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뭐부터 먹는 게 좋을.....”
소녀의 말이 갑작스레 끊기고 사람들의 함성이 귓가를 강타했다. 마레이와 소녀의 시선이 함성의 중심지로 옮겨졌고, 저 멀리 제국을 상징하는 깃발이 내걸린 사절단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올해도 황제가 왔네.....”
소녀의 중얼거림에 마레이의 시선이 사절단의 중앙으로 옮겼다. 황제. 제국의 여황제를 칭하는 말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를 그냥 황제라 불렀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만 봐왔던 사람이 행렬의 중앙에서 사람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황제는 금실로 드래곤의 문양으로 수놓아진 하얀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멀리서 바라보는 데도 차갑게 느껴지는 표정. 제국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지만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고 있었다. 움직이는 손에 따라 태양처럼 반짝이는 금발이 태양 빛을 그대로 반사하고 있었다. 조각 같다고 해야 할까. 마레이가 만난 여인 중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이 된 에르덴에게 미안한 이야기였지만, 여황제의 미모는 사절단이 저 멀리 지나가 윤곽이 보일 때까지 멍하게 바라볼 정도로 아름다웠다.
인형같이 딱딱한 표정이었는데, 사람처럼 웃고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런 생각이 길게 늘어졌다. 물 위를 유영하듯 흘러가는 생각을 붙잡는 것은 옆에 있던 소녀의 말이었다.
“얼굴의 반만이라도 성격이 따라갔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 황제님을 알고 있어요?”
“조금.”
소녀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았다. 마레이도 아직은 소년이라 불릴 정도로 작은 키였지만, 눈앞에 있는 소녀는 마레이의 입술에 간신히 닿을 것 같이 작았다. 그런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귀엽다거나 예쁘다는 수식보다는 아름답다는 말이 떠오르는 외모 때문이었다.
“어떤 분이세요?”
“지독하게 강인한 사람. 찔러도 피가 나올 것 같지 않은 강철. 같은 여성으로 봐도 멋지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사람이야. 자, 움직이자. 사절단은 어차피 중앙에 있는 성으로 갈 거라 따라가도 얼마 못 볼 테니, 관광이나 계속하자.”
황제를 무척이나 잘 알고 있는 모습에, 문득 이 소녀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알지 못했다. 만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낯선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자 왜인지 모르게 거리감이 느껴진다.
“따라와.... 응? 뭐 찾는 거라도 있어?”
“아, 공왕님도 한 번 보고 싶어서요.”
마레이의 말에 왜인지 소녀가 짙은 한숨을 토해냈다. 바닥에 진득하게 달라붙는 깊은숨에서 질척한 느낌이 났다.
흡혈귀 소녀가 작게 한숨을 내뱉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보고 싶다면야. 따라와. 제국은 서쪽에서, 공왕은 동쪽에서 같은 시간에 움직여서 성으로 가니까. 공왕의 얼굴을 보고 싶다면 빨리 움직여야 해. 성에 도착하기 전까지 가려면 좀 서둘러야겠는데.....”
즐거움으로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녀의 목소리만 나지막하게 울렸다. 축제의 분위기와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저는 마레이라고 해요.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마레이? 마레이 드 파웬?”
“네? 절 아세요?”
“조금. 유명하잖아.”
소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주 멀게 느껴졌던 서로의 거리가 한 발자국 좁혀진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붉은 눈동자가 마레이를 훑었다.
“너였구나...... 그럼, 리아 정도면 좋겠다.”
“네?”
“리아라 불러. 지금이면 그 정도면 되겠네.”
리아는 마레이를 아는 눈치였다. 아니, 알고 있었다. 다만, 마레이는 눈앞의 소녀를 처음 본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라벨라 때문에 알고 있는 걸까. 생각이 쉴 틈 없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다시 앞서 걸어가는 리아의 뒷모습에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리아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것도 꽤나 버거운 일이었으니까.
다행이도 공왕의 행렬이 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시 여기서 잘 안 보이려나. 기다려 봐.”
리아는 이동로를 통제하는 사람 중 하나에게 다가가 무어라 말을 건넸다. 선글라스를 낀 정복을 입은 여성이 곤란한 듯 뺨을 긁적이고 마레이를 한 번 본 뒤에, 작게 한숨을 내쉬고 리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 아는 사람이 있었네. 이리 와. 바로 앞에서 보여줄 테니까.”
마레이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리아는 마레이의 손목을 잡고 거대한 성문 앞으로 이끌었다. 모자에 눌린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며 달콤한 복숭아향이 났다. 리아가 다가가자, 사람들을 막은 검은 양복의 사람들이 미묘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마레이와 리아가 서 있을 작은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네? 그래도 지금은 저기에 집중해.”
작은 손가락이 저 멀리서 다가오는 루마니아 공왕의 행렬을 향해 있었다. 공왕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대신, 한 여성이 창문에 상체를 내밀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정숙한 느낌보다는 경박한 느낌이 드는 여성이었다.
“공왕 부인인가요?”
“아니. 첩이야. 원래 저 옆은.... 아니, 됐어. 쯧.....”
공왕의 행렬이 빠르게 지나쳤다. 리아는 혀를 강하게 차고 걸음을 옮겼다. 한참이나 커다랗게 보이던 등이, 작은 키에 맞게 자그마하게 줄어 있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기에 마레이는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갈 수밖에 없어 보였다.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았다. 축제와 동떨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던 소녀는, 이제 활발한 축제와 반대로 무력해 보였다. 그런데도 맛있는 가게, 구경하기 좋은 것들을 소개해주었다.
