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여진(餘震)
라드는 칼린이 전화국으로 달려가는 것을 확인하고서 조용히 고개를 돌려 칼린의 방 쪽을 올려다보았다. 곧 그는 대사관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계단을 올라 칼린의 방 앞에 도달했다.
그는 문고리를 잡고 잠깐 숨을 죽였다. 만약 누군가에게 걸리면 이 순간을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적당히 변명할 거리를 떠올린 그는 더 망설이지 않고 칼린의 방에 들어갔다. 그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의 방은 창문이 열려 있었다. 문을 열자 마자 싸늘하게 식어 냉기를 뿜어내는 그 공간 속에서, 라드는 펄럭이는 커튼이 책상을 가렸기에 먼저 창문을 닫았다.
방은 깔끔했다. 그의 가방이 구석에 누워 있었고, 그것 뿐이었다. 침대에도 의자에도 책상에도 온기 따위는 없었다. 딱 잘라 말하자면 추웠다.
그는 먼저 침대 아래를 살펴보았다.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쓰레기 통은 비어 있었고, 창 틀 사이에도 숨은 공간은 없었다.
다음으로 뒤져 본 것은 가방이었다. 가방 안에는 담요조차 없었다. 방 만큼이나 삭막하게 비어 있는 그 안 쪽에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갈색의 자루였다.
들어올려서 확인해 보니 익숙한 것이었다. 상회에서 신선도를 유지해야 할 것이 있을 때 사용하는, 마도구의 일종이었다. 아주 귀한 것은 아니었다. 식품류를 취급하는 자라면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이 정도로 작은 것이라면 행상인들도 사용할 때가 있다. 잘나가는 떠돌이도 여유돈으로 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칼린이 들고 다닐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자루를 열어보니 빈 병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하나같이 빈 병들은 누가 햝아 내기라도 한 듯 투명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보기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라드는 거기서 그에게 가장 익숙한 냄새, 그렇기에 헷갈릴 수도 없는 냄새를 맡아냈다.
"...이거 봐라."
그는 입가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자루를 열자 마자 강하게 터져 나오는 그 냄새는 분명한 피 냄새였다. 빈 병에는 피가 담겨 있었으리라.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머리를 감쌌다. 그의 비밀이 뭔지 점점 감을 잡을 수 없게 되고 있었다. 그의 상냥함은 확실한 진짜다. 상냥함이라고 해야 할까, 그가 보기에 칼린의 자세는 광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어쩌면 칼린은 미친 자이며, 피를 마셔 대는 은밀한 성욕같은 것이라도 있는 걸까. 그 정도로 가벼운 문제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비어 있는 병들을 다시 돌아보며, 그는 칼린이 최근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것 때문일 것이라고 추리해냈다.
다음은 그가 어젯밤 흐느낀 원인을 찾아야 할 때다. 라드가 본 그는, 전문적인 기술은 없지만 꽤 치밀한 면이 있다. 어쩌면 이미 흔적을 전부 치워 버렸을 수도 있다.
먼저 뒤져 본 것은 사물함이었다. 완전히 비어 있었다. 의자 방석 밑도 찾아보았지만, 그런 곳에 뭔가 있을 리 없었다.
책장에 꽂여 있는 책들을 전부 뽑아 보았다. 그러나 애초에 4권밖에 꽂여 있지 않아 뒤의 벽이 그대로 보이는 책장에 뭔가를 숨길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소금부대가 온다고 해서 급하게 주문해서 들여온 책들. 도합 20권의 책은 핀과 도르베, 이리하, 칼린 네 명이서 전부 받아갔다.
칼린이 받아간 네 권의 책 중 한 권은 고전 소설이었고, 나머지 세 권은 마법에 관한 이론서였다. 그는 바닥에 내팽게 쳐진 그 책들을 보며 곤란한 듯 수염을 긁었다.
내팽게 쳐진 책을 들고, 그는 뒤통수를 긁으며 하나씩 그것들을 책장으로 꼽았다. 접혀 있는 흔적들로 그가 마법서를 얼마나 치밀하게 읽었는지 알 수 있었다. 뭔가 찾는 것이라도 있던 걸까. 참고할 건 없을지 그는 그 책을 열어 보았다.
유감스럽게도 별거 없는 내용으로 보였다. 그가 접은 것은 대체로 공간 이동 계열의 마법이었고, 시간이동 등의 허무맹랑한 마법의 계열 들에는 격렬하게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우주와 관련된 마법에도 관심이 있는 듯 했다. 일부 페이지에는 감정적으로 찢겨진 흔적들도 남아 있었다.
