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여진(餘震)
구덩이가 꽉 찼다. 이바노프는 가만히 구덩이 바깥까지 비져 나온 팔이나 다리를 삽으로 밀어 넣는다. 그는 지금 자신의 눈가에 흐르는 것이 땀일지 눈물일지 생각해 보았다.
"다 밀어 넣었으면 비켜."
뒤에서 들려오는 증오스러운 적의 목소리. 그는 그 명령조까지 같이 곱씹으며 눈가의 땀을 닦아냈다. 그런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기욤은 그를 지나쳐 구덩이를 확인했다. 8명, 아니 9명인가. 자기가 밀어 넣으라고는 했었지만 진짜로 해낼 줄은 몰랐다. 그녀는 만족스럽게 이바노프의 어깨를 한번 치고서 등을 돌렸다.
"전부 묻어. 그래도 사망자가 많이 나오지는 않았군."
그 말에 조롱이 담긴 것을 알고 있다. 그 자리의 유일한 빅센마르크인인 그는 병사들의 웃음에서 그걸 알 수 있었다. 그의 꽉 쥔 양 주먹에서 피가 흘렀다.
"괜히 원망할 생각 하지 마라. 네놈들이 게을러 빠졌어서 생긴 일이야. 할당된 시간 내에 빠릿빠릿하게 했었으면 이런 일 없었잖아?"
그들이 내줬던 '목표'는 소금부대의 도착 전에 전화국과 대사관을 세우는 것이었다. 매일 할당되는 성과에 맞추지 못하면 업무는 연장되었고, 후반에 가서는 쉬는 시간조차 없이 일하며 각자 집에서 쉴 시간조차 얻지 못하게 되었었다. 전화국을 지을 때 즈음에는 전부 현장 바닥에서 누워 자야 했었다.
"그래도 뭐, 전화국과 대사관 건축은 어찌 저찌 끝냈군. 이제 가보도록. 우린 보고 할 게 있어서."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리고 병사들에게 구덩이를 덮게 하는 기욤을 보며, 이바노프는 최대한 무감각함을 유지하면서 한 걸음 씩 발을 뗐다. 한걸음 한걸음마다 자신이 직접 묻은 동료들의 시체가 채이는 것 같았다. 결국 그가 숲을 벗어나 마을에 도착했을 때 즈음엔 수염까지 푹 젖은 수척한 꼴이 되어 있었다.
"...수고 많았네, 이바노프."
숲의 입구 즈음에서 그를 기다리던, 짧고 단단해 보이는 화상자국이 난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이바노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얼굴을 쓸어 내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푸르투가. 우린... 우린 이번 작전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해...!"
그의 눈물은 김까지 서릴 정도로 뜨거운 것이었다. 화상입은 남자는 그런 그를 보며 침묵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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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일주일간 정말 잘 참아 주신 겁니다."
마키도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걸 칭찬으로 받아들일 기분은 아니었다.
"모두, 먼저 지나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허단..."
"그만. 빠르게 계획이나 짜죠."
세라가 기도를 끊어내며 냉정한 어투로 말하자, 마키도는 눈물을 닦아내며 입을 벌렸다.
"...저 혼자만이라도 기도하게 해주세요. 그들은 이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실 분들이 아니셨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의미-"
"세라."
이바노프가 약간 열이 오른 세라를 진정시키고, 자신도 손을 모았다.
"조금이면 된다."
눈물 자국조차 채 지워지지 않은 그를 보며, 세라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곧 푸르투가도 손을 모은 것을 시작으로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이 하나 둘 씩 손을 모았다. 1분정도, 침묵속에서 속삭이는 소리와 흐느끼는 소리만이 파문처럼 퍼져 나갔다.
"... 감사합니다. 그들의 영혼이 안식을 찾았기를. 부디 남은 자들이 부당함에 굴복하지 않도록 꺾이지 않을 용기를 주기를."
"...이쪽이야 말로 감사하오. 그럼 슬슬 본제로 돌아가도?"
"네. 부디."
"마키도씨도 같이 땀 흘리며 일했으니 들으셨겠죠, 전후복구부대는 내일 아침에 도착합니다. 따로 준비해야 할 것이 있을까요?"
"일단, 뭐, 특별히 준비할 건 없을 것 같네요. 상황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일단 구호부대 안의 상회측 내통자분이 병력을 더 들여올 때부터 뭘 시작할 수 있겠네요."
