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4화 〉병(충)해 (84/164)



〈 84화 〉병(충)해

자신이 능력을 썼을 때, 시체들의 산을 쌓아 올렸을 때, 그 아비규환 속에서 망설임없이 전투를 택했을 때, 적장의 목을 완전히 베어 날려 버렸을 때, 그 때였다. 그제서야 칼린은 자신의 분노가 어디를 향하는 지 알 수 있었다.

그 힘, 한 순간에 전황을 뒤집어 버릴 정도의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쓰지 않았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누군가의 목숨 앞에서 그건 전부 핑계일 뿐이다. 그의 실수는 그것이다. 그는 자신을 양이라고 생각해 버린 것이다.


애초에 그는 양이 아니다. 도르베의 말이 맞았다. 늑대는 결코 양이  수 없다. 설령 양과 친해지고 싶더라도 그럴 수는 없다. 양들은 너무 약하다. 지켜야 했다. 그가 늑대의 모습을 꺼내며 지켰어야 했다. 들킬 것이 두려워서 너무 많은 양들이 다치고 죽었다.


이제 자신의 본질을 받아들여야 했다. 평화롭게 살았던 전생을 핑계로 도망치는 짓은 그만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자신을 부숴야 한다.


잘린 목은 꽤나 끈적한 느낌으로 떨어진다. 땋여 있는 머리가 잡기 편하다. 손가락을 몇 번 얽어내 그것을 들어 올린다. 그녀는 목이 잘리던  순간까지도 눈을 감지 않았다. 설령 목이 떨어졌음에도 그 시선은 올곧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칼린은 굳이  눈을 감겨주지 않았다.

자신의 뒤에 넘어진 말을 바라본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듯 네 다리가 전부 다른 방향을 향한 상태로 주저앉아 있다. 구멍이라는 구멍에서 전부 피를 뿜어내고 있는 것 같다. 처참한 얼굴이다.

"수고했어."
칼린은 그렇게 말하고서 검을 꺼냈다. 그리고 느리게 눈을 끔뻑 대는 말의 머리를 향해 검을 내리 꽂았다. 말은 별다른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죽었다. 검이 꽂힌 부분에서 뽀글거리며 피가 올라왔다. 칼린은  피에 손가락을 찍었다. 그리고 혀에 얹어 그 맛을 보았다. 감미로웠다.

그는 자신의 진영 쪽을 느리게 돌아보았다.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자들이 오고 있다. 네르바의 병력들이다. 그 병력들과 부대원들이 달려오고 있다. 저 정도로 수가 모이니 나름의 감동도 생긴다.


다음으로 그는 맞은편, 적의 진영을 바라보았다. 쌓아 올려진 말들의 시체를 뛰어넘으며, 충족들은 재주도 좋게 양 옆으로 갈라져 오기 시작했다. 이젠 우리가  이긴 싸움이다. 그래도 칼린은 굳이 쌓아 올려진 시체의 탑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언덕 위에서, 칼린은 조용히 들고 있던 목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적장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을 때 만큼이나 우렁차게 소리쳤다.


"적의 수급을 베어냈다!!!"
겁쟁이는 이제 그만. 같잖은 도덕론도 이제 그만. 더 이상 백색상황이 아니다.
적색상황. 그는 이제야  세계에 완벽히 적응할 준비를 끝마쳤다.




"병력이 늦은 것에 대해 사죄하지. 이름이...?"
충족과의 전투는 참 싱겁게 끝나 버렸다. 8영주의 훈련된 기갑병들은 마치 그들을 몰아내는 듯 밀어버렸고, 일반병사들은 나올 타이밍조차 잡지 못하고 승리했다. 기갑병 2명이 죽었다. 충족의 기마술은 경지에 오른 것이 확실했으나, 기술의 차이가 너무 컸다.

그리고 그 말은, 단 한번이라도  정도로 강경한 대처를 했다면, 언제든 이 상황을 끝낼 수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 마을의 새로 축출된 대표는 조소를 지었다.


