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얼굴을 떠올리자, 동시에 튀어나오는 욕설과, 그에 맞춰 제멋대로 자신의 비부를 쑤시는 기다란 손가락. 무의식적으로 이드리엔은 일리엔이 아닌, 마레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개새끼. 발정 난 새끼. 미친 새끼. 빌어먹을 새끼. 나도, 나도. 언니처럼 잘 조일 수 있는데.
-찌걱찌걱찌걱찌걱!
“아웃…! 미, 민감해서… 시, 싫어.. 벌써, 벌써...으읏…! 읏…!”
잠들었던 몸이었지만, 전날의 쾌감이 끝까지 올려버린 몸의 감도는 여전히 남아있었기에 몇 번의 움직임만으로 이드리엔은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쾌락에 손가락을 멈추지도 못한 채로 수음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아우읏….! 나, 날 임신시킬 거지? 응? 응… 으응… 더러운 놈… 나랑, 나랑 언니를.. 잔뜩 임심시킬 거잖아… 아우으읏… 시, 싫어…. 언니는, 언니는 흐읏…. 내, 내끄으으읏…. 히이잇..!! 아, 안에다 싸면, 싸면 안 돼… 아우으읏..!”
-쯕…! 쯔으윽! 쯔으으윽…!
단순히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가, 이제는 미칠 듯이 손가락을 쑤셔 넣던 이드리엔은, 마레이의 피스톤 질과 최대한 똑같이 손가락을 최대한 빼냈다가, 끝까지 질 안에 찔러 넣기 시작했다.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의자 밑으로 애액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아흐…. 흣…… 시, 싫어…. 갔다, 갔단… 히이잇… 계속 쑤시면 안돼에에… 미, 민감해서.. 으읏…. 머, 멈추지 않아.. 아으읏…!”
절정과 동시에 상체가 앞으로 쓰러진 이드리엔이었지만, 여전히 의자의 가장자리에 풍만한 엉덩이를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는 그녀의 손은 뻐끔거리며 애액을 토해내는 질 안으로 계속해서 손을 밀어 넣고 있었다. 마치, 어젯밤에 자신을 범한 어린 소년의 물건처럼.
그렇게 다시 한번 뜨겁게 달아오르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이드리엔은 팔에 쥐가날 기세로 제멋대로 손가락을 질 안으로 쑤셔 넣을 수밖에 없었고. 자신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질 때까지, 몇 번이나 그 자세 그대로. 아니, 중간에 바닥에 엎어졌음에도 자위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몸에 붙은 불을 약간이나마 진화시켰 때, 이드리엔은 목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겨우겨우 진정시키며 어젯밤에 자신 위에 올라타며 기분 좋게 울부짖던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으…. 흐으… 하아… 정말이지….. 말도 안되에…. 이건….. 마레이.. 으읏… 언니… 아아… 읏..! 읏..! 흐으.. 가, 갈 것...으으...”
“기분 좋지?”
익숙한 목소리에 번쩍 고개를 든 이드리엔은 자신이 얼마나 추레한 모습으로 수음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잊었는지, 멍하니 일리엔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나, 난… 언니, 나는… 그러니까…..”
초록빛 눈동자에 수음하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 담기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이드리엔은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로, 시선을 돌린다.
어느새 허벅지를 모은 채로 홍수가 난 듯 젖어버린 음부를 두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소년의 페니스를 사이좋게 받아들이며 허덕이던 사이였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이드리엔은 귀까지 빨갛게 물들인 채 일리엔의 시선을 피한다.
“이드리엔?”
허리를 숙인 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일리엔의 눈과 마주치지도 못하는 이드리엔은 애써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방긋방긋 웃는 언니의 모습은, 자신이 사랑하던 예전 모습과는 다르게 너무나 끈적하고 더 매혹적이라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아니야… 그게.. 아니니까… 읏…? 어, 언니, 왜…? 꺄아앗?!”