공국의 수도는 거대한 수로가 도시의 중앙을 지나치는 신기한 도시였다. 도시의 외곽에 바다가 있음에도 습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태양이 강하게 내리쬐는 오후임에도 그늘을 지나칠 때면 서늘한 공기가 맴돌았다.
돌로 된 바닥에는 돌가루가 신발 밑창을 가볍게 긁었고, 손끝에 닿는 벽돌 끝은 까칠까칠한 느낌이 들었다. 하얀 먼지가 묻은 손가락에는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강이 도시를 관통할 뿐만 아니라 오래된 나무의 가지처럼 곳곳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신기하게 비릿한 물 냄새가 나지 않았다. 맑은, 약간의 과장을 덧붙인다면 새벽녘 깊은 호수에서 나는 기분 좋은 향기가 물씬 풍겼다. 관광이라 해서 배를 타게 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재미있는 도시지?”
수면의 반짝이는 햇살을 멍하니 바라보다, 옆에서 들려오는 물음에 고개가 저도 모르게 끄덕여졌다. 리아는 난간에 반쯤 걸터앉아 지나치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모자를 꾹 눌러 써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기에 저절로 반짝이는 머리카락으로 시선이 이어졌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은 태양 빛을 받아 하얀 실처럼 보였다.
“유람용 소형배가 유명한 건 수로를 따라 움직일 때 보이는 다양한 건물들과...... 네 바로 밑에 있는 물고기 때문이야.”
리아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물고기 떼가 수면에 고개를 내밀고 배를 졸졸 쫓아오고 있었다. 보통은 사람이나 배를 피할 터인데 입을 뻐금거리고 따라오는 무리에 난간에 기대어 손을 슬며시 뻗어 보았다. 물고기들이 고개를 하듯 허공에 떠올랐다가 물속으로 들어가길 반복했다.
“.......멀리서 구경하는 걸 추천할 게.”
“네? 그게 무슨..... 히이이익...!”
리아의 말에 의문을 표하기도 잠시 물고기들이 이빨을 드러냈다. 수십 마리의 물고기가 이빨을 보인 채로 바라보고 있는 관경은 기괴해서 순간 난간을 붙잡고 있던 힘이 풀리고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며 수면으로 고꾸라진다.
“아... 아... 아.....”
몸이 한 바퀴 허공에서 굴렀지만,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선체의 끝 부분에 손을 내밀었다. 미끄러운 느낌이 들기도 잠시, 몸이 다시 한번 중력에 몸을 맡기고 하얀 난간이 손끝에서 더욱 더 멀어진다.
“.......내 말 맞지?.”
난간을 붙잡고 마레이의 손목을 잡은 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검은 모자가 옆을 스쳐지 나간다. 그리곤 물고기 떼 위로 미끄러지다 자취를 감춘다. 순간 놀랐던 몸이 축 늘어지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 손목을 잡아준 리아를 올려다보았다.
잔뜩 놀란 붉은 눈동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나풀거리고, 물고기들이 첨벙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매달리기도 잠시, 몸이 위로 끌어올려졌다. 선체에 두 발을 디딘 마레이는 난간을 사이에 두고 리아를 꼭 끌어안았다. 달콤한 복숭아 향을 맡으니 긴장이 풀려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일단 난간은 넘어와. 다시 넘어질 수도 있으니까.”
“네....”
지지대를 넘는 걸 도와준 리아는 새하얗게 변한 마레이의 얼굴을 보고 마구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관광코스 맞아요?”
“응, 유명해. 인명사고는 아직도 없고. 쟤네들도 사람이 빠지면 도망치거든.”
“정말요....?”
마레이를 끌어올리다 떨어진 모자에 달려드는 물고기 떼를 보면 리아의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아직까지 보고된 사고는 없어,”
리아가 한쪽 구석에 앉아 한손으로 얼굴을 슬며시 가렸다. 자신을 끌어올리며 보였던 얼굴이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어디서 본 것 같지만, 리아 같은 사람을 잊어버릴 리가 없을 테니 묘한 가시감일 뿐이라 생각하고 가볍게 넘겼다.
“슬슬 끝났나 보네. 일단 가게에 좀 들르자. 모자 좀 사야겠네. 좀 씻고 싶기도 하고.”
이동 지점으로 도착한 배가 천천히 속도를 줄여나가며 멈추었다.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가고 선장이 다가와 리아에게 자신의 모자를 건네주었지만, 그녀는 ‘남의 유품을 빌리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고 선장에게 인사를 건네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골목길 끝에서 슬며시 눈치를 살피던 리아는 한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가게로 들어갔다.
“어서오.... 아가씨!”
“안녕, 요즘 장사는 잘 돼?”
“물론이죠! 아, 옆에 분은 남자친구?”
리아가 푸우- 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친구는 아니고, 음..... 나에게 우유를 뿌린 사람이야.”
“네?!”
여성 점원의 인상이 험악하게 바뀌었다.
“그냥 사고였으니까 인상을 풀렴. 그래서 그런데 욕실 빌릴 수 있을까?”
“물론이죠!”
리아를 보며 나긋나긋하게 대답하고 있었지만, 중간중간 자신을 노려보는 눈동자에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리아는 아는지 모르는지, 옷가지와 속옷을 들고 곧장 열쇠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갔다.
리아가 사라지자, 점원 누나의 눈초리가 더더욱 날카로워졌다. 경찰이 범죄자의 몸을 뒤지듯 샅샅이 훑는 시선을 마주보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밖에 나가 있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몸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가 걱정이 드는 찰나, 문이 열리며 한 손님이 들어왔다. 이 가게에 익숙한 모양인지 점원의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점원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라벤 자작부인, 오늘 영업 쉽니다.”