"정확한 계획은?"
마키도는 지도를 펼쳤다. 교단 내에서 자체적으로 그려낸 지하도의 지도였다.
"전에 이동하면서 사용하셨던 지하도는 패전 이후로 전부 태우셨다고 하셨죠. 비교할 만한 게 있으면 좋았겠지만... 아쉬운 대로 만들어 봤습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여기에서 전화국과 신설된 대사관은 멀지 않아요."
마키도는 그 지도에서 그려져 있는 시설 간의 위치들을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교단에서는 이미 여기서부터 그 두 시설을 이을 수 있는 길을 제작할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제부터 교단은 건물 공사에 관여하지 않고, 저녁에 이 땅굴을 개척해낼 겁니다."
"필요한 자재는 어떻게 구할겁니까?"
"구호부대의 내통자에게 부탁하면 건축 보금물자 사이에 땅굴용 보급물자도 지원받을 수 있을겁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 해요."
"...확실히."
"그럼 공격은 언제 하려는 거지? 굳이 그런 번거로운 것까지 만들어야 되는 거냐?"
수긍한 이바노프와는 달리 푸르투가는 불만이 있는 듯 했다. 마대자루 너머로 보이는 눈은 척 봐도 화가 나 있었다.
"... 전면전은 최대한 피해야죠. 교단측이나 상회측에서 보내는 인원들은 전부 전투가 익숙하지만, 여기 있는 여러분은 한 10명정도 이외에는 전투에 문외한이 아니십니까?"
"하지만 우리는 한 명 한 명이 특수 전력일텐데."
"그건 저쪽도 그럴 겁니다. 심지어 저쪽 구호부대는 말도 안되는 실적을 갱신중인 확실한 비대칭병력이죠. 장군으로서 어느 정도의 피해를 감수하는 것은 각오지만, 피할 수 있는 피해를 감수하려는 것은 그저 폭군입니다."
"시간을 끌수록 피해가 커질 거다. 벌써 9명이나 죽었어."
"그러니 조금 더 침착하라는 겁니다. 확실히 이겨야죠."
푸르투가는 가만히 눈 앞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곧 그는 한숨을 내쉬며 먼저 분위기를 꺾었다.
"...공격은 지하통로가 완성되어도 바로 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의 공격 신호는 윌레인 측에서 신임대사를 선출했을 때입니다."
"신임대사가 대사관에 있을 때 공격하자는 건가?"
"아마 구호부대원들도 대사관에서 숙박하게 될 겁니다. 지하통로로 빠르게 습격해서 대사를 납치, 동시에 전화국을 점거합니다."
"그리고 전화국에서 윌레인 대사를 통해 우리가 황녀를 데리고 있음을 밝히자, 이거구나. 나쁘지 않은 것 같네."
세라도 작전에 수긍했다. 더 이상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는 듯 했다.
"그러면 작전 때까지 우리의 패를 들켜서는 안돼요. 낮이건 밤이건 황녀님을 철저히 숨기고, 주민들을 입막음 시키세요. 서로 조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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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는 모든 보고를 확인하고 보고서를 내려 놓았다. 벌써 저녁 식사 시간을 넘겼지만, 그녀는 따로 뭔가 챙겨 먹고 싶지 않았다. 집사도 칼린도 없는 영주실 안에서 그녀는 잠깐 멍한 상태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전화가 울릴 때까지, 그녀는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듣고 있다."
'요나씨 본인이십니까?'
"그래."
'왕도 정보부에서 전화입니다. 지금 바꿔드리겠습니다.'
전화국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리고, 잠깐동안 침묵이 흘렀다. 곧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기름 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나경?'
"네. 요나입니다. 자백을 받으셨나요?"
'아뇨, 입도 뻥긋하지 않습니다. 이대로 계속 '심문'하면 죽을지도 모르겠어요.'
축축하고 기름진 목소리인데도 무기질적이고 사무적이다. 약간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현재 전화가 지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 날 이후 쉬지 않고 '심문'을 행한 것은 맞습니까?"
'네. 특별히 봐주는 것 없이 정상 절차를 밟았습니다만... 요나경이 원하시는 답변은 커녕 입술도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요나는 웃음을 감췄다. 당연히 알고 있다. 썩어도 8귀족의 위치까지 올랐던 자가 고문 좀 한다고 거짓 자백 따위를 할 리 없다. 그렇다고 미쉘에게 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분명 협상조건을 준비해 놨을 것이고, 이 전화도 그것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쪽에서 조건을 하나 붙였습니다만.'