오금 사이를 붙잡아 슬며시 들어 올리는 언니의 행동에 이드리엔이 작게 발버둥 치지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도 모르는 그녀는 제대로 된 반항도 하지 못하고 일리엔의 이름만 몇 번이나 부를 뿐이었다.
진득한 미소를 지은 채로, 일리엔은 자신의 쌍둥이 동생을 침대 위에 눕힌다.
“읏…!”
점액으로 잔뜩 젖은 이후, 방치되었던 침대 위에는 끈적하고 피부가 아릴 정도의 냉기를 머금었다. 이드리엔은 등에 닿는 더럽고 추잡한 느낌과 함께 싸늘한 냉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 뭘 하려는 거야.. 언니…..!?”
상체만 걸친 채, 애매하게 침대에 동생을 올리는 일리엔. 곧장 동생의 길쭉한 다리를 구부리고 슬며시 자신의 어깨에 걸치는 언니의 모습에 이드리엔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일리엔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초록색 눈동자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만, 무엇인가 간절히 바라는 듯이 비부 사이로 슬며시 애액을 흘려내보낸다.
“조금만, 조금만 먹을 테니까… 응?”
정액으로 범벅이 되어 백금색 음모 위로 언니의 숨결이 닿자, 이드리엔은 알 수 없는 쾌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엇을? 어떻게? 왜? 라는 질문을 해야 되지만, 이드리엔은 핏발이 선 눈으로 스스로 언니의 목에 허것지를 걸친다.
그리고 조심스레 허리를 슬며시 들어 올린다.
“언니, 하지 마.. 제발… 제발… 언니.. 으읏…!”
윗 입은 쉴 새 없이 일리엔은 만류하고 있었지만, 이드리엔의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점점 묽어지는 정액 덩어리들을 토해내고 있는 갈라진 틈뿐이었다. 방금전까지 수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이, 분홍색이었던 클리토리스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입 맞추지 마.. 시, 싫어.. 아우읏…….! 언니, 혀를 넣으면.. 아우읏.. 아앗.. 아우으읏…!”
“이드리엔 미안해…. 미안해…. 라벨라님이 주인님을 돌려보내 달라고 징징거려서 주인님의 정액 제대로 못 먹었으니까….!”
이드리엔에게 전혀 통하지 않을, 자신에게 통용될만한 변명을 내뱉은 일리엔은 게걸스럽게 동생의 음부를 탐한다.
쯥…! 쯔으읍.. 쯥..! 쯔으읍..! 쯥..!
“아웃… 언니, 빨면 안돼에엣… 우우웃..! 언니가 빨고 있어…! 흐읏… 아, 안돼.. 으읏.. 혀를 넣어서 빨고 있어.. 아우우우..!”
주인님의 소중한 정액을 담아내고 있는 질 안에 혀를 밀어 넣으며 긁어내고 있을 뿐이었지만, 이드리엔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꿈에 그렸던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움직이지 말라는 듯이 골반을 두 손으로 골반을 잡아챈 채로, 갈라진 틈 속으로 밀어 넣은 혀가 거칠게 질 안을 헤집고 있었다.
“아우, 우우, 언니, 아웃…. ! 좋아, 좋아해.. 아우으읏… 너, 너무 빨면.. 흐으읏… 아아앙..! 간다.. 간다.. 으읏…!”
경련하듯 덜덜 떨리는 하체의 움직임을 제지하지도 못하고 이드리엔의 상체는 제멋대로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탐스러운 가슴이 중력에 짓눌린 채로 방향성 없이 움직이고 있다. 혀를 밀어 넣어 정액을 빨아 마시는 양만큼, 애액으로 가득 차서 점점 묽어지는 마레이의 정액에도 일리엔은 끝까지 혀를 밀어 넣어 거칠게 헤집었다. 그와 동시에 여동생의 갈라진 틈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탐한다.
