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8화 〉활공(滑空) (158/164)



〈 158화 〉활공(滑空)

"... 거짓말."
칼린은 요나의 방에서 망연하게 그렇게 말했다. 그가 요나의 말을 부정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약간의 적대감까지 삼키면서  말을 뱉어 낸 것이다.

"그렇게 말해도,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나에게 따져도 없는 게 생겨나는  아니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들고 있던 죽통을 기울여 비어 있음을 보여줬다. 칼린은 그래도 영 믿을 수 없는 지 조금 뒷걸음질치다가, 근처에 있던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 아직, 아직 오늘은 많이 남아 있잖아요."
"아침에  왔으니 안 올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말 했었잖니. 새벽에  거고, 안 오면 한달 정도 결과가 미뤄지게 된 거라고."
"그런 말은 하지 않으셨어요."
"정말 그랬던가? 확신하나, 칼린?"
확신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칼린은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다. 분명 자신에게 중요한 이야기라서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대화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의 기억은 결코 '확신'에 다가갈 수 없다.

"저는..."
"네가 불안정한 상태인 건 알고 있다만... 난 분명하게 말했었다.  의심하고 있는 거냐."
그 말에 담긴 것은 분노나 무례함을 탓하려는 질책이 아니었다. 의심받은 것에 대한 아쉬움, 슬픔 따위였다. 칼린은 이 상황을 인정할 수는 없었지만, 인정하지 않을 방법도 없었기에 먼저 고개를 숙였다.

"... 요나, 정말 죄송해요. 의심하려던 게 아니예요."
"매번 사과 뿐이구나. 난 널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하며 돕고 있는데."
"요나..."
"내가 아니었다면 벌써  내쳤을 것이다. 그러니 제발,  정도는 의심하지 말아 다오. 왜 다시 흔들리고 있느냐."
그 이유를 칼린은 알고 있다. 리쿠르트가 심고, 이리하가 물을 뿌린 그 씨앗은, 이제 칼린 스스로가 자각할 수 있을 정도로 커진 상태였다.

"이만 들어가거라. 숙취 때문에 보일 모습이 아니구나."
요나는 조금 수척한 얼굴로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정말로 피곤해 보였기에, 칼린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 가보겠습니다."
"그래. 조식은 먹지 않겠다고 전해 다오."
칼린은 그녀의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요나는 그가 문을 닫은 것을 확인하고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지치고 피곤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도 칼린을 속이는 게 즐겁지만은 않다.

"다음... 다음 계획을..."
그녀는 그렇게 혼잣말하며 팔을 올려 눈가를 가렸다.

#

칼린은 혼란스러워서 울고 싶었다. 일이 너무 많다. 신경  것도 너무 많고, 환청은 서서히 다가오고, 스스로가 미쳐간다는 자각이 생기지만 완전히 미치지는 못해서 괴롭다. 더 이상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기에 그는 마음 놓고 우는  조차  수 없었다.

그런 그가 향한 곳은 주방이었다. 그는 승객이자, 영주의 종자로 종업원의 위치이기도 했다. 주방에  것은 요나의 조식 거부 입장을 밝히기 위해서 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먼저  손님이 있었다.

"어이쿠, '참수자' 아니야."
미로코의 종자, 니노였다. 그녀는 비틀거리면서 걸었는데, 교태나 아양처럼 보이기 보다는 취객의 걸음걸이 같은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양 어깨의 높낮이는 마치 무언가에 고정된 듯 달라지지 않았다.

"여기가 식당이 아닌  알지~?"
그녀는 말 끝을 늘이며 칼린을 향해 다가왔다. 칼린이 아무 말 없이 허리춤에  칼집으로 손을 향하자, 그녀는 양 팔을 조금 벌리며 웃었다.

"워, 농담, 농담! 여전히 날이 서 있네."
"가까이 오지 말아주세요."
"그래. 알아. 안다구. 여기서  할게."
"되도록 말도 걸지 말아주세요."
"아니, 이건 물어봐야 되는 거거든... 무슨 일로 주방에 온 거야?"
 '벨카호'는 3개 영지의 합작이다. 그리고 그 영지 중 하나인 라티아의 영주, 미로코의 종자인 니노다. 그녀가 보안에 대해 신경 쓰는  딱히 이상한 게 아니다. 칼린은 거기까지 떠올리고서 별 저항감 없이 말했다.

