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참수자
"받아들이고 떠나거라, 리쿠르트. 칼린은 더 이상 네가 필요하지 않아."
요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눈을 가늘게 내리뜨고서 웃는다.
"대학도 완공되었어. 이 이후의 교육은 내가 전임할 테니 안심하고 대학으로 들어가라. 이미 교수자격으로 이름을 넣었어."
리쿠르트는굳은 표정으로 그저 서 있었다. 그녀는 잠깐 주먹을 꾹 쥐었다가, 곧 작게 질문했다.
"칼린의 결정이 확실한 거라면 떠나기 전에 대화정도는 가능하겠죠."
"물론이다. 난 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네 생각처럼 뭔가 음험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마음껏 의심해도 좋지만, 적어도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 말해줬으면 좋겠군."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묘하게 끈적함이 담긴 웃음을 지으며 리쿠르트를 올려 보았다.
"지금 상황은 간단하지. 넌 이제 칼린의 무대에서 사라질 뿐이다... 관계없는 사람이 되는 거야. 그 선택은칼린이 한 거고."
리쿠르트는 눈을감고 크게 숨을 들이 마셨다. 그리고 요나를 향해 몇 걸음 다가가 그녀의 책상 앞에 섰다.
"제자를 제대로 떠나 보내는 것 까지가 스승 된 자의 의무입니다. 제자가 원치 않을 때 붙잡는 것은 스승이라고 할 수 없죠. 저는 확실히 전에는 칼린에게 의지하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재능의 원석같은 아이였다. 그런 제자에게 알려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당시 기댈 곳이 없던 리쿠르트는 그 교육열로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그녀에게는 의지할 곳이 있다.
"요나. 저는 그의 첫 스승으로서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제가 가르친 것은 제가 떠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기억해 주십시요."
그리고 이건 도발. 요나가 한 말로 그녀의 심중을 읽고 핵심을 찌른 도발이었다. 얼굴이 굳어가는 요나를 두고서, 그녀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건내 주신 자리를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제 짐은 싸 두신 것 같으니 마지막으로 칼린과 한번만 대화하고 바로 자리를 옮기도록 하죠. 하지만 지원해주신 집은 받지 않겠습니다. 전 제 그이와 이사 갈 예정이니까요."
그리고 발을 돌려 요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모든 사람들을 손 위에 올리려 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 신세를 졌어요."
요나는 리쿠르트가 떠난 후로도 그저 문을 바라보다가, 곧 담배에 거칠게 불을 붙였다. 조금이라도 일찍 보내서 다행이었다. 너무 똑똑한 말은 다루기 힘드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넘기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녀가 떠나가기 전 던진 말을 머리에서 떨칠 수 없었다.
"썩을 년이..."
그녀는 불쾌한듯 담배를 피워 대다가, 주먹을 쥐어 그 불을 끄고 적당한 곳으로 집어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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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린. 저는 이제 성을 나갈 겁니다."
리쿠르트는 그렇게 운을 뗐다. 칼린은 아무 말없이 그녀를 바라 보았다.
"당신도 보셨을 그 대학으로 떠날 겁니다. 교수와 연구자를 겸업할 생각이에요. 서적이 많다 더군요."
리쿠르트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올곧다. 칼린은 그눈을 견디기 힘들다. 그러나 여기서 시선을 떨굴 수는 없었다.
둘은 그들이 사용하던 교실에 앉아 있다. 리쿠르트는 그 교실을 천천히 바라보며 입을 연다.
"함께한 시간은 정말 짧았네요. 하지만 확실히 말 하건데, 당신은 제가 가르친 학생들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을 배웠고, 저도 당신이라는 학생에게서 잊을 수 없는 가치들을 배웠습니다. 단언컨데 당신은 제 최고의 제자였습니다. 제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했던 말이 기억나시나요?"
잊을래야 잊을 수 있을 리가. 그 때는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 넘어갔었지만, 언젠가 언어를 배우고 리쿠르트는 다시 한번 더 그 말을 했었다.