그는 책이 가진 물질적 가치를 잘 모르는 듯 했다. 그러나 그 외에 다른 것을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마지막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고전 소설을 들었을 때, 그는 이질감을 느꼈다. 아직 그것이 뭔지 제대로 눈치채지 못한 라드는 먼저 그 책을 관찰해 보았다.
접혀 있지 않았다. 마치 읽지도 않은 듯 옆면이 깔끔했다. 그러나 겉표지의 가죽이 접힌 것으로 보아 분명 펼쳐 보기는 했으리라. 이상한 것은 그것 만이 아니었다.
책이 너무 가벼웠다.
이정도 두께의 책이다. 이 무게는 말이 되지 않는다. 라드의 머리속에 한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그는 책의 맨 앞장을 펼쳐본다. 그리고 천천히 책장을 넘긴다. 한 장씩 빠르게 넘어가던 그 책은
"하... 젠장."
가운데가 파여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휴지가 우겨 들어가 있었다. 라드는 그 휴지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일지 알고 있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좀 큰데..."
휴지를 치우니, 그 아래에 있는 것은 그의 예상대로의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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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칼린, 잘 부탁한다."
"예. 걱정 마세요."
칼린은 배웅을 나온 동료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곧 마차가 자리를 뜨기 시작한다. 칼린은 멀어져 가는 칼타코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곧 다시 머리를 마차에 집어넣고 가면을 벗는다.
"음..."
그리고 라드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아무 일 안 생기면 좋겠네요. 그죠?"
"응?"
칼린이 지금 남의 상태를 자세히 볼 여유가 없어 놓친 것이지만, 지금 라드는 수상해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그가 본 것이 있었기에. 라드는 가만히 그런 칼린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연다.
"아. 그렇군. 아무 일도 안 일어나야 할 텐데 말이다."
"빨리 일 끝내고 참고 있던 걸 풀어야죠."
칼린은 웃으며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라드는 지금 그 미소를 곧이 곧대로 볼 수 없다.
칼린이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송곳니가 남아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
그가 참고 있는 게 뭐지?
내 앞에 있는 건 대체 뭐지?
"라드씨?"
"그렇군. 네 말이 맞아."
라드는 대충 대답하고서 머리를 숙였다. 더 깊숙히 알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접한 정보들 만으로 이미 충분히 혼란스러웠고, 영주에게서 탈출하기에는 충분한 것 같았다.
"아무튼 모든지 빨리 끝내 버리고 싶단 말이지."
"이 곳 주민 분들은 우리가 떠나가도 굳건하게 사시겠죠.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아요."
다시 웃으며 말하는 칼린. 방금 드러난 이빨에는 확실하게 빈자리가 없었다.
책에 들어있던 송곳니에 조금 달라붙은 살점의 상태, 피가 굳은 정도를 보았을 때, 그 이빨은 확실하게 전날 저녁에 뽑힌 것이었다.
칼린의 저 헤실대는 웃음이 다르게 보인다. 눈을 사로잡는 매혹적인 얼굴이 이제 요사스럽게 보인다.
저건 대체 뭐하는 존재인가.
"...칼린. 미안하지만 담배를 안 피니까 너무 피곤하군. 조금 자도 될까?"
"그럼요, 라드씨. 도착하면 제가 깨워 드릴게요."
순박한 표정으로 즉답하는 칼린을 보고 라드는 몸을 뒤로 눕힌다. 진짜로 잘 생각은 없다. 그는 양 팔의 밧줄을 조금 늘어 트리고 몸이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긴장시켜 둔다.
자는 척이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자신의 경계를 내비쳐 버릴 것 같았다. 물론 알고 있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가 갑자기 라드를 덮치거나 공격할 일은 없다.
알고있다. 그는 좋은 놈이다.
그러나 좋은 '사람'은 아니다. 이제는 그것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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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분 정도 지났을까, 마차는 곧 대기하고 있는 사람 셋을 발견했다. 두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으로, 셋 다 중년의 끝을 스치는 정도의 나이는 되어 보였다.
그러나 마차가 가까이 다가가자, 나무의 뒤쪽으로 병사들이 몇명 나오기 시작했다. 전부 세어보니 스무 명 정도였다. 마부가 경계를 담고 마차를 멈췄고, 칼린은 의문을 가지며 가면을 들었다.
"라드씨, 일어나세요. 도착한 것 같은데..."
"... 같은데?"
"작은 문제가 있을지도?"
