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8화 〉에필로그 (128/164)



〈 128화 〉에필로그

이바노프의 선포가 떨어졌을 때.  전화가 끊어지고 전화국에는 무거운 기류가 흘렀다. 전화국 공무원 다프네는 눈 앞에 있는 세개의 전화를 보며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일한지 3개월. 그녀의 선배가 급한 일이 있다고  하루 맡게 된 야간근무였다. 야간에 움직이는 일들은 보통 더 비상인 일들이 많다지만, 3개월짜리 신입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소식이었다. 영주들의 침묵속에서 다프네는 이빨이 부딪히는 소리를 막아 내기 위해 입 안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가장 먼저 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라티아 영주 미로코와 연결된 전화기였다.

'아직 다른 전화들은 연결되어 있습니까?'
그녀 특유의 모든 게 성가신 듯한 목소리. 평소에도 그런 신경질적인 말투를 사용했지만, 그것을모르는 다프네에게는 몸이 튀어 오를 정도로 두려운 것이었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조용히 심호흡 하며 말투를 유지했다. 여기서 실수하면 죽을 것이다. 그녀의 머리속에는 이미 그렇게 생각이 박혀 있었다.


'... 전화원씨. 이름이 뭡니까.'
"... 다프네입니다."
사갈의 영주 카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하자, 다프네는 과호흡으로 혼절할 것 같은 것을 참아내며 답한다.


'그렇군요... 다프네, 지금 상황이 많이 부담될 것 같습니다. 맞나요?'
"저, 전혀 아닙니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계십니다. 조금 도와드리죠. 앞으로 15분간,  전화들을 켜 두고 다른 곳으로 나가 계십시요. 그리고 이 사항에 대한 것을 절대 타인에게 말하지 마세요. 15분  이 자리로 조용히 돌아왔을 때, 우리가 아직도 대화 중이라면 다시 15분 더 나가 계십시요.'
정중하고 부드럽다. 그러나 압박감은 놓치지 않았다. 다프네는 지인들에게 눈치가 없다는 평을 듣고 살아왔지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얼간이는 아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조심스럽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바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밀려오는 구토감을 참을  없었다.

'... 자, 그러면 우리 끼리 이 사안에 대해 이야기를 해 봅시다. 요나경,  자리에 계신 가요?'
'... 있습니다.'
주도권은 카뮈가 잡았다. 그는 목을 한번 가다듬고 부드럽게 말했다.


'저는 칼타코가 독립해도 별로 아쉽지 않습니다. 저쪽에서 황녀를 건내 준다고 하면, 오히려 그게 이득일  같군요.'
'농담하지 마십시요, 카뮈 경. 그 땅을 잃으면 라티아의 손해가 어느 정도일지 모르시고 하신 말씀은 아니잖습니까.'
마정석의 최대 수출지, 사갈. 그 곳은 칼타코라는 땅에서 얻는 이점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기계공학으로 발전을 이루고 있는 라티아로서는, 군수공장과 시설을 설립할 계획이던 칼타코 영지를 잃으면 손해가 크다. 미로코는 뒤로 물러날  없는 게임이었다.

'비행선을 동원하죠. 어차피 전부 죽여버려야 할 텐데 제가 검을 잡겠습니다.'
'국가 위신을 생각하세요.'
'멀쩡히 손에 넣었던 영지를 독립시키는 것은 국가 위신에 맞습니까?  저들과 타협 볼 생각이 없습니다.'
그레서 미로코의 태도는 강경했다. 평행선이 지속된다. 선택은 요나에 의해 결정되리라.

'요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우리 셋이서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8영주를 전부 모으고 말하거나, 국왕저하에게 상황 전달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셋만 연결된 동안 미리 방향을 정해 놓자는 겁니다.'
요나도 카뮈의 속내를 읽어냈다. 셋이서 먼저 회의나 여론의 흐름을 잡아 두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요나는 알고 있다.  회의는 전혀 쓰잘데기 없을 것이라는  안다.

'그렇다면 감히 말씀드리는데, 어떤 방침도 결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두시면 됩니다.'
'... 뭐라구요?'
'저들은 내일 오전 9시까지 버틸 수 없을 겁니다.'
잠깐의 정적. 확답으로 나온 그 말에, 나머지 두 영주의 머리가 새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먼저 입을 연 것은, 그 태도에 분노한 미로코였다.

