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6화 〉숙청회(肅淸會) (86/164)



〈 86화 〉숙청회(肅淸會)

칼린은 눈을 떴다. 기분이 꽤 상큼하다. 먼저 기지개를 한번 피고,  밖을 바라본다. 창틀에 새가 몇 마리 걸터앉아 있다. 이 소리 때문에 깬 걸까, 그는 웃으며 손을 휘둘러서 그 새들을 날려 보낸다.


분명 조금 쌀쌀했었는데, 오늘은 쾌청하고 따뜻하다. 그는 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풍경을 감상한다. 하늘인지 바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아침이다.

그는 자그맣게 콧노래를 부르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먼저 양치를 한다. 이 세계의 구강 세정 도구들은 형편없지만, 열심히 닦으면 착색과 구취를 막아  정도는 된다. 어차피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는 칼린의 몸이었지만  습관을 버리고 싶지는 않다. 전생과 관련된 것은 소중하니까. 언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끝마친 그는 햇살냄새가 나는 수건에 얼굴을 비빈다. 건조하고 따뜻하게 그의 얼굴을 감싸온다. 그 속에 얼굴을 파묻고 화장실을 나온 그는 옷장으로 향한다.

한종류의 옷만 여러벌 챙기며 돌려 입는 것을 단벌신사라고 하던가, 칼린은 확실히 그것이었다. 그러나 동료와 있을 때 입는 옷이 그의 기본 복장이다. 말끔히 수선되어 넣어진 옷으로 완전하게 갈아입은 그는 거울을 보며 한번 웃어 보인다. 오늘 하루는 느낌이 좋다.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선다. 발걸음은 바로 영주실로 향한다. 지난 임무가 끝난 후, 요나는 여러가지 준비를 하며 그녀의 집사, 알레프를 출장 보냈다. 지금은 칼린이 임시로 그녀의 집사일을 하는 중이었다.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지만, 나름 보람찼다. 쉬는 시간 틈틈이 갤러한과 리쿠르트를 만나는  재미가 쏠쏠했다. 가끔은 팀 원생텀의 모두가 와 주기도 했다.


그 뿐이 아니라, 요나는 어디까지나 집사의 '대리'로 일하는 것을 감안해 휴일에는  밖을 나갈 수도 있게  주었다. 지난주에는 성 밖으로 나와서 모두와 술잔치를 했었다. 도르베가 다시 돋아난 자신의 손가락을 맥주잔에 걸쳐 건배사를 했었다.


모든게 잘 풀렸다. 역시 시간이 약이라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비져 나오는 웃음을 막고 영주실 앞에 섰다. 그리고 가볍게 노크했다.


"요나, 들어갈게요."
"아, 칼린인가... 들어오너라."
문 맞은편에서 들려온 소리. 칼린은 힘차게 그 문을 연다.




알레프에게 '작은 일'을 시키러 보낸 후, 요나는 그 임시 대리로 칼린을 지목했다. 시종들은 지난 임무가 끝나고 그가 보이는 이상행동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녀의 의견을 반대했지만, 그녀의 태도는 강경했다. 그리고 실제로, 칼린은 꽤나 자신의 일을 잘 해내고 있었다. 일주일간 그는 요나의 곁을 떠나지 않고 보좌했으며 예법부터 업무까지 완벽하게 수행해냈다.

물론 약간의 문제는 있었다.


요나는 일주일 후에 있으킬 일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슬슬 칼린이 올 시간이었기에 그녀는 조금 풀어진 상태였다.

"요나, 들어갈게요."
문 밖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 요나는 들어오라고 말하고 문을 지켜보았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해진 옷을 입고 있는, 쫄딱 젖은 칼린이었다.


요나는 가만히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한번 훑어보고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니, 칼린."
"네? 아침인사를 드리러..."
"아니, 그건 알겠는데 말이다... 쫄딱 젖었잖느냐."
그 말에 칼린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물을 뚝뚝 떨구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옷... 수선할 수 없으니 버리라고 둔 것을 또 어디서 주워 온거니."
칼린은 영주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듯 자신의 손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영주실의 창 밖을 바라보았다. 낙뢰를 동반한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반짝, 하고 번개가 그 광채를 뿜었다.