“응? 무슨 일 있는.....”
라벤 자작부인이라 불리는 여성이 마레이에게 흘깃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죽일 듯 노려보는 점원의 모습을 보고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고 문을 닫았다. 시선을 돌리면 곧장 달려들 것 같은 점원누나의 모습에 마레이는 자작부인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조용히 구석으로 시선을 돌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아가씨에게 우유를 뿌렸다고요?”
“...아니, 저는.. 그러니까 사고.... 네....”
무어라 변명을 내뱉으려고 했지만, 위험한 느낌이 풀풀 풍기기 시작했기에 그냥 죄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놈팽.... 아니, 도련님은 아가씨랑 아는 사이라고 했나요?”
“아뇨... 저는 모르는데... 리아는 안다고 해서...”
“....애칭을 부르는 사이라는 거군요.”
점원으로 추정되는 아가씨는 무척이나 화를 내고 있었다. 왜 화를 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한 가지는.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분위기가 점점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점원은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마레이는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마주보고 있기에는 무섭다고 생각이 드는 기괴한 웃음을 직면할 용기가 없었다.
“처음 보는 분인데. 혹시 외부인이신가요?”
“네? 아, 발테르에서 왔어요.”
뾰족한 귀, 짐승처럼 찢어진 동공, 핏기가 느껴지지 않는 새하얀 피부. 점원 누나가 말하는 외부인이라는 말이 한 번에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잔뜩 입술을 오므리고 코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련님의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열 다섯입니다......”
“열 다섯이라..... 인간이라 그런지 확실히 빠르게 자라는군요.”
마레이의 얼굴과 몸을 한 번 더 훑은 점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가 아니라면 혹시 이름을 들을 수 있을까요?”
“아, 안녕하세요. 마레이라고 해요. 마레이 드 파웬입니다.”
“.........파웬 가문.”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리기도 잠시, 점원 누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등 뒤에 있는 하얀 벽을 후려쳐 부숴버리고 그 안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갑작스러운 점원의 행동에 마레이가 뒷걸음질 친다. 곧장 달려들 것 같은 모습에 마레이는 에르덴이 준 팔찌를 붙잡고 앞으로 내밀었다.
“그만!”
“아, 아가씨....”
“내 손님이야. 드미테르.”
리아가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며 내려오고 있었다. 물기를 머금어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이 허공을 수놓다 물기를 뱉어내고 제자리로 되돌아가길 반복했다.
“파웬 가문입니다! 아가씨!”
“내 손님이라니까.”
리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점원이 무어라 말을 내뱉으려고 했지만, 리아는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는 것으로 칼을 드미테르를 침묵시켰다.
“칼도 집어넣고. 모자 하나 꺼내줘.”
드미테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점원은 입술을 꽉 깨물고 바닥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검을 높이 들어 올려 바닥으로 내팽개치려다, 입을 꾹 다물고 소리를 지른 뒤 부서진 벽에 수납했다.
“이 복장과 어울리는 거로 보여?! 저걸로 줘.”
길쭉한 파나마 햇을 가져온 드미테르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린 리아가 구석에 걸려 있는 밀짚모자를 가리켰다.
“저건 그냥 분위기용으로 넣어둔 싸구려....”
“저걸로 줘. 난 분명히 말했어, 드미테르. 지금 내가 지갑을 두고 와서, 나중에 와서 할게. 직접 청구해도 상관없고..... 영수중 대충 끊어줘 서명할 테니까. 가면 넉넉히 줄 거야.”
“저도 이 가게 취미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가씨라면 이 곳을 다 드려도....”
말은 청산유수같이 했지만, 드미테르라 불리는 여성은 착실히 영수증을 끊어 리아에게 내밀었다. 영수증의 적힌 가격을 흘깃 보니, 마레이의 용돈으로 감당하기 힘들 금액이 적혀 있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가격이 비쌀 거라고 생각했지만, 싸구려라고 말한 밀짚모자의 가격이 상상을 초월했다.
“음.... 거리가 생각보다 꽤 되니까, 그냥 네가 직접 받으러 와. 대신에 가게 수리비도 같이 청구해. 영수증 다시 써, 사인해줄게.”
리아는 낙서를 하듯 가볍게 펜을 휘적이고 가게를 나왔다.
“리아는 유명한 사람인가 보네요.”
“.............그냥저냥. 여기서 오래 살아서 그래. 좁은 도시니까.”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지. 리아는 적당히 대답하고 걸음을 옮겼다. 물기가 남아있는 젖은 머리카락 위로 태양이 내리쬔다. 물기를 머금은 짙은 색감을 머금은 머리카락이 태양빛을 받아 확연한 은빛으로 빛났다.
“여기는 공국 왕실 주방장이 은퇴하고 나선 차린 가게. 취미로 하는 거라 가격도 싸고, 양도 많아서 자주 오던 곳이야.”
사람들이 잔뜩 서 있는 줄을 기다리며 필리아는 레스토랑에 대해 간단한 설명하기 시작했다. 실없는 잡담과 못 먹는 음식이나 좋아하는 음식 같은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 레스토랑에 입장할 수 있었다.
“이런, 누추한 곳에 귀한 손님이.....”
“뭐가 귀해. 같은 손님이지.”
억세 보이는 노인이 필리아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곧장 작게 미소를 띄우고 다가왔다.
“너무 오랜만이라, 이 늙은이가 얼굴을 잊어버릴 것 같습니다.”
