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7화 〉암투(暗鬪) (67/164)



〈 67화 〉암투(暗鬪)

"아, 그 조각상에서 나오는 노래 참 좋죠. 그걸 왕궁에서 불꽃놀이를 보며 듣다니, 정말 좋았겠네요."
"뭐야, 알고 있던 거야?"
갤러한의 질문에 리쿠르트는 조금 실례라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우리 아버님은 교수님이셨다구요. 아버님을 따라다니면서 왕도는 꽤 자주 갔어요."
"헤, 그럼 다음에는 같이 가서  관광 좀 시켜주라."
그 말에 리쿠르트는 웃으려 대답하려 다가 말을 멈췄다. 갤러한은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떠올렸다.


"지금은 힘들겠지만, 언젠가요..."
그녀의 아버지는 반역자라는 오명을 쓰고 있었다. 아직 그녀는 왕도를 반기지 못할 것이고, 왕도는 그녀를 반기지 않을 것이다.


"뭐, 마음에 준비만 되면 언제든지 말해. 국가 영웅이신 갤러한님이 같이 있는데 누가 불만을 가지겠어?"
"하하, 무리나 하지 마세요."
리쿠르트는 그렇게 웃고서 갤러한의 손을 잡았다.


"왕궁에서 저 말고 다른 여자랑 노시지는 않으셨죠?"
"놀았다고 한다면?"
"낭심을 걷어 차겠어요."
"...다른 동료들한테 물어봐. 진짜 그런 일 없었어."
사뭇 진지한 대답을 하는 갤러한을 보며 리쿠르트는 웃었다. 그리고 물었다.


"칼린에게 물어볼 게요. 긴장하세요."
갤러한은 그 말에 한순간 표정이 굳어 버렸다. 조금 생각하던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칼린은 영주의 종자자격으로 8귀족의 회의에 나갔었어. 중요한  그게 아니고 말야..."
갑자기 분위기를 잡는 갤러한을 리쿠르트는 조금 이상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내 생각에 영주님과 칼린이 뭔가를 더 숨기고 있는 것 같아."
"예? 아니...아아앗! 진짜요? 그치만 칼린에게 요나는 자기를 팔려던 사람일 텐데...!"
"아니, 그런 핑크 빛 비밀이 아니야."
갤러한은 화색을 띄며 어쩔 줄 몰라 하던 리쿠르트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왕국 최고의 무력이 동원될 정도의 비밀이야."
리쿠르트의 얼굴도 조금씩 굳어 가기 시작했다.

"축제 다음날, 그러니까 신병들 훈련 봐주는 날에, 제리코님이 칼린을 습격 했었어. 그리고 둘이서 무슨 대화를 나누더군."
"...무슨?"
"대화 내용은 몰라.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어.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음모론이 되겠지만, 어쨌든 가벼운 문제는 아닐 꺼야."
리쿠르트는 얼굴이 하얘지고 있었다. 갤러한은 너무 갑작스럽게 이야기를 꺼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조금 후회했다.

"걱정 하지마! 적당히 대화하다가 제리코는 돌아갔었고, 칼린도 부상은 특별히 안 입었던  같으니까. 하지만..."
갤러한은 조금은 안심한 리쿠르트를 껴안았다.


"최대한 빨리 성에서 나와, 리쿠르트. 우리 영주에게는 뭔가 숨기고 있는 꿍꿍이가 있어.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야. 너도 알잖아."
그 말에 리쿠르트는 갤러한을 조금 밀어냈다.

"요나를 왜 그렇게 나쁘게 말하나요!  동생같은 아이예요!"
"아니,  동생이었으면 널 그 정도로 때리지 않았지. 리쿠르트, 정말 일이 너무 급격히 극적으로 풀린 것 같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거야?"
물론 리쿠르트도 그런 생각을  본적은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일이 간간이 생기기에 기적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것이다.