"벨카의 영주, 요나입니다."
요나는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지금 그 자리에는 소금부대의 대표 요나, 네르바의 대표 허버트, 본 영지의 대표를 맡게 된 노인, 이렇게 셋이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네르바의 영주는 본 영지 대표의 이름은 묻지도 않고 있었다.


"요나... 아니, 요나경. 다시 사죄하마. 미안했다."
한번 더 이어지는 사과에 요나는 말없이 담배를 꺼넀다.


"사과할 대상을 틀리신 듯합니다, 허버트경."
불을 붙이며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말에 허버트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 사과는 8영주로서의 빚이다. 정말 내가 사과할 대상을 잘못 골랐는가?"
그의 시야에 본 영지의 대표는 이미 들어오지도 않고 있었다. 그는 지금 새로운 길을 개척해내려 하고 있는 때였다. 벨카라는 괴물의 일면을 보았다.

"...만약 제가  빚을 안 받는다고 한다면."
그러나 그런 그의 속보이는 말에도 요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거기까지 말하고서 연기를 한번 깊게 빨아들인 요나는 재를 털며 다시 말했다.


"그러면,  상황에서 뭐가 바뀔까요."
예상하지 못한 강경한 반응에 허버트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그러나 곧 평정을 되찾고 웃음을 머금었다.

"그렇군. 자네 말이 맞아. 그렇다면 거기 노야(老爺)공의 이름은?"
"...로토라고 하오."
"그런가. 로토씨, 미안하지만  영지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제대로 사죄하고 싶은데, 알려줄 수 있을까?"
"이 영지에 이름같은 것은 이미 애저녁에 잃어버렸지. 그것도 모르는 것 보니, 우리 영주님이 확실히 남의 손을 빌리는 성격은 아니었나 보오."
마치 위치의 차이를 망각한 듯한 날카로운 말투. 하지만 허버트는 지금 그 어떤 추태도 보일  없었다. 그는 양 손을 들어 올리며 약간 웃어 보였다.

"진정하시게. 다른 영지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을 뿐이야. 자네들도 알다시피, 전쟁이 끝난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이제 우리가 이 영지에서 벌레도 쫓아냈으니까 말이야."
"벌레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벌레. 그것들은 벌레 그 자체였다. 언제나 귀찮게 날아와서, 손을 대기 귀찮을 정도로만 피해를 입히고 사라지지. 알을 까고 도망쳐 버린 다는 거다."
요나가 그를 조금 노려보았다. 그러나 허버트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벌레는 추하지... 그래서 쫓아내 버렸다네. 로토씨, 안심하고 이제 뒷일을 맡겨 다오. 지난 일들의 사죄 차원으로 본 영지는 이제부터 네르바가 관리하겠네."
노인의 눈이 커졌다. 팅기듯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그는 허버트를 노려보며 낮게 그르렁대듯 물었다.


"당신들이 벌레로 취급한 그 괴물들이 우리 영지를 70년 가까이 괴롭혀 왔었다...! 이렇게도 간단하게 쫓아낼 수 있었다면 왜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인가!"
"로토씨. 앉으시게."
"그리고, 승전하고 책봉관계를 만들 상황이 되니 바로 우리 영지를 삼켜 먹으려고 해? 부끄러움을 모르는 겐가?"
"이봐..."
"요나경! 한마디 해주십시요!  불경한 자의 입을 막아 주시오! 저자가 우리들의 피와 땀으로 만든 결실 위에 깃발을 꽂으려 하고 있소!"
"노공(老公)."
허버트의 로토를 부르는 호칭이 바뀌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로, 그는 가만히 노인을 쳐다보았다.

"앉으라고 하였다."
로토는 그 시선을 받으며 잠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곧 침착함을 되찾고 자리에 앉았다.

"자네들은 지금 영주도 없고, 변변찮은 방어수단도 없고, 영민들이 먹을 식량도 없고, 넘쳐나는 부상자를 수용할 시설조차 없어."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가만히 손가락을 테이블에 몇  두드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솔직해지도록 하겠네, 로토경. 말 했다시피, 손 대기 귀찮을 정도의 피해만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귀찮다니-"
"일어나지 마시게. 한번  의자에서 엉덩이를 뗀다면 자네의 목도 떼야 할게야."
다시 한번 일어나려는 로토를 향해 허버트가 손을 펼쳤다. 그리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있는 로토를 비웃듯, 굳은 표정을 다시 부드럽게 바꿨다.