그래. 이런 식으로.
'정보부에 말할 생각은 없고, 요나경과 직접 대화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것 때문에 전화 드렸습니다.'
그런 년이 원하는 것은 대강 예상이 간다. 아마 자유, 사면, 일단 죽음은 피하는 쪽으로 협상을 이끌겠지. 받아서 손해 볼 것은 없다. 요나는 소리없이 입가를 올리며 말했다.
"...몇일 정도 후에 제가 직접 만나러 가겠습니다. 미쉘경에게는 말하지 마세요."
'네.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나러 가는 그 날까지... '심문'을 멈추지 않기를 바랍니다."
'...네.'
그걸로 전화는 끊어졌다. 요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최근 자신을 감싸던 불쾌함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래, 아직은 조금 더 괴로워야지.'
그녀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잠깐 미쉘이 고문당하고 있는 장면을 그려 보았다. 퍽 즐거웠다. 재떨이를 같이 들고 그녀는 영주실을 나왔다.
방에 들어가 몸까지 깨끗하게 씻고서, 그녀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방에 불조차 키지 않고 그저 퍼질러져 있던 그녀는 지금 자신의 상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상황은 순조롭다. 8영주로서 자신의 위치는 공고해진 것이고, 상회는 데버만이라는 정치적 생명줄과의 연을 잃었다. 미쉘에게서 다임상회와 내통했다는 자백만 받아내면 상회는 끝이다. 8영주의 나머지 귀족 놈들은 끝없이 자신을 견제하려 들겠지만, 애초에 요나는 그렇게 큰 야망도 가지고 있지 않다. 노려도 딱히 털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칼린. 칼린도 노선을 바꾸면 문제가 없으리라. 그에게 이 세계의 멋진 점들을 보여주고 구슬리면 여기에 머물 것이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도록 만들면 된다. 그게 아니면 적어도 도망칠 수 없게 라도 만들면 그녀의 승리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리고 테이블의 아래쪽을 더듬어 보았다. 그녀가 칼린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느낄 때 확인하던 것을 보기 위해서 였다. 손 끝에 만져지는 단추를 눌러보면, 책장이 열린다. 그녀는 그제서야 방의 불을 키고 열린 공간을 향해 다가간다.
작은 화장품 케이스. 지금 시대에 와서는 그렇게 비쌀 이유도 없는 특별할 것 없는 화장품이다. 그러나 내용물은 그것이 아니었다. 요나는 마치 그것이 작은 아이라도 되는 듯 소중하게 들고 침대 위에 앉았다.
그녀는 세게 쥐면 부서지기라도 하는 듯 조심스럽게 그 뚜껑을 들어 올려 본다. 퍼져 나오는 피냄새, 안에는 악몽에서나 나올 법한 것이 있다. 빽빽하게 들어박힌 이빨은 일반인이 보기에는 구역질까지 일으킬 만한 것이었다. 요나는 그걸 하나씩 전부 꺼내 들여다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것이야 말로 칼린이 자신에게 귀속될 수밖에 없다는 증거물이요, 그녀와 칼린만이 공유하는 추악한 보물이었다. 칼린은 자신이 이것을 버린 줄 알지만, 그녀는 칼린의 누더기가 된 옷 마저도 가지고 있었다. 그와 관련된 것은 그녀도 모르게 버리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까 평소대로 였다면, 그녀는 지금쯤 안정을 되찾고 편안했어야 했다.
위화감. 어긋난 느낌.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다. 그녀는 이 파우치 안의 내용물에 한해서는 착각할 것이 없었다. 조용히 케이스를 책상까지 들고 간 그녀는 내용물을 늘어놓아 보았다.
이빨은 전부 있었다. 그러나 조각이 한 조각 없다. 4개의 이빨이 13개의 조각으로 갈라져 있었을 터이다. 그 조각 중 하나가 없다. 이빨 하나가 맞춰지지 않는다. 가장 큰 조각 하나가 사라졌다.
그것을 눈치채고서, 그녀는 그저 의자에 무너지듯 앉았다. 붉게 상기된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듯 가만히 그 이빨들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그 자세 그대로 하루 밤을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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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녹지에서 포장조차 되지 않은 흙 길로 조금 가다 보면, 다시 포장도로가 이어지기 시작한다. 거기서 부터는 녹지는 온데 간데 없어 지고 정적인 풍경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 길은 단풍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리는 조용한 곳이다.
