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활공(滑空)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은... 그래. 라면이라는 건데..."
"라묜?"
"조금 더 발음을 약하게. 라면이에요. 라면."
"... 무슨 음식이냐. 말만 하면 만들어주지. 우리 성의 요리사들은 뛰어나다."
"아마 만드는 건 힘들지 않을까요? 기술이 좀 많이 들어가는 요리라서..."
벌써 2시간째, 둘은 바에 앉아서 대화를 지속하고 있었다. 어느 덧 하늘이 남색으로 물들어 바에는 조명이 켜져 있다.
"그 라면에 계란 하나 탁 깨서 먹으면, 정말 맛있었는데... 학생때는 하루에 네 개도 먹어봤어요."
"네 개? 과일같은 거냐?"
"아니, 그런 건 아니예요. 뭐랄까... 일인분을 한 봉지단위로 나눠서 파는데... 음..."
"과일같은 게 아니라면 만들어 줄 테니 말을 좀 해 보거라."
"그러니까... 아, 이거... 설명을 할 수가 없네..."
분위기는 완전히 무르익었다. 소금부대가 수면실로 들어간 후 귀족들은 각자 뿔뿔이 이동하며 바에도 사람이 하나 둘 씩 찾아왔지만, 둘은 다른 사람의 접근을 힘들게 할 정도로 단란한 분위기를 내며 대화 중이었다.
"그... 밀가루를 길고 얇게 뽑아서, 튀기나? 말리나? 그걸 구불구불하게 뭉쳐서 단단하게 만들고... 뜨거운 물에 넣으면 풀어지도록 가공하는 거예요. 거기에 준비된 가루소스를 풀어 넣어서 끓이는 거죠."
"... 썩지 않느냐. 그런 걸 봉지에 넣어서 판다고?"
"아니, 흠... 죄송합니다, 도저히 설명이 안되요."
칼린은 그렇게 말하고서 해맑게 웃는다. 칼린, 너는 네 고향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밝게 웃는구나. 요나는 그걸 깨닫고서 약간 저릿함을 느낀다.
"동방의 국수요리 같은 거냐?"
"조금 다르긴 하지만, 면 요리라는 건 같아요."
"여기 주방장에게 부탁해 볼까? 아마 만들 수 있을 거다."
"아뇨, 그럴 필요는 없어요. 아마 전혀 다른 뭔가가 나올 것 같으니까..."
칼린은 그렇게 말하고서 술을 한 모금 더 들이 마신다. 그에게는 물이나 다름없다. 그저 분위기 때문에 마실 뿐이다.
"그치만 그렇네요. 돌아가면 가장 먼저 라면이 먹고 싶어요."
"... 일단 만들어 놓으라고 할 테니, 예상과 다른 게 나오면 그 때 피드백 해 다오. 혹시 비슷한 게 나올지도 모르는 것 아니냐."
"아뇨. 절대로 못 따라올 거예요. 그러고보니 요나, 연구는 얼마나 진행됐을까요?"
요나의 꽤 간절했던 마음을 칼린은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부셔버렸다. 요나는 가만히 있다가 성질부리듯 술잔을 꺾어 들었다.
"... 이걸 봐라."
그리고 속주머니에서 작은 죽통을 꺼내 건냈다. 칼린이 그 죽통을 받아 들자, 요나는 입가를 닦아내며 부가설명을 했다.
"가장 많이 보급된 주술물품이지. 안에 있는 종이를 연결된 죽통으로 운송 시킬 수 있다."
"아, 리쿠르트씨의 마법과... 비슷한..."
리쿠르트 이야기가 닿자 조금 고개를 떨구는 칼린을 신경 쓰지 않고, 요나는 계속 말한다.
"다르지. 이 죽통은 전용종이만이 이동 가능하다. 여러가지로 제약이 많아.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죽통을 열어 비어 있는 통을 보여준다.
"연구는 이미 끝났다. 아마 내일 쯤 결과가 나오겠지. 이 죽통으로 결과에 대한 논문이 전달 될 거다."
"네? 당장 내일이요?"
"그래. 당장 내일."
"어떡하죠, 저 돌아갈 준비같은 거 할 틈이 없었는데..."
"아직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 방법이 어떤 건지도 모르니..."
"하긴, 그러네요! 엄청 힘들 수도 있겠죠! 그래도 일단 드디어 첫걸음을 뗀 느낌이랄까..."
칼린의 텐션이 오른다. 그에 반해 요나의 텐션은 조금 내려간다.
"... 넌 여길 떠나는 데 아무 미련도 없느냐?"
"네?"
"아무 미련도 없느냐고. 네게 이 세계는 그냥, 언제든 버리고 가버리고 싶은 곳일 뿐인 거냐?"