칼린은 그렇게 말하고서 마차에서 먼저 나왔다. 라드는 칼린을 뒤따라 나가며 약간의 거리를 두고 상황을 지켜 보기로 했다.
"아... 빅센마르크의 대사분들이 맞으신 가요?"
칼린이 조심스럽게 윌레인 어로 질문하자, 대사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던 여성이 앞으로 나서 답했다.
"그쪽이 우리의 안내원이요?"
거친 말투. 대사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그러나 칼린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맞습니다. 칼타코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우리 영토였던 곳을 못 찾을 까봐 부른 건 아니겠지. 악수는 됐소."
그 중년 대사는 억양이 심한 발음으로 그렇게 칼린의 악수를 쳐내고서 조용히 상대를 파악해 보았다. 정장 위에 가죽코트를 걸치고 있는, 가면을 쓴 꺽다리. 파악하기 힘든 외형이었지만 성격이 유한 편인 듯 했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는 더할 나위 없다.
"그래서... 뒤에 계신 병사분들은? 이쪽까지 오실 때 호위를 맡으신 분들인가요?"
"...그렇소."
"아, 그런가요... 다행이다, 전 또 무슨 일이 날 줄 알았지 뭐에요."
칼린은 그렇게 말하며 가면 뒤로 몇 번인가 웃음소리를 내다가, 마차로 걸어가며 문을 열었다.
"자, 그럼..."
대사들은 서로 눈치를 본 뒤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들 뒤에 있던 병사들도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라, 잠깐만요. 대사님들 외에는 탑승 불가에요."
칼린이 그것을 막아서자, 선두에 있던 병사가 칼린을 거칠게 밀어냈다. 칼린은 얼떨떨한 듯 뒤로 몇 걸음인가 밀려나가 그들을 쳐다보았다.
"빅센마르크 국민의 몸은 빅센마르크 병사가 지키는 것이 당연지사. 칼타코는 이제 여러분의 땅입니다. 당연히 우리 몸을 지킬 병사가 필요해요."
대사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했다. 라드가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형씨, 남의 나라 군사가 자기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침략'이라 부르는 거요. 대사라는 자가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라드! 정중하게 대해야죠!"
칼린은 그런 라드를 나무라며 다시 병사들의 앞으로 섰다.
"죄송합니다만, 역시 병사분들은 탑승 하실 수 없어요. 방금 여기 계신 라드씨의 말씀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고, 이 정도로 많은 사람을 마차에 태울수도 없는걸요."
"걱정 마시길. 들어 갈 수 있을 정도만 데리고 갈 테니. 일단 최대한 많이 태워 보렵니다."
대사는 뜻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그들의 임무는 여기서부터였다. 기싸움에서 밀리는 순간 점점 더 잃는 것이 많이 생긴다. 칼린은 상당히 곤란한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죄송합니다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두의 병사가 다시 한 번 칼린을 밀어냈다. 칼린은 또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밀려났다.
"우리 병사들이 조금 거친 면이 있소. 이해해 주시길. 아직 전쟁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말이오."
라드는 그 광경을 보며 어떻게 일을 정리해야 할 지 생각해 보고 있었다. 가장 무난한 선택지는 타협을 보고 저들의 병사와 좁은 마차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의 지휘관은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초반 기싸움에서 밀리는 일이 될 테니까. 하지만 상대 측이 이렇게 강경하다면, 정중하게 저들을 멈출 방법은 없다. 그래서 그는 칼린이 하는 것을 보고 선택하기로 했다.
칼린은 어색하게 서 있었다. 밀려난 자세에서 그대로, 그는 심호흡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몇 번인가 몸을 들썩이던 그는 다시 멀쩡히 일어났다. 그리고 병사의 앞으로 다시 향했다.
"죄송합니다만-"
이번에도 선두의 병사는 칼린을 밀어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것이 닿는 일은 없었다. 칼린이 하던 말을 멈추고 그 손목을 붙잡았다.
"한번만 더 저를 밀어내신다면 적대하는 것으로 판단하겠습니다."
방금 전과는 다른 차갑게 깔린 목소리. 분위기가 일변했다. 마차에 타려던 대사들의 발걸음이 멈췄고, 병사들은 즉각적으로 무기를 잡았다. 칼린은 그 병사의 손목을 잡은 상태로, 끊어졌던 말을 뒤이었다.
"제가 받은 명령은 비무장의 대사분들을 모셔 가는 겁니다. 병력 동반 허용같은 것은 들은 적도 없습니다."