"칼린이 요나를 만나 일종의 설득을 했었다고 말했지. 내 생각에는 그게 거래였고, 그 거래의 내용이 윌레인에서 불법적인 일이었던 거지. 그래서 제리코님이 칼린을 건드린 것으로 경고한 거고."
"말도 안돼요. 길에서 주워 온, 아무것도 없는 칼린과 리쿠르트가 무슨 거래가 되겠어요?"
"칼린이 아무것도 없다고? 걔는 인적자원의 최상위계층같은 놈이야. 리쿠르트, 걔를 가르쳐 봐서 알잖아."
"...그렇다면 단순히 인재채용의 형태로 들여온 것일 수도 있잖아요.  굳이 구린 게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왕국 최강검이라고! 오직 왕가만이 다룰 수 있는 광견이 굳이 신병훈련소까지 숨어 들와서 칼린과 검을 맞댔어! 왕도의 안전같은 것과 직접 관련 있는 문제나, 제리코님 본인과 관련된 문제가 칼린과 요나 사이에 있다는 거 아니야?"
리쿠르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갤러한은 그 기세를 탔다.

"영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똥통을 굴러도 살아서 구르는  나아. 리쿠르트. 최대한 빨리 성을 나와. 나도 소금부대의 계약이 끝나면 바로 그쪽으로 따라 갈게. 임무 휴가마다 만나러 갈게."
그녀는 즉답할 수 없었다. 아직은 요나를 믿고 싶었다. 그녀가 지하감옥에서 자신을 끌어안았던 것조차 거짓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한번 대화라도 해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되었다.

"...생각할 시간을 줘요."
"리쿠르트!"
"걱정마세요, 갤러한. 요나는 제가   알아요."
아마도, 이지만.

"정말 위험하다 싶으면, 그 때는 제가 먼저 도망칠 게요. 함으로 연락을 남길 게요."
"... 그래, 자기는 나보다 똑똑하니까."
갤러한은 기세를 조금 꺾었다. 어차피 바로 도망치기도 힘든 상황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오늘은 먼저 가는 게 좋을  같다."
"...그러네요."
리쿠르트는 아쉬운  말했다. 갤러한은 그런 리쿠르트를 보며 한번 피식 웃었다.


"뭐, 매일 오고 있잖아.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다가, 결정 났을 때 말해줘. 다음 임무는 영주도 참가할 테니까 한동안은 성안에 있는 네 걱정은  해도 되겠지."
"...그러네요! 그럼 내일 다시 봐요, 갤러한!"
"그래. 내일 봐."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섰다. 길게 뻗은 복도의 끝에,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갤러한이 앞에 나가며, 그 형상은 더 뚜렷해 졌다. 요나였다.


"갤러한,  온 건가."
갤러한은 조금 숨을 참았다. 타이밍이 조금  좋았다.

"... 이제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가. 매번 미안하군. 아직 리쿠르트를 밖으로 보내기에는 불안하니까 말이다."
또 그녀가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안한 것이겠지. 갤러한은 이 분위기가 불편했다.


"뭐, 그래, 갤러한. 만났으니 하는 말인데..."
요나는 갤러한에게 다가왔다. 갤러한은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칼린과 제리코가 만났던 것... 그건 부대원들 끼리의 비밀이었다. 칼린에게도 굳이 다시 언급하지 않을 일이고. 맞지?"
이상할 정도의 타이밍. 너무  들어 맞는다. 갤러한은 그녀가 지금 떠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을 버리지 못한다.

그건, 요나가 문 너머로 모든 것을 듣고 나서 자리로 돌아간 뒤 우연을 가장하며 부딪힌 것. 만약 그렇다면-


"맞냐고 물었다, 갤러한."
그녀는 마치 눈만 빛나듯 갤러한을 바라본다. 아름답지만 두렵다. 갤러한은 압박감 속에서 쥐어짜듯 선택지를 골라냈다.

"...맞습니다, 영주님."
마치 수정구슬을 들여다보는 점쟁이처럼, 요나는 갤러한을 한참을 뜯어본다. 그리고 무표정하게 입꼬리만 들어 올린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어 갤러한의 표정은 한 층  굳는다.

"...갤러한."
"넵."
그의 말투조차 평소보다 굳어버렸다. 그녀를 상대한다면 승률은 얼마나 될까. 당장 1대1로 붙어도 갤러한의 승률은 0에 가까우리라. 눈 앞의 여성은 '전차' 요나이다.


"지휘관이라고 불러라. 너는  부대원에 소속되어 있으니까. 다음주에는 같이 임무를 하게 될테니 미리 호칭을 고정시켜 두자고."
요나는 웃으며, 갤러한의 어깨 위에 손을 얹는다. 갤러한은 그제서야 숨통이 조금 열리는 느낌이 들어서 작게 숨을 내쉰다.

