥 요나경을 배려했을 뿐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칼린 쪽으로 다가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칼린을 감싸고 있는 요나 쪽으로 다가왔다. 높고 좁은 힐이 걸을 때 마다 청량한 소리로 울렸다.
"가면을 벗어 보거라."
그녀는 요나의 바로 앞에 서서 칼린의 얼굴을 마주하며 말했다. 힐까지 신은 그녀는 180정도 되었기에 요나보다 칼린의 눈높이에 가까웠다.
"영주님..."
"...가면을 벗거라, 칼린."
요나는 쥐어 짜 내 듯 그렇게 말했다. 미쉘은 그런 요나의 표정과 어투까지도 즐기는 듯 웃었다.
칼린은 가면을 벗었다. 미쉘의 표정이 점점 바뀌어 갔다. 마치 아름다운 보석을 보았을 때 나오는 표정. 그녀의 종자, 뒤낭은 그런 그녀를 보며 칼린에게 유감을 표하듯 고개를 숙였다.
"당신같은 전장의 시궁쥐가 어떻게 이런 보석을 주웠을까요, 벨카에 특출 난 미인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녀는 한마디 한마디에 도발을 끼워 넣었다. 요나는 조용히 분노를 삭혔다.
"이름이 뭐지?"
"...칼린입니다."
"어머."
이름을 듣고서 미쉘은 요나를 비웃듯 내려 보았다.
"혹시 그 이름은 주인이 직접 하사한 건가?"
"...그렇습니다만."
"하, 하하! 요나경, 제 생각보다 욕망에 충실하시군요!"
미쉘은 그렇게 말하며 요나를 향해 비웃음을 보넀다. 요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으나, 그녀의 굳게 쥔 양 주먹에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인에게 어떤 취급을 받고 있을지는 뻔하군. 칼린이라 불리며 전장을 돌아 다닌다니, 어떤 의미로 해석하건 아까운 일이야. 어떤가, 칼린. 바나루크로-"
"그만하십시요."
결국 요나는 그녀의 말을 끊고야 말았다. 안 그래도 살벌했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 살얼음판이 된 꼴 이었다.
"...제 말을 끊으신 겁니까?"
"8영주분이라고 해도 일선을 넘으셨습니다. 주인 앞에서 종자를 유혹하다니, 부끄러운 줄 아십시요."
미쉘은 가만히 요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실핏줄까지 드러나 있었다. 확실히, 지금 미쉘의 도발은 둘 사이의 위치차이를 감안해서라도 일선을 넘은 행위였다. 미쉘도 칼린의 외모에 한순간 홀려서 저지른 실수였다.
"...그 말은 맞지만 부끄럽지는 않군요, 요나. 제가 부끄러운 일은 단 하나뿐입니다."
그녀는 발을 돌렸다. 그림자 위로 미끄러지는 듯한 동작이었다.
"피임약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사실뿐이죠. 알아들으셨나요, 요나씨?"
그렇게 미소를 남기고 그녀는 자신의 종자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 임무가 제대로 되지 않아 영주를 잃게 된다면... 우리 영지는 너를 언제든 환영한단다, 아름다운 아가. 기대하고 있으마."
그녀는 달빛사이로 참 잔혹한 말을 두고 떠났다. 회랑에는 이 상황을 어떻게 넘길지 고민하는 칼린과,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몸을 떨고 있는 요나, 둘만이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