'거만하구나, 요나. 이 사안에 걸린 것이 무엇인지 알고도 그런 말을 하다니. 네 부하를 믿는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수에 맞지 않는 만용을 부리는구나.'
'만용이 아닙니다. 사실이죠.'
갑작스러운 반말에도 요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미로코는 태도를 바꾸지 않는 요나에게 더 화가나 이를 물었다.

'네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나?'
이 정도 사안이다.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하는 것은 8영주 실격이다. 책임을 진다고 한다면- 8영주라 해도 가벼운 것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요나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제 귀족의 이름과 목숨을 걸겠습니다.'
아무도 답할 수 없었다. 요나는 자칫 가볍게 들린  말에 목숨과 이름을 얹었다.


이제 그 말은 그 어떤 합리적인 예상보다 무거워졌다.

#

일주일이 흘렀다.

전화국 안에 있던 자들은 전부 죽었다. 납치당했던 대사부터, 황녀까지.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윌레인측은 칼타코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들을 전부 잃었다. 소금부대에서는 아스타를 잃었다.


전화국의 상황을 확인한 자는, 아스타가 실제로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칼타코 현장을 다시 찾아간 칼린이었다. 그는 전화국 내부를 조사하면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했는데, 여기저기로 이어진 지하통로와, 외부 지원이 있었다는 명확한 흔적. 그리고 역십자였다.

이에 8영주들은 칼타코가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 외부세력을 끌어들였고,   하나는 비나흐 열차테러사건의 혐의가 있는 조직이며, 조직끼리의 내분으로 인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렇게 결론이 났다.

빠르면 오늘, 늦어도 내일 저녁에는 소금부대가 벨카에 도착한다. 아스타의 시체는 회수할 수 없었다. 너무 심하게 훼손되어 가져 올 수 없었다고 한다.


갤러한은 기절한 다음날 아침 바로 깨어났다. 도르베는 깨어났었으나, 아스타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다시 기절했다. 아직 일어나지 못했다.


마레의 작업은 빨랐다. 그가 퍼트린 소식지의 내용은 대충 아래와 같다.


'칼타코 주민들은 외부의 지원을 받으며 땅굴을 만들었고, 그걸로 소금부대를 기습. 소금부대는 굴하지 않고  10명으로 농성전을 벌였으며, 그 결과로 아스타가 장렬히 사망.


그 기백에 기죽은 칼타코 놈들은 전화국으로 도망쳐 계획보다 섣부르게 협상을 시도, 그러나 밖에서 여전히 저항중인 소금부대에 대한 압박감과, 서로의 욕망을 양보해내지 못하고 자멸.

용맹한 국가의 영웅, 아스타 라진에게 축복을.'

칼타코는 독립에 실패했다. 작전에 참여하지 않은 일반 주민들의 처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곳의 얼음이 녹는 일은 없다.

소금부대의 네번째 임무. 칼타코와의 분쟁조절. 아스타 라진의 사망.


임무 성공.


#

드디어 그 날이 왔다. 요나는 정복으로 갈아입고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흠잡을 데 없다. 그래. 오늘 같은 날에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안되겠지.


곧 그녀의 소금부대가 도착한다. 순직한 군인에게는 제대로  예우를. 칼린을 제외한 부대원따위 어찌되든 좋았지만, 군인으로서 갖춰야  예까지 잊지는 않았다. 아스타 라진. 그녀에 대한 묵념을 대충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죽음까지 자신의 패로 사용할 준비도 되어 있었다.

성을 나선다. 거리는 축제분위기를 자제하라고 명했다. 다가오는 부대원들을 환영할 준비는 되어 있지만, 모든 영민들은 상복을 입고 있다. 환호도, 축포도 없을 것이다. 엄숙한 침묵 아래에서 저들을 반길 것이다.

거리에 깔린 융단의 양 옆으로 병사들이 검을 들어 올린다. 마차가 들어온다. 그 누구도 손을 빼서 인사하지 않는다. 의아해하는 아이들을 부모들이 필사적으로 막아낸다. 조용히 다가오는 마차를 보며, 요나는 당장 달려 가고픈 마음을 참는다.

마차에서 한 사람씩 내리기 시작한다. 하나같이 어딘가를 절어 대며, 패잔병과 같은 표정으로 나오고 있다. 남은 대사 두명까지 나오고 나서야,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도르베를 등에 업고 나온 것은.