"그럼. 조심히 가라고. 바로 술집으로 가는가?"
"아, 네. 그렇습니다."
"그래. 들어가라."
영주는 그렇게 말하고서 갤러한을 스쳐 지나간다. 갤러한은 그녀가 리쿠르트의 방을 지나갈 때 까지 그녀에게서 눈을   없었다.


1. 의문을 가지지 마라.
2. 무례하지 마라.
3. 거짓말하지 마라.
라드가 주의하라고 명령받은 것은 그렇게 세가지였다. 지금 그의 뒤에는 엄격한 표정을 지은 용병들이 20명 서 있다. 그리고 앞에는, 짤뚱한 몸에 맞지 않는 정장을 입어 조금 우스운 꼴의 에테롬이 있다.


"이야, 긴장되네요. 수뇌부와 접선이 이렇게 빨리 이뤄질 줄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말을 접견지 바로 앞에서 하는 것도 대단한 신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접견지에는 작은 텐트가 있었다. 상당히 고급 재질의 천을 사용한듯, 그 텐트는 일말의 빛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처럼 완전한 무광의 흑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라드, 6명만 잡아 골라서 텐트로 같이 들어와 주세요. 나머지 16명은 텐트 앞에서 대기해 주시고."
라드가 여섯 명을 골라잡자, 에테롬은 그 여섯을 확인한 뒤 웃으며 텐트에 들어갔다.

텐트 안에는 테이블 하나와 함께, 맞은편에 후드를 눌러써서 눈가가 안보이는 여성이 하나 앉아 있었다. 검정색에 흰색의 테두리를 가진, 신기하게 생긴 후드였다.

"오셨습니까, 에테롬씨."
그녀의 목소리는 범죄조직의 수장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후드로 가려진 얼굴도, 드러난 부분만 봐도 그녀가 엄청난 미녀라는 것은 알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후드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신을 보니  수 있었다. 흰색 보로 머리를 올린 뒤, 그 위에 검정색 실크 케이프 같은 것을 덮은 형태였다. 그리고 목부터 가슴께 까지는 흰색의 베일을 두르고 있었으며, 그 아래로는 길게 뻗은 케이프와 같은 재질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다리의 구동범위를 위해서 인지 원피스에는 옆 트임이 되어 있어, 바지를 입고 있는 다리가 보였다. 허리는 검이 꽂혀 있는 허리띠로 단단히 조여져 그녀가 육감적인 몸매를 하고 있다는 것을  수 있게 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칼린이 전생에 살던 곳에서 수녀복이라고 부르던 그것이 조금 바뀐 느낌이었다. 하지만 에테롬편에 있는 모두에게는 생소한 복장이었다.


"아, 반갑습니다, 그러니까..."
"프레데리카라고 합니다. 아니면 그냥 교주님이라고 불러 주셔도 관계없습니다."
그녀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야, 만나 뵙기 정말 힘들었네요! 무슨 일로 교주님께서 저를 먼저 찾으신 걸까요?"
에테롬은 맞은  집단의 무거운 공기에도 개의치 않고 가볍게 대화를 이끌었다. 교주는 먼저 그런 에테롬에게 고개를 숙였다.


"먼저, 이쪽에서 찾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부르게 된 점 사죄 드립니다.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음해하는 세력들을 경계해야 했기에..."
"어이고, 아닙니다! 사정은 다 알고 있으니까, 오히려 이제서야 믿어 주시는 것 같아 기쁘게 왔으니까요."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그러면, 바쁘실 테니 바로 본론으로 가고자 합니다."
그녀는 손을 모으며 웃었다.

"칼타코 영지를 아시나요."
분명 전쟁이 끝나고 빅센마르크에게 양도받은 땅이었다. 아직  지역의 영주가 뽑히지 않았고, 빅센마르크의 주민이 대다수인지라 자치구인 상태로 남아있는 영지이다.

"뭐, 자세한 것까지 물으시면 모르겠지만..."
에테롬의 말에 교주는 오른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그러자 뒤에 서있던 자가 종이를 건내 주었다.

"이 종이는 그곳 주민들의 성명서입니다."
에테롬은 그 성명서를 확인해 보았다. 성명서에는 빅센마르크에게 버림받은 그들은 칼타코 영지를 자치정부로 독립시키고 싶다고 되어 있었으며, 이를 위한 저항에 힘을 보태 주었으면 좋겠다고 적혀 있었다.

