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여진(餘震)
"괜찮겠어?"
"... 사흘이나 기절했다면 급해요. 지휘관님에게 보고를..."
"영주님은 연락을 못 받으시고 계셔. 그걸 걱정한 거면 일단 쉬어."
"... 아직도 연락을 안 받으신다 구요?"
"응."
칼린은 엉거주춤하게 일어난 자세로 이리하를 보다가 침대에 풀썩 앉았다.
"하... 무슨 일이 생기신 건 아니겠죠?"
"진짜 큰 일이 생긴 거라면 이미 소식이 퍼졌겠지. 자, 알았으면 다시 누워."
"...아뇨, 이불도 치웠으니까 일어났다고 지금 전할 게요."
칼린은 다시 몸을 일으키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가, 발을 멈추고 이리하를 돌아보았다.
"그... 혹시나 해서 묻는 거지만... 나흘 내내 제 수발을 들어주신 건가요?"
"... 동료니까."
그는 그 울림이 좋은 듯 눈을 감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웃음을 머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말이죠, 이리하랑 라드, 이 둘 하고는 못 친해질 줄 알았어요."
그녀는 불이 꺼져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문 밖에서 들어오는 역관이 칼린의 얼굴을 적당히 가려주었기에 제대로 말에 집중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계속 믿어 주셔서."
그가 보내는 특별한 신뢰감을 더욱 만끽하고 싶었지만, 이리하는 그렇게 간사한 성격은 될 수 없었다.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일으켰다.
"칼린... 네 수발을 나 혼자 들지는 않았어."
"네?"
"문 밖으로 나가봐. 네가 해낸 걸 봐야지."
불 꺼진 방과는 완전히 다른 로비의 분위기. 급조되어 건물에 화려한 맛은 없었지만, 꽤 밝은 건물 내부의 분위기는 칼린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의 심장이 두근거리던 것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직 용서받지 않았다는 두려움. 동료들에게 말하는 순간이 가까워질수록 떨리고 있었다.
마침내 계단을 조금 더 내려가면 대화소리가 조금씩 들려온다. 저녁시간인 걸까, 소리는 식당쪽에서 들리는 듯하다. 짤그락 거리며 식기들이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떠듬떠듬 유쾌한 대화소리가 들린다.
칼린의 계단을 내려가던 발이 멈췄다. 지금의 그가 저 좋은 분위기 사이로 끼어들면서 자신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기쁜 일인 것 마냥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본다. 스스로도 나이 쳐먹고서 꼴사납고 어리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발은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그는 발을 움직인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자신에 대한 일은 결국 스스로 보고하는 것이 도리이기에.
"여러분..."
그는 천천히 식당의 커튼을 밀어내며 머리부터 밀어 넣는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자, 그는 의도적으로 무시당한 것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기 위해 조금만 더 큰 목소리로 다시 한번 말해본다.
"여러분...?"
제일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역시 청각으로 먹고사는 핀이었다. 그리고 곧 핀을 시작으로 하나 둘 씩 식사를 멈추며 칼린을 돌아 보았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칼린은 필사적으로 그들의 표정을 읽어 본다. 그러나 여유가 없다. 그녀는 턱까지 올라온 숨을 고르며 힘겹게 떠듬떠듬 말한다.
"저, 그... 일어났어요..."
정적속에서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곧, 아주 평범하게 다시 식사가 재개되었다. 식기가 잘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모두 다시 멈췄던 대화를 시작했다. 잠깐의 헤프닝을 마주한 듯한, 그 정도의 느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예상하고 있던 칼린에게 별로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가 작게 쓴웃음을 짓고 커튼에서 빠져나오려 할 때 였다.
"나흘이나 굶어서 배고프지?"
도르베의 목소리. 칼린은 다시 머리를 들이민다.
"우리도 막 식사를 시작한 참이다. 앉아라, 맛있는 게 많아."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옆자리에 비어 있는 의자를 뒤로 빼 주었다. 그리고 머뭇거리는 칼린을 향해 웃었다.
"다들 듣고 싶은 게 많다."