아아, 칼린. 너로구나.

#


축사도, 축제도 생략되었다. 애도의 분위기 아래, 도르베는 바로 대사들과 함께 왕도로 옮겨졌다. 그는 왕도의 병원에서 치료받게 될 것이다. 상대적으로 부상이 심한 륑게도 그를 따라 갔다.

다른 전원, 너나 할 것 없이 그들은 조용히 흩어졌다. 모두가 자신들이 머무는 여관으로 이동하는 것을 확인하고서, 요나는 칼린의 어깨를 잡고 성으로 이동했다. 칼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나는 칼린에게 옷을 갈아입고 식사에 참가하기를 권유했다. 반정도 강요하니, 칼린은 어쩔  없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칼린과 요나, 둘만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식탁에서 둘만이 어색하게 식기를 잘그락대고 있는  상황의 전말이다.


"먹거라. 구경만 하지 말고."
"...요나, 저는-"
"먹으라고 했다."
그 말에야 칼린은 마지 못해 음식을 집는다. 샐러드에 겨우 포크를 꽂아 넣는 그를 보며, 요나는 말했다.

"... 동료의 죽음은 괴롭지. 몰라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묵묵히 식사를 계속했다. 명백하게 호화로워진 식탁. 하지만 칼린은 그런것을 눈치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먼저 입을  것은 칼린이었다.


"요나."
"말하거라."
"제가 전부 죽였어요."
"알고 있다."
"저한테 코트를 만들어 주신 분부터, 제게 먼저 말 걸어준 사람들. 음식을 갖다 준 사람. 감사하다고 그 척박한 땅에서는 보기도 힘든 꽃을 따다 주던 사람들. 전부 죽였어요."
요나는 그제서야 들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고 칼린을 돌아보았다.

"칼린-"
"저를 봐요, 요나."
칼린이 요나와 눈을 마주했다. 금방  것같은 눈을 하고 있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는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지만 웃음은 아니다.

"그러고도 식사를 하고 있어요. 함께 식사했던 사람들까지 죽여 놓고서 요나와 식탁을 함께 쓰고 있어요."
건조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의 눈은 한껏 떨리지만 눈물이 흘러나오지는 않는다.


"저 눈물이 안나요. 전 이제 정말로 괴물이 되어 버렸어요."
그는 다시 시야를 돌린다. 요나의 눈을 피하듯 식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곧 고개를 떨군다.


"저를 돌려 보내주세요..."
요나의 몸이 크게 주춤한다. 그를 향해 뻗던 손이 멈춘다. 눈가가 조금 일그러지지만, 그에게 윽박지르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요나는 그저 몸을 떠는 칼린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칼린. 미안하구나. 네게 군인의 방식을 가르치려 했군."
곧 요나는 칼린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몇 번인가 그 감촉에 집중하며, 그녀는 상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식사는 일렀을지도 모르지. 들어가 쉬거라. 일단 조금  두거라..."
"... 죄송해요, 요나."
"아니다. 괜찮아."
칼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방을 향해 비틀거리며 돌아갔다. 요나는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시야를 벗어나자, 식기를 집어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그저 하염없이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음식을 곱씹었다.

그녀의 손에 집혀 있는 식기가 우그러지고 있는 것조차 모르고 그저 하염없이 씹었다.


#


식사가 끝나고 요나는 바로 마차를 향해 발을 옮겼다. 향하는 곳은 왕도였다.


말 6마리가 끄는 대형마차. 왕도까지 가는 데에는 2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녀는 정보국에 도착해 혐오스러운  그 건물을 노려보았다. 이제 15시. 아직 '정보추출 활동'이 한참일 시간이다.


익숙해지지 않는 축축한 복도를 지나고,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격리실들을 지나치면, 미쉘의 심문실이 보인다. 요나는 아무 말없이  문을 발로 차서 열어낸다. 안쪽에 걸려있던 자물쇠가 부서지며 문이 열린다.


안에서는 비릿한 냄새가 나고 있다. 어딘가 비릿하고 역겨운 냄새와 습기가 불쾌하게 요나를 덮어온다. 그녀는 코를 살짝 가리며 눈가를 찌푸린다. 곧 그녀의 옆으로 숫퇘지 한 마리가 깜짝 놀랐는지 부서진 문을 통해 달려 나온다.