"... 지식이란, 남창을 보석으로 만들 수도, 보석을 남창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겁니다. 하지만 지식과 상식이 만드는 벽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 않았죠. 왜 사람은 어른이 될 수록 딱딱하게 굳는가. 그건 성장하면서 얻는 지식과 상식이 편협한 사고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멈추고 자신의 경험, 상식, 지식 등에 기대기 시작하는 거죠. 하지만 모든 걸 아는 사람은 없기에 사고가 편협해지는 겁니다."
그녀는 천천히 칼린에게 다가섰다.
"이건 제가 스승으로서 드리는 마지막 조언입니다. 부디 잊지 말고 마음속 등불로 이 말을 받아들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녀의 눈에는 그 어떤 악감정도 없다. 제자의 앞날에 대한 걱정, 정결함, 올곧음. 그 뿐이다. 그녀는 칼린에게 정말 자신이 필요 없는지 되묻지도 않았다.
"스스로 생각하세요. 당신에게는 이제 어느 정도 기본 지식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그 정보를 사용하되, 거기에 휘둘리지 마세요. 처음 당신이 떠올리고 생각했던 그 유연함을 찾으세요. 나중에 얻은 정보 따위로 당신의 본질을 흐리지 말아주세요."
칼린은 이제 상냥함이 두렵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그 두려움 까지 받아들이리라. 그래서 그녀가 한 그 말들이 칼린의 가슴속에 깊이 박혀오는 듯 했다. 그래, 이건. 언젠가 이리하가 했던 말과 비슷한-
"이별이 아닙니다. 벨카의 대학에 있을 거예요. 언제든 제가 만나고 싶어 지거나, 의문이 생긴다면... 언제라도 좋습니다. 찾아오세요. 갤러한과 함께 기다리겠습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칼린에게, 리쿠르트는 가볍게 포옹했다. 그리고 한번 웃어 보인 뒤 고개를 돌려 교실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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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테롬은 자신의 앞에 가로 일렬로 줄선 자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가 모집한 최강의 병력들. 그러나 그럼에도 각자의 개성이 너무 강해서 불안감을 떨쳐 내기 힘들었다. 그의 입에서 어쩔 수 없이 크게 한숨이 터져 나온다.
"하아... 당장 3일 후에 강습이란 말입니다..."
"한숨 쉬지마라. 숨쉬지 마라. 죽어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제 호위인데 그런 말 해도 됩니까?"
그는 송윤에게 그렇게 답하고서 다시 시선을 올려 보았다. 자신이 모집한 자들끼리 내분이 한번 있었다고 한다. '백정' 캘리건과 '천변만화' 디마코의 싸움이었다.
"... 뭔가 이상해요. 정보가 빠져나가고 있는 것 같다구요. 그럼 저거부터 의심해봐야 되는 거 아니예요?"
캘리건은 아이같은 말투로 그렇게 말한다. 그는 에테롬을 꽤 존경하고 따른다. 그의 앞에서는 애같은 말투를 사용하게 되어 버린다고 한다. 그런 이유도 있다지만, 에테롬이 보기에 그의 정신은 별로 건강하지 않다.
"와, 씨발 저거, 선빵 치고서 말 고르는 껀덕지 좀 보소. 불알 뿌셔 버린다, 핏덩이새끼야."
디마코. 그가 소집한 인원중 최고 연장자. 아무래도 순수한 전투실력으로는 캘리건에게 밀렸는지 가벼운 부상을 입고 있다. 코 위로 드러난 커다란 흉터를 일그러 트리며 그는 사납게 말했다.
"... 이번 일은 켈리건씨가 잘못한 것 같네요..."
"에테롬씨!"
"왜퇘뤔쒸! 썅놈 새끼, 20년 전이었으면 넌 벌써 야산에서 니 무덤파고 있었다."
"근데 저 새끼가 진짜...!"
"둘 다 진정하세요."
에테롬은 목소리에 힘을 주고 둘을 말렸다. 적대하려던 둘이 동작을 멈췄다.
