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1화 〉참수자 (141/164)



〈 141화 〉참수자

"그런가. 대학이 완공된 건가."
요나는 읽던 신문을 접으며 조금 생각해보다가 입을 열었다.

"공장 어때?"
"두 달 정도 더 걸릴 겁니다."
"그렇군. 알았다. 대학은 언제든지 바로 연구자들을 들일 수 있는 상황인가?"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좋아."
그렇게 말하고서 그녀는 완전히 신문을 치웠다. 그리고 집사 대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칼린에게 나갈 준비를 하라고 전해라. 대학으로 간다."

#

발을 구르는 소리. 아침에는 언제나 발을 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지하실에서부터 나는 것이라서, 귀 기울이지 않으면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면 분명하게 들려온다. 발을 굴리는 소리가. 자신을 원망하는 자들의 함성이.

뚜벅뚜벅, 쾅쾅. 문이 두들겨지고 있다. 그는 저들을 죽일 것이다. 저들은 저항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래왔으니까. 그래야 그가 괴로워할 것을 알고 있으니까. 발소리. 군화소리다. 두꺼운 신발을 신고 있다. 다가온다.

저들을 죽이는 건 칼린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제는 기계적으로 처리할  있는 일이다. 여기서 목숨이란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숨을 들이 마시고 감각을 집중시킨다. 천천히 앉은 자리에서 전투 준비를 한다. 베어낸 손목에서검을 꺼내 든다.

똑똑똑

'칼린씨, 요나씨에게서의 지령입니다. 아침을 드시고 대학 견학을 예정입니다.'
그 소리에 칼린은 조금 정신을 차린다. 그는 다시 피를 굳혀 만든 검을 다시 융해 시키고서 멍하게 문을 바라보았다. 정적이고 조용한 아침이다.

"... 곧 나가겠습니다."
잠옷을 벗으려고 단추에 손을 가져다 댄다. 다시 보니 잠옷이 아니다. 그는 어제부터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잠깐 옷에 손을 대고 멈춰 있던 그는, 문 밖으로 소리를 내기 위해 적당히 부스럭거리며 허공을 향해 눈을 돌렸다.

"오늘 수업은 어떻게 되나요?"
'취소될 예정이었습니다만, 원하신다면 리쿠르트씨에게 저녁에 시간을 내달라고-"
"아뇨. 취소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만나고 싶지 않았다. 이상한 말로 그를 어지럽게 만든다. 그걸 피할 수 있으니 행운이다. 그는 담배를 챙긴  입에 가볍게 걸치고서 문을 열었다. 집사 대리는 눈을 감고 있다.

"안내해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는 끝까지 칼린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서 칼린을 앞서 나갔다. 이것이 요나가 성 내의 시종들에게 내린 새로운 지침임을 칼린이 알 방법은 없었다. 그는 상대가 눈을 감고 있다는 것도 눈치챌 수 없었다.

아침상 준비가 끝나 있었다. 시종들은 얼굴에 부직포같은 것을 내려 덮고 있었다. 칼린은 그런 시종들이 분주히 음식을 옮기고 있는 테이블에 앉아 요나에게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 넌 여전히 잠을 못 자고 있나 보구나."
요나는 걱정되는 듯 눈가를 조금 찡그리며 칼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시종들을 향해 눈길을 보냈다. 음식을 옮기던 시종들은 황급히 식당을 떠났다. 모두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서, 요나는 칼린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벌써 일주일은 잠을 못 잤지 않느냐. 가여운 것."
"괜찮습니다.  필요가 없으니까요."
칼린의 말에 요나는 대답 대신 그를 가슴팍으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독이듯 말했다.

"... 네가 요즘 고생했을 것을 알고있다. 많은 일이 벌어졌었지... 네게는 벅찬 일이었을 거야. 그래서 당분간 네게 휴식을 줄 참 이란다."
"휴식이요?"
"그래. 네 마음에 안정을 줄 것들. 오늘은 말이다, 칼린. 네가 돌아갈 방법을 알아볼 연구소에 가 볼 예정이란다."
품속에 멍하게 있던 칼린의 표정이 일변한다. 그는 자신을 누르는 요나를 조금 밀쳐내며 고개를 들어올린다.

"여, 연구소요?"
"그래. 널 지원하기 위한 연구팀이 사용할 연구소. 말했지 않느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용해 널 도울거라고."
칼린은 진심으로 놀란 듯 표정을 당분간 바꾸지 못하다가, 곧 웃으며 요나에게 한번 더 안겨들었다.

"전...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아니.