요나는 도망치는 숫퇘지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려 심문관을 노려본다. 심문관은 잠깐 머리를 싸매다가, 곧 장갑을 벗으며 요나에게 다가간다.

"요나경. 미리 말씀은 해주시고 와주십시요."
"... 바빴나보군요."
"무슨 소식을 바라고 오신 거라면 유감입니다만 아직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
제대로 답하지 않고 얼굴을 찌푸리는 심문관. 요나는 그의 뒤를 슬쩍 본다. 미쉘이 바짝 마른 몰골을 하고서 목마에 매달려 있다. 팔다리를 목마의 배에 묶여 엎드린 자세를 하고서. 요나도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는 예상이 가능했다.

"... 고생하는군."
"아무튼 돌아가 주십시요. 특별한 용무가 있는  아니라면..."
"미쉘에게 목욕을 시켜 주십시요."
요나는 불쾌감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심문관의 가면 뒤로 눈이 커지는 것이 보였다.


"...설마."
"목욕시키고 꺼내 주십시요. 전 나가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요나는 분노를 숨기지 않은 발걸음으로 심문실에서 등을 돌렸다. 심문관이 어벙하게 서 있는 사이, 미쉘은 작게 미소를 흘렸다.

#

요나와 미쉘은 마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저 침묵 속에서, 마차는 빠르게 벨카를 향해 달렸다.

지나치게 흔들리는 마차는 가혹하게 고문당한 미쉘의 속을 저리게 쑤셔 댔다. 하지만 그녀는 터져 나오는 구역질과 함께 웃음을 참아내고 있었다. 이 정도 괴로움은, 다음에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는 괴로움에 무너지지 않는다. 그녀의 품위, 그녀의 독기는 그렇게 약한 것이 아니다.

마차가 벨카의 안으로 진입하자 요나가 작게 입을 열었다.


"... 오늘은 안된다. 칼린이 많이 괴로워. 유감이지만-"
"...오늘, 받아 가야겠습니다..."
미쉘의 목소리는 작고 떨렸지만 확실했다. 죽어가는 목소리로도 그 패기는 죽지 않았었다. 요나는 불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미쉘을 쳐다보다가, 곧 고개를 돌렸다.


요나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미쉘은 비틀대면서 마차에서 나오다가 넘어졌다. 요나가 혀를 차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그녀는 웃음을 머금고 기어서 두 다리로 서려고 했다. 그러나 머리가 올라오자 갑작스레 올라오는 구토감에 바닥에 토를 쏟아냈다.

"도와드리지."
증오가 담긴 목소리. 하지만 그 태도에 비해 하는 행동과 말은 상냥하려 애쓰고 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미쉘은 알고 있다. 이긴 것은 미쉘이다. 오로지 분노와 실망감 따위만을 보이려고 하지만, 미쉘은  수 있다. 그녀의 마음속 깊이 있는 '뭔가'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녀는 끈덕지게 일어났다. 토를 한번 하고 나니 차라리 머리가 가볍다. 다가오는 요나를 밀쳐내고 스스로 일어난다. 어거지로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이니, 요나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진다. 그래. 그거면 된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요나를 앞장선다.


"마지막 제안이다. 다른 걸로 요구해라. 가능한 모든 것을 해주마. 불가능한 것이라도 어느 정도 재고하겠다."
"... 제 생각은 바뀌지 않아요, 시궁쥐 요나..."
요나가 다시 입을 다문다. 앞장서던 미쉘은, 요나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이  것을 믿지 못하고 동공을 벌렸다.

"무슨-"
"제 추태가 보고 싶었던 것이라면 이걸로 만족해 주십시요."
요나. 철혈의 요나. 전차 요나. 그녀를 항상 시궁쥐라고 부르며 조롱하던 미쉘이었지만, 그녀의 긍지는 알고 있다. 그녀는 포승줄로 묶어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 그녀의 무릎은 오직 왕을 위한 것이다.

그런 그녀가, 지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죄인신분의 자신을 향해 경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 간청 드립니다. 부디. 부디 요구사항을 바꿔 주십시요."
미쉘은 처음에 자신의 눈을 의심한다. 환각 마법이 아닌지 확인해 본다.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은, 한껏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요나. 아무리 봐도 그것이다. 곧 그녀는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이 헛웃음만으로도 폐가 아프다. 그러나, 그러나 참을  없다. 곧 그녀는 몸이 찢어질 것 같은 아픔을 감당하면서, 참을  없어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요나! 진심입니까!"
그녀는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요나를 내려다보았다. 이 승리감. 이것이 필요했다. 나의 종자, 나의 영지, 나의 명예. 모든 것을 가져간 그 년이 지금 자신의 앞에 몸을 웅크리고 있다. 간절히 빌어대고 있다.

