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3화 〉여진(餘震) (93/164)



〈 93화 〉여진(餘震)

이제는 익숙한 왕도의 풍경. 그만한 지진이 있었음에도 왕도는 거의 피해가 없었다. 시민들은 빠르고 성숙한 대처를 했고, 건물들은 지진을 굳건히 버텨냈다. '시민'의 사상자 수는 단 3명이었다.


칼린은 가만히 무너진 건물의 외벽들을 수복하는 작업을 구경했다. 마법적인 무엇 없이 기계장치와 시멘트로 수복작업을 하는 장면이, 지금의 그에게는 마치 상당한 기술력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가만히 그 감정을 곱씹어 보며 자신이  세계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가 얌전하게 에어택시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칼린."
요나가 얹은 손에 그는 놀라며 몸을 틩겼다. 그녀는 생글대며 뒤에서부터 칼린을 감싸 오기 시작했다.

"뭘 보고 있느냐."
"아..."
천천히 어깨에서부터 쓸어내려 오는 요나의 손을 조금 밀어내고 그는 웃어 보였다.


"역시 왕도 정도면 지진피해도 별로 없구나, 싶어서요."
"아, 그건가."
평소에는 한번 밀어내면 끝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끈질기게 다시 붙는 것이다. 요나는 칼린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그의 어깨에 고개를 얹었다.


"지진은 그렇게 강하지 않았고, 우리도 곧 이정도로 발전할 수 있다."
칼린도 더 밀어내지는 않았다.

"8영주가 되었다... 미쉘이 자백만 하고 나면, 정식으로 취임식이 열리게 된다. 대단하지 않느냐, 칼린."
"그렇네요."
"그래. 내 그림이 완성되어간다."
요나는 조금 킥킥댔다. 그리고 칼린의 양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걸쳤다.

"내 그림이 완성되면,  때부터는 고뇌할 필요 없다. 안심하며 나날을 보내면 되는 거다."
칼린은 그 말에 고개를 돌리며 요나를 바라본다.


"...요나, 전 언젠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해요."
침묵. 요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칼린은 그의 손 위에 얹혀진 요나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아직도 돌아가고 싶으냐?"
"네."
"그 모든 일을 겪고  이후인 데도, 아직도 돌아가고 싶다고?"
"...네."
"넌 이미 평화에 적응할 수 없어. 모르겠느냐?"
그녀는 그를 붙잡은 손에 점점 힘을 준다. 칼린은 약간의 통증을 느낀다.

"내 옆이 네가 있을 곳이라는 걸 모르겠느냐?"
그녀의 눈가가 조금 일그러진다. 칼린이 대답이 없자,  그녀는 손에 힘을 풀고 표정을 되찾았다.


"...아니, 아니다. 칼린, 높은 곳에 있으면 더 넓은 시야가 생기는 거다. 걱정 말거라. 8영주가 되면 널 위해 돌아갈 방법들을 수소문해주마."
"...감사합니다."
"그래.  위해서 말이다."
요나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인다. 칼린은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녀의 말이 맞다. 위치가 높을수록 시야가 넓어진다.


"...그러니까 그 전까지는, 나를 돕는 게 모두를 위한 길이다. 네가 언제 떠나도 괜찮도록,  동료들에게 네 흔적을 남기지 마라. 네가 언제든 그들을 도울 수 있도록, 그들과 거리를 두거라. 네가 돌아가기 전까지 네가 있을 곳은 네 동료들과... 나의 성뿐이다."
"그럴까요."
"당연하지. 넌 솔직해질 수 없는 괴물이니까."
그녀의 말이 지나치게 무감각하게 다가왔을 때, 칼린은 다시 한번 자신이 얼마나 상황에 익숙해 졌는지  수 있었다. 요나가 등에서 떨어지며 조금 차가운 바람이 그들 사이로 흐른다.

"자, 돌아가자. '대도시 벨카'로 가야지."
"알겠습니다."
적색상황. 그는 감정을 더 내리 죽인다.