"물론이다, 칼린. 하지만 약속대로 이 세계에 있을 동안은 내 곁에만 있거라."
"제게는 영주님 밖에 없어요..."
요나는 그 말에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가까스로 이성을 잡은 그녀는 어색하게 양 팔을 그의  위로 앉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래. 연구팀도 보고, 여기저기 둘러 다니면서 나와 함께 바뀌는 벨카의 풍경들을 돌아 보자꾸나. 아무 걱정할 것 없다. 나와 함께 있으니까."
"네... 감사합니다, 요나."
그는 잠깐 그 상태로 머무르다가, 곧 몸을 빼내며 요나를 올려다보았다.

"빠르게 먹고 가봐요!"
요나는 그 얼굴을 보며 이성을 붙잡기 위해 자신의 다리를 최대한 세게 붙잡았다. 아직. 아직도 때가 아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식사를 재개했다.

#

벨카에 신설된 대학은, '전상민'의 입장에서 보면 학교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것이었다. 그러나 만들어진 시간과 처음 건설이 예정되었을 때의 벨카의 입지 등을 고려하면 상당한 것이었다.

이미 이세계의 수준을 알고 있는 칼린에게도 그 대학은 상당하게 느껴졌다. 칼린은 오랜만에 호기심을 보이며 대학을 향해 조금 빠르게 걸었다. 칼린보다 앞서서 걷고 있던 요나도 칼린이 자신도 모르게 빠르게 걷고 있음을 느끼고 속도를 조금 높였다.

"어떠냐. 만족스러운가?"
"멋져요! 멋져요, 영주님!"
"그런가, 멋진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거구나, 칼린!"
요나도 보기 드물게 들떠 있었다. 그녀는 밝게 웃으며 대학의 외벽을 한바퀴 돌고서, 다시 정문까지 도달했다.

"자, 들어가보자!"
그녀는 힘차게 정문으로 들어갔다. 평지에 지어진 대학. 칼린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3분정도 걸으니 시설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단해요! 정말 대단해!"
"우리가 해낸 거다! 조금 더 자랑스러워 해도 좋아!"
시설의 문을 열고서, 요나는 문을 잡고 칼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붉어진 자신의 얼굴을 들키면 어쩔까 두려웠지만, 칼린은 그런 걸 신경  여유가 없었다. 그는 망설임없이 요나의 손을 붙잡았고, 요나는 터져 나오는 함성을 참으며 그를 잡아 끌었다.

"여, 연구실로 바로 가보지 않겠느냐? 시설이 어떻게 준비되어 있는  보여주마!"
"네!"
둘은 발걸음을 옮기며 약간 상기된 기분을 곱씹었다. 이 순간 요나는 행복했다. 칼린의 고양된 기분이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저 좋았다.

그녀는 먼저 칼린을 도서관으로 안내했다. 거대한 홀에 책들이 빼곡하게 비치되어 있었다. 결코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이세계에서 이정도 규모의 도서관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각지의 마법학에 관련된 문헌을 쓸어 모았다. 지금까지 쌓아 놓은 게 있어서인지 많이도 지원해주더구나."
"굉장해요..."
"그렇지. 이 중에 한권 정도는 네가 원하는 마법이 있을 지도 모르잖느냐."
칼린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듯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마  정도로 기대가 큰 것이겠지. 요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약간의 유감을 느꼈다.

이 모든 시설은 칼린이 돌아갈 수 없음을 알려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니까.

""... 그럼 연구소로 가 볼까."
"조금 빠르네요?"
"책을 읽을 것도 아니라면 여기에 머무를 건  뭐냐. 움직이자."
조금 아쉬워하는 칼린을 잡아 끌면서, 요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연구소까지 전부 구경하는 데에는 총 40분정도가 걸렸다.

#

"전부터 내가 의뢰를 맡겨 둔 연구팀이 있었단다. 그 연구팀을 대학으로 초청할거야. 내일 모레쯤 도착할 테니  때부터 같이 연구 진척도를 확인하자 꾸나."
아직 완전히 개발되지 않아 조금 황량한 그 개척지에서, 요나는 그렇게 말했다. 칼린은 그런 그녀의 말에 조금 웃었다.

"... 그러네요. 드디어 뭔가 돌아갈 방법을 찾아보게 되는 거군요."
그가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유일한 한가지였다. 지금 그가 그것마저 포기하게 된다면 부셔 지리라.

"고마워요. 이렇게 웃어본  얼마 만일까요."
"... 내가  건, 그래. 왕성에서 같이 춤췄을 때였구나."
그녀는 그 때를 회상하고서 또 즐거워져서 자그맣게 웃었다. 그녀도 그렇게 순박하게 웃는것은 오랜만일지도 모른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는데, 시장에서 가볍게 길거리 음식을 먹어보는 건 어떠냐?"
마차로 바로 성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에둘러  말이었다. 그러나 그 제안에 칼린의 발걸음이 한순간 멈췄다.