"영주님께서 조식을 드시고 싶지 않으시다 길래, 그걸 전해드리려고..."
"오, 나도야! 같은 이유네."
"... 예?"
칼린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니노도 딱히 보안 때문에 서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니노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한 걸음 앞섰다.

"너무 그러지 마. 무슨 생각 했는지는 알 것 같으니까... 어제 종자들끼리 모이는 자리에  왔었지?"
"... 그런 자리가 있었나요?"
"... 아하. 어떻게 된 건지 알겠네."
분명 진메이가 칼린을 불러오겠다고 나섰다가, 거절당했다며 혼자 돌아왔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고, 대화는 7명이서 진행되었다.

"뭐, 중요한 자리는 아니었는데, 하나 나온 말이 있거든. 보안 관련으로."
"그런가요. 비켜 주시겠어요?"
"궁금하지 않아? 꽤 요나 영주님에게 충실했던  같았는데."
"중요하지 않다면야..."
"이 배 안에 침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지. 흥미 없으면 관두고."
칼린의 발걸음이 멈추고, 니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 뭐라구요?"
"조금 흥미가 생겼어?"
니노는 입가를 길게 찢으며 웃는다.

#

8영주의 종자들이란, 기본적으로 멍청하지 않다. 상대적으로 생각이 짧아보이는  니노라는 여성조차도 멍청한 여자가 아니다. 기계공학의 선두주자 라티아의 영주 종자다운 지식과 지능을 겸비하고 있으며, 그녀가 하는 대부분의 멍청한 행동은 위장공작일 뿐이다.

그녀는 칼린에게 흥미가 있었다. 흥미라고 해야 할지, 처음 보자 마자 영주실에서 가장 적대해서는 안될 상대임을 바로 파악해 냈다. 다른 종자들도 그것은 바로 파악해 낸 듯 했지만, 특별히 가까이 갈 생각은 누구에게도 없는 듯 했다. 일부는 알면서도 감정을  이겨내고 적대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그녀로 따지면, 별 신경 쓰지 않는다. 약자는 죽는 것이다. 오히려 좋든 싫든 저 가면 쓴 꺽다리와 친해지지 않으면 저것의 빈틈을 평생 파악해내지 못할 것이다. 거기까지 판단을 끝마친 그녀는 최대한 칼린과 우호관계를 맺어 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침입자라니, 무슨 뜻인가요."
"증거는 특별히 없어."
"...네?"
"하지만 알잖아, 이 바닥에서 감이 제일 중요하다는 거."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칼린을 향해  걸음 더 다가갔다. 대화 중일 그가 어느 정도까지 거리를 허용하는 지 알아보기 위함 이었다.

"지금 감으로 때려 맞춘 이야기를 믿어 달라는 건가요? 아무리  감이 중요하다지만."
"8영주중 7명이 느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넌  느낀 거야?"
"전 전투경력이 짧아서."
"하하! 말도 안되는 농담을!"
웃으며 양 팔을 벌리고, 눈치채지 못하게  걸음 더 앞선다.