"...오늘은 쾌청하지 않았군요."
"그래, 칼린. 오늘은 폭우란다."
칼린의 얼굴에 걸쳐져 있던 미소가 사라져 간다. 그는 천천히 들어 올렸던 손을 떨구며 눈을 감았다. 곧 젖어서 달라붙은 앞머리를 쓸어 넘긴 칼린은 잠깐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요나. 금방 다시 준비해서 돌아오겠습니다."
"...이해한다. 천천히 하도록."
세번째 임무가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칼린은 집사업무를 핑계로 요나를 제외한 타인과의 모든 교류를 끊었다. 그리고 가끔씩 '문제되지 않을 수준의 이상행동'을 보이고는 했다.



"리쿠르트."
"네."
갤러한은 침대 위에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리쿠르트는 테이븚 조명을 키고 책을 읽는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갤러한이 전날 저녁부터 하룻밤을 묵게 된 상황이었다.

"...칼린에 대한 거, 안 물어봐?"
"말하기 싫은 것 아니었나요?"
"근데... 되게 티났었잖아, 말 피하는 거..."
리쿠르트는 책을 접고 갤러한을 돌아보았다. 완전히 그가 일어난 것을 확인한 그녀는 방의 조명을 키고 그에게 다가왔다.

"정말, 그런 죄 지은 표정 지을 거면 애초에 숨기지를 마세요..."
"내 표정이 어떤데?"
"제가 가르치던 학생들 중에 그런 표정을 짓던 아이가 있었어요. 제 볼펜을 빌려갔다가 잃어버리고 다음날 표정이  갤러한이였죠."
그녀는 웃으며 갤러한의 코를 잡아 쥐었다.

"아, 아아아! 아파파!"
"말해봐요. 무슨 일인데요?"
갤러한은 코를 부여잡고 눈물이  도는 찡함을 느꼈다. 잠깐 그 감각을 음미하던 그는  입을 열었다.


"리쿠르트."
"네, 네."
"걔 잘 지내?"
리쿠르트는 그 말에 이마를 탁 치며, 그대로 갤러한과 십자모양이 되도록 위로 누웠다.

"살라만코가 말했었죠, 우리는 결코 평생 이성(異性)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남자들은 왜 그렇게 속이 꼬여 있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눈을 감고 조금 웃은 그녀는 곧 다리를 움직여 그의 뒤편으로 갔다.

"제가 보기에는 괜찮아 보였는 걸요. 저도 뭐, 지난주부터 그가 집사 대리가 되어서 수업은 못했지만... 성 안에서는 자주 만나거든요. 딱히  죽거나 그런 모습은 못 봤어요."
"그래?"
그 말에 관심을 가지며 고개를 돌리는 갤러한을 보며, 리쿠르트는 둘이 싸운 것은 아닐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네. 오히려 뭔가... 조금 더 침착해진 느낌이었죠. 원래도 나이에 비해 침착했지만, 지금은 뭔가 어른이 된 것 같더라구요."
그 말에 갤러한은 또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리쿠르트는 더 참지 못하고 그의 뺨을 붙잡았다.


"머야."
"말을 좀 해요, 멍청한 사람. 그렇게 한마디마다 일희일비할거면 왜 저한테 묻는 거예요."
"이헌 진싸 모마해훠-"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뭐라는 지도 모르는 말을 뱉는 갤러한을 보며 리쿠르트는 웃었다.

"요나에 관한 일이예요?"
그는 침묵으로 답했다.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갤러한, 요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아니야, 리쿠르트."
갤러한은 그의 볼을 잡고 있던 리쿠르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똑바로 그녀의 눈을 보며 한번  강조했다.