"여러분에게 끈끈한 전우애까지 요구하는 게 아니예요. 돈 받고 있으면 계약을 지키십쇼. 화나게 하지 말고..."
약간의 경고가 담긴 목소리에, 캘리건은 금방 주눅들어 고개를 떨군다. 디마코는 할 말이 없는 듯 혀를 차고서 고개를 돌렸다.
"물 좀 가져다 주실래요, 할란?"
"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머리를 싸잡다가, 한 명씩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계획을 짰습니다. 여러분은 2분할로 둘 둘 씩 나눠져서 성에 침투할 거예요. 여기저기에서 소집한 병력들까지 모아서, 두분 씩 그 병력들을 이끌 겁니다."
"한 팀당 병력을 얼마나 이끄는 거지?"
"30명씩. 도합 64명이 성에 들어가는 게 되겠네요."
할란이 돌아왔다. 에테롬은 그 물을 한번에 쭉 들이마신 후, 담배를 꺼내 들었다.
"통신기는 한 팀당 한 개씩 들고 가시죠. 오늘은 해산하시고, 전달사항이 생긴다면 죽통으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어디 추적당하지 않게 특별히 주의해 주세요. 켈리건씨가 걱정한 것도 완전히 의미 없는 건 아니니까요."
"에테롬씨...!"
"네네. 돌아가세요, 켈리건씨."
에테롬은 대충 말하고서 팔을 휘적였다. 병력들이 해산하자, 그는 할란에게 고개를 들어 질문했다.
"병력들 개개인의수준은 어느 정도죠?"
"전쟁에 참가했던 자들도 있고, 용병출신도 있습니다. 수준미달인 자는 없어요."
"그런가요. 다행입니다..."
불을 붙이고서 그는 자신의 의자를 몇 번인가 손가락으로 두들겨 보았다. 이번 싸움은 져서는 안된다. 너무 많이 져왔고, 요나는 이제 너무 성장했다. 지금이라도 강행을 해야 했다.
"역시 계획은 바꾸지 않습니다. 3일 후, 벨카를 공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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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 대리는 놀라움을 감춰내고 있었다. 요나의 업무처리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는 원래도 기계적이고 빠르게 업무를 처리해 왔다. 시종들과 자신에게 여러가지로 괴팍한 명령이나 행동강령을 내리기는 했어도, 그 유능함은 진짜였기에 내심 존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보인 업무속도는 그냥 놀라운것이 아니었다.
경악. 그야말로 경악이 흘러나올 정도의 처리 속도였다. 자신은 아무리 빠르게 하려 해도 5시간은 걸릴 작업을 그녀는 2시간 남짓 만에 끝내고서 평온하게 담배를 꺼내고 있었다.
"지금이 몇시지?"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그는 자신의 시계를 꺼내 보았다. 14시 27분. 점심식사 후 쉬지 않고 업무를 진행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놀라움을 감추며 시간을 말했다.
"14시... 27분입니다."
요나는 그 말에 잠깐 고민했다. 3시에 딱 맞춰서 칼린을 만나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조금 생각해 보고서, 그녀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시나요?"
"거기 있거라. 내 문제다."
짧게 말하고서 그녀는 겉옷을 걸쳤다. 그리고 그대로 방을 나서려다가,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그녀는 집사 대리의 말을 듣지 않고 발걸음을 돌려 책상을 향해 걸었다. 몇 번인가 사물함을 뒤져보던 그녀는 곧 그 안에서 향수를 꺼내 들었다.
'... 향수?'
집사대리는 일하는 동안 요나가 향수를 사용하는 것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 향수통을 열어 냄새를 맡아보더니, 집사대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향수말이다."
"예."
"좋은 건가?"
집사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잠깐 멍하게 있다가 얼떨결에 답했다.
"아, 아마도..."
요나는 그 말에 잠깐 고민하는듯 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그 향을 맡아본 후에 도통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1분정도 그렇게 고민했을까, 그녀는 곧 그것을 손목에 조금 발랐다.