"이야기가 옆으로 셌네. 물론 감만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야. 종업원들 중 일부가 지나치게 준비가 잘 되어 있다고 생각 안 했어?"
"... '지나치게' 라면요?"
"그냥 잔이나 서빙하면 되는 시종들이 말이야, 전문 기사시험을 치루는 사람들이나 할 법한 걸음걸이로 술을 나르고 있었다고. 언제든 빠르게 검을 뽑기 위해서 오른 쪽 어깨를 움직이지 않는 거며, 양손잡이 인 거며... 나름 숨기려고 했지만, 우리는 속일 수 없었지."
"8영주가 한꺼번에 모인 자리인데, 시종이라 해도  정도 실력은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조금 다르지. 차라리 근위병을 태워 넣으면 모를까, 일개 시종들까지 그렇게 고급인력으로 준비하는 건 말이 안되거든. 우리라고 전쟁이 끝난 직후에 돈이 넘쳐 흐르지는 않아!"
사실, 윌레인의 국고는 흘러 넘치고 있었다. 피해는 컸지만, 윌레인은 이번 전쟁으로  이득을 보았다. 물론 칼린이 이런 세부사항을 알 리는 없었고, 일개 시종들을 그렇게 고급으로 준비할 필요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 그럼 뭐죠? 왜 그걸 영주님에게 직통 보고한  수상한 자들을 잡지 않고 제게 말하시는 거죠?"
"우리 영주님은 이미 상황을 아셔. 하지만 서류상으로는 문제가 없거든. 전원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야. 옛날부터 귀족의 종자로 일해온 사람들이고, 이력서도, 사람에게도 조작은 없어. 이상할 게 없다 이거지."
"탑승객 개개인의 신원파악까지 끝나 있으면 그냥 무고한 의심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딱히 우리가  배를 뒤집어 엎어서 마녀사냥을 시작하자는 건 아니야."
한걸음 더. 그녀는 호흡까지 의식하며 칼린에게 또 한 걸음 다가갔다.

"조심하는 게 좋을  같다, 이거야."
"전 반정도는 승객권한으로 탔습니다. 배 내부 시설에 대해서 잘 모르기에 경계해도 큰 도움은 못될  같네요."
"무슨 일이 생겼을  가장 재앙일 부분은 뭐... 기낭외피랑 엔진실이겠지. 그 주변만 조심하자고. 만약 비행선이 무너져도 내부 승객들을 탈출 시킬 수단은 있으니까, 그 두 부분만 어찌저찌 지켜내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사상자 없이 끝낼 수 있어."
"수단이라 함은?"
"이런 일에 적임인, 공간이동계 능력자가 두 명 탑승해 있지. 오네트라는 지방출신 대장장이랑 피로만이라는 교수야. 이름은 알려준 거니까, 미리 얼굴이라도 알아 두라고."
"... 하지만, 요나... 영주님이 엔진실은 가보지 말라고 했었는데요."
"들어가진 말아야지. 방해가 될지도 모르잖아. 그냥 위치만 파악해 두라는 거야."
칼린은 그 말에 조금 의문을 느꼈다. 분명 '위험하니까' 가 아니라 '방해 될지도 모르니까' 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기낭외피로 이어지는 문도 있어. 거기를 따라서 사다리를 올라가면-"
"아, 거기는 어디인지 알  같아요."
"그래? 이미 봤나 보네."
조금 분위기가 풀린 걸까. 니노는 그렇게 판단하고 웃으면서, 적대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보이는 자세로  걸음을 더 뻗었다.  때 였다.

"계속 가까이 오시는군요."
조금 온기를 찾던 그의 목소리에 다시 한기가 깃든다. 니노는 그 때 발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뜬다.  사이의 거리는 250센치를 조금 넘기는 정도 일까. 니노는 그것이 칼린이 지금 서있는 지점에서 검이 닿을 수 있는 데 까지의 거리임을 곧바로 파악했다.

"이럴 때가 아닌  같은데? 감사하단 말 정도는 들어도 되지 않을까?"
"감사합니다. 하지만 가까이 오지는 말아 주세요."
"제멋대로네. 그래서 미움 받는  아니야?"
"어찌되든 상관없습니다."
아무래도 어떤 상황이 되었건, 니노가 그의 경계선 안쪽에 들어가는 것은 힘들 듯 했다. 그녀는 바로 백기를 들어 올리고 한 걸음 뒤로 빠졌다.

"... 너랑 진검으로 싸우기는 싫다니까... 그래도 가끔 대련 연습은 해보고 싶네. 호승심을 자극하는 게 있어."
"감사합니다."
"난 할 말 전했으니까, 이건 빚으로 달아 두던가 할게. 피차 조심하자구, 내일 까지만 버티면 되는 거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등을 돌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칼린은 니노가 시야 밖으로 사라질 때 까지 경계태세를 유지하다가, 그녀가 완전히 보이지 않자 자세를 고치며 잠깐 할 일을 정리해 보았다.