"그, 그렇다면  지금은 구하러 오신 겁니까..."
"전쟁으로 물자 한 톨이라도 아껴야  때니까. 그리고 뭐..."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요나를 바라보았다. 원래 이곳이 소금부대의 무덤이 되었어야 했다, 그는 그 말을 삼켜내고 그저 웃었다.


"갖가지 이익관계의 교차라는 것이지.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승전으로 우리는 충족과의 조공/책봉관계를 성립시킬 것이며, 그를 위해서는 이 영지를 제대로 관리가 가능한 도시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영지에 더이상 귀족은 남아있지 않아. 영주를 선출할  없어.

필요한 것을 전부 해주지. 부상자들은 치료받을 것이고, 사망자들은 안치될 것이며, 전화시설도 생기고 온전한 네르바의 영지가 될 것이다. 나쁘지는 않을텐데."
로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그는 천천히 질문했다.

"그러면... 그러면 충족의 물자들은 어디로 가는 겁니까?"
"네르바의 것이다. 물론, 자네들도 이제 네르바의 영민이야. 자네들에게 가는 것이나 다를  없지."
로토는 눈가가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껏 지켜온 결과가 이것이다. 결국 다시 밑바닥이다.


"...원래 이럴 계획이셨습니까?"
그는 작게 요나를 향해 물었다.

"이게 당신이 말한, 우리의 원통함을 씻어내는 방식이십니까?"
"로토경.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받아들이시지요."
요나의 말에 로토의 안에 있던 뭔가가 깨졌다. 그는 천천히 속주머니를 뒤져서 담배 한 개피를 꺼넀다. 1년  즈음에 우연히 외부의 병사에게 받아서 금이야 옥이야 하며 아껴 두던 담배였다. 자신과 같은 테이블에 있는 자와 그의 부대원들은 소비재라고 여기며 여기저기 피우고 버리는  담배였다.

그가 천천히 담배에 불을 붙이려 하자 허버트가 손을 들었다.

"난 담배연기가 불쾌해서 말이네. 할 말이 끝났다면..."
그렇게 말하고 싱긋 웃는  얼굴을  이상 참을  없었다. 같은 테이블에서도 그는 같은 위치가 될 수 없었다. 로토는 천천히 발을 끌며 천막을 나섰다. 그의 이리저리 꾸겨지고 젖은 담배에는 빌어먹게 불도 잘 붙지 않았다.

"자, 그럼..."
로토가 나간 것을 확인한 허버트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요나를 향해 웃었다.

"진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 요나경."






"아가야. 차다레마가 돌아오지 않는다."
쪼그라든 노인의 뒷모습. 그녀가 오매불망 하늘을 바라보고 있어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네, 할망. 그러네요."
덩치가  남자가 그 옆에 앉아 호리병의 뚜껑을 연다. 그는 다리부상을 이유로 이번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부족원이다.

"알면서 어디로 가려는 게냐. 기다리자꾸나."
쉬어 터진 목소리. 남자는 가만히 주변을 바라본다. 갑옷을 입은 군인들이 천막에서 충족의 미래를 결정하고 있다. 대화하고 있는 것은 키후타 씨족의 족장, 차다레마가 아니다. 그녀는 다른 곳에 있다.


"차다레마가 돌아오면-"
그는 한번 입을 열었다가 다시 꾹 다물었다. 그리고 올라오려는 것을 눌러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면, 꼭 어디로 가야하는 겁니까."
할멈은  말을 듣고 나서야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아가야. 바람은 머무르지 않는단다."
남자는 바람소리를 듣는다.  바람소리에는 앞으로 자신들의 미래가 실려서 들려온다. 자신들의 씨족이 아닌 자가 자신의 종족이 걸린 문제를 자신의 적과 토의 중이다. 이미 그들은 바람이 아니다.