#


"진짜 다행이다..."
갤러한은 테이블 위에서 퍼질러져서 함을 붙잡고 계속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 새끼 왜 저러냐?"
"뭐, 딱 성에  간 날에 지진이 일어났으니까. 지 여친이 걱정돼서 떨었다, 이런  아니겠냐?"
"헤-"
륑게의 설명에도 릴로가 이해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아니, 뭐, 그렇게 강진도 아니었고, 애초에 지진이 지나간지 4시간은 지났잖아."
"그러니까. 꼴불견이지."
륑게는 그렇게 말하고서 릴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손목에 붕대를 하고 있었다.


"그건 뭐냐?"
"아, 이거..."
릴로는 자신도 모르고 꺼내 버린 팔을 다시 감추었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 뭐냐... 남자애 하나를... 구해줬단 말이지?"
"...어디에서?"
"그- 그그...  왜, 벨카 동쪽에, 술집거리에서."
"릴로씨 설마..."
핀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자, 그녀도 숨길  없다는 것을 아는 듯 팔을 꺼내 눈을 감쌌다.

"하... 빡촌 갔다 왔어."
"그럴  알았다."
"아니, 진짜 모든 걸 다 걸고, 두번째 임무 이후로 도저히 못 참아서  한번 간 건데 지진이 겹친 거거든?"
"어련할까."
"진짜로! 씨발,  운이 잘못이지..."
릴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갤러한의 맞은 편 즈음에 앉았다.


"주인장. 독한걸로 한  따줘."
"지금 마실라고?"
"엉. 갤러한, 너도 마실 거냐?"
"응. 나도 줘."
테이블 위로 잔 두개와 뚜껑이 따인 술병이 올라왔다. 릴로가 손을 뻗기도 전에, 륑게가 테이블 위로 걸터앉으며 병을 챙겼다.

"핀,  고아원은 어떤데."
"모르겠어요. 근데 뭐, 숲 한가운데에 있는 곳이기도 하고, 강한 지진도 아니었으니... 애초에 지진이 거기까지 갔을까요?"
"방금 소니아한테 들었는데, 이번 지진은 윌레인 전역적으로 일어났나 보더라고. 내일쯤에 한번 보러가라."
"네? 그래도 될까요?"
"안 될  뭐야. 이런 상황이면 각자 고향 한번씩 들러 봐야 되는 거 아니겠냐?"
륑게는 그렇게 말하고서 병을 기울여 술을 마셨다.  번 목 울대를 울리며 술을 마신 륑게는, 곧 트림을 뱉으며 덧붙였다.


"거 씨발, 우리 위대하신 지휘관님도 이정도는 허락하겠지. 우리가 업적도 세워줬는데 말야."
그 말에 대답은 없었다. 핀은 잠깐 망설이다가 곧 입을 다물고 발을 돌렸다. 아무리 요나라도, 정규부대도 아닌 소금부대원들이 임무 외 시간에 무엇을 할지는 간섭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 바로 다녀올-"
"아, 잠깐. 맞다, 맞다. 지금 일반마차는 운영  한다. 야, 그, 영주 성 있지?"
"네? 네."
"직접  타고 갈 거 아니면, 거기서 그냥 마차 하나 잡아서 타. 우리는 써도 된다더라."
"아, 감사합니다."
"그래. 금방 갔다 오고."
집을 챙기고 급하게 나가는 핀을 보던 릴로는, 륑게에게서 병을 빼앗아 자신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샷을 비운 후 아직도 함을 붙잡고 있는 갤러한을 두고 질문했다.


"야, 아스타랑 도르베는?"

#

"이쪽이다, 아스타!"
"엉!"
그들은 벌써 네 시간째 쉬지 않고 말을 타는 중이었다. 계속 달리던 도르베는  뒤쫓아오는 아스타의 얼굴을 보고 말의 고삐를 잡았다.


"...조금 쉬었다 갈까."
"어? 난 괜찮은데..."
"아니, 내가 지쳤다."
도르베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아스타는 흐르는 땀을 닦고서 따라 웃어 보였다. 지칠 만도 했다. 검연습을 하다가 바로 뛰쳐나온 거였으니까.

"그렇다면 잠깐만..."