"요나는 절대로 '괜찮은' 사람이 아니야. 뭔가 있단 말이야."
"... 그래요, 당신도 본 게 있으니 하는 말이겠죠. 오해라고는 생각하지만, 당신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아요."
"이리 와봐."
갤러한은 리쿠르트를 품에 끌어안았다. 따뜻한 이불 안에서,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돈을 모으고 있어. 자기 덕분에 술자리도 많이 안 가져서 금방 금방 모이더라고."
"전 딱히 갤러한씨가 더 놀러 다녀도 잡지 않아요."
"하하, 아무튼 들어봐... 임무를 하는 도중에 비나흐에서 전철을 탔었어. 리쿠르트, 비나흐에 가본 적 있어?"
"음... 옛날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자세히 기억은 안 나네요. 그래도 분명 깔끔한 곳이었다는 건 기억해요."
"그래. 정말 멋진 곳이였어. 나도 처음 갔던 곳은 아니지만, 감상이 달라지더라고. 하루 벌면 하루 사는 거라고 생각했던 때랑은 다르게 보였어... 천천히 늙어갈 생각과 그걸 이행할 돈, 그게 둘 다 잡히니까 새로워 보이더라."
리쿠르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갤러한을 보았다.

"우리 부대가 돈을 많이 줘. 진짜 많이 줘. 명예제대도 곧이야. 리쿠르트. 무슨 말하려는 지 알겠어?"
"갤러한, 당신..."
"모험이 길었어. 드디어 마침표를 찾았고. 난 그게 죽음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갤러한은 리쿠르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만큼 아찔하고 위험한 여자가 되더라. 내 마침표가 되어 줄래?"
그녀는 복잡한 얼굴을 했다. 얼굴을 찡그리다가, 웃다가, 곧 혼란스럽게 눈을 피하다가, 다시 그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그가 뻗은 손을 잡았다.


"갤러한, 모르겠어요. 너무 갑작스러워요. 난- 당신을 사랑하지만..."
"괜찮아. 지금 답하라고  말은 아니야. 정말 괜찮아."
그는 리쿠르트를 품에 끌어안으며 몇 번 토닥였다.

"나중에, 조금 상황이 진정되고, 내가 궁금한 것들을 전부 밝혀내면... 그  정식으로 준비해서 거절할 수 없는 이벤트를 만들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괜찮아."
"미안해요. 저는..."
"아냐, 아냐. 지금 답해달라고 말한 게 아니였어. 맙소사, 이게 나쁜 아이디어였다는 걸 알았어야 됐는데... 미안해. 연애는 처음이란 말이야."
그는 흐느끼는 그녀를 품에 안은 상태로 말했다.

"그냥,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으면 슬슬 성에서 나오라는 거야. 칼린도 이제 다 성장했고. 어디든 말해. 윌레인 어디에든 집을 지어 줄게. 당신이 배정받은 학교 근처에서 살고 싶어... 벨카 근처는 피하자. 알겠지?"
"...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쏟아지는 폭우속에서  둘은 이불속으로 파고 들었다. 이후에 나는 소리는 빗소리가 가려 주었다.





"야, 도르베... 그만 화 풀고 이  좀 먹어봐..."
아스타는 병상에 앉아있는 도르베를 향해 지친  숟가락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러나 도르베는 그런 그녀에게서 단호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칼린이 고작 그런 이유로 그랬을리가 없잖아! 그는  친우다! 우리를 도와준건데, 그런 취급을 받을 이유는 전혀 없었어!"
"아니, 그러면 영주가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요나님은 청렴결백하시다! 뭔가 오해가 겹친 거겠지! 아무튼! 모두가 칼린에게 사과하기 전에 난 음식에 손 댈 생각 없다!"
그는 이제 눈뜬지 6시간이 지난 상태였다. 정신을 차렸으니 링겔주사가 아닌 음식으로 속을 채우는 것이 필요했지만, 그가 기절했던 사이에 일어난 일을 듣자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다.

"야, 믿기 싫은  이해하겠는데-"
그녀는 그런 도르베가 답답해서 화가 났기에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다가 접시를 밀어낸 그의 손을 보았다. 중지가 없었다. 아직 붕대로 감싸져 있는 그의 손이 너무 앙상해 보였다. 마치 가장 큰 가지를 잃은 나무 같았다.