그 누구도 도르베의 말에 반기를 표하지 않았다. 그것 만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칼린은 조금 몸을 떨다가, 고개를 푹 떨구고서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으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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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린은 자신이 앞장서서 뒷정리를 자처했다. 식사가 끝나고서, 그는 웃으며 식기들을 가져가 설거지를 시작했다. 나흘간 기절해 있다가 40분 전에 일어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이게 맞는거겠지..."
소니아는 그렇게 말하고 칼린 쪽을 쳐다보았다. 애초에 사정을 알고 있던 그녀로서는 마냥 기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도 모르겠다. 요나 지휘관이랑 연락이 안되는 지금이야 말로 뭔가 상황을 바꿔 보기에는 최적의 기회 니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며 씹는 담배를 꺼냈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말이 엉망이라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다만 칼린이 그런 모습을 보인 이후에도 모두가 칼린에 대한 의심을 유지하게 할 방법 따위를, 갤러한은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둘이서만 뭘 그렇게 쑥덕대?"
"신경꺼."
"궁금하게 만들기는."
끼어들려는 륑게를 쳐내고서 갤러한은 담배를 씹어 댔다.
"그럼... 이제 전처럼 돌아 온거죠, 우리?"
핀이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식사자리는 나름대로 유쾌했었고, 특별한 일은 생기지 않았다.
"전처럼, 인가..."
그러나 몇몇의 반응은 핀이 기대한 것과는 달랐다.
"그건 조금 다른 문제지, 핀."
"네? 또 뭐가 문젠데요?"
약간 짜증내는 핀을 향해 륑게가 웃었다.
"아니, 확실히 우리가 잘못했다는 건 인정해. 칼린이 그럴 놈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았고, 뭔가의 사정이 있었으니 그랬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래서?"
"그래서라니-"
"상황이 바뀐 건 없어. 라드는 아직 애꾸눈이고 도르베는 아직 손가락이 8개라고... 이유가 어찌되었건, 확실히 그 내막을 듣기 전에 그렇게 섣불리 믿어 버릴 수는 없다 이거야."
륑게의 말에 핀은 조금 풀죽어 고개를 숙였다. 륑게는 아무래도 너무 심하게 말했나 싶어 조금 말을 고쳤다.
"아니, 뭐... 방금은 조금 극단적으로 말한 거고, 상황은 안 바꼈지만 우리가 칼린에게 잘못 대한 건 인정하니까 말이야... 전처럼 화목한 분위기로 돌아 갈 거야."
"...그런가요?"
"그렇다고. 완전히 똑같이는 역시 힘들어도... 칼린 쟤 애초에 미워하기 힘든 자식이었으니까, 응?"
"제대로 사과도 했고 말이야... 나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넌 다 이야기 끝났는데 또-"
"아, 몰라. 들어간다."
아스타는 그렇게 말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륑게는 그 모습을 보고 아스타가 아닌 도르베를 돌아보았다.
"쟤는 네가 잘 설득해 봐라."
"아, 응. 맡겨라."
도르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스타를 따라 갔다.
"그...러면, 칼린도 일어났으니까 진짜 계획대로 내일 파티야?"
릴로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다시한번 남은 사람들끼리 어색함이 생겼다. 곧 갤러한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솔직히, 지금만큼 칼타코 주민들하고 원활하게 지낸 적 없잖아. 물 들어올 때 노 젛어야지. 칼린 나았는데 그거 쌩까고 다시 거주구 건설시키면, 다리 공사한 것도 다시 부셔 먹으려 들지도 몰라."
"아니, 난 좋은데..."
"저도 좋아요! 그런데..."
칼린이 기적적으로 소냐를 살린 날 이후, 소금부대 뿐 아니라, 주둔병력까지도 칼타코 주민들과 사이가 상당히 원활해 졌었다. 나흘 뿐 이라고는 하나 그 나흘간 주민들은 그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유순하게 행동했고, 주둔병력들은 무기를 내려놓았다.
소금부대 측에서 다리 완공 파티를 제안한 것은 결코 기분으로 즉흥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면 진심으로 한번 통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양측 다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할 생각은 없어도 피를 흘리고 싶지 않다는 것은 같았다.
즉, 이번 파티는 윌레인측의 첫 자비였다.