"그들은 그 조건으로 디알테스트그롬을 국교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 분 아래에 높낮이가 없습니다. 국가라는 것은 결국 인간들이 정하는 경계일 뿐이죠. 거기에 사는 인간들이 결정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교리에 따라 그들을 돕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다임상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인가요?"
"에테롬씨가 우리 교단에 상당한 지원을 해주고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에테롬은 가만히  성명서를 바라보았다. 가능할 리가 없다. 윌레인 입장으로서는 방금 전쟁이 끝난 빅센마르크르르 직접 견제할 수 있는 그 땅의 자치권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무의미한 희생이 될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상회의 이름을 걸고 도와 달라는 것이 아닌, 에테롬씨에게 부탁드리고 있습니다."
 두 말은 차이가 아주 크다. 그러나 피해 규모는 달라도, 후자도 에테롬에게 상당한 피해가 될 것은 뻔한 일이다.

"...글쎄요. 물론 저도 위대한 디알테스터만의 뜻을 믿습니다만... 이정도로 성공확률이 희박한 일에 손을 대고 싶지는 않습니다."
"성공확률이 낮다고 할 수는 없겠군요."
교주는 그 말에 즉답했다. 에테롬은 이상한 것을 들은 듯 눈가를 찡그리며 웃어 보였다.

"단순히 크기만 생각해도 말이죠. 무력저항은 금방 제압될 겁니다. 그리고 칼타코에 윌레인이 군사적 요충지의 자치권을 포기 시킬 정도의 패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드는데요."
"먼저, 그들은 결사의 각오를 하며 저항할 것입니다. 아무리 윌레인이라도 한 영지의 모든 영주민이 결사항쟁을 한다면, 타협안 정도는 꺼내겠지요."
"너무 어린 소리네요. 칼타코는 아직 윌레인의 정식 영지조차 아닙니다. 영주가 없는 땅이 어떻게 영지일까요."
"두번째, 빅센마르크의 막내 황녀가 그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에테롬이 한순간 표정을 잃었다가, 이윽고 눈알이 빠져나갈 정도로 커졌다.

"그...그게 정말입니까?"
"네. 사실확인은 이미 끝냈습니다."
빅센마르크의 막내 황녀. 전쟁 중 행방불명되었다고 들었건만, 거기에 잡혀 있었는가. 이러면 확실히 그들에게도 협상패가 잡혀 있다.


왕가의 친족은 얼마나 좋은 패인가. 어떤 식으로 사용해도 손해 볼 것이 없다. 윌레인에서도 빅센마르크의 막내 황녀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었을 때 국가 전역에서 그녀를 수배하며 찾아다녔던 적이 있었다.

문제는 에테롬의 선택이다.

"어떠신가요?"
에테롬은 두가지 선택지가 생긴다.  제안을 거절하고 왕도로 달려가 이 사실을 보고한다던가, 미래를 보고 칼타코에 투자한다. 여기서 지원한다면 에테롬은 칼타코라는 자치구 안에서 영주급의 권력을 가지게  수도 있으리라. 한 정부가 자신의 상회만을 이용하게 된다면 그건 분명 엄청난 이익을 부를 것이다.

에테롬의 선택은 정해져 있다. 상인으로서, 그는 언제나 미래의 패를 본다. 그래, 시대가 급격히 흐르고 있다. 이제 신분제는 오래 가지 못한다.


"...허 단 디알테스터만. 상인 에테롬은 이 계획에 기꺼이 참가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상인님은 우리의 승리를 확신해 주시는 몇 안되는 선구안을 가지신 분이니까요."
교주는 밝게 웃으며  손을 모았다.


"모든 것은 그분의 뜻 아래, 언젠가 만인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시간을 만들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에테롬씨. 혹시 더 질문하실 것은 없으신가요? 교리에 대한 질문도 괜찮습니다."
교주는 그렇게 말하며 그들을 둘러보았다. 상인은 그 말에  손을 앞으로 펼쳐 내밀며 흔들었다.


"모든 것이 그분의 뜻 아래인데 의문은 또 뭐가 있을 까요. 바쁜 시간을  빼앗기 싫으니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어머, 저분은 달라 보이는 걸요."
교주는 녹아 내리는 듯한 미소를 입에 걸치며 손가락을 뻗었다. 그녀가 가리킨 것은 라드였다.