“100년은 더 살 것 같은데 뭐....... 방 남은 데 있어? 소란스러운 곳은 싫은데.”
상체를 숙인 노인을 꼭 끌어안은 리아가 두 뺨에 가볍게 키스를 건넸다.
“언제나 하나 남는 곳이 있지요. 아, 일행분이 있었군요. 남자친구인가요?”
“응, 마레이 인사해. 푸루크 멜이야.
리아의 소개에 마레이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멜이라 소개받은 노인의 눈가에 주름이 가득했지만, 맑은 눈동자에 반짝반짝 빛나는 활력이 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했다.
“편하게 푸라고 불러주세요, 공자.”
“안녕하세요... 푸...”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는 마레이의 모습에 푸루크는 직접 리아와 마레이를 방으로 안내했다. 어느새 가져온 것인지 입이 길쭉한 물 주전자로 앞에 있는 유리잔의 절반을 채워 넣었다.
“메뉴는 예전에 종종 드시던 걸로?”
“자신 있는 걸로 가져다줘. 추천 메뉴가 있으면 추가로 부탁할게. 이 녀석이 물주시거든.”
“아하하하, 오랜만에 실력을 발휘해야겠군요. 아가씨의 친구분을 섭섭하게 할 수는 없죠.”
푸르크는 가슴을 탕탕 소리가 나게 두드리고 방을 나섰다. 슬그머니 메뉴의 가격표를 보고 나니 그렇게 가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보였다.
“왜? 비쌀까 봐 긴장했어?”
“아..... 솔직히 말하면... 네. 아까 밀짚모자 가격을 보고 많이 놀랐거든요.”
“.....정말 재미없게.... 너무 솔직하게 말해서 웃을 수도 없잖아.“
지난주 레스토랑의 데이트 때에 라벨라가 해줬던 데로 냅킨을 목에 둘러맸다. 매듭을 묶으려고 했지만, 끝부분이 잘 접히지 않아 자꾸 손이 허공을 맴돌았다.
“가만히 있어....
번번이 떨어져 내리는 냅킨을 보고 리아가 일어나 직접 목에 냅킨을 둘러매어 주었다.
“레스토랑은 처음이야?”
“두 번째 이긴 한데... 이런 건 처음이네요.”
리아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달콤한 복숭아향이 은은히 풍겨 코를 간지럽힌다. 확실히 묶었음을 알려주듯이 목 뒤를 가볍게 두드렸다.
“뭐, 오랜만에 괜찮겠지.....”
리아는 재밌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붉은 눈동자 위로 짐승처럼 길게 찢어진 동공이 눈에 들어왔다. 마레이를 보고 있었지만, 마레이를 보고 있지 않았다. 너머의 무엇인가를 보는 듯 표정을 짓는 그녀의 모습에 작게 웃는 것으로 화답했다.
“음식은 기대해도 좋아. 푸루크는 요리를 무척 잘하거든.”
마레이의 목에 걸린 냅킨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다가, 무릎 위에 있는 냅킨을 자신의 목에 두른 리아는 레스토랑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언제 만들어졌고, 년 수익이 얼마이고, 현지인뿐만 아니라 관광객에게 인기라는 등.
자그마한 소녀가 할 것 같지 않은 이야기를 쭉쭉 이어나갔다. 리아는 대화에 목마른 사람처럼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발테르의 총독과 여황제가 내놓은 정책과 정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신문의 가십거리를 주로 보는 마레이에게는 무척이나 어려운 이야기라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그런 이야기를 남자에게 하면 인기가 없답니다.”
“.....생각보다 빨리 나왔네.”
삐딱하게 대답한 리아의 태도에도 푸르크는 음식 카트를 밀며 그저 웃고만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여러 음식들이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보기에도 즐거울 뿐만 아니라, 음식 향조차도 입맛을 다시게 하는 고급스러운 요리들이 차려져 있었다.
“푸루크는 나가주지?”
“식사 시중이 필요하신 게 아닌가요?”
“내 나이가 얼마인데.”
반개한 리아의 눈이 작게 웃고 있었다.
“아가씨의 나이의 숙녀는 목에 냅킨을 두르지 않습니다. 노만이 안다면 잔소리를 늘어놓을 테지요.”
“응? 이 모습이 싫은 걸까? 우리들의 장점이 아닌가. 나이에 비해 무척이나 어려 보이는 거. 옛날 생각 좀 나라고 했을 뿐인데. 마음에 안 들었나?”
푸루크의 갈색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그리고 입을 가리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가 가슴의 한 손을 올리고 고개를 크게 숙였다.
“무척이나 그리운 옛날이군요. 이 늙은이를 위해 남자친구분도 같이 노력해주셨으니, 감사의 의미로 디저트는 제가 사야겠군요. 지금부터 준비해야 될 테니, 실례지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시중을 들 인원을...”
“필요 없어.”
못 본 사이에 정말로 아가씨가 되셨군요. 푸르크가 쓰게 웃었다. 그래도 즐거워 보이는 노인의 모습에 마레이도 잔잔하게 웃으며 방을 나가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저기.. 냅킨을 목에 두르면 안 되는 건가요?”
“안 되는 건 아냐, 다만 아이들이나 노인들이 주로 하지. 테이블 매너를 이야기한다면 보통 무릎 위에 올려놓는 게 맞겠지.”
리아도 냅킨을 목에 두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릎에 두르고 있었지만, 자신을 한참 보다가 다시 목에 두른 걸 보면 일종의 배려였다고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요. 이런 건 잘 몰라서.”
“모르는 건 상관없어. 알면 되니까. 식사 중에 빤히 바라보면 부끄러우니까, 식사를 마저 해주겠어?”