"...뭐, 그러면 아무나 한 명 나가서 지금 주둔병력 캠프에 말 전달하고 와. 바로 내일 축제할 것 같으면 더 늦기 전에 소식 전달 해야지."
그들이 꺼리던 문제는, 이것을 누가 전하러 갈지였다. 대수로운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귀찮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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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마을에 생기를 돌릴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던 것일까, 칼린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핀이 주둔병력에게 전달한 이후 일의 진행은 빨랐다.
병사가 마을에 소식을 전달하자 마자 준비가 시작되었다. 호사스럽게 준비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정성껏, 주민들은 거리에 장식을 시작했다.
병사들이 허락한 시간은 딱 1시간이었다. 감시하는 병사들이나 주민들이나 양측이 피곤한 상황이었지만 눈을 비벼가며 버텨냈다. 점점 깔려가는 어둠 속에서, 작게 기적이 하나 더 일어났다.
시작은 한 병사의 불평이었다. 눈가를 긁으며 장식이 촌스럽다고 한 말이 발단이었다. 그도 특별히 미적 감각이 뛰어나서 꺼낸 말은 아니었고, 그저 빅센마르크의 미의식을 비하하기 위해 던져본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독립을 준비하는 칼타코 주민들에게는 새롭게 다가왔다. 어쩌면 자신들의 본국과도 다른 새로운 문화 양식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막 시작점을 밟는 국가들이 가장 해야 할 것, 모방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주민 한 명이 제안했다. 그렇다면 윌레인의 양식도 넣어 보자고. 한달 전이었다면 그자는 등가죽이 벗겨질 때 까지 맞은 후 얼굴에 헝겁을 쓰고 호수로 버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만큼은 양측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약간 고양된 기분을 누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은 지금 얼마나 대단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그것을 해냈다. 근 4년간의 전쟁을 했던 자들이 그 문화를 공유하며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시시껄렁한 농담을 뱉어 가며, 서로 잘 통하지도 않는 대화를 하면서 화합을 만들어 갔다.
1시간의 제약을 두고 작업을 끝마치게 하기 위해서 파견되었던 주둔병들은, 어느새 3시간째 그들을 도우며 부르튼 손으로 거리를 장식해 나갔다.
그런 하루를 거쳐서 완성된 거리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일반 주민들과 병사들이 만든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누구도 그 투박한 거리 속에 있는 풍취까지 부정하지는 못했다.
소금부대가 맞이한 아침의 거리에는 그런 뒷이야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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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뭐야..."
도르베는 조금 당황한 듯 거리를 둘러 보았다. 별로 거리의 조잡함 따위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하룻밤만에, 가난한 마을에서 거창한 축제를 준비할 것 이라고는 생각조차 한 적 없었다.
오히려 정 반대에 가까운 문제였는데, 하룻밤만에 준비된 것 치고는 너무 많은 것이 장식되어 중구난방으로 난잡해 보였다.
"재밌게 됐는데? 보기 좋다."
아스타는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듯 웃으며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었다. 풀린 분위기에 그녀도 신이 나서 거리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녔다.
"...네 센스는 이상하다."
"뭐?"
"이리하의 선물을 좋아할 때 부터 알아봤다마는..."
도르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거리를 둘러보았다. 난잡하게 뒤섞인 여러가지 문화를 보며, 도르베는 어쩌면 이것이 새로 다가올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 풍경이 그가 만드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빅센마르크 사람과 윌레인 사람들이 이렇게 섞여 있으니 구분조차 잘 가지 않는다. 그러나 평소에 서로의 얼굴에 깔려 있던 피로와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순수한 화합.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도르베가 싸워온 이유일지도 모른다.
"도르베?"
"아, 미안하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머리를 몇 번인가 젓고서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맞은편에서 익숙한 여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얼라, 나와 주신 거예요?"
억양 없는 말투. 세라였다.
""...널 보러 나온 것은 아니다."
"까칠하시다니까. 알고 있어요."
세라는 다소 까칠한 도르베의 태도가 익숙한 건지 자연스럽게 넘겨받고서 아스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저녁에 대사관으로 찾아가도 된다는 게 진짜인가요, 아스타씨?"