“하아… 하아… 언니가, 언니가 내 거길... 빨고 있어.. 우읏… 그, 그만.. 미, 민감해서.... 아아아앙… 아우…. 그, 그만해.. 언니, 이, 이상하단.. 으읏.. 읏..! 어, 언니? 언니! 어, 언니이잇…! 자, 잠깐.... 시, 싫어.. 아우으읏… 아, 안돼, 안돼..... 언니 아우아아앙…!
민감해진 몸의 탓에 곧장 절정에 도달한 이드리엔은 자신의 음부를 거칠게 탐하고 있는 언니의 얼굴에 분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거칠게 애액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조금 더.. 더.. 더… 주인님의 정액을….”
자신의 얼굴에 사정이라는 표현이 좋을 정도로 애액인지, 소변인지 모를 액체를 뿜어내고 있음에도 일리엔은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것처럼, 갈라진 꽃잎 속에 혀를 무자비하게 밀어 넣고 있을 뿐이었다.
“더, 더 줘.. 이드리엔… 더, 더...”
“우으으… 으으...으읏.. 크흐으읏!!”
입을 제대로 벌리지도 못한 채, 눈에 흰자가 가득한 이드리엔이 언니의 말을 제대로 들을지는 의문이었지만, 계속해서 쾌락을 주입하는 언니의 행동에 이드리엔은 반쯤 실신한 채로 짐승처럼 길게 울부짖을 뿐이었다.
“손가락을 넣으면…. 쯔읍… 더 나오네…?”
계속해서 부르르 떠는 동생의 모습에도 일리엔은 일방적으로 이드리엔의 음부 밑에, 갈라진 틈 밑에 국화 모양으로 주름진 핑크빛 구멍에 손가락을 밀어 넣는다.
-푹..!
친언니의 손가락이 들어가자마자 정액이 잔뜩 섞인 애액이, 일리엔의 얼굴에 분사된다.
“흐으읏……! 무, 무… 으읏…! 어, 언...언니…”
“아하핫, 이드리엔. 넣은 것만으로 가버린 거야? 여기에도 가득 있지? 응? 조금만 마실 테니까.. 이드리엔.. 미안해.. 조금만이니까..!”
“더, 더러워. 하, 하지 마.. 언니,, 언니.. 으읏…! 하지마아아앗!!!”
-푸욱..! 푸욱..! 푸우욱..!
“아아아아앙, 엉덩이에 흐으읏… 손가락, 손가락, 언니 손가락이.. 으읏… 아우.. 하, 하지마아아앙…!”
“애액을 이렇게 뿜어내면서 그런 말을 해도.. 쯔으읍.. 꿀꺽. 더, 더 줄 수 있지? 넌 ‘아직’ 주인님의 정액을 안 좋아하니까.”
이미 어린 소년에게 조련되기를 수십차례였기에 길쭉하고 여린 쌍둥이 언니의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를 밀고 들어오자, 이드리엔은 고통 대신 쾌락에 젖은 신음을 길게 내뱉었다.
이 기분 좋고, 끔찍하고, 끝나지 않았으면 하길 바라는 악몽이 조금 더 이어진다는 생각에 이드리엔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른 채, 엉덩이 사이로 밀고 들어오는 언니의 혀의 감촉에 다시 한번 허벅지를 부르르 떤다.
이건 지옥이었다. 벗어날 수 없는. 그래서 더욱 무서운. 매혹적인. 지옥.
사람들이 많은 장소는 거북하면서도, 이상하게 매혹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도시의 삶에 적응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리엔이 주었던 마법 책을 집어 들고 공부나 할까 했지만, 이상하리만큼 집중이 되지 않아서 억지로 밖으로 나온 마레이가 책에 집중할 리는 없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길고 길었던 연휴를 다시 곱씹으며 스스로가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아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기분으로 채워진 자신을 되돌아보며 천천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피, 필리아? 아, 아니 공주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는지요, 공작 자제님?”
필리아는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한 손으로 쥔 양산을 빙그르르 돌리는 걸 보면 즐거운 것 같기도 했다.