기특하다는 듯이 흥흥 소리를 내며 코웃음 소리가 슬며시 새어 나왔다. 슬며시 붉어진 얼굴로 말하는 리아의 모습에 계속 바라보기도 미안했다. 그녀의 포크가 그릇 위에서 작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필리아야.”
“네?”
“내 이름.”
푸루크가 호언장담했던 대로, 어디서도 먹어본 적 없는 맛있는 디저트를 전부 먹고 나서 리아가 대뜸 입을 열었다. 턱을 괴고 웃고 있는 그녀는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마레이를 보고 있었다.
“필리아... 예쁜 이름이네요.”
“응? 반응은 그게 끝이야?”
“어.... 유명한 분이에요?”
“하하하하, 아니, 그냥. 뭐... 그렇지.”
필리아가 웃고 있었지만, 그냥 그뿐이었다. 잔뜩 즐거워하던 이전과는 다르게, 웃음에는 시시한 반응에 떨떠름함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찻잔을 들고 있는 손이 미묘하게 떨렸다.
“그래, 나쁜 반응은 아니네.”
리아. 아니, 필리아는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래. 오히려 이래서 재미있는 반응일지도 모르겠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착 가라앉은 눈동자가 마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필리아는 진득하게 웃고 있었다. 비웃는 것 같지는 않았다. 차분하게 변한 눈동자가 그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좋아, 널 믿어줄게. 나를 정말 모른다는 사실을. 우연히. 정말 우연히. 나와 공국에서 만났다는 사실을 모두.”
필리아는 처음에 자신의 이름을 아는 듯했다. 하지만 라벨라와 자신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걸까.
“우리 예전에 만난 적이 있나요?”
“아니.”
은빛 머리카락이 허공에 가볍게 춤을 추었다.
“리아는 저를 얼마나 알고 있는 건가요?”
“그냥, 이름만. 우연치 않게 들었을 뿐이지.”
“아까 점원분께서 저를, 아니. 파웬 가문을 무척이나 싫어하셨는데 필리아도 같나요?”
“드미테르 또한 구질구질한 과거의 망령일 뿐이야. 나는 빛바랜 영광을 누린 적도, 받고 싶지도 않지. 파웬 가문의 초록용라든지, 여황제에게 별 불만도 없어. 뭐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하면 제 역할에 충실한 멋진 여성들이라 생각하는 쪽.”
누군가를 칭찬하는 건 좀 부끄러운 일이네.
필리아는 그렇게 중얼거린 뒤 입을 꾹 다물었다.
다시 붉은 눈동자가 떠졌다.
그녀는 미련을 털어버린 듯,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에 두른 냅킨을 풀어내고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자신을 따라 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어색하게 접힌 마레이의 냅킨을 흘깃 보며 조용히 말했다.
“좋아, 그러면 하던 거나 마저 할까? 알려주고 싶은 게 꽤 많으니까 오늘 하루는 빽빽할 거야.”
필리아는 가볍게 흥얼거리며 식당을 나섰다. 왜인지 모르게 은발의 아가씨는 무척 홀가분해 보였다.
“계단을 좀 많이 올라야 되니까, 조금 쉬다 갈까?”
식사가 끝나고 네 시간 동안 쉴 새 없이 걷던 필리아가 카페를 가리켰다. 빽빽하다고 말하기에도 부족했다. 숨 돌릴 시간도 없이 걷고,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차를 얻어 타고, 뛰어다녔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실례임을 알았지만, 의자에 앉자 몸에 힘이 전부 풀려, 그대로 테이블 위에 널부러진 수밖에 없었다.
“내일부터 일정이 있어서, 오늘 아니면 시간이 없어. 남자애가 체력이 그게 뭐야?”
“무리에요... 리아. 이야기해준 거에 반도 기억 안 난다구요. 너무 정신없이 뛰어다녀서...”
테이블에 엎어진 자세 그대로 커피를 홀짝이는 필리아의 모습에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몇 번 쉼호흡을 하고 정자세로 앉아, 그녀가 건네준 커피를 받아마셨다.
“응...? 조금 이상한 맛인데...”
“아, 실수!”
커피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맛이 났다. 살짝 비릿하면서도 이상한. 다시 홀짝이려는 순간 필리아가 마레이의 커피를 잡아채 바닥에 쏟아 부었다. 그녀의 격한 반응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지만, 카페 메뉴에 ‘블러드’란 단어가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으으.... 지금 저.. 방금...”
“사람 피는 아니니까! 괜찮아! 아, 마음에 들어? 내 거라도 마실래?”
필리아는 무척이라도 당황한 듯, 주저리주저리 떠들기 시작했다. 오늘 처음 봤지만, 언제나 여유롭고 가끔씩 어른스러운 그녀의 모습과 달라서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웃지 마.... 나도 모르게 실수했네. 으으... 오늘 현금 거의 안 가지고 나왔는데... 루르, 커피 서비스돼?”
“안됩니다.”
카페점원과도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점점 그녀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지 궁금해졌지만,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저 쓰게 웃고 지갑을 꺼내 일반적인 커피 하나를 시켰다.
“뱀파이어들이 많이 있으니 조금 신기하지?”
“그것보다는... 그냥 사람이 많아서요.‘
“발테르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 발테르에서 왔다면서 이게 많다고?”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그전에는 시골 마을에서 살아서.....”
점원이 곧장 주문한 커피를 마레이 앞에 가져다주었다. 서비스라면서 작은 조각 케이크를 둘 사이에 두고 마레이에게 잘해보라는 듯이 윙크를 했다.