"그럼! 누님이 우리 도와준 게 얼만데 당연하지!"
아스타는 힘차게 말하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항상 말하던 그 아들도 데리고 와도 돼! 변변찮은 음식은 없을 테지만, 평소에 먹는 짬밥보다는 훨씬 좋을껄?"
"하! 하하, 생각해 볼게요!"
세라는 가볍게 말하고서 손을 흔들었다. 지나쳐가는 그녀를 보며, 도르베는 약간의 의문을 품었다.
"왜?"
"아니, 별거 아니다. 거리나 계속 구경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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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챠! 씨-팔!"
기묘한 기합을 날리며 륑게가 공을 굴렸다. 공은 빙판 위를 비틀거리며 굴러 대다가 곧 목표에서 한참 빗나가며 멈췄다. 륑게는 욕지거리를 뱉어대며 가진 돈을 바구니에 던졌다.
팀 원생텀이 있는 곳은 작은 내기판이었다. 빅센마르크의 전통 노름으로 벌어지는 내기판에, 초보라는 핑계를 대고 몇 판 무료로 해보다가 재미를 들린 것이 실수였다. 륑게는 벌써 꽤 많은 돈을 탕진하고 있었다.
"야, 그만하고 다른 데도 좀 둘러보자..."
"잃은 만큼은 수복해야지...!"
"너 그 말만 다섯번째야..."
"잃은 걸 수복 못했으니까! 내가 씨발 같은 게임에서 8연패를 할 것 같아?!"
"존나게."
갤러한과 소니아는 그런 륑게를 구경하고 있었다. 릴로는 이미 내기판의 남자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어... 어! 야, 반숙!"
분한듯 얼굴을 찌푸리며 지갑을 뒤지던 륑게는, 곧 운 없게도 근처를 지나던 푸르투가를 발견해 불렀다. 푸르투가는 잠깐 눈을 감고 한숨을 내신 뒤 고개를 돌렸다.
"대체 여기서 뭐하는 거냐."
"야, 반숙! 돈 좀 빌려주라!"
""...뭐?"
"따서 갚을게!"
그에게 덤벼드는 륑게의 눈은 이미 정상인의 것이 아니었다. 푸르투가는 상황을 대충 파악하고 웃었다.
"뭔 상황인지 알겠구만..."
"야, 내 말 들리냐?"
"아. 미안하지만 돈은 못 빌려주겠어."
"뭐? 그러기냐?"
"진정해봐. 돈이 없는 거 아니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공에 천천히 다가갔다.
"내가 따주지."
그리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공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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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린은 방의 창문을 열어 두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창 밖으로 완성된 다리가 보였다. 그가 보기에는 꽤나 완성도가 높아 보였다.
얌전하게 담배를 피고 있으면 노크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재떨이에 담배를 꾸겨서 꺼낸 후 창 밖으로 연기를 빼낸 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갈게요-"
문을 열어보니, 뒤에 있던 것은 이리하였다.
"엽."
"어서오세요."
무슨 일이냐, 같은 멋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칼린은 웃으며 이리하를 방 안으로 들였다.
"축제, 참가할 생각 없는 거야?"
"네, 뭐... 별로 안 당기네요."
칼린은 웃으며 다시 담배를 한 개피 더 꺼냈다. 이리하는 그런 그를 위해 성냥을 꺼냈다.
칼린은 자신에게 성냥을 건내는 이리하를 바라보았다. 처음보는 옷. 그녀의 사복을 유심히 지켜봐왔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인지 더 신선해 보였다.
"옷, 이쁘네요."
"응? 아..."
이리하는 칼린의 말에 자신이 입은 옷을 내려다보았다. 깔끔하게 굴곡 없는 검은 롱 코트. 그녀는 가만히 그 옷을 내려다보다가 웃었다.
"고마워. 아끼는 옷이거든."
"놀러 가시려고 꺼내 입으셨나요?"
"뭐... 그러려고 했는데."
그녀는 가까이에 있던 의자에 앉으며 눈을 감았다.
"혼자서는 재미없을 것 같아서."