차분하고 낮게 깔린 경고하는 목소리. 손목을 잡힌 병사는 그의 손을 풀어보려고 꽤 거칠게 팔을 흔들어 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중하게 대해야 할 것은 대사분들 뿐입니다. 병사 여러분이 아닙니다."
잡힌 팔에 천천히 압력이 들어갔다. 그 팔을 잡힌 병사는 서서히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무기를 뽑았다. 그리고-
"그만."
대사가 먼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천천히 들어올린 양 손을 내리며 한숨을 내신 뒤 칼린을 다시 바라 보았다.
저건 건드리면 안된다. 그녀의 재책정 결과는 그렇게 나왔다.
"그 쪽의 뜻을 따르겠소. 그 병사를 놓아 주시오."
"하지만 대사님!"
"답하지 마라."
그녀는 짧게 말하고서 마차에 올라탔다. 나머지 대사들도 굳은 표정으로 마차에 들어갔다. 칼린은 쥐고 있는 손에 천천히 힘을 풀다가, 곧 완전히 손을 놓고서 발걸음을 마차로 향했다.
"잘 풀렸네요, 라드씨."
그리고 묘한 표정으로 그를 관찰하고 있던 라드를 향해 작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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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은 편지지와 등불을 붙잡고 땀을 흘려 대고 있었다. 슬슬 대사들이 모일 시간이다. 완전히 어두워진 풍경 속에서, 달빛에 비치는 눈이 횃불 없이도 어느 정도 시야를 확보하게 해주었다.
그녀의 병력들은 아무 문제없이 외부 순찰을 돌고 있었다. 전원 갑옷을 입고 완전한 무장을 끝낸 상황이었다. 그러나 순조로운 상황과는 달리 그녀는 지금 상당히 곤란한 상태였다.
"야! 너 이리 와봐."
"뭡니까."
적당히 자신의 병사 하나를 불러 데려온 기욤은, 편지지를 바닥에 내려 놓고 그 병사에게 질문했다.
"'강녕'을 어떻게 쓰냐?"
병사는 얼척이 없다는 듯 기욤을 쳐다보다가, 곧 근처에서 나뭇가지를 가져왔다.
"대장님, 제발 공부 좀 하십쇼..."
"아니... 갑자기 쓰려고 하니까 안 떠올라서 그런 거거든?"
"안 쓰려던 단어를 갑자기 쓰려고 하니까 바로바로 안 나오는 겁니다. 무리하지 말고 대장님 평소 말투대로 쓰십쇼."
"병신아, 네가 뭘 아냐?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허세도 부리고 싶고 그런거야."
기욤은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며 병사가 들고 온 나뭇가지를 바라본다. 그 병사는 곧 눈 위에 나뭇가지로 '경녕' 이라고 쓴다.
"이렇게 쓰면 됩니다."
"고맙다, 야."
"대장님, 신성한 근무시간에 뭐합니까?"
병사 하나가 더 다가온다. 기욤은 편지지에 '경녕하심가요' 라고 삐뚤하게 쓰고 있다.
"그 뭐냐, 편지쓰는데 '강녕'을 어떻게 쓰는 지 기억이 안 나더라고. 그래서 얘 불러서 물어봤지."
"뭐야, 분명 그냥 짬질부리는 줄 알았습니다. 남편 분 드리려고 쓰시는 겁니까?"
"그럼 병신아, 내가 사령관님한테 편지를 보내겠냐?"
비웃으며 다시 펜을 잡은 기욤을 보고, 그녀의 부하는 가만히 편지를 읽다가 손가락으로 글자를 가리켰다.
"아, '강녕' 그렇게 쓰는 거 아닙니다."
"뭐? 야 너 뒤질래?"
"엥? 너가 한번 써봐."
그 병사는 나뭇가지를 건내 받아 바닥에 '강녕' 이라고 쓴다.
"저 이래 뵈도 학교도 나왔습니다. 강녕은 이렇게 쓰는 겁니다."
"아 씨발! 종이도 없는데! 개새꺄 너가 사 와!"
"악! 대장님! 믿을 사람을 잘 고르셨어야지 말입니다!"
기욤은 자신을 잘못 가르친 병사를 후들겼다. 그리고 자신이 썼던 글 위로 몇 번이고 가로줄을 그었다.
탕
"야, 넌 내 옆에서 편지 쓰는 거나 도와."
"저야 좋긴 한데... 왜 갑자기 편지를 쓰십니까?"
"곧 그이 생일이야. 지금 보내면 생일 즈음에 도착할 것 같아서. 선물이랑 같이 보내려고."
"... 혹시나 해서 묻는데, 선물은 뭡니까?"