둘은 말에서 내려 간단하게 먹을거리들을 꺼내서 바닥에 앉았다. 오래는 쉬지 않을 계획이다. 길어야 30분. 해가 떨어지고 나면 승마가 곤란하다.

아스타는 빵을 조금 뜯으며 도르베의 안색을 살폈다. 무표정으로 육포를 잡아 뜯던 도르베는 곧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돌아보았다.


"뭐 묻었나?"
"아니, 괜찮나 싶어서."
도르베는  말에 살짝 웃으며 고개를 떨궜다.


"뭐, 그렇지. 앞뒤  보고 달려오기는 했다만, 달리다 보니 솔직히 큰 걱정이 되지는 않더군. 우리 아버지도 군인 출신이니 말이다. 이정도 지진에 사고가 나시지는 않았겠지."
"...그러냐?"
"아니, 사실 무섭다."
그렇게 말하고서 도르베는 물이 담긴 자루를 아스타에게 건냈다.

"따라와 준다고 해서 안심했다. 고맙다, 아스타."
아스타는 그 물을 받아 마셨다. 대답하기 조금 부끄러운 느낌. 드러나려는 표정과 기분까지 삼켜내며 그녀는 멋쩍게 웃었다.

"이젠 고맙다는 말 막 하네."
"불만인가?"
"나쁘진 않아."
슬슬 하늘이 붉게 젖어간다. 이 계절의 해는 빨리 떨어진다. 도르베는 잠깐 지도를 펼쳐 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앞으로 1시간에서 2시간이면 도착할 것 같구나."
"그러냐. 시간이 애매한데..."
"그래. 준비해라. 다시 달려야지."

#

라드는 전화국 밖으로 나와 담배를 꺼냈다. 다행히도 지진으로 병원에 별 문제가 생기지는 않은 듯했다. 그의 누이는 지진이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잠깐 자신의 속주머니를 매만지며 챙겨 나온 것이 그대로 있는지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 거리를 걸어 나오며 벨카의 상황을 봤다. 마차들과 가로등 따위가 여기저기 어질러진 아이의  마냥 널려져 있었지만, 딱히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는  길을 고민하다가 벨카를 벗어나기로 했다. 그가 발견한 것이 어떤 것인지 확답이 나오기 전에는 누군가에게 들켜서는 안된다. 그의 '친구'중에는 의사도 하나 있다. 오랜만에 한번 보러 갈 겸 물어보면 되리라.

그는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2시간이면 간다. 저녁은 그 친구와 함께 먹을 듯했다.


#

4시간 정도를 내리 달리자, 곧 작은 성채 도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리하는 말의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정문으로 다가갔다. 근위병들이 그녀를 막아 섰다.


"시민증을 보여주세요."
근위병들은 나름 친절한 태도를 유지하며 물어보았고, 이리하도 별 반감 없이 시민권을 꺼내 건내 주었다. 근위병 하나가 그걸 확인할 동안, 나머지 한 명의 근위병은 이리하를 보고 있었다.


"이쪽에는 무슨 일로?"
"지나는 길입니다."
"어디에서 오셨고 어디가 목적지죠?"
"비나흐에 있었고, 로가에 가려고 해요."
"비나흐는 몇 시 즈음에 떠나셨죠?"
"13시쯤에 나섰습니다."
"흠..."
그녀의 시민증은 문제가 없었다. 다만 그녀의 대답은 조금 이상했다.

"...비나흐에서 여기까지 4시간이나 걸렸다구요?"
2시간이면 충분하고 남은 거리이다. 그러고 보니 비나흐와 연락이 끊어지기도 했다. 그들은 천천히 전투태세를 준비했다.

"저... 길을 잃었었습니다."
"네?"
"길을 잃었었습니다."
이리하는  번 말하는 것이 부끄러워져 고개를 조금 떨궜다. 승마기술도 나쁘지 않은 그녀가 왜 지역간 이동을 할 때는 무조건 마차를 이용하는가.

그녀는 길치였다.


"...길을 잃으셨었다구요?"
"...네."
그녀는 더 이야기하기 싫어 빠르게 통행비를 꺼냈다.


"...알...겠습니다."
근위병들은 조금 당황하면서도 금방 자신의 임무로 돌아갔다.