“그럼 발테르에는 왜 간 거야?”
“엄마. 아니, 이모가 돌봐주시기로 해서요.”
“이모?”
“아, 라벨라 드 파웬... 이요.”
필리아가 커피잔을 깔끔히 비워냈다. 한 잔 더 달라는 그녀의 요구에 점원은 돈은 있냐고 묻고, 필리아는 그저 방긋 웃기만 했다. 절대 안 된다고 말하던 점원은 한숨을 내쉬고 곧장 커피를 가져왔다.
“엄마라 부르는 걸 보면, 마레이는 차기 가주의 양자로 들어간 거야?”
“네, 뭐.”
“으음.... 열여섯이라고 했나?”
“열다섯 살이요.”
“근데 발테르에 다닌다고?”
“아, 월반했거든요.”
대단하네, 짧게 대답한 필리아는 의자 위에서 다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마레이를 중간중간 훑어보면서 기쁜 듯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자신이 발테르 학교에 다닌다는 이야기와 나이 이야기를 안 했던 것 같은데.
“인간들의 나이는 짐작하기 어렵네. 그래도 열다섯이라... 좀 어리네. 그 애보다...”
필리아의 말이 끊겼다. 마레이도 그녀의 말을 집중하고 있지 않았기에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듣지도 못했고, 몇 가지 드는 궁금증도 묻지도 못했다. 다만, 두 사람의 시선이 카페 안에 틀어져 있는 텔레비전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황제께서과 건국절을 맞이하여......
화면 안에서 공왕이 한쪽 무릎을 꿇고 황제의 손등에 키스하고 있었다. 화면 구석에서 익숙한 얼굴이 정복을 입고 황제 옆에서 공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왕과 똑 닮은 소년도 예식에 맞추어 황제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장면이 바뀐다.
“재미없네. 구경할 건 많지만, 시간은 없으니까 마지막에는 제일 좋은 걸 보러 갈까?”
“네, 필리아... 아, 필리아 누나.”
“...... 나, 그 호칭 안 좋아해. 그냥 리아로 불러.”
새로 바꾼 호칭에 질색하며 마레이의 손목을 잡아 이끄는 리아의 모습에 점원은 ‘불장난은 안 됩니다.‘라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물론, 리아는 ‘헛소리하지마 루르.‘라고 일축했고 카페를 나섰다.
저 위에서 종소리가 들려온다. 묵직한 황동의 울음소리에 계단이 덜덜 떨리는 것만 같았다. 원형 계단 중간중간에 있는 창문에서는 태양 빛이 아스라이 들어오고 있었다. 먼지가 반짝이며 허공을 잠시 맴돌다, 그림자 속으로 잠긴다.
“조, 조금만 쉬었다 가요....”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드문드문 창문이 있는 탓에, 계단을 오르다 밖에 풍경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여긴 진짜 마음에 드는 사람만 데리고 오는 특별 서비스라고? 아무나 못 오는 곳이야.”
“네...... 그래도 잠시만요.”
필리아의 말처럼 아무나 못 오는 곳이 맞았다. 교회에 붙어있는 종탑으로 가는 길에는, 대놓고 큰 글씨로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 인쇄된 종이가 붙어 있었으니까. 가도 되냐고 묻는 마레이의 모습에 필리아는 피식 웃고 자신이 관계자라면서 걱정하지 말라며 그의 의문을 일축했다.
“......거의 다 왔으니까 좀 쉴까?”
“그 이야기 다섯 번째 인 거 알아요?”
“네 번째야.”
과장은 나쁜 버릇이야. 필리아는 한쪽 눈을 찡긋 감고 벽에 기댔다. 은색 머리카락의 일부가 태양빛을 받아 백색으로 반짝인다.
“크사크루 자매의 수업은 듣고 싶어도 못 듣는 경우가 허다하지. 워낙 경쟁이 치열해서 말이야. 언니 쪽은 최대한 점수를 주려고 하니까 이해가 되는데. 동생 쪽은 깐깐하게 채점하는 데도 인기가 많아서 좀 신기하기도 해. 남자애들이 많은 걸 보면 역시 외모가 문제이려나.”
필리아는 발테르 학교에 대해서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줄리아 파후? 아, 그 북부 전선의 악마 말하는 거지? 외눈 안경이 어울리는 사람이 잘 없는데.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멋지다 생각이 가끔 들곤 해.”
“이체르 데 발렌타인은.... 음... 공국 출신의 다크 엘프야. 서로가 알고 있긴 한데, 사이가 별로... 아니, 내가 그런 분류를 싫어해서 말이야. 뭐, 직접 만나보면 알거야.”
학교를 다닌지 2주가 지났지만, 사실 학교에 대해서, 선생님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별로 없었다. 발테르 학교에 잘 아는 듯한 필리아의 말에 자연스레 그녀들에 대해서 어느새 묻고 있었다.
“나기사? 아사노? 처음 들어보는데, 검술? 나는 무리고 창을 주로 다뤄서 관심이 전혀 없다 보니까. 이름을 들어보면 동대륙 쪽 사람 같은데. 글쎄.”
물론, 필리아가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일리엔과 줄리아의 칭찬을 들을 때마다 어깨가 으쓱해져 버려서 다른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어느새 묻고 있었다.
“이하운..... 현대 전쟁사를 보면 가끔 나오는 사람인데 몰라? 뭐 나 같은 경우는 그 녀석이랑 어머니랑 친하기도 하니까 개인적인 친분은 있는데. 가진 힘에 비해서 털털한 태도가 좋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직무유기 같은 느낌이 들어서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 ‘냥~’이라며 컨셉을 잡는 고양이 수인 선생님이 전쟁사에 나오는 인물이라는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하운의 능글맞은 고양이 같은 모습을 떠올리면 전쟁터보다는, 학생들과 자주 장난치는 선생님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필리아도 발테르에 다니나요?”