약간의 서러움이 받친 말이었다. 세상의 의미 따위 요나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를 보내 줄 생각도 추호도 없다. 하지만 그가 가는 길을 망설이게 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칼린은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어느정도 이해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요나. 당신은 이 세계에서 제 유일한 이해자예요."
"... 그래서."
"소금부대는 제 있을 곳이 되어주었죠. 리쿠르트도, 어긋나 버렸지만 분명 좋은 선생님이었어요. 제 은사(恩師)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여기서 생긴 인연들을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요나는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알고 있다. 그녀가 만든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제가 이 쓰레기같은 세상을 사랑하게 될 일은 없을 거예요."
칼린답지 않은 이 격한 말은, 뭔가를 떠올리고 하는 말 조차 아닐 것이다. 그저 멍한 머리 속에서도 흔들릴 수도 잊을 수도 없는 진심이라는 것이다.
"이 세계를 증오하느냐?"
"죽을만큼."
보통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칼린답지 않은 즉답. 그걸로 그의 진심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가 여기까지 온 것은 8할을 자신의 작품이었으니까. 요나는 조금 씁쓸하게 웃고서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그것 참 유감이군."
유감인 것은, 자신이 칼린을 보내줄 생각이 없다는 점. 유감인 것은, 설령 자신이 그를 보내 줄 의사가 있어도 방법이 없는 점. 유감인 것은, 그녀는 칼린이 이세계를 사랑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는 점.
"곤란한 질문을 했구나. 미안하다."
"아뇨. 저야 말로 뭔가, 죄송합니다."
내가 돌아갈 수 없다고 하면 너는 무슨 얼굴을 할까. 울까, 웃을까. 화를 낼 거냐, 눈물을 흘릴 거냐. 아니면 평소처럼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어딘가로 훌쩍 숨어버릴 거냐.
상상만 해도 가슴이 옥죄여 온다. 하지만 슬픈 건 그걸로 마지막이다. 그가 이 세계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 이후부터. 그 때 부터는, 감히 그가 슬퍼할 일이 생기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그녀의 각오였다.
"... 슬슬 파티가 시작되겠군. 일어나라. 올라가자 꾸나."
"에스코트해 드리겠습니다."
"훌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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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홀에 사람이 한 두 명씩 모이기 시작한다. 소금부대원들도 간단하게 세안만 끝마치고 졸린 눈을 비비며 모여 있다. 소니아는 참 오랜만에 잠들 수 있었다.
"그 수면실 말이야... 뭔가, 생각보다는 좋았네."
"아늑해서 말이죠... 분명 들어갈 때 까지는 영안실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잠에서 깨니까 나가기 싫어 지더라구요... 조금 무서웠어요."
"나만 그런거 아니지? 거기 조금 소름 끼쳐..."
"침대가 좋아서 그런가? 배고픈데 저녁도 먹기 싫더라..."
각자의 감상이 나온다. 모두들 간만에 깊이 잠들 수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꽤 소름 끼치는 경험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갤러한은 그 안에서도 잠을 자지 못했다.
"넌 안 잤냐, 갤러한?"
륑게가 그걸 눈치채고 말을 걸어온다. 갤러한은 뭐라고 대답할 지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다물고 턱을 괴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곧 그는 결심하고 모두를 향해 말을 꺼낸다.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게 두개 있거든...?"
"하나가 아니었어? 뭔데."
"그... 잠깐 모여봐."
사뭇 진지한 분위기에, 다들 별 말 없이 그를 향해 모인다. 오랜만에 깊이 잘 수 있어서 그런지, 소니아와 핀도 상당히 안정되어 보인다. 조언을 들으려면 지금이 답이었다.
"나 혼자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와서 말이야... 중요한 선택이야."
"후까시 그만 잡고 빨리 말해. 뭔데?"
지금이 맞는 타이밍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한순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여기까지 말을 끝낸 이상, 그냥 넘어가려고 하면 다굴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닿았다. 그는 한번 한숨을 내쉬고서 주머니 안쪽에 손을 집어넣었다.
"... 이걸 봐."
"... 작은 함? 설마..."
"리쿠르트한테 줄 약혼반ㅈ-"
말을 끝마치기 전에 릴로가 갤러한의 손을 쳐내 그 함을 바닥으로 떨궈버린다. 얼빠진 갤러한에게 릴로가 크게 화낸다.
"이 정신나간 새끼야!"
갤러한은 잠깐 얼떨떨해 떨어진 반지 함과 릴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화낼 건 자신인데, 선수를 빼앗긴 느낌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한 명씩 욕설을 뱉어 대기 시작한다.
"좆같은 새끼... 무슨 일을 한 거야..."
"우린 이미 끝났어...!"
"갤러한씨... 진짜 눈앞이었는데 이런 걸 들이밀어 버리시면..."