"얼굴이 보이게 후드를 들어주세요."
"그래야 될까요?"
"당연하죠."
여러가지로 얼빠진 여성이라고 생각하며 근위병이 조금 성질을 부렸다. 이리하는 그들이   있도록 후드를 반 정도 들어 올렸다.

"음...문제없습니다. 들어가세요."
드러난 그 얼굴은 이리하의 것이 아니었다. 조금 수수해 보이는 갈색 머리의 여성으로 보였다.

"감사합니다."
이리하는 그렇게 말하고 통행비를 건낸 뒤 말을 끌고 마을에 들어왔다. 만에 하나를 경계해 목걸이를 챙겨갔던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교단의 사제가 되고 나서 받았던 것이었다. 착용자의 목 위까지의 외형을 다르게 인식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녀는 마부 여관으로 발을 옮기며 지금 상황을 천천히 정리해 보았다.

1. 비나흐의 마도 열차 처리는 성공했다. 너무 훌륭한 방식으로.
2. 비나흐의 전화국이 무너졌으니 아마 이 소식이 퍼지는 데에는 하루정도가 걸리리라.
3. 아마 교단에서 이 소식을 교주에게 가장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리라.


마차는 아마 오늘 바로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비나흐의 마부가 말했던 것처럼 일주일을 멈춰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요금만  비싸게 낸다면 내일이나 내일 모레부터 움직이는 마부들도 있겠지. 일단   까지는 이 지역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직접 말을 타고 길을 찾아보니,  수 있었다. 길 찾기는 사람이 할 짓이 못된다.


#


"여기다."
초원을 조금 달리는가 싶더니, 곧 초원 한가운데에 멈춰선 도르베를 보고 아스타는 물음표를 띄웠다.

"뭐가 여기야?"
"우리 아버지의 집."
아스타는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야, 작은 오두막 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걸 보니 도르베가 걱정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빨리 가보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둘은  오두막을 향해 걸었다.


용케 무너지지 않았구나, 그게 아스타의 감상이었다. 도르베도 감상은 똑같았는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들긴 뒤 소리쳤다.


"아버지! 괜찮습니까!"
잠깐 안이 소란스럽다가, 곧 문이 열리며 그의 아버지가 나왔다. 그 나름대로 수습을 하고 있었는지, 팔을 걷어 올린 셔츠가 더러워져 있었다.

"도르베? 왜 온 거냐?"
도르베는 아버지의 조금 당황한 표정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아, 그게, 지진이, 그, 거, 걱정돼서-"
"...아! 그랬겠지! 그, 미안하다. 당연한 건데..."
둘은 정말로 닮았었다. 피곤할 정도로.


"그, 도우려고 왔는데, 혹시 방해라면 돌아가겠습니다-"
"아니! 도와주면 고맙지, 집안이 망신창이란다. 정말, 그 때 집을 나와 있어서 다행이었지. 그리고 뭐, 아버지 집에 일 없이 찾아올 수도 있는거지. 내가 말을 잘못했다..."
그는 문을 잡고 웃으며 말하다가 뒤늦게 아스타를 보았다. 둘을 당황한 표정으로 번갈아 보기 시작한 그에게, 도르베가 급하게 말했다.

"이쪽은 제 동료입니다! 같이 도와주겠다며 따라왔어요."
"아, 그런가.  부탁하네. 이름이?"
그는 더러워진 손을 셔츠로 닦아내고 내밀었다. 전에 귀족이었던 자라고는 상상도 못할 소박한 행동이었다. 아스타는 그런 그의 손을 가만히 내리 보았다.

"아스타?"
도르베가 말을 걸었지만, 아스타는 거기에 굳이 손을 건내지는 않았다. 가만히 그 손을 바라보던 그녀는 곧 침을 뱉듯 말했다.

"아스타 라진이요."
그리고 더는 말하기 싫다는 의사표현이라도 하듯 팔짱을 꼈다.


"어이, 아스타, 무슨 짓이냐!"
무안하게 내밀어진 아버지의 손을 보며 도르베가 어쩔 줄 몰라 하자, 그의 아버지가 급하게 손을 치우며 분위기를 바꿨다.