둘은 잠깐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날씨도 좋고, 둘 다 기분도 좋다. 칼린은 잠깐 가만히 이리하의 정갈한 모습을 즐기듯 눈에 담았다.
"이리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뭔데?"
"전에 이리하가 했던 말하고도 관련이 있어요."
칼린은 그대로 침대 위에 앉았다. 이리하가 관심이 가는 듯 담배를 꺼냈다. 그녀가 성냥을 하나 더 꺼내려 하자, 칼린이 그것을 막았다.
"가만히 있어요. 붙여 드릴테니까."
칼린은 그렇게 말하고서 불 붙은 담배 째로 이리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하얀 얼굴이 약간 상기되었다.
"이리하가 전에 말씀하셨죠. 저만이 이리하씨의 진짜 동료가 될 거라고."
약간 담배냄새가 섞인 그의 날숨이 가깝다. 이리하는 의도적으로 숨을 조금 참았다.
"제 나름대로 그게 무슨 뜻일지 생각해 봤었지만... 저는 너무 어리고 무지해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도르베씨에게 들었어요. 제가 기절했을 때 동료들을 설득했던 것이 이리하씨였다고."
그에게서는 미묘한 향기가 난다. 그 향은 정말 미묘한 것이라서, 의식하지 않으면 놓칠 것 같지만, 의식하면 달큰하게 머리속으로 파고들어온다.
"정말 고마워요. 어떤 방식으로든 갚고 싶어요. 정말 어떤 방법으로든."
담배끼리 가까워진다. 곧 그의 담배가 이리하의 담배 끝에 닿는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시면, 담배불이 옮겨붙는 소리가 차분히 방에 퍼진다.
"하지만... 저는 이리하씨가 원하는 동료같은 건 될 수 없어요."
가히 폭력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요염함 속에서 그 말은 선고처럼 울려 퍼진다. 마침내 담배에 완전히 불이 붙는다. 칼린은 천천히 이리하에게서 떨어진다.
"이기적이지만 어쩔 수 없는 걸요. 그러니까... 제게서 장기적인 무언가를 바라면서 도와 주시는 것이라면... 죄송하지만, 전 도와드릴 수 없어요."
지금의 칼린이 확실하게 정한 유일한 것. 그것은 그가 이 빌어먹을 세계를 최대한 빠르게 떠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누구에게도 빚을 만들어 두고 싶지 않았다.
칼린은 그녀가 분노할 줄 알았다. 적어도 아쉬움을 토로할 줄 알았다. 그러는 것이 당연했다. 생각해 보면 그녀에게 칼린은 참 많은 빚을 졌기 때문에.
그러나 이리하는 그 말에 웃었다.
"처음에는 말이지... 네가 궁금했어."
"네?"
"단순히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일지, 신념이 확고한 건지 궁금했어. 기억 나? 라무르마을에서 말이야."
칼린에게는 잊을 수 없는, 차라리 잊고 싶은 기억. 그는 대답대신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가 알았지. 내가 본 너는 신념도 육체도 강했지만... 동시에 너무 약했어. 한순간 네 무력과 정신력이 두려웠지만, 그 근본까지 보고 나니까 두려울 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어."
열린 창 밖으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평화롭게 늘어지는 소리. 칼타코에서 웃음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이다.
"행동하는 강한 선(善)이 상황을 바꿔. 너라면 이 세상의 총체적인 상황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너와 동료가 되려고 했어. 그런데 무리였던거야. 나로서는 널 강하게 만들 수 없어. 널 이런 시궁창같은 상황속에 무디게 만들 수 없었어. 나도 그 정도로 강하지 못했으니까."
거기서 부터 칼린은 이리하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만 관념적으로 어떤 말을 하고 있는 지 해석해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야, 정말 최근에 와서야, 관조해 보고 나서야 알았어. 내가 해야 했던 일. 그건 널 내 동료로 만드는 게 아니었다고."
거기까지 말하고서 그녀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뭔가를 회상하듯 반쯤 감은 눈에는 각오가 같이 담겨 있었다.
"내가 네 동료가 되야 했던 거야. 칼린, 네가 어떤 존재든... 난 네 선을 지지해."
그 말 한마디가 왜인지 칼린에게는 거대한 지지대가 되어준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