"뭐, 뭔데... 리쿠르트가 너네한테 무슨 말 했었어? 나만 모르는 거야?"
갤러한은 참을 수 없이 불안해져서 그렇게 말하며 반지함을 주워들었다. 그럴 리가. 약혼 제안은 벌써 옛날에 했었단 말이다.
"배에서 내리면 전해주면서 정식으로 약혼 하려더-"
"앨랠랠랠ㄹ랠ㄹ랠ㄹ래!"
"입 닥쳐! 말 멈춰! 멈춰!"
소니아까지 손을 휘젓으며 갤러한의 말을 멈추게 한다. 그제서야 갤러한은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너네들 설마... 그거냐? 징크스 때문에 그러는 거냐?"
"왜 하늘 한가운데를 떠다니는 비행선 안에서 그런 말을 꺼내는 거야?! 이제 날아다니는 관짝을 탔다는 기분밖에 안 들잖아!"
"낙하산... 낙하산이..."
"아니... 기다려봐. 진짜 그것 때문에 이 난리를 치는 거라고?"
"너가 징크스를 무시한다고? 넌 그러면 안되지!"
확실히, 갤러한은 징크스를 신경 쓰는 타입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문제에서는 아무래도 질문에 대한 답에 더 신경 써 줬으면 한다.
"아니, 설마 무슨 일이 생기겠어...? 8영주가 직접 주최한 선상파티인ㄷ-"
"아, 이 새끼 이제 자각도 못하고 막 뱉어 대네 씨발…"
"왜! 왜 파티가 끝나고 안전하게 땅을 밟은 상태에서 전역하고 말하는 걸 기다리지 못하신 거예요, 갤러한! 대체 왜!"
"틀렸어... 우린 전부 죽을 거야... 적어도 갤러한은 죽어..."
확산되는 패닉에, 커져가는 목소리. 이쯤 되니 갤러한도 오기가 생긴다. 그는 반지 함을 열어 소리치기 시작한다.
"이 반지를 리쿠르트한테 줄 거야! 이 파티가 끝나면 리쿠르트에게 약혼 신청할 꺼야! 무사히 전역하면 결혼해 야지~! 모아둔 돈으로 집도 사고 떠돌이 은퇴 할라고! 방금 소리 들었어?! 방금 뭔가 창 밖으로 지나갔는데?! 새겠지! 신경 쓰지마! 뭐가 부딪쳤어! 해치웠나?!!!"
"그만! 그만해 개새끼야!"
"갤러한, 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뭐, 꽤 즐겁게 살았다..."
"술집... 전역하면 새우려고 했던 술집이..."
파티홀 가장자리에서, 소금부대원들은 빽빽 대며 소리를 질러 대기 시작했다. 모두 그들을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것도 잊고서 소란을 피워 댄다. 그리고 이제 막 파티장에 들어온 요나와 칼린도 그 소란을 보게 된다.
"봐라, 칼린. 바보들은 넓은 곳에 두면 알아서 텐션이 올라간다니까."
"그런 건가요?"
"그런 거다. 지금 말 걸어보면 될 것 같군."
그녀는 그들 중에 이리하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파티는 시작도 안 했는데, 다들 꽤 신나 보이는군."
"아, 지휘관님..."
소란이 천천히 멈춘다. 모두 자세를 다잡고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뭐, 가볍게 해라. 분위기를 깼군. 다시 즐겨. 그런데... 이리하는 어디 있지?"
"어, 글쎄요? 중간에 어디로 갔는데 못 찾겠네요."
"그런가. 탓하려는 건 아니다. 마음대로 즐기려무나. 자네들의 퇴임식까지 포함된 파티니까."
요나는 가볍게 웃고서 칼린을 향해 고개를 돌려 살짝 웃는다.
"난 다른 영주들을 보러 가겠다. 준비해야 할 게 있거든. 파티가 시작하면 다시 만나러 올 테니, 즐기고 있으렴."
"아, 영주님..."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칼린의 등을 다독여 주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소금부대원들은 요나의 등이 완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경직된 자세를 풀었다.
"... 우리 지휘관님은 피부가 정장이 아닐까? 어떻게 사복을 본 적이 없냐..."
"충족이랑 싸울 때 갑옷 입으셨었잖아."
"정장 위에 입었을 수도 있지. 어떻게 아는데."
"개소리 좀 그만해라... 전에는 이리하 피부가 갑옷이 아닐까 이 지랄하더니."
농담이라도 웃겨야 먹히지, 륑게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 칼린을 돌아보았다.
"이번 가면 말이야, 턱이 분리됐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런 말을 꺼냈다.
"네? 네."
"그럼 이제 뭐 먹을 때 가면 반쯤 들어올리고 먹고, 그 짓 그만해도 되는 건가?"