'... 엔진실인가.'
들어가  생각은 없다. 다만, 니노의 말 대로 위치 정도는 파악해 두는 것이 좋을 듯 했다.

-

"여기서 쭉 직진하면 엔진실입니다."
시종 한명의 친절한 안내로, 그는 금방 엔진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게다가 시종은 호승심 따위가 없어서 인지 칼린과 거리도 적절히 유지해 주었다. 이런게 서비스맨인가, 하고 칼린은 자신의 전생을 조금 떠올려 보았다.

엔진실까지의 길은 꽤나 복잡한 것이었다. 가는 길에는 위장문이 두개가 있었으며, 길다란 복도의 끝에 움푹 패이듯 들어가 있는 방이었다. 그리고 문 앞에는 3교대로 상시 감시하는 승무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3인 전부 전투에 능숙한 자들이라고 했다.

안전해 보였다. 니노가 그런 자신감을 보인 것도 이해가 간다. 긴 복도는 다수의 적을 견제하는 데에 최적화가 되어 있고, 애초에 여기까지 오는 길도 쉽지 않다. 오는 방법을 전부 알아도 시간이 걸리는 구조이다. 똑똑한 보안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 칼린은 그 자리에서 안심을 느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밀려들어오는 듯한 불쾌감에 식은땀을 닦아내며 그저 복도 끝의 문을 뚫어지게 바라 보았다. 그 복도는 마치 칼린을 향해 다가오는  하면서, 멀어지는 것도 같았다. 조명이 얕아 그림자가 짙게 진 벽의 사면 꼭짓점에는 칼린을 문으로 집어 끌고 가려는 마귀들이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 칼린씨?"
"..."
"칼린씨. 아무리 칼린씨라도 이 너머는 못 들어가십니다..."
"... 예? 아, 예."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가 느낀 감각들  그를 가장 소름끼치게 만들고 있는 것은, 보안이 철저한 곳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을씨년스러운 시각정보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서 제정신을 되찾고 등을 돌렸다.

"안내 감사합니다. 부디 보안에 신경 써 주세요."
"다시 밖까지 안내해 드리겠..."
"아니요, 혼자 한번 나가보겠습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발걸음을 옮기며, 그는 자신이 들었던 것을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너머 즈음에서 약하게 들려오는 신음소리. 귀에 차가운 진흙이 들어오는 듯한, 끈적하고 기분 나쁜 단말마. 쥐어 짜내지는 듯한 끓어오르는 비명소리. 그가 평소 듣던 환청과  다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전조조차 없었다.

악화됐나. 그는 자신의 환청증세를 의심하며 그렇게 중얼거리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피했다.

#

"아스타에 이어서, 또 한 명의 영웅이 그녀의 뒤를 따라갔었습니다. 어제도 언급했지만,라드는 그 출중한 지략을 무기로 언제나 한 발 빠르게 일어날 사건들에 대처하고는 했습니다. 특히 네크로맨서를 토벌 할 때에 뛰어난 활약을 보였었죠.

비록 그의 혈육들이 이 자리에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그와 피를 나눈 듯 끈끈한 정을 이은 동료들이 모두 모여 있습니다. 부디 그가 이걸로 만족하기를 바랍니다.

어제도 했던 묵념은 생략하겠습니다. 라드의 죽음은 지금도 이 비행선 측면을 통해 전국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왕 저하의 자비와 그의 공로를 흠모한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아주 작은 기적이 일어날 예정입니다.

모두들, 창 밖을 봐 주십시요. 앞으로 1분 후,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들이 불을 높이 들어 올려 그들의 애도를 밤하늘까지 보낼 것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어제와는 다른 애도의 자리이므로 춤과 음악은 없을 예정입니다. 각자 그 품격을 지키며, 창 밖에서 벌어질 기적을 봐 주십시요. 술과 음식을 즐기며, 지금 이 모든 것을 일궈낸 라드를 향해 건배를 외쳐주세요.

여기까지 입니다. 여러분 부디, 벨카호의 마지막 밤을 즐겨 주시길 바랍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