“어떨 것 같아?”
벽에서 등을 뗀 필리아는 그저 웃고만 있었다. 다시 걷자는 듯, 마레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맞대면 손가락 한마디 차이가 날 것 같은 작은 손을 붙잡았다. 부드러웠다. 하얀 맨손에서 애매한 온기가 느껴졌다.
“동생이 다니고 있어. 대답을 듣지 못했네. 그래서, 나는... 어떨 것 같아?”
“다니는 것 같아요.”
‘그럴지도 모르겠네.‘라며 애매하게 대답을 피한 필리아가 쇠사슬로 칭칭 감겨 닫혀있는 문에 가볍게 손을 가져다 대었다. 쇳소리가 울렸다. 쇠사슬은 스스로 풀려 바닥에 굴렀다. 환한 빛이 문을 통해 쏟아진다.
“자,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야.”
햇빛을 등지고 활짝 웃는 어린 소녀의 모습에 얼굴이 잔뜩 달아오른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와서 봐봐.”
작은 손이 마레이를 더욱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빛 속으로 걸음을 옮기자,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 태양이 도시를 감싸 안고 있었다. 수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노란 태양을 받은 수로가 빛을 머금고 반짝인다.
“아름답네요....”
저절로 움직이는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말에 필리아는 기쁜 듯 웃고 있었다. 회색의 성이 중앙에 높게 솟아 있었다. 바다로 이어지는 거대한 수로가 나뭇가지처럼 뻗어있었다. 하얀 성벽이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에는 흐릿하게 초록색으로 변한 농지가 눈에 들어온다. 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것도 보였다.
빽빽이 들어선 도시 안의 건물들의 모습은 그닥 멋지다고 평가할 수는 없었지만, 다른 요소들을 모두 포함한다면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길게 이어진 커다란 산맥들이 보였다. 그 아래로, 열차 하나가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흘깃 필리아를 바라보았다. 도시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와 새하얀 얼굴, 분홍색 입술까지. 태양 아래에서 더없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외모에 자신도 모르게 왼쪽 안대로 손이 움직일 것 같았다.
필리아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녀의 몸은 마레이와 육욕의 일상을 보내는 연상의 누나들의 육감적인 몸에 비한다면 작고 초라했다. 하지만 덜 여문 꽃봉오리 같아서, 외견으로 드러나지 않는 아름다움을 내면에 머금고 있었다. 거기에 간간히 달콤한 꽃향기를 풍기는 만개한 꽃처럼 느껴져서 묘한 두근거림을 만들어낸다.
“자, 구경도 끝났으니 식사나 하러 갈까? 저녁은 내가 살게.”
“조금만 더... 보고 가면 안 될까요.”
마레이의 부탁에도 필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문 앞까지 걸어간 그녀는 망설이는 마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풍경이 소중하다면 지금 놓아줘.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붙잡을 수 없기 때문이거든. 붙잡을 수 없는 걸 잡으려 손을 뻗는 순간, 네 마음속의 아름다움은 미련으로 더러워질 거야.”
반개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필리아의 말에 움직이지 않은 걸음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녀는 피식 웃고 문에 기대던 등을 떼어냈다. 팔짱을 끼던 손이 닫혔던 현실의 문을 다시금 열었다.
교회의 종탑을 내려가는 것도 꽤나 고된 일이었다. 무릎이 상한다며 천천히 걸어 내려가는 필리아의 뒷모습을 쫓아 내려오다 보니, 어느새 저녁노을이 저 멀리 보이는 성을 붉게 칠하고 있었다.
“일단 제일 중요한 것들은 전부 보여준 거 같네. 조금 모자라지만.”
“하루종일 뛰어다녀서 기억도 잘 안 나요....”
“시간이 필요할 뿐이야. 붙잡지 노력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것들은 너에게 남아 활짝 피어나겠지. 물론 가장 마지막에 본 기억이 쉽게 나겠지. 공국의 모습을 잊지 말아 달라고 시계탑에 데려온 건 그런 이유고.”
교회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검은 차를 탔다. 필리아가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지만, 차는 천천히 도로를 달렸다.
“저녁 식사는 점심에 비하면... 조금 부족할지 몰라. 점심에는 전직이 요리사였지만, 지금 가는 곳 주인은 전직이 집사였거든. 뭐, 워낙 다재다능한 사람이라 음식도 나쁘지 않은 편이니까.“
자동차는 곧장 멈추었다. 운전기사가 나와 문을 열어주고, 필리아와 마레이를 내려놓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뒤에 차를 타고 사라졌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식당이라고 부르기에는 꽤나 규모가 큰 곳이었다. 호텔이라 부르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도심지에서 꽤나 먼 변두리에 홀로 높게 솟아있는 곳이었다. 휴업이라 쓰여 있는 팻말에도 필리아는 가볍게 문을 열었다.
“아가씨, 올해도 잊지 않고 찾아주셨군요. 말년의 복이 넘치는 것 같습니다. 작은 아가씨도 같이 오셨다면 더욱 좋았을 텐데. 대신, 멋진 청년을 데리고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공자. 편하게 노만이라 불러주시지요. 방과 식사는 준비되어있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노인. 아니, 노신사라고 부르는 게 맞을까. 주름진 얼굴이었지만, 깔끔한 인상의 노인이 끌끌 웃음을 터트렸다. 필리아를 기다렸다는 듯이 겉옷을 받고 엘리베이터로 두 사람을 이끌었다.