약간 회색 빛이 도는 하늘 아래 풍경을 거울처럼 그대로 비춰내는 호수. 약간 쌀쌀한 바람이 코끝으로 느껴진다면, 벌써 다 도착한 것이다. 황폐하게 쓰러진 전쟁의 흔적들을 지나가다 보면, 그 전쟁보다도 차갑고 무기질적으로 색이 바래진 집들이 모여 있는 이곳에 도착한다.
"...칼타코에 도착했다."
맑고 차가운 공기. 왜일까, 이렇게 순수하게 자연의 향이 나는 공기는 오랜만이기도 하다. 풀과 낙엽이 썩는 냄새, 보리냄새, 원리나 진실을 따질 수는 없지만, 이 시간 햇살에도 분명 냄새가 있다. 풍경이나 여건으로만 보자면 갤러한은 여지껏 이동해온 모든 임무지 중에서 이곳이 가장 만족스러웠다.
"여기냐."
도르베도 그 풍경들을 돌아보았다. 딱 머리를 스쳐 지나갈 정도의 바람. 그는 앞머리를 올리며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 벌레 군집 냄새가 여기까지 나는구나."
"진정해.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아스타가 도르베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한다. 한번 그 영지를 둘러본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빅센마르크는 항상 눈 내리는 곳인 줄 알았는데.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전부 흰색이고 말야."
"이 좀벌레들도 사계절은 향유한다. 겨울만 극단적으로 길 뿐이지."
도르베는 그렇게 말하고 입가를 일그러트리듯 웃었다.
"그래서 저놈들 피가 차가운 거다."
"...아, 그래..."
아스타는 도르베의 옛모습이 떠올라 괜히 더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도르베씨는 저런 반응이지만, 전 이곳이 싫지 않네요. 바람만으로도 청량한 것이..."
핀이 작게 그렇게 말하자 릴로가 작게 응수했다.
"나도 꽤 맘에 드는 걸. 그리고 뭐냐, 듣기로는 빅센마르크 남자들이 기운이 좋다던-"
"꿈도 꾸지 마라, 야. 조용히 넘어가자고. 괜히 일 만들지 말고..."
륑게는 그렇게 말하고 짐을 하나씩 꺼냈다.
"소니아! 보고해라.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으니까."
"응! 잠깐만!"
소니아는 눈을 반짝이며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와, 이런 곳 근처에 술집 지으면 느낌 쩔텐데...! 여기 땅이나 좀 사둘까?"
"음... 난 추천 안 해."
그런 그녀 옆에서 분위기를 깬 것은 라드였다.
"...무슨 이유라도 있어?"
"그야 뭐, 한 일주일만 여기 더 있어보면 알겠지만, 저 호수가 곧 얼어붙을 거야."
"그건 그거 대로 장관일 것 같은데. 역시 늦기 전에 사두는 게..."
라드는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기가 찬 듯 웃었다.
"뭐, 결정은 임무 끝나고 해도 늦지 않잖아? 소금부대에서 전역만 제대로 해도 땅 매입에 우선권이 생기니까 말야."
"...확실히 그건 그렇네. 응."
소니아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벗어났다. 라드는 가만히 영지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끝을 가져다 줄 영지다. 그게 자유가 되었든, 죽음이 되었든.
이리하는 그들과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아직 마차에서 애매하게 몸을 뺀 위치를 유지하며 풍경을 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곳이야. 척박하지만 정적이고 고요하지. 사람들은 강인하고 정의로워. 난 이 곳이 꽤 맘에 들어."
나즈막히 말하고서 그녀는 마차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편안한 웃음을 입가에 걸쳐 보였다.
"넌 어때, 칼린."
더 넓어졌기 때문일까, 마차의 안쪽은 전의 것보다 더 어두운 느낌이었다. 그 어두운 마차의 한구석에서 칼린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손에는 붕대가 대충 감겨 있는 가면이 들려 있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그는 가면을 들어 올려 얼굴에 썼다. 어둠속에서 하얀 가면만 둥 떠있는 것같은 그림이 되었다. 몸을 일으키며 마차를 나오는 그를 위해 이리하가 문을 잡아 주었다. 칼린은 거기에 가볍게 묵례하는 것으로 답했다.
"바람은 기분 좋아요."
그리고 그 한마디로 칼타코의 첫인상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