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암투(暗鬪)
"칼린과 영주는 무슨 관계일까."
라드는 셋만이 남은 테라스에서 조용히 화두를 꺼넀다. 그 분위기 속에서는 절대 말해서는 안될 것 같은 주제이기도 했다.
"...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거냐."
도르베는 이리하의 눈치를 보며 작게 말했다. 그의 손에는 아직 동전이 들려 있었다.
"방금 영주가 칼린을 데려갈 때, 영주가 이리하와 칼린의 접촉 그 자체를 신경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거든."
라드는 싱글거리며 아직도 분노를 눌러 참고 있는 이리하를 바라보았다.
"급했다... 보다는, 급해 졌다 라는 느낌? 단순한 상하관계가 아닌 것 같다 이거지."
그리고 들고 있던 동전 두개를 주머니에 집어 넣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도르베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라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리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이리하양. 난 방금은 영주가 너무 심했다고 생각하는데."
"...저리 꺼져라."
"정말로, 마차에서부터 영주가 이리하양에게만 너무 심하게 굴지 않았나?"
조금 떨고 있는 이리하의 얼굴 앞으로 억지로 머리를 들이밀며 라드는 그렇게 말했다.
"뭔가 알고 있지 않아?"
이리하는 라드를 세차게 노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나 라드는 그 시선을 치우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조금 능글 거리는 미소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비켜. 방해야."
그려는 그렇게 말하고 라드를 밀치며 인파속으로 들어갔다. 도르베는 그런 라드를 바라보며 질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너무한 것 아닌가."
"너무하다니. 이리하, 칼린, 영주가 뭐를 숨기고 있는지 우리는 모르니까 말이야. 이정도 질문은 당연한 게 아닌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동전을 다시 꺼냈다. 분명 주머니에 넣었던 동전이 그의 소매에서 흘러나왔다.
"아니면, 넌 이리하를 완전히 신뢰하고 있어?"
도르베는 바로 그렇다, 라고 하려다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녀는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라드도 그렇지만, 도르베에게는 오히려 라드보다도 그녀가 믿기 힘든 존재였다. 너무 비밀이 많은 여자였다.
"그건..."
"저쪽에서 말해주지 않는 다면 방법은 없지만 말이야... 셋 중에서 가장 입을 열 것 같은 사람은 칼린인가-"
라드는 지금은 그저 씨앗만 뿌려 두기로 했다. 너무 많은 작업을 치면 도르베가 뭔가를 눈치챌 수도 있다. 그는 눈치가 꽤 좋으니까.
"뭐, 즐거운 축제날에 생각할 거리는 아니지. 동전이나 제대로 쥐어 보라고."
"...아."
그래도 분명히, 씨앗은 심었다.
"미안하다, 칼린."
요나는 칼린에게 물잔을 건내 받으며 조용히 그렇게 말했다. 칼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볍게 웃었다.
"네 강한 척하는 주인의 추한면을 보았구나. 얼마나 우습겠느냐. 웃어도 좋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칼린은 상당히 복잡한 기분이었다. 전상민이 아닌 '칼린'으로서 그녀는 그의 부모와 같은 존재였다. 마치 부모가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은 것을 본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칼린."
"네."
"어디에 가지 말아 다오."
그녀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아래에서는 미망인이, 위에서는 돼지 놈들이 칼린을 노리고 있다.
"...제 이름을 지어 주신 것은 영주님이십니다."
"그 이름은-"
"뜻은 신경 쓰지 않아요. 전 보석이라는 뜻을 선호하니까. 그거면 돼요."
칼린은 그렇게 말하며 요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영주님은 제 정체까지 받아 주신 유일한 사람이예요. 전 그거면 돼요."
"...그런가."
요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까지고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축제는 영원히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칼린, 이 자리를 빌려 선언할 테니 나의 증인이 되어 주겠나."
"어떤..."
"오늘 나에게 부끄러움을 준 자들은 마땅한 보복을 받게 될 것이다. 저 달에 맹세하지."
평소의 당당한 목소리. 그녀가 내민 손을 보며, 칼린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전 영주님을 믿습니다."
"다행이로군."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당당히 고개를 돌렸다가,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다시 칼린을 돌아보았다.
"칼린, 돌아가면 다시 사교장으로 갈 건가?"
"그렇죠. 모두에게 오늘 결정된 일도 미리 전할 겸."