“필리아라고 불러줘. 공주님이라든지, 영예라든지… 너에게는 별로 불리고 싶지 않네. 너도 공작 자제라고 불리는 건 싫지?”
짙게 깔린 붉은, 아니. 어둠을 닮은 한 쌍의 붉은 눈동자가 고양이처럼 느긋하게 웃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필리아.”
“응, 오랜만이야라는 인사보다는…. 반갑네라는 말이 더 좋겠지?”
한쪽 눈을 감으며 테이블 위에 올린 손으로 턱을 괸 필리아가 허락을 구하듯 말을 건네왔다. 밝은 태양 아래에서는 그녀의 보라빛 머리가 은색처럼 반짝여서 아름답다라는 짤막한 감정을 남긴다.
“내일쯤 만날 거라 생각했는데, 우연히 이런 곳에서 보네.”
얼굴에 흘러내린 은빛 머리카락을 귓가로 넘기며 필리아는 등을 꼿꼿이 피며 다리에 두 손을 모아 정갈하게 앉았다. 격식 없는 말과 행동들과 다르게 진짜로 아가씨라는 느낌이 들어 마레이도 따라 허리를 꼿꼿이 폈다.
슬며시 웃고 있는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하얀 치아 위로 예리하게 튀어나와 있는 송곳니가 보인다. 그녀에게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마레이는 입을 꾹 다물었고. 필리아도 마레이와 같은 것인지, 아니면 그의 말을 기다리는 것인지 가만히 마레이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별로 놀란 눈치가 아니네. 오히려 무덤덤한 반응에 내가 놀랄 것 같아.”
상처받은 듯, 축 처진 필리아의 어깨가 눈에 들어오자 마레이는 어쩔 줄을 몰라 일단 생각나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노, 놀랐어요. 필리아가 발테르 학교에 다닌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만날 줄은… 그게 어떤 말을 해야 될지 몰라서… 그게 필리아가 싫다는 건 아니고.. 저, 저는.. 그게...”
“그렇게 반응해주면 내가 잘못한 것 같네.”
아니에요! 마레이가 큰소리로 외치며 일어나자, 마레이와 필리아에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귀가가 빨갛게 물들인 채로 조심스레 의자에 앉고 바닥만 바라보는 마레이의 모습에 필리아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웃음을 터트린다.
“화도 못 내겠고 정말이지...”
붉은빛이 짙게 깔린 입술 사이로 필리아의 한숨을 길게 새어 나왔다. 마레이는 고개를 들고, 고개를 삐딱하게 세운 필리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라고 말을 할까라고... 잔뜩 생각해뒀는데, 막상 갑자기 만나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네.”
“죄, 죄송합니다.”
“어째서 사과하는 거지?”
필리아의 눈동자에는 의문만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축제때.. 제가… 필리아를...”
“내가 강제로 당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서로의 합의라고 해야되는 게 있지 않았나?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 그렇죠?”
필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술에 취한 연인들이 분위기에 취해 침대에게 홀린 것 같은 밤이었다. 일리엔이나 라벨라가 시키는 대로 이드리엔을 괴롭히고 길들일 때와 필리아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물론, 나도 첫 흡혈이다 보니 진정하지 못하고 휩쓸렸던 거고. 너도 그런 분위기에 휩쓸린 거겠지. 이해해.”
너무나 냉정한 필리아의 반응에 마레이는 머리가 차갑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 둘 다 분위기에 휩쓸려 몸을 한 번 섞은 걸로 아주 특별한 관계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니까. 왜인지 모르게 안타깝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것 같았다.
섭섭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느끼는 게 정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도 들고. 마레이는 답답한 마음에 길게 한숨을 토해내고 싶었다. 그래도 제일 크게 느끼는 감정은 확실하게 선을 긋는 필리아에게서 느끼는 섭섭함이었다.
맞아, 공주님이랑 그런 짓을 했다고 해도….
“1학년이라고 했나?”
“아, 네. 이번에...”