"이거."
기욤은 주머니를 뒤져보더니, 작은 반지를 꺼냈다. 빅센마르크의 동전으로 만든 반지였다.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보기에 이쁜 것은 아니었다.
"...진짜, 대장님은 남편 분 한테 잘하십쇼."
"그게 무슨 의미냐?"
"무슨 의미기는, 그냥... 하... 그냥 잘하십쇼, 대장님..."
그 병사는 눈을 가리며 그렇게 말하고서 그녀가 쓰고 있는 편지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대장님 남편은 어떤 분이십니까?"
"뭐야, 본 적 없냐? 귀족 출신인데, 피부도 하얗고 잘생겼지. 목소리도 딱-, 중저음에-"
"하! 하! 내 남편이 좀 생겼지!"
"대장님 칭찬한 거 아닙니다. 그리고 아무데나 비유법 막 쓰지 좀 마십쇼. 손가락이 곰 눈깔 같다는 게 뭔 개소립니까?"
"아니, 그 정도로 투명하게 이쁘다 이거지... 너가 그렇게 말하니까 병신같이 들리잖아."
탕 탕
"병신같아서 그런 겁니다... 이 부분도 지우십쇼."
"쓰기 전에 말해주지, 씨발롬."
기욤은 썼던 부분위로 다시 줄을 긋는다. 몇 번인가 더 끄적이니, 곧 편지는 전부 쓸 수 있었다.
"근데 편지지는 있습니까?"
"센스 없는 새끼들. 유행하는 게 뭔지도 모르니까 너네한테 연인이 없는 거다."
"하- 이거 글 알려주지 말 걸 그랬네."
투덜대는 병사를 두고 기욤은 편지 가운데에 그녀가 만든 반지를 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편지로 감싸서 줄로 묶어냈다.
"...뭔 짓을 하는 겁니까?"
"포장 끝."
"와, 씨발... 진짜 남편 분 한테 매일 절하십쇼."
"야, 또 뭔데!"
"이딴 게 유행하면 제가 왼손 자릅니다. 우체부도 안 받아 줄 것 같구만, 무슨..."
탕 탕 탕
"주소 적혀 있고 군대 인장까지 있는데 최우선순위로 배달가지! 안 받아 주는 건 뭔데!"
"그럼 우체부 출신한테 물어봅시다. 전 이번주에 제 짬에서 나오는 고기 전부 다 겁니다."
탕
"난 꽁쳐 둔 술 한 병 다 건다."
"오케이. 저기 저쪽에 정찰중인 새끼가 제 후임인데, 우체국 출신입니다. 야! 잠깐 와 봐!"
그들의 정면쪽을 타이밍 좋게 지나치던 병사가 그 쪽으로 다가간다.
"이딴 걸 우체국에서 받아주냐?"
"...주소 적혀 있어요?"
"있긴 해."
탕
"그럼 이것도 받아줘요."
"어? 진짜?"
"네. 친구 말로는 요즘 유행 한다던데..."
탕
"왼손 대라, 병신아!"
"대장님. 농담이었습니다. 역시 대장님은 센스가 좋으십니다."
탕
기욤은 하려던 말을 멈춘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본다.
"이 씨발, 이거 계속 뭔소리냐?"
작게 작게 들려오는 폭음. 처음에는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소리였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대사를 위한 식사 중에 옥수수 튀김이라도 있는 걸까 생각했다. 큰 일이 있다면 보고가 왔을 테니까. 그러나 그 폭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보고 오겠습니다."
그녀의 편지를 봐주던 병사가 몸을 일으켰다. 풀어져 있던 병사들이 스위치가 바뀐 듯 준비를 한다. 기욤은 자리에서 일어나 투구를 다시 맨다. 그리고 그녀가 쓰던 편지를 바닥에 내려 놓는다.
"대장! 대장!"
저 멀리, 다급하게 다가오는 자가 한 명. 확실한 그녀의 병사였다. 그는 무릎에 부상을 입고 있었다.
"저 새끼들 이상한 무기를-"
탕
근처 숲에서 들려온, 지금까지 들려온 소리 중 가장 가까이에서 들린 폭음. 곧 그 부상병은 투구까지 관통 당하여, 뇌수를 흩뿌리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기욤은 스위치를 돌렸다. 그녀의 의식은 즉시 3년 전 전장에서의 그것으로 돌아왔다.
"실제상황! 공격받고 있다! 즉각적으로 대처하라!"
이 땅에서, 이 세계 최초로 총기가 사용된 전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