"할멈. 우리도 이제, 고삐가 걸리나 봅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서 달을 보았다. 초광월. 찬란하게도 떠있다. 그들에게 별은 언제나 횃불보다도 밝게 비추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횃불이  밝아져 있었다.

차다레마의 수급, 그것은 이 곳에 도착할 때까지 눈을 감지 못했었다.

"아가, 왜그러니."
노인이 다가와 남자의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댄다.


"눈에 별이 가득 떨어졌구나..."
그녀의 반대 손 위에는, 원래 자신들의 족장이었던 자가 드디어 휴식을 청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자신의 가족들을 전부 보고 나서야 감겼다.


밤바람이 멈추었다.



칼린은 조금 쳐진 상태로 다시 진영에 도착했다. 그는 단순히 적장의 수급을 돌려주는 역할을 맡고 싶다는 이유로 충족의 진영까지 들어갔었다. 그리고 협상의 장에는 참여하지 않고 바로 진영으로 돌아왔다. 두개의 달이 청량하게 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동료들이 다가왔다.

"다음은 뭐냐, 칼린."
아스타가 그렇게 말하며 주저앉은 그에게 다가갔다.

"눈에서 불이라도 쏠거냐?"
농담 투의 말이었지만 분노가 담겨 있었다. 칼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 해, 씨발놈아!"
아스타는 그의 멱살을 움켜 쥐었다. 소니아가 그런 그녀를 붙잡았다.


"야, 말로만 하기로 했잖아!"
"말로 못 알아 쳐먹는  같아서  맥여 줄라고 그런다, 씨발!"
그녀는 소니아를 밀쳐내고 다시 칼린의 멱살을 쥐었다.

"그게 마법이건 초능력이건 어찌됐든 좋아. 네가 뭐하는 새끼든 신경 안 써. 근데 우리 동료 아니었냐?"
"진정해..."
"진정?  잘난 능력 조금만 더 빨리 썼으면 충족이고 나발이고 갤러한 말마따나 유서 쓸 필요도 없었어! 그러니까 말해봐, 무슨 거창한 이유 때문에 그렇게 꽁꽁 아껴 두고 있던거냐?"
소니아도 말리는 것을 멈추었다. 모두가 칼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칼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씨발새끼가...!"
아스타는 그런 칼린의 반응에 화가  올랐다. 얼굴이 붉어진 상태로 그의 멱살을 잡아 올리던 그녀는 곧 심호흡을 하며 손을 풀었다.


"뭔 이유였는지는 몰라도 말야,  그 거창한 이유 덕분에 도르베는 중지가 없어. 너한테 욕도 못하게 생겼지.  새끼 이야기까지 꺼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라드는 애꾸가 됐고."
칼린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도르베의 중지가... 뭐라고요?"
"왜 씨발새끼야, 이건 궁금하냐? 도르베 중지가 떨어졌다고,   닦아주느라!"
아스타는 자신의 중지를 들어 올리며 손날로 탁탁 쳐보았다.


"갤러한이랑 애들이 너 못 믿을 새끼라고 했을  믿어보겠다고 한 게 도르베였어! 역겨운 새끼 같으니, 그 능력이 그렇게 소중하셨냐? 쓰면 뒤지는 거야? 안 뒤진거 보면 그것도 아닌데!"
"잠, 잠깐! 도르베는 어디에 있죠?"
"의무실. 이유  말해 줄 거면 만날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마라."
그 대답은 륑게가  것이었다.

"전,  그냥 그런 능력이 있었는데, 원래는 이렇게 강한 능력이 아니었-"
"내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
목소리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요나였다. 그녀는 천천히 칼린 쪽으로 다가와 칼린의 옆에 섰다.