영 불안한 표정으로 방을 나서던 그녀는 곧 문 앞쪽에 있던 거울에서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또 왜 그러나 하고 지켜보고 있으니, 그녀는 다시 테이블로 돌아와서 집사 대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이름이 뭐였지."
"글렌입니다."
"글렌. 머리는 빗을 줄 아나?"
"예?"
-
20분 정도가 더 흐르고서, 요나는 지금 어정쩡한 자세로 칼린의 방 문 앞에 서 있었다. 옷은 평소와 같은 정장이지만 그녀 나름의 치장을 끝마친 상태였다.
더 이상 리쿠르트가 없다. 성 안에 방해꾼이 없다. 바뀐 건 그것 하나 뿐이었지만, 요나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손발이 덜덜 떨렸다.그녀는 잠깐 더 멍청하게 서 있다가, 곧 크게 심호흡 하고서 용기를 냈다.
"칼린. 들어가도 되겠느냐."
문 너머에 대답이 없다. 요나는 괜히 어색함에 몸을 조금 꼬아 대다가 다시한번 목소리를 냈다.
"들어가마."
지위상 문제될 것은 없다. 그녀는 그렇게 자기최면을 하고서 문고리를 잡았다.
'아, 요나?'
타이밍 좋게 들려오는 대답에 요나는 다시 목을 가다듬고 조금이라도 더 깔끔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 지금 바쁘다면-"
'아뇨, 들어오세요. 씻느라 못 들었네요.'
잠깐 요나의 손이 멈춘다.
씻고 있었다고?
그녀는 군침을 삼키고서 자신이 잡고 있는 문고리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문 뒤에 무슨 일이 있든 칼린이 허락한 것이다. 이번 한번 만큼은 이성이 지게 해 보자.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문을 제꼈다.
"무슨 일이신가요?"
칼린은 바지만 입은 상태로 젖은 머리를 닦아내고 있었다.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한 건지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고,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어깨와 쇄골을 타고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요나는 잠깐 넋을 잃고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다시 조용히 문을 닫았다.
'요나?'
"오, 오, 옷은 입고 부르거라!"
이성의 몸이 거북하다는 놈이 자신의 것을 보이는 데에는 별 감정이 없는 건가. 괜히 못 볼 것을 본 것 같아 심장이 마구 뛴다. 이런 곳에서 그의 상식이 이상한 것을 느낀다.
'아... 불쾌하셨다면 죄송-'
"아! 아니! 그건 아니다! 아무튼 옷을 입고 불러라!"
자신도 모르고 큰소리로 말해버리고서그녀는 문고리만 붙잡고 심호흡을 한다. 곧 문이 열리며 셔츠를 입은 칼린이 문을 열어 준다. 조금 아련하게 나는 비누향과 온기가 그녀의 코를 스친다.
"죄송합니다. 분명 수업은 15시 반 인줄..."
"아니다. 내가 조금 일찍 온 거야. 수업 방침같은 걸 말해주려 한 거다만..."
그녀는 자신의 시선이 계속 내려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하얀 쇄골이 시선을 계속 빼앗는다. 이렇게도 약한 사람이었나 자책감과 함께 뜨거운 감정이 들끓는다. 칼린은 그걸 전혀 모르고 문을 활짝 연 뒤 그녀를 안으로 들인다.
"일단 그... 셔츠 위에 뭐라도 걸치거라..."
"머리만 전부 닦고요. 죄송합니다. 지금 이대로 이야기해 주실 수 있으신 가요?"
그의 목소리에는 변화가 없다. 들으면 침착해지는 목소리다. 그러나 그럼에도 요나의 가슴은 멈추지를 않았다. 그녀는 최대한 칼린에게서 눈을 피하며 잠깐 거리를 벌린 뒤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너, 너는 씻을 필요가 없던 것 아니었느냐. 네 몸은 그 뭐냐, 위, 위생이. 위생이 유지가 되었지 않느냐."