요나는 칼린에게 다가가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다만 방금과 같은 악수를 하자는 손동작은 아니었다.
"보여줄 것이 있으니 말이다. 사교장에 가기 전에, 한 곡 어떤가."
"네? 그, 여기 서요? 누군가에게 보이기라도 한다면..."
"성의 안쪽이다. 8귀족들도 전부 위치로 돌아가고 있고. 지금 이 회랑은 우리 둘 만의 것이다."
쉽사리 손을 내밀지 않는 칼린의 손을 요나가 붙잡았다.
"지난 춤은 불 꺼진 방 안에서 음악도 없었고 좁은 곳이었지. 마지막에는 분위기도 안 좋았어.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한 곡을 끝 마치자꾸나. 최고의 조명과 음악 아래에서."
"여기도 조명과 음악은 없는 걸요."
조금 신나서 미소 지으며 말하는 칼린에게서, 요나는 붙잡은 손을 놓을 수 없었다.
"기다리거라. 곧 시작된다."
"뭐가..."
그리고,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그 소리는 터지는 듯한 소리로 바뀌며, 무수히 빛나는 불이 되었다. 잘게 찢어진 갖가지 색상의 색종이가 흩뿌려 지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왕도 쪽에서 메아리처럼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기념일의 20시가 되면 왕도의 조각상들이 10분간 노래를 부르지. 춤추기에는 나쁘지 않은 곡이라고 생각한다."
이상하게도 그 노래는 폭죽의 폭음속에서도 참 편안하게 들려왔다. 차분했던 회랑은 어느새 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때, 최고의 조명과 음악이 맞지?"
"부정할 수 없네요."
그제서야 칼린은 반대손을 내밀었다. 아아, 그래. 이 순간만 영원할 수 있다면. 다만 그럴 수만 있다면 이제 요나에게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으리라.
그 춤은 서로를 녹이듯 길게 이어졌다. 폭죽의 불꽃이 꺼지고 나서도.
어느새 동전으로 간단한 마술을 성공하게 된 도르베는, 묘하게 조용해진 분위기에 무도회장 안쪽을 쳐다보았다.
"연주가 끝난건가?"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멈추고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기에 의아해하던 도르베는 그제서야 조각상에 관한 것이 떠올랐다.
"설마... 그걸 오늘 열어준다고?"
분명 장관이 될 것이다. 아마 다른 이벤트도 준비중인 것인지, 몇몇 커플들이 사람 없는 공간을 찾아 다니는 것이 보였다. 도르베는 왜인지는 몰라도 그 때 아스타가 떠올랐다.
"뭐야, 도련님. 마술연습은 끝인가?"
"아, 미안하다. 아스타를 찾아야 해."
젊은 두 남녀이다. 이 순간에 서로를 찾는 것이 어떤 의미가 되는지, 도르베 본인은 몰라도 라드는 알고 있었다. 급하게 동전을 돌려주려는 도르베의 손을 라드는 밀어냈다.
"가져가라고. 선물이다."
"뭐야, 나에게도 하나 주는 거냐."
도르베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 금화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곧 그 나이 때 청년이 지을 법한 밝은 웃음을 지었다.
"고맙다. 그럼."
그렇게 말하고 급하게 무도회장으로 들어가려던 도르베는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꽤 세게 박은 머리를 매만지며 보니, 앞에 넘어져 있던 것은 아스타였다.
"이런 썅, 뭐야... 도르베?"
"네, 네가 왜 여기로?"
도르베는 급하게 일어났다. 아스타는 자리에 주저앉은 상태로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아니, 너가 없어서 찾고 있었는데, 릴로가 너는 테라스로 갔다 길래. 사람 많은 거 싫어하는 구나- 하고 그냥 두고 있었는데, 불꽃놀이를 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아스타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잠깐 말을 멈추었다.
"...너랑 보는게 제일 재밌을 것 같더라."
"...그러냐."
도르베는 아스타가 일어날 수 있도록 손을 뻗어 주었다. 그리고 일어난 아스타를 이끌고 테라스로 데려갔다.
"뭐야, 너도 있었냐?"
"걱정 마. 불꽃놀이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말이지."
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테라스를 빠져나왔다.
"무도회 내내 저 새끼랑 있었냐?"
아스타의 질문에 도르베는 잠깐 생각하다가 답했다.