"질문이 있는 표정이네요. 아닌가요?"
에테롬은 속으로 터져 나오는 욕설을 삼켰다. 라드는 확실히 머리속에 떠오른 의문이 있었다. 그러나 질문한다면 금지사항 1번을 어기게 되고, 질문하지 않는다면 금지사항 3번을 어기게 된다.

어차피 하나 어기는 거라면 질문은 하고 가야지, 하고 라드는 합리화를 끝냈다.

"댁들이 모시는 사람이 누구요?"
라드의 질문에 에테롬이 머리를 감쌌다.

"...사람이라."
교주는 그 말에 조금 경직되었다가, 곧 다시 얼굴에 미소를 되찾았다.

"혹시 이름이?"
"라드요."
"그렇군요. 라드씨는 절대자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게 뭡니까?"
그에게는 생소한 말이었다. 얼굴을 찡그리며 되묻는 라드의 입을 에테롬이 황급하게 막아냈다.


"이야, 죄송합니다! 이자는 제가 고용한 일일 용병같은 것이기에, 너무 자세한 것은 알려주시지 않아도-"
"아닙니다. 우리의 교리를 모르는 자에게 신앙의 불씨를 뿌리는 것, 그거야 말로 우리의 지고의 행복이지요. 부디 라드씨를 놓아주시겠습니까?"
에테롬은 당황해서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뗐다.

"절대자란... 그런 겁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위에서 바라보고 계시는, 의지를 가지신 분입니다. 당신이 악업을 저지를 때 눈물 흘리시고, 당신이 선한 일을 행했을 때 같이 축복해 주시는 분입니다. 빛과 어둠을 가르시매 그 둘을 구분하신 분이시며, 세상의 이원을 나눠 진리와 혼돈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태양과 명월이 그의 눈이시매 세상의 모든 것을 관측하시며, 심판하지 않으시되 직접 죄의 무게를 알려주시는 분이십니다. 고매한 그분의 의지는 우리의 짧은 생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그저 그분이 짜신 인과 아래에서 선택을 거듭할 뿐인 미물들입니다.
가장 찬란하게 빛을 발하면서도 가장 어두운 어둠까지 삼키시는 분이십니다. 대저울의 정확한 중심점이며, 세상에  하나뿐인 절대불변의 대진리이십니다. 가장 높이 서있는 왕이시며 동시에 가장 낮게 무릎 꿇은 부랑자입니다.
어떻게 그분을 정의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저희는 그저 경외에 부르르 떨며 고개를 조아리고  손을 모아 그분을 우리의 언어로 부르짖을 뿐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고, 양손을 깍지 쥐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두명의 종자들도 같은 자세를 취했다.

"디알테스터만, 하고 말이죠."
허무맹랑하고 과도하게 두리뭉술한 이야기이다. 이 정도로 길게 떠들어야 정의되는 것이 정상적인  일리 없다. 그러나 그녀의 편안한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라드는  인상깊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나온 감상은 전혀 신성함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 내가 이렇게 개같이 굴러먹고 사는 것이 눈깔 세  달린 관음취향이 있는 부랑자 때문이라는 거요?"
그가 느낀 것은 분노였다. 그에게는 그저 가상의 탓할 거리를 만든 것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평소의 그였다면 가볍게 웃어 넘겼을 이야기였지만, 왜 인지 그녀 앞에서는 감정을 숨기는 것이 힘들었었다.

완전히 굳어버린 에테롬을 보고 나서야 라드는 정신을 차리고 교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교주는 여전히 자애롭게 웃고 있었다. 그녀는 라드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말했다시피, 우리는 그 분의 뜻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하찮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그분의 인과 속입니다. 그러니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고-"
라드는 혼란스러웠다. 그 순간에도 그는  텐트를 나왔을 때 에테롬에게 변명할 말을 생각해 내 보려 했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가 뭐라고 할지 궁금해서 참을  없었다.


"기도하세요. 언제나 그분은 당신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에테롬 일행이 나가고, 교주는 웃으며 테이블에 다시 앉았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텐트의 뒷문이 열리는 소리에 조용히 고개만 돌려 뒤를 보았다. 거기에는 이리하가 들어오고 있었다.

"교주님, 실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리하가 보고를 위해 도착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리하. 일지는 잘 봤습니다."
그녀는 정말로 반가운지 화색을 띄며 이리하를 데려와 앉혔다.

"그러면 이제, 미사 전까지 그 형제로 점 찍은 소년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미사까지는 아직 30분정도가 남아있다. 텐트속에서 은밀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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