젠장할. 사춘기가 되돌아온 느낌이다. 요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욕지거리를 뱉어댔다. 나름 준비한 것들이 망해 버렸다. 분명 자신을 이상하게 보고 있겠지. 그런 식으로 요나가 자책할 동안, 칼린은 조용히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 그렇네요. 왜 그랬을까요?"
멍한 머리로, 그저 리쿠르트가 떠나니 자신도 모르게 욕실로 향하게 된 것이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구고서 그는 그저 초점을 잃은 눈으로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 그대로 기계적으로 씻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너, 너와 대화해 보면 조금 이상한 점을 느끼고 있었다만... 네가 살던 곳에서는 남성의성적 가치가 더 떨어지거나 했던 거냐?"
"예? 글쎄요... 딱히 그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럼 넌 왜 그렇게 훌렁훌렁 벗은 몸을 보이는 게냐... 나 이외에도 그러고 다니지는 않았겠지?"
"보통은 별로 벗을 일이 없죠."
"... 아무튼 빨리 옷을 걸쳐라."
"죄송합니다."
칼린은 짧게 사과하고서 적당히 머리를 수건으로 말고 겉옷을 잡았다. 그러다가 비누향과 섞여서 나고 있는 꽤 청량한 향기를 맡았다. 그 냄새가 뭔지 생각해보던 칼린은 요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요나, 혹시 향수 뿌리셨..."
"지금 말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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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은 예정대로 15시 반에 시작하겠다. 그리고 오늘도 수업이 끝나면 거리를 같이 걷자꾸나."
조금 진정된 분위기 속에서 요나는 그렇게 말했다. 칼린은 머리에 동그랗게 수건을 말아 올리고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일단 네가 우리 도시에만이라도 적응해 준다면 좋겠구나. 같이 한 걸음 씩 차분히 밟는다면 괜찮아 질 것이다. 언제 까지고 과거를 극복해내지 못하면 안되지."
"... 그렇죠."
"그래. 뭐 궁금한 것 있느냐."
칼린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가 겨우 딱 하나, 힘들게 어떻게든 떠올린다. 그 질문조차도 칼린에게는 버거운 것이었지만, 왜일까. 어지러운 정신 속에서 딱 한마디 계속 뇌리에 박혀 있던 그 말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스스로 생각하세요.'
'본질을 흐리지 마세요.'
"요나."
"그래."
그는 이 질문을 해도 될지 고민해본다. 그러나 뿌옇게 가려진 머리 속은 그가 생각하는 것을 계속 방해한다. 평소였다면 그는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라드의 장례식은 없는 겁니까?"
스스로 하던 질문 끝에, 칼린은 자신도 모르고 그 말을 뱉어냈다. 요나는 그런 그를 잠깐 멍하게 쳐다보다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 수업과 관계된 질문은 아니로군."
별로 유쾌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는 분명 '라드에게 신경 쓰지 않는' 상태였어야 했다. 이렇게 뭔가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위험하다. 자신을 찾아 버릴지도 모른다. 요나는 그 질문에 답할지 조금 생각해보다가, 여기서 질문을 피하면 오히려 좋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 내 8영주 지위가 정식으로 인정되면, 소금부대원 전원이 비행선에 타게 될 것이다. 유력 귀족들, 어느정도 이름있는 왕족들까지 같이 타서 선상 파티를 할 예정이다. 그 때, 그 비행선에서 라드의 부고소식을 윌레인 전국으로 퍼트릴 예정이란다."
칼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조차도 그 질문을 왜 했는지 몰랐으니까. 라드는 그저 배신자였고, 죽였어야 했으니까. 명령이 그랬고 자신도 그걸 원했을 테니까.
아니, 그랬던가?
"네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주제넘은 질문을 했구나."
"... 죄송합니다."
"왜 그런 질문을 한 거지?"
알 수 없다. 칼린의 침묵이 곧 답이었다. 요나는 이를 그저 기우라고 넘기기로 했다. 이 질문을 한 지금 이 순간조차도 칼린은 자신의 질책에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리쿠르트가 뿌려 둔 씨앗은 천천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