"어쩌면... 너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저놈도 그렇게 나쁜 자식은 아닐지도 모른다."
"엥? 그럴리가."
"어쩌면이다. 그럼."
도르베는 그렇게 말하고 쏘아 올려지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불놀이나 보자 꾸나."
라드는 무도회장의 거대한 창 너머로 테라스에서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그들과, 불꽃놀이를 순서대로 보았다. 이 불꽃놀이는 왕도 전체에 보이리라. 이 음악소리는 왕도 전체에 퍼지리라.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정도는 자신은 자신의 누이와 같은 것을 누리고 있다.
위대한 윌레인에게 무궁한 축복을, 라드는 비웃듯 그렇게 말하며 과일주와 함께 자신의 조소를 삼켰다. 그리고 등을 돌려 군중속으로 묻혀 들어갔다.
"누구는 아쉽겠어?"
불꽃놀이를 바라보는 갤러한에게, 륑게가 다가와 놀려 대기 시작했다.
"...응, 많이 아쉽군."
"아... 그러냐?"
갤러한은 그의 농담을 받아 칠 정도로 기운 넘치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감상에 젖어 그저 그 불꽃놀이를 바라보았다.
"야, 그래도 뭐,. 내일이면 다시 만나잖냐.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는 게 어디야?"
"기왕이면 이 풍경을 같이 보고 싶었어. 리쿠르트의 마지막 불꽃놀이는 우리를 탈출시켰을 때 쓴 폭죽이었을 테니까. 내가 마지막 기억을 바꿔주고 싶었다."
그는 평소보다 말투도 조금 차분해져 있었다. 륑게는 자신이 놀릴 타이밍을 잘못 잡았음을 직감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갤러한을 혼자 두려다가, 곧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갤러한에게 다가왔다.
"야, 우리 이제 영웅이야. 이런 식으로 일 몇 번만 더 하면 설마 네 여친 파티 한번 데려오는 것도 못하겠냐?"
"그렇겠지?"
갤러한은 그제서야 조금 웃음을 보였다. 륑게는 누군가를 격려하면서 생기는 미묘한 분위기가 싫었기에, 혓바닥을 한번 내밀어 보이고 그에게서 떨어졌다. 륑게가 가고 나서도 한동안 갤러한은 불꽃놀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땠어?"
"놀릴 맛도 안나. 침울해져서는..."
"하! 내가 이래서 누구랑 안 사귄다니까."
륑게는 소니아와 릴로가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 셋은 불꽃놀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다만 회장 안이 번쩍번쩍거려서 조금 고양된 상태이기는 했다.
"아, 그런데 좀 부럽네. 나도 불꽃놀이 같이 볼 사람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뭐야, 너도 그런 생각은 하는구나?"
되는 대로 뱉은 듯한 릴로의 말에 소니아는 원망스러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감상 없는 친구들을 둔 자신의 잘못이라며 상황을 넘기려고 했다. 시선 끝에 라드가 보였다. 그는 마치 불꽃놀이에서 도망이라도 치듯 등을 지고 있었다.
"뭐야, 혼자서 또 어디가..."
그녀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라드는 군중속으로 사라졌다. 그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조금은 궁금했지만, 이윽고 별 신경 쓰지 않으며 다시 자신의 친구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야, 너네들 핀 못봤냐? 한 1시간쯤 전에 마지막으로 보고 어디 갔는지 못 찾겠네."
"꽤 인기 좋았으니까, 어디 귀부인 하나 제대로 꼬신 거 아니야?"
"하, 걔가? 말이 되는 소리를... 차라리 어디 집 쿠거한테 쥐어 짜이고 있는 쪽이 말이 돼."
"하하, 무리수인가?"
셋은 그렇게 잠깐 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서, 다시 평소처럼 바보같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충 평소의 술자리때 하는 이야기와 비슷한 것이었다.
이리하는 무도회장을 나와 있었다. 그렇다고 테라스도 아니었다. 그녀는 화장실에 있었다.
그녀에게 무도회는 이제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그저 모멸감에 치를 떨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겨보았다. 머리카락이 썩은 석유같은 색을 풍기고 있다.
차라리 쥐어 뜯어버리고 싶었다. 어찌되든 상관없었지만, 비행선에 검게 칠해져 있는 자신의 머리를 보고, 미망인이라 멸시를 당하고 나니 그 검은색 머리가 너무 증오스러웠다.