"아, 괜찮네. 고참 떠돌이들은 악수도 꺼린다고 들었어. 네 동료들이라면 전부 국가영웅들 아니더냐. 내가 생각이 없었던 거겠지. 괜찮으니 들어오렴, 둘 다."
그는 웃으며 문을 열고 잡았다. 도르베는 약간의 의구심을 품고, 아스타는 약간의 불만을 품은 채로, 둘은 그 집으로 들어갔다.

#

"오늘은 특히 더 수고했다, 칼린."
"감사합니다."
요나는 보기 드물 정도의 웃음을 입에 걸치며 칼린을 칭찬했다.


"예의 차리지 않아도 좋아. 정말 큰일을 해줬다. 갖고 싶은 거나 필요한 것이 있다면 모든지 말 해다오. 그래, 먹고 싶은 건 없나? 이 세계에는 엄청난 진미들이 가득하다."
"...괜찮습니다. 배가 고프지가 않아서."
"오늘 하루 종일 굶지 않았느냐. 먹고 싶은 것이 없다면 뭐, 술이나 갖고 싶은 것을 얘기해 보거라! 뭐든지 다 줄 수 있어! 이제 네 주인은 대도시의 영주이다!"


칼린은 조금 생각해 보았다. 요나가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뭐라도 말하는 것이 예의가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마치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생각하는  자체가 힘들었을 뿐더러, 갖고 싶은 것은 도저히 떠올릴 수 없었다. 그는 최근 안개속에서 살아가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말 뿐으로도 충분합니다. 고생은 요나님이 하셨죠."
"그, 그런가... 그래! 그렇다면 피라도 빨겠느냐? 원한다면-"
"영주님."
칼린의 요나를 부르는 호칭이 바뀌었다. 피라도 빨겠냐니, 그 말은 왠지 칼린에게 거슬리고 아프게 들렸다. 물론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거두어준 사람에게 무슨 무례를 저지른 것인지 죄책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역시 오늘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셔츠 단추를 풀다가 완전히 멈춰버린 요나를 두고 칼린은 발을 돌렸다. 요나는 칼린이 완전히 방을 나가 발걸음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셔츠 단추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오늘은 최고의 날이 되었어야 했다. 자신의 생일보다도 즐거운 날이 되었어야 했다. 그와 자신을 위한 철옹성을 거의 완성시킨 날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모두 망가졌다. 그가 창밖을 보며 원래 세계 따위의 이야기를 해서 그런 것이다.  세계가 그가 있을 곳이었다.  세계에서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모든지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세계를 등지려고 한다.

막혔다. 무엇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것이고, 그가 싫어하는 모든 것을 베어가를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빌어먹을 동료들뿐이다. 먼저 그를 싫다고 배척해내는 멍청한 잡것들이 그가 원하는 전부이다.

요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풀었던 단추를 다시 잠구고 술병을 꺼냈다. 그리고 술잔에 한가득 담은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살짝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쥔 요나는 한번에 그 잔을 비웠다. 그리고 책상을 내리 치듯 잔을 내렸다. 깨져버린 술잔의 파편들이 요나의 굳은 살이 가득 박힌 손에 박혔다.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르는 듯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거냐..."
그녀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서려 있었다. 분노와 억울함을 곱씹으며 그녀는 흐느끼듯 계속 혼잣말했다.

"도대체  더 어떻게 해야 이 세계의 나만을 바라봐 주는 것이냐...!"
격해지는 감정에 그녀의 볼에는 눈물까지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녀는 심호흡하며 이성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그래, 이세계 따위가 존재할 리도 없으며, 칼린은 그저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정신착란일 뿐이다. 어차피 돌아갈 방법은 없을테니, 시간을 들여서 그를 설득하고 회유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간간히 그가 묘사하는 이세계의 풍경이라는 것은, 결코 정신병자가 묘사하는 상상 속 세계 따위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말하는 이세계 이야기 따위를 일부러 멸시하며 비하하고는 했다.

한번 격해진 감정이 다시 차분해지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깨져버린 술잔을 손으로 쓸어낸 뒤 술병을 잡고 술을 마셔 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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