“아직도 펄펄한 주제에 은퇴나 해버리고. 당신이 없어서 저쪽은 엄청 엉망이라고. 이런 곳에 호텔이나 짓고 편안하게 노후를 보내다니, 국가적인 손실이야. 축제날에 영업을 하면 이해라도 하는데, 가장 돈이 되는 이때에 영업을 전부 쉬는 것도 이해가 안 돼.”
“그냥 은퇴하면서 가지고 있던 꿈인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만족할 만큼 벌었고, 만족한 만큼 살았습니다. 쥐고 갈 것도 없는 늙은 몸이 묘지기마냥 남은 그리움을 이곳에서 지킬 뿐이지요. 그리고 제가 아니면 조용한 곳에서 마법의 하늘을 볼 수 있는 장소를 누가 아가씨에게 대접해드리겠습니까.”
필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렇지만..... 노만은 아직도 펄펄하잖아. 아버지가 요즘 하는 걸 봐봐. 정신이 나간 것 같다니까.”
“저는 이미 외부인입니다. 그분께서도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이 늙은이를 상대해주시는 것은 무척이나 감사한 일이지만, 옆에 계신 공자분을 어색하게 두는 건 실례입니다. 아가씨.”
노만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꾹 눌렀다. 곧장 문이 열리고, 노만과 필리아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마레이에게 타라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도 이제 남자친구를 만날 나이군요. 이 늙은이 죽기 전에 아가씨의 아이를 한 번 안아보았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무슨, 남자친구. 그냥 오늘 만난 사이야. 아버지가 둔 감시꾼 놈들이랑 쫓아내다가 얽혀버려서.... 그냥.”
필리아가 머리카락 끝을 붙잡고 비비 꼬았다. 노만의 주름진 눈가가 가늘어지고, 입에는 작은 미소가 그려진다.
“젊었을 적에 인연은 생각보다 갑작스레 다가오는 법이지요. 제 나이가 된다면 새로운 인연은 없어지더군요. 천천히 정리할 인연들이 남아서 뒷모습을 그릴 뿐이니까요.”
“노만은 아직 젊어. 그런 이야기 하지 마. 꼭 금방 죽어버릴 것 같아서 두렵다고....”
필리아라고 생각되지 않은 여린 반응에 마레이는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착하며 가벼운 기계음을 냈다.
“저는 이만 약속이 있어서 가보겠습니다. 음식은 준비해 두었습니다. 휴가라고 직원들을 모두 내쫓아서 음식은 데워 드셔야 합니다.”
“조심히 들어가....”
“예, 공국에 다시 돌아오신 걸 환영 합니다 아가씨. 인사를 드리는 걸 깜빡했군요. 공자. 아니, 마레이 드 파웬군. 아가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네, 넷...!”
노만이라 소개한 노신사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자신의 이름을 밝힌 적이 없었다. 필리아도 이름을 듣고 나서 자신을 알아보았지만, 그는 얼굴만 보고 마레이를 알아보았다.
“펜트 하우스를 깔끔하게 치워났습니다. 아가씨와 작은 아가씨를 위한 곳인데. 한 분은 영영 찾아오질 않는군요. 슬슬.... 제 아내와 외출할 시간이 다가오는군요. 열쇠는 방안에 두었습니다.”
“엠마는....”
필리아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입술을 잔뜩 오므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늘상 같지요. 오늘 밤은 같이 있어 주려고 합니다. 이번에도 문을 닫아둘 터이니, 공자도 편한 방을 쓰시길 바랍니다. 작은 아가씨도 계시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다음에는 엉덩이를 걷어차서 데려올 테니까 걱정 마.”
“하하,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노신사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묵례를 한 뒤에 엘리베이터와 함께 사라졌다. 신기한 사람이었다. 아니, 대단한 사람 같아 보였다. 멍하니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만 있자, 필리아가 마레이의 옆구릴 팔꿈치로 가볍게 두드렸다.
“노만은 유명한 행정관이기도 했어. 제국 사람이라 역시 모르려나?”
“아, 네.....”
“슬슬... 시간이네. 마당으로 나가야 잘 보여. 따뜻한 물이라도 데워야겠네.”
필리아가 능숙하게 문을 열었다. 방이라고 생각되지 않은 넓은 공간이 펼쳐지고, 유리문 너머 녹색의 마당이 보였다. 필리아는 능숙한 손길로 주전자를 렌지 위에 올리고 불을 붙였다.
“거기 앞에 보온병 있으니까 꺼내줘. 아, 붉은색으로. 분홍색은 다른 사람 거라 가져오면 안 돼.”
노만이 데워먹어야 된다는 음식들이 따끈한 김을 내며 식탁위에 차려져 있었다. 시선을 떼지 못하는 마레이의 모습을 보고 필리아는 먼저 테이블에 앉고 마레이에게 앉으라고 눈짓을 주었다.
공국의 밤은 무척 차가웠다.
봄이 확연하게 다가왔음에도, 밤공기가 테이블 주위를 서늘하게 맴돌고 있었다. 걸친 담요 주변으로도 지나치는 찬 바람은, 더운 재스민 차 한 잔에 눈처럼 녹아버린다.
“레이디를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그리 오래 하는 거야?”
“아, 노만에 대해서 조금....”
필리아는 담요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찻잔 위로 깊은 숨결이 내려앉았다. 그리움과도 같이, 진득하게 달라붙은 숨결은, 테이블 위를 계속, 그리고 또 계속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