"내 명령이었다. 마법이 아닌, 그만의 초능력같은 것이다.  능력을 숨기고 급한 순간이 아니면 사용하지 말라고 했었다."
어이가 없어서 눈썹을 씰룩거리고 있는 아스타를 밀어내며 륑게가 앞장섰다. 그리고 소니아를 향해 신호를 보낸 뒤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가 전부 죽기 전까지는 그 '급한 순간'이 아니었다, 이겁니까?"
"아니, 정확히는 날짜의 문제였다."
"날짜의 문제?"
칼린조차 요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요나는 당당하게 말을 이어갔다.


"8영주가 병력을 대준다고 했다. 난 그들에게 빚을 만들어 두고 싶었고. 그래서 그들이 오기 전까지는 치열한 싸움을 연출해야 했다."
"연출이라 했습니까?"
소니아의 연락을 받고 온 갤러한이 륑게를 밀어내며 앞섰다.

"그래. 연출.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난 나의 승리를 확신했고, 그래서 후퇴를 명령하지 않고 계속해서 싸웠다. 이게 내 계획의 초석이  테니까."
칼린은 분명 요나에게 말을 다루거나 하는 것은 힘들 것 같다고 말했었다. 즉 요나의 믿는 구석이라는 것은 칼린이 아니었다. 그는 요나가  그런 말을 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초석을 위해 감당 가능한 희생은 감당해낸 것이다?"
"그래. 우리 부대원  누구라도 하나 목숨의 위기가 생길 경우에는 써도 좋다고 했다. 칼린은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갤러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요나와 칼린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섭군. 칼린님은 무려, '동료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눈알이 뽑히는 상황'까지는 감내 가능한 거라고 생각한  아닙니까."
"저는-"
"나와 칼린은 같이 다녔지. 내가 사용하지 말라고 하였다."
갤러한은  말까지 듣자 조금 웃었다. 그리고 칼린을 바라보았다.

"나 참, 훌륭한 번견을 두셨구만."
그리고 씹는 담배를 꺼내며 침을 뱉듯 말했다.

"애초에 외부요원으로 봤어야 됐네,  새끼는."
그 말을 듣고 서야 칼린은 영주의 뜻을 이해했다. 갤러한의 그 말이 칼린의 머리와 가슴, 양 쪽을 관통해 냈다. 영주는 지금 자신을 돕고 있었다.

부대원들이 자신에게 거리를 두게 해서 자신의 '괴물'로서의 능력을 조금 더 쓰기 편하게 만드려는 것이었다.


갤러한의 말을 듣고 나니  수 있었다. 영주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차라리 좋다. 어찌되었든 지킬수만 있다면 그걸로 좋다.

"... 그렇게 받아들이시면 유감입니다."
그래서 칼린은 한층 더 자신을 죽였다. 냉정하게 그렇게 말하고서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

"영주님의 명령이 최우선이었습니다. 죄송해요."
그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아끼던 것들이 자신을 적대하려 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괜찮다. 이게  지키기에 편해질 것을 알고 있다.

"...네크로맨서 죽일 때... 난 그 때 이후로 너가 좀 성장한 줄 알았어."
릴로가 그렇게 말했다.

"돌아가 보겠슴다. 서로 좋은 시간 보내십쇼."
비꼬듯 던진  말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등을 돌렸다. 가만히  있는 칼린의 옆에서 영주가 담배를 꺼넀다.

"이걸로 좋은 거겠지?"
"네. 감사합니다, 요나."
"별말씀을."
요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손을 가져다 댔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아낼 수 없어서 였다.

"언제든 도와주마."
가만히  있는 칼린을 잡아 끌며, 요나는 그렇게 말했다.




이리하는 자신이 오늘 목격한 것에 감동해 기도하고 있었다. 확실했다. 교단이 찾아다니던 그것이었다. 그녀는 환희에 가득 차서 눈물까지 흘렸었다.


빨리 복귀해서  일을 모두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생각과 함께 주기도문을 읊으며 기도하던 그녀는, 다가오는 인기척에 자세를 풀고 고개를 돌렸다. 갤러한과 소니아가 서 있었다.

"뭐, 이야기를 듣고 왔는데 말이야..."
갤러한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이리하는 소니아쪽을 바라보았다.