"이 얼마나 꼴사나운 추태! 당신 같은 게 8영주라니! 윌레인은 망국의 길을 걷고 있는 겁니까!"
그 모든 모욕을 감내하며 요나는 머리를 들어올리지 않는다. 미쉘은 천천히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인다. 그리고 웃음을 참으며 그녀를 내려다본다.


"전장을 전전하던 계집이, 처음으로 사랑하는게 생겨 버린 건가. 그게 약점이 될 줄은 몰랐겠지요. 그저 헌신적으로 던져보려던 거겠지. 당신의 종자도 지금 당신을 보면 환멸을 느낄 겁니다!"
"어찌되든 좋습니다."
"하하하! 대답조차 걸작이네요!"
미쉘은 한참을  웃다가, 눈물을 닦아내며 찢어질 듯 웃었다.

"하지만 싫습니다."
움츠린 요나의 몸이 크게 튀는 것이 보인다. 미쉘은 지금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고고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솔직히 실망스럽군요, 요나. 그  시간 동안, 생각했다고 나온 계획이 그겁니까? 진심으로 사죄? 하하하! 당신의 명예... 그건 챙겨 가야지. 하지만 그걸로 끝나지 않아요."
그녀의 발걸음에, 비틀거리는 것이 사라진다. 다시 원래의 고고한 발걸음이 돌아온다. 기품이 회복되는 듯, 난장판에 엉망이었던 미쉘의 모습에 다시 요염함이 깃든다.


"당신과 당신의 종자. 모든 것을 망가트리겠습니다! 8영주의 자리를 즐기시죠, 요나... 당신이 끔찍하게도 아끼는 그 종자를 짓밟고 오를  자리를요!"
미쉘은 그렇게 말하고 발걸음을 바쁘게 했다. 천천히 뒤에서 요나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 최고다. 최고로 좋은 기분이다. 정신이 점점 맑아져 온다.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이 유일한 아쉬움이다. 안타까울 다름이다. 이 장면을 모두가 봤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없다?

미쉘은 이제서야 느껴지는 위화감에 주변을 둘러본다. 근위병도, 주민도 없다. 마차도 어느샌가 떠났다. 지금 이 자리에는, 요나와 미쉘.  뿐이다.

"... 거절인가."
요나는 나즈막하게 혼잣말을 하며 발을 옮긴다. 서서히 미쉘에게 다가간다.

"방금 것은 참회였다. 나 스스로의 오만으로 만들어진 사태였기에.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마지막 시도이자, 오만한 자신에게 주는 벌이었다."
"자, 잠깐-"
미쉘의 표정이 급변한다. 어두운 거리에서, 요나의 검이 푸르게 빛나며 뽑힌다.

"어리석었지. 나 자신도 나에게 제일 알맞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으니. 이제 내가 그린 그림의 첫 붓을 떼려고 한다."
"제, 제정신입니까 요나? 저를 죽이시겠다구요?!"
미쉘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요나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검을 뽑아 천천히 미쉘에게 다가갔다.

"소중한 것을 지키는 방법. 군인인 내가 다른 방법을 찾은 것 자체가 언어도단. 쉬운 패를 가지게 되니 눈이 돌아갔었지. 그것을 알려준 네게 감사한다."
"요나아아-!!!"
분노에 찬 목소리. 악에 받친 듯한  목소리까지. 요나는 단칼로 베어낸다. 미쉘의 목이  멀리로 날아가며, 피가 궤도를 그려낸다. 잠시 후, 그녀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역겨운 소리를 낸다. 요나는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그녀의 시체를 발로 밀어낸다. 그리고 자신의 뺨에 튄 피를 닦아낸다.

"나는 패도(覇道)를 걷겠다."
칼린을 자신의 곁에. 막아내는 것을 모조리 부순다. 방해되는 것을 모조리 베어낸다. 요나의 입에 미소가 걸쳐진다. 다른 이에게 보일 수 없는 검은 웃음. 깊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어둠.  검정은 어딘가 요염함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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