"...일단, 네 몸을 가지고 협박하는 건 그만둬... 모두 걱정하고 있단말야."
한층 기세가 꺾인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우울한 목소리를 내버렸다. 도르베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그녀의 표정에 조금 마음이 약해졌다. 그도 근본이 모진 사람이 되지 못한다.

"...그건 미안하다만..."
말끝을 흐리던 도르베는 결국 이길 수 없다는 듯 아스타가 내밀고 있는 접시와 숟가락을 건내 받았다. 그리고 그 수프를 한  떠 담았다.

"...나쁘지 않은 맛이다. 콘수프인가?"
"응. 핀이 만들어 준거야. 일어나면 꼭 핀한테 고맙다고 해."
"그래. 그러마."
아스타는 수프를 떠먹는 도르베를 보며 조금 어물쩡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너, 그... 안 불편하냐, 숟가락 집는 거..."
"뭐, 괜찮다.  정도면 경미한 부상이기도 하고. 새끼손가락이 아니어서 다행이었지. 새끼손가락이 없으면 악력이 반으로 줄어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
"오, 진짜?"
조금  죽은 아스타를 위해 도르베는 일부러 가벼운 분위기로 말했다. 아스타도 그런 그의 배려를 읽고 조금 기분을 높였다.

"하긴, 문제는 없겠다, 야! 난 손가락 여섯개잖냐! 딱 매꿔지네!"
"하하! 왼손 약지까지 포함하면 아직 하나 부족한데 말이야."
"아, 그러네. 미안..."
"아니, 웃으라고 한 말이었다..."
아무래도 어색한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둘이 그렇게 침묵을 유지하고 있자, 방에 노크가 울렸다.

"들어간다."
들어온 것은 릴로와 륑게였다. 둘은 병실 안을 두리번거리며 가져온 과일바구니를 내려 놓았다.


"밖에서 듣고있는데, 너네  다 병신 같길래 도와주러 왔지."
"무슨, 내 잘못이 아니야. 것보다 나가라. 너네는 칼린에게 사과하고 들어와."
"그새끼한테 사과할 일은 없을거야. 억울하면 뭐, 지가 알아서 해명하라 하던가."
릴로는 그렇게 말하고 작은 칼을 꺼내 과일을 깎기 시작했다. 도르베는 뭔가 더 말하려고 하다가 아스타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화제를 돌렸다.

"핀하고 소니아는?"
"핀은 고아원에, 소니아는 요즘 바빠."
륑게가 릴로가 깎은 과일을 하나 집어먹으며 대답했다.


"야, 환자 꺼를 네가 왜 먹어?"
"이걸 도르베 혼자  먹으라고? 신종 고문이냐?"
병실은 금방 시끌벅적 해졌다. 도르베는 병실 안에서는 소란 피우지 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웃었다. 그래, 동료는 이런 느낌이 제일 좋다. 첫번째 실패를 겪은  그는 이 분위기가 무엇보다 그리웠다. 그리고 칼린에게도 이런 것이 필요하단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과 같은, 홀로 남은 사람의 냄새가 났었다.

조금 더 진정돼서 몸이 완전히 나아지면 칼린을 보러 가야겠지. 다른 동료들의 뜻까지 바꾸는 것은 힘들었지만, 자신만큼은 그를 믿는다고 알려줘야 한다. 너무 늦어지지는 않기를, 하고, 그는 비오는 창 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음. 오늘도 완벽하군."
요나는 만족스러운  칼린을 돌아보았다.


"수고했다, 칼린. 1시간 후에 다시 보지."
"네, 요나."
말끔해진 모습으로 깎듯이 인사하는 칼린을 보며, 요나는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집사 대리를 맡게 되어 그의 예절이나 화법 등은 심화단계를 거치고 있었고, 요나는 하루하루 그녀가 원하는 칼린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바라보며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최근 미소를 입에 달고 다녔다.

일이 어떻게 이렇게도  풀릴 수 있을까. 마치 의지를 가진 무엇인가가 일부러 그 둘 사이를 엮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잘 풀리고 있는 것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요나는 싱글벙글하며 기분 좋게 복도를 지나 어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방은 마레의 방이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조금 밝은 목소리로 물은 그녀는, 평소처럼 대답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이상한 냄새가 바로 그녀의 코를 찔렀다. 종이와 잉크, 그 사이에 섞인 것은- 아마도 배변의 냄새.