"...그러나 이것마저 위대하신 분의 시험으로 달게 받아들이겠 나이다."
그녀는 눈물까지 삼켜내며 강하게 깍지를 끼었다. 그리고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며, 조금 떨었다.
"제가 걷는 모든 길이 언젠가 그 분의 뜻을 따라 감에 의심치 않습니다."
조금씩 그녀의 떨리던 몸이 진정되는 듯하다가, 마침내 그녀는 다시 정적을 찾았다. 그리고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평소의 그것이었다.
"허단디알테스터만..."
그녀는 그렇게 기도문을 끝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일이 좌절하기에는 너무 길고 험한 길이었기에.
파티가 끝났다. 불꽃놀이는 일종의 엔딩크레딧이었다. 요나와 칼린은 천천히 무도회장으로 올라가 부대원들과 합류했다.
칼린이 이번 회의로 결정 난 것을 모두에게 전달했다. 각자 반응은 달랐지만, 어쨌든 불만족스러운 여론임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왕실의 시종을 따라 각자의 방을 배정받았고, 각자의 밤을 보냈다.
왕국의 신병들보다 늦잠을 잘 수는 없다, 라는 이유로 그들의 모든 방은 요나의 지시하에 조금 이른 22시에 소등되었다. 기상 예정시간은 06시가 될 예정이었다.
칼린은 홀로 누워서 불 꺼진 천장을 바라보았다. 분명 이세계에 처음 왔을 적에는 이렇게 마음 편히 웃고 떠들며, 즐거워할 때가 생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생각은 곧 불안감을 가지고 왔다. 자신이 격어 온 모든 일들, 마리 모녀의 죽음, 그 사이에서 자신이 행복해도 되는 것인지에 관한 두려움이었다. 최근에는 어떤 꿈도 꾸지 않고 잠을 깨는 날도 있었다. 그에게 과연 그런 행복이 허용되는 것일까.
그에게는 행복에서조차 쓴맛이 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걸 포기할 수는 없어서 억지로 부둥켜 잡고 있었다. 슬슬 정신을 제대로 차리고 이세계에 적응하면서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충족과 싸운 다는 것은, 인간을 적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을 죽이게 된다는 것이다. 두렵지만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그 전까지 최고의 정신상태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 그에게 행복은 아주 쓴 정신치료제 정도의 역할이었다.
요나는 잠자리에 누워서 깊은 숨을 내쉬었다. 오늘 있었던 모든 일들을 감안하고 서라도, 꽤 멋진 하루였다. 그녀의 심장은 아직도 요동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어 보았다. 최근 그 부분만 이상하게 민감해진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게 나쁜 느낌은 아니다.
그래, 어디의 누가 되었든 그 누구도 나에게서 칼린을 앗아 갈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의 비밀을 잡고 있으니까. 그는 나의 것이 될 테니까. 지금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며, 언젠가 서로밖에 필요가 없는 사이가 될 것이니까. 그게 누가 되었건 방해할 수 없-
제리코.
그녀는 갑작스럽게 그가 떠올랐다. 그는 무도회장에는 참여조차 하지 않았었다. 공중에 떠있던 것 같은 기분이 갑작스레 낙뢰처럼 떨어졌다. 맙소사, 그녀는 가장 위험한 것을 잊고 있었다. 8영주따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것이었다.
그가 칼린을 지목했다. 정치도, 공갈도, 협박도, 타협도, 대화도, 무력도 그를 멈추지 못할 것이다. 이미 그와 칼린이 만나는 것은 확정사항이 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는 오늘 칼린을 만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당장 칼린의 방으로 달려가서 그 상황을 전달해주고 싶었다. 차라리 도망치자고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도망은 악수(惡手)이고, 지금 알리는 것은 칼린의 불안감을 부추길 뿐인 일이다. 어떻게 든 피할 수 없는 시험이라면 차라리 최대한 진심으로 임하게 하는 것이 안전할 터이다. 그렇다고 그 사실이 그녀의 걱정을 지워주지는 않는다.
요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준비되어 있는 술을 한잔 더 마실 수밖에 없었다. 달궈졌던 몸은 갑자기 떠오른 충격에 싸늘하게 식었다. 그녀는 자신의 무력함을 안주로 밤을 보냈다.
그리고 성에도 아침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