"아, 소니아는 같이 들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너, 나, 소니아, 도르베. 이렇게 넷만 이 주제로 대화를 해 보자고."
"사실 난 이제 칼린을 별로 돕고 싶지 않은데 말이지..."
소니아의 말에 갤러한이 고개를 돌렸다.


"왜 갑자기?"
"갑자기라니, 너... 칼린 그거 완전 영주의 개새끼였잖아... 진짜 생리도 겹치면서 싸우는데 역병도 돌고, 난 이번 일은 도저히 용서가 안돼..."
"아, 그거."
갤러한의 말에 이리하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소니아가 그 대신에 있었던 일을 전달해 주었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이리하는 아직도 납득이 안가는  고개를 기울였다.


"믿을 수가 없군."
"그러니까... 그 새끼한테 동정심을 느끼다니."
"아니, 진짜로, 이야기에 신빙성이 없다는 거다. 그대로 믿기에는 애매한 이야기야."
"뭐?"
이리하의 말에 소니아가 조금 당황해서 되물었다. 그러나 제대로 당황할 시간도 없이 갤러한이 다음 말을 이어받았다.

"당연하지, 영주의 말은 거짓말이었으니까."
"뭐? 왜? 무슨 소리야?"
"8영주에게 빚을 지게 하는 게 목적이라고 했었잖아?"
"응..."
"애초에 상하관계가 있는 명령을 실행할 뿐이라면 빚이 생길 일이 없지. 영주는 8영주가 당일에 오지 않을 것을 미리 알고 있던거다."
말 표현을 잘못한 거지, 하고 갤러한이 말을 덧붙였다. 소니아는 깨달은 듯 입을 크게 벌리고 가만히 있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그게 칼린이 무고하다는 뜻은 아니잖아..."
"당일에   것을 알고 있었고 그걸로 빚을 만들고 싶었다면, 미리 칼린을 시켜서 충족들을 잡아 놓고 그 지역에서 기다리는 쪽이 나았겠지. 위험부담도 적고 손해도 적으니까. 몇일동안 기다리면서 빚을 늘려버릴 수도 있었을 테고."
"그...런....."
소니아는 반박 하려다가  말을 잃었다.

"그리고 칼린은 네르바에서 추가 병력들을 데리고 왔어. 영주의 말만큼이나 막 쓰고 쉽게 사용되는 능력이었다면 굳이 추가병력을 데려올 필요가 없었겠지. 기마전에 한해서 칼린은 무적이었을 테고, 견제 중인 대귀족과 공을 나누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 요는, 칼린이 병력들을 데려온 것과 말들을 한꺼번에 무너뜨린 것은 영주의 계산 밖의 일이었다."
"...영주에게는 다른 수단이 있었겠지. 그러나 그걸 쓸 필요가 없어졌고."
"그거야."
갤러한과 이리하가 그런 말을 주고받을 동안 소니아는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 머리를 때려가며 생각해 보았다.


"그, 그래도 아직 이상해! 그럼 영주는 애초에 왜 그런 거짓말을 한건데?"
"그건..."
"나도 그건 이해가  가는군."
이리하도 끼어들었다.

"칼린을 우리와 가까이하게 만들 생각이 아니었던가?"
"...그냥 내 생각인데 말야."
갤러한은 조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요나는 '우리'의 관계는 필요 없던거다."
"그게 무슨 소리... 아!"
소니아가 이해가 된  소리쳤다.


"양방향적인 관계는 필요 없다는 건가... 근데 우리가 칼린한테 등을 돌리면 칼린이 동료에서 의미를 찾을 리 없잖아. 본말전도 아니야?"
갤러한은 그 말에 잠깐 움찔했다. 이리하도 고개를 숙였다.


"뭐, 뭔데..."
"그건... 그건 지금 상황만 봐도 답이 나오잖냐."
"무슨..."
"자세한 이유는 몰라도, 칼린은 영주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었어."
소니아가 입을 막았다.


"걔는 굳이 양방향으로 신뢰니 뭐니, 그런게 필요하지 않다는 거다... 뭐가 동료냐고, 관상어도 아니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