불조차 켜지지 않은 방 안에서, 창가에 작은 등불이 하나 켜져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앞 테이블에 끝없이 양 손을 움직이고 있는 한껏 웅크린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번쩍, 하고  전체를 매우는  속에서, 그 테이블에 앉아있는 것이 미친듯이 양손으로 무엇인가를 적고 있는 마레임을  수 있었다. 바닥에는 이리저리 글자가 휘갈긴 종이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근처에는 배설물이 담긴 병들이 널려져 있었다.

요나는 한번 눈을 감싸고 방의 불을 켰다. 그제서야 마레는 마치 기계가 정지하는 듯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고용주를 확인했다. 분명 지난  만난 이후 단 한번도 위생관리를 하지 않았으리라. 그의 수염은 얼굴의 반을 덮고 있는 상태였다.

"오오오오오! 이거야 원, 영주님 아니십니까? 분명 또  방을 치우겠다고 오는 시종분들인 줄 알았습니다만.  왜, 언제나 오시는 딸기같은 코를 가지신 목석같은 아주머니와, 늘씬하고 깡마른, 자작나무 가지같은 말끔한 청년 둘이서 제 방을 치워야 겠다고 난리 법석을 떨고는 했죠! 어찌나 시끄러운지, 괴물이 벼락에 맞는다면 그런 비명소리가 날 겁니다! 그들이 아니라면 뭐, 솔직히 누가 되든 상관없었습니다만, 이거야 원! 영주님은 예상도 못했네요! 아니, 사실 예상은 했는데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려드릴려고 갖다 붙인 말이긴 합니다! 그도 그럴게 영주님, 분명 충족들과 아직 싸우고 계실  알았지 뭡니까! 가신지 아직 2이ㄹ....아니, 솔직히 헷갈립니다만, 혹시 떠나신지 얼마나 지나셨죠? 뭐, 그건 별로 안 중요하겠군요! 어쨌든 영주님은 여기 계시고, 저도 여기 있고, 이 방안에는 썩은 돼지 시체에 향 꽃은 냄새가 나니까 말입니다!"
"마레씨, 여전히 말이 너무 깁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는지는 꽤 중요하죠."
요나는 그 악취속에서도 미소를 지으며 그의 쓰레기 성전에 발을 디뎠다.

"충족 토벌을 갔다 온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다음주에는 8영주의 모집이 있을 예정이구요. 저는 초청받지 못했습니다."
"오호! 이건-"
"그리고 마레씨, 당신과 제가 생각한 이야기가 들어 맞았습니다."
요나가 예측한 모든 것. 그것은 마레가 제안한 '이야기'들 중에서 하나를 고른 것뿐이었다. 사람의 성격과 인물관계, 그 배경 등을 파악하고 나아갈 이야기를 예측하여 쓰는 것.   뿐이라면 그건 어찌되든 좋은 이야기가 되지만-


"하, 하하! 그런가요, 그렇습니까! 어떤 이야기가 정답이었습니까? 역시 배신이 있었지요?"
97개의 이야기. 그가 요나에게 제안했던 가지수는  97개였다. 그리고  중에서, 요나와 마레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을 추려내서 총 5개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다.


"약간의 변수는 있었지만, 뭐. 그건 부대 안의 일이었고... 8영주와 상회의 행동은 정말 그대로더군요.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것은 이미 한없이 예언에 가까운 것이었다. 마레는 폭소하며 말했다.

"그 변수! 변수에 대해 묻고 싶지만, 당신은 말해주시지 않겠죠. 마치 장미꽃의 봉오리처럼 입을 다물겠죠! 알고 있습니다, 네, 알아요!"
"뭐, 그러면 이제..."
요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여기저기에 빼곡하게 흩어져 있는 종이들, 틀림없다.


"앞으로의 이야기 가닥을 준비하고 싶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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