"... 시장이요?"
그 표정에서 요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원하던 것의 첫번째 조건이 충족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눈. 저 눈은 사람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자의 그것이다.

"사람들이 무섭니?"
"... 그게 아니라..."
다시 몸을 움츠리는 칼린을 보며, 요나는 확신했다. 그는 드디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녀는 그런 칼린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곧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칼린."
"죄, 죄송합니다. 저는... 따라 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진정하거라. 질책하려는 것이 아니야."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칼린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두려움은 당연한 거란다. 하지만 지금은 걱정할 필요 없어."
거의 마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독할 정도의 카리스마. 요나에게는 그것이 있었다.

"넌 내 곁에만 있으면 안전하단 것을 잊었느냐."
칼린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떨림은 조금 멎어 있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자, 가자꾸나."
그녀는 그런 칼린을 두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즐거움이 흘러 넘쳐서 어울리지 않게 콧노래까지 흘러나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조금 들뜬모습까지 품격 있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 속은 역시 터무니없는 괴물이었다.

#

첫 외출은 꽤 성공적이었다. 요나는 불안정한 칼린의 고삐를 확실하게 잡아냈다. 어떤 사고도 없이 식사를 끝마쳤고, 거리의 모두가 둘에게 축복을 던졌다. 벨카는  둘을 사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린은 길에서 뭔가 말할 여유는 없었다. 그의 눈은 끊임없이 헤엄치고 있었고, 몸의 긴장을 풀 생각도 없어 보였다. 요나는 그 반응에, 솔직히 만족했다.

"이번주는 이렇게 벨카를 돌아 보자꾸나. 네가 적응할 수 있도록 말이다."
"... 네."
보석을 과시하는 기분. 거리를 돌아다닐 때에는 어쩔 수 없이 가면을 씌워야 했지만, 그래도 마냥 좋았다. 그 만족감을 곱씹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성 근처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리쿠르트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더군."
요나는 마치 방금 떠올랐다는 듯 화두를 던졌다. 가면을 벗던 칼린의 손이 멈춘다.

"... 그렇습니까."
"네가 잘 배우고 있는 것 같으니 교육에 문제는 아닌 것 같다만...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칼린은 조용히 요나를 따라 걷는다. 요나는 대답을 기다린다. 곧 칼린이 입을 연다.

"요나."
"말 하거라."
"제게 아직 가정교사가 필요한가요?"
요나의 발걸음도 멈춘다. 그녀는 앞 만을 바라보며 칼린을 향해 고개 돌리지 않는다.

"... 필요하냐 불필요 하냐를 묻는다면, 필요하지. 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으니까."
"... 그런가요."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내가 너를 직접 지도해 줄 수 있다."
칼린이 고개를 들어 올린다. 요나의 얼굴은 역광으로 짙게 가려진다.

"하지만 영주님의 시간을 빼앗을 수는..."
"하루에 3시간정도는 낼  있다.  의지만 말 하거라."
요나는 조금 고개를 돌린다. 여전히 보이지는 않는다.

"더 이상 리쿠르트에게 배우고 싶지 않은 거냐."
 자리에서. 천천히 노을이 지는 그 장소에서. 둘의 그림자는 점점 길어지고. 서로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을씨년스러운 붉은 빛 속에서 잠시 바람소리만이 공허하게 퍼진다. 그리고-

"...네."
바람소리에 묻힐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결단을 내렸다. 요나는 그 몸을 굳히고서 고개를 들어 올린다.

"그런가. 네가 그걸 원한다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칼린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요나는 입고 있던 코트의 깃을 잡으며 입가를 가리듯 얼굴 쪽으로 살짝 올렸다.

"오늘 내가 말을 전달해주마. 그리고 칼린."
"네."
"후회하지 않게 해주마."
타오르는 것 같다. 속에서부터 불이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녹아버릴 것만 같다. 달뜨게 올라온 숨이 아려 올 정도로 괴롭게 벅차다. 올라오는 고양감에 정신이 아찔하다.

아무 생각도   없다. 지금 그녀가 느끼는 것은 하나로 잘라 말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감정이었다. 달성감, 우월감, 도취감, 승리감, 애달픔, 간절함. 요나 자신조차 추하다고 생각해서 부정하던, 자신이 대체할 수 없던 위치를 가진 리쿠르트에 대한 열등감과 경계심. 그 모든 것들의 댐이 무너지며 그녀의 가슴을 혼란스럽게 뒤흔든다.

그러나 이 고양감과 흥분만큼은 확실하게 단언할  있었다. 어떻게든 빨리 그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열기를 빼내야 했다.  안쪽에 응어리 지며 타오르는 불을 꺼야 했다.