"네. 그렇죠..."
"왜 진작 그렇게 안 해줬다냐, 방법이 다 있으면서..."
그 다음은 어색한 침묵이었다. 륑게도 사회성이 출중한 편은 아니다. 그는 다른 동료들을 향해 눈으로 신호를 보내면서 최대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했다.
"칼린씨. 만나고 싶었어요."
입을 연 것은 핀이었다. 그는 지팡이를 짚으며 칼린을 향해 조금 다가왔다.
"갤러한씨가 칼린씨는 우리를 만나는 게 조금 불편할 수도 있으시다고 말해줬거든요. 그 말 듣고 조금 생각해 봤어요."
륑게랑 릴로가 조금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꺼내지 않아도 좋을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핀과 소니아는 이해할 수 있기에 먼저 이 점을 짚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힘든 일이었죠. 저랑 소니아씨는 그... 비공식 임무에는, 참가도 하지 않았으니 뭐라 말 할 자격도 없겠지만. 어떤 기분인지는 차고 넘치도록 이해해요. 저랑 소니아씨도 방 밖으로 한동안 나오지를 못했으니까."
임무 하나하나가 정신적으로 너무 고된 일이었다. 소니아도 핀도 완전히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아니, 소니아는 한번 무너졌다.
"그런 우리가 방 밖으로 나올 수 있던 건 전부 동료들 덕분이죠. 이 부대에서 좋은 일이 많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 준 곳인 걸요. 칼린씨, 일단 이 분위기라도 빌려서 대화를 해보고 싶어요."
핀이 칼린을 향해 한발짝 다가간다. 칼린은 조금 머뭇대며 할 말을 생각 중이었다.
"술이나 마실까요? 제가 몸에 버터 바르고 식탁위로 날아가는 거 보신 적 있으신 가요?"
가볍게 농담하며 칼린의 옆구리를 찔러보는 핀이었다. 하지만, 핀이 근본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칼린은 지난 일들에 대해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은 시체나 지을 법한 무표정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 중이었다. 가면이 없다면, 분명 지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고민중이었을 테니까. 라드의 얼굴은 환각으로 찾아올 때나 다시 떠오르는 정도가 되었고, 칼타코에서 벌어진 일은 정말 무슨 사건이 있었는 지만 기억하고 있었다. 남은 감정은, 도르베가 그리운 정도. 그와는 밤을 세어가며 이것저것 대화해 보고 싶었다.
"... 고마워요, 핀. 부탁할 게요."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 뿐. 딱히 대화하고 싶지도 않았고, 지난 일에 대해 회상하며 눈물흘리고 싶지도 않았다. 기억은 흐릿하고, 눈물은 말랐고, 대화는 의미 없다. 그는 이 곳을 나갈 테니까. 다만 친애하는 동료들을 위해 대화 정도는 할 수 있다. 그 정도의 감상 뿐이었다.
"이제 전역하게 될 테니까요. 그렇죠?"
모든 게 끝날 테니까. 난 여기에 '칼린'을 두고 떠날 것이다. 다들 정말 아끼고 사랑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미련이 남지는 않는다.
"그렇죠. 그러니까 오늘은 마지막날을 즐기자구요."
"핀이 말 잘했다! 진지한 이야기는 그만 하고, 일단 술부터 마시자! 우리는 오히려 파티 시작되면 또 자제해야 할 텐데!"
륑게가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끼어들며 흐름을 잡았다. 모두들 파티장 가운데로 움직이며 대화를 시작한다. 소금부대 중 단 한 명도 칼린의 속을 읽어내지 못했다. 다만, 의심하고 있는 자는 있었다.
갤러한은 칼린의 뒷모습을 굳을 얼굴로 바라보았다. 마치 그렇게 하면 가면 뒤에 숨은 얼굴이 보이기라도 할 것처럼. 아니, 그가 보고 싶었던 것은 가면 뒤의 얼굴 따위가 아니었다. 다른 무언가, 칼린이 숨기고 있는 것.
"이리하가 알아서 여기에 찾아올 수 있을까요?"
"그래! 걔 한테도 묻고 싶은 게 많은데 말이지!"
"전 따로 대화해야 할 게 있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에 녹아 드는 칼린을 보며, 갤러한은 약혼반지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칼린. 난 네가 방에 틀어박혀서 실어증이라도 걸렸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 군. 난 이걸 다행이라고 봐야 되는거냐.
그 질문이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어차피 그 질문에 대답할수 있는 건 누구도 없었을 거라는 것이다. 칼린조차 답하지 못하겠지. 갤러한의 머리속에 뱉지 못할 말들이 떠오른다. 그래. 예를 들어...
이젠 네가 무섭다, 칼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