스스로를 불사르는 애욕. 그녀는  불을 전부 삼켜내고 우민들의 태양이 되었다. 이제  사랑의 대상을 철저히 고립시켜 나간다. 온전히 그 만이 자신의 빛을 쬘  있도록 한다. 그는 그녀의 세상이 되고, 그녀는 그의 태양이 된다. 눈 앞이다.

그녀의 발걸음이 조금 빨라진다. 경쾌하게.

#

"강습대의 준비는 어떤 가요."
에테롬의 말에, 할란은 약간 고개를 숙이고서 가져온 종이를 펼쳤다.

"총원 5명 준비 끝낸 상태입니다."
"... 그렇습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맞지 않는 비장한 표정을 만든다. 그리고 할란에게 손을 내민다. 할란은 그에게 종이를 전달해 준다.

"할란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멤버로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요?"
할란은 잠깐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금부대의 전력도, 요나경의 실력도 모르지만... 그녀의 성을 급습하는 거니까요. 솔직히 지는 그림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죠?"
"그야, 그녀의 성에 소금부대가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시기가 시기인지라 그녀의 성에 무장병력이 많이 모인 것도 아니니까요. 알아본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솔직히 과도한 병력 같기도 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목을 한번 풀었다.

"'백정' 캘리건. 무능력자지만 10대 중반 남짓한 나이에 3급 괴물을 홀로 토벌한 경력이 있습니다. 도축칼로 상대의 원형을 알아볼 수 없게 죽이고 다녀서 붙은 별명이라더군요.

'천변만화' 디마코. 20년 전 첩자로 활동하다가 처형당한 줄 알았지만, 생존을 확인해 영입 성공. 실력도 실력이지만 어떤 모습으로든 변할 수 있다는 점이 상당히 무섭더군요.  자 하나 때문에 피아 구분 식별법이 새로 개정되었었지요.

'라미' 라모스. 기사였습니다만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직위를 잃었습니다. 맨손으로 전신무장을  동기를 때려 죽였지요. 분열성 장애가 조금 있는 것 같지만, 감안하더라도 상당한 실력을 가지신 분이십입니다.

'조각가' 제퍼만. 모든 걸 녹이는 오른손과 모든  굳히는 왼손을 가졌습니다. 에테롬씨도 보셨겠지만... 솔직히 별로 친해지고 싶은 분은 아닙니다."
"과신은 금물이지요. 그 바바라씨도 죽어버렸으니까요."
"뭐, 그건 그렇지만... 계획에 실패하더라도 에테롬씨는 무사할 겁니다."
그 말에 에테롬 뒤에 서 있던 송윤이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잘 알고 있다, 깜둥이."
할란은 그 멸시표현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송윤을 노려보았다.

"... 정말로 제리코씨와 합을 다룬 적이 있다는 '동방제일검'일 경우에 말이지만요."
"호오. 의심?"
방 안의 온도가 내려간 듯한 긴장감 속에서, 송윤은 자신의 검을 조금 들어 올렸다.

"송윤씨. 제발 가만히 계시죠."
"싸우려는 거 아님. 실력을 증명해 보이지."
그리고 방을 한번 둘러보더니 가볍게 코웃음 쳤다.

"14년전. 그 멍청이가 순회하다가 동방으로 왔을 때 한번 싸웠음. 이게 그 때 남은 거."
그녀는 입고 있던 옷을 들어 올려 배를 드러냈다. 동방계 특유의 살짝 노란 피부에, 갈라진 복근 위로 큰 흉터가 하나 남아있었다.

"그 때는 졌다.하지만 분명 합을 겨뤘다. 난 더 강해졌지. 동방 속담. 날 죽이지 못한 것은 날 강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옷을 다시 내린  검에 잠깐 손을 댔다.

"너네들 검은 섬세함이 없어."
잠깐 침묵. 그리고 그녀는 검에서 손을 뗐다. 멍하게 있던 할란과 에테롬은 기가 빠진 듯 눈을 약간 찡그렸다.

"실력을 보여주신 다는 아니었습니까?"
"돼지새끼. 섬세한 작업은 눈치도 못 챈다."
"당신 사실 윌레인어 알고 있는 거 아닙니까?"
"말이 많다. 담배나 펴보는 거 어때?"
전혀 신경쓰지 않는 다는 듯 방약무인하게 구는 송윤을 보며, 에테롬은 성가시다는 듯 테이블 위에 얹어져 있던 시가담배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그것을 집어 불을 붙이려 할 때였다. 시가담배의 끝이 빗변으로 잘려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뭐야, 대체 언제..."
할란이 당황해서 작게 신음처럼 그 말을 꺼냈다. 잘린 담배를 기예를 보듯이 즐겁게 바라보는에테롬을 두고, 송윤은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인정?"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