필리아는 고개를 간단히 끄덕였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지금에 와서야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기분 좋은 꽃내음이 난다는 걸 깨달았다. 왜인지 모르게 자신 또래의 여자아이에게 알 수 없는 끌림이 이어지고 있었다.
“두 살 차이… 아니 세 살 차이인가.”
필리아가 아무렇지 않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마레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목으로, 그리고 몸으로, 그리고 아래로. 무엇인가 생각이 났는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에 답답하다는 듯이 스스로의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그리고 폐 끝까지 눌러붙은 짙은 한숨을 토해냈다. 북적이는 광장의 모습을 보며 그 어느 때보다 담담하게 말을 내뱉는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걸 알지만, 음…… 그래. 널 좋아하는 거 같아.”
필리아는 마레이를 바라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녀의 말이 진짜인지, 농담인지 구분할 수 없었기에 마레이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수에 젖은 눈동자로 필리아는 한동안 광장을 지나는 사람들을 눈에 담았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라고 마레이가 생각을 할 무렵 붉은 눈동자가 다시금 마레이를 담아냈다.
“하지만 사랑은 아니야”
“아, 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니었구나. 사랑하지 않는다는 필리아의 말에 마레이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라벨라나 에르덴등이 이상한 것이었다. 잡힐 듯하면서, 잡히지 않는 필리아의 모습에 마레이는 알 수 없는 갈증에 목이 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눈을 가린 안대를 벗으면 이 소녀를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는 걸까. 자신도 모르게 안대 주변을 매만지고 있는 것을 깨닫고 마레이는 황급히 손을 아래로 내렸다. 필리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것 같이, 무엇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듯이 그렇게.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이야.”
갑자기 말을 꺼낸 필리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말을 내뱉으려고 하다가 입술을 꽉 닫고, 자신의 머리를 헤집고 다시 한숨을 내쉬길 반복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마레이는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그녀가 내뱉을 말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그게.”
필리아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마레이를 노려보았다. 붉은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그렇게 마레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우…… 나, 날. 내가. 내가 널 사랑하게 만들어줘.”
“네?”
마레이의 답답한 물음에 필리아는 답답하다는 듯이 눈을 질끔 감았다. 그녀의 길쭉한 귀가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참아내기 위해 겨우겨우 발버둥 치고 있었다. 다시금 마레이는 노려보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다, 다시 한 번 마레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인내심을 갖고 다시,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 말을 다시 한번 내뱉는다.
“널 사랑하게 만들어 달라고, 내가.”
필리아는 부끄러운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날이 서 있는 종족 특유의 손톱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렇지도 않았던 게 아니구나. 마레이는 몸이 흐물흐물해질 것 같은 기분 좋은 나른함에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필리아는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들고 있던 가방에서 커다란 갈색 봉투를 꺼내 들어 마레이이 앞에 내밀었다.
“그러려면…. 우선은 서로를 알아야겠지.”
“이건 무엇이죠…?”
열어봐. 필리아의 가벼운 대답에 마레이는 조심스레 실로 단추가 달린 봉투에서 실을 풀어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마레이 드 파웬에 대한 보고서. 제목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마레이는 곧장 필리아를 바라보앗다.
“하나도 안읽었어. 널 더 좋아하고 싶었거든. 그러면 이런 보고서가 아니라 내가 직접보고 느끼고 만지면서 알아야 된다고 생각했어.”
필리아는 마레이의 손에 있는 봉투를 가볍게 넘겨받더니 바닥에 가볍게 집어 던졌다. 뭉쳐지지 못한 종이 뭉치들이 허공에 제멋대로 휘날렸다. 마레이가 붙잡으려 하자, 필리아가 그의 손목을 잡고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종이들이 불에 타오르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렇게 티를 내는 건 싫지만, 그래도 보여주고 싶었어. 내 삶은 연애라는 거랑은 거리가 멀었거든. 그래서 어떻게, 무엇을 상대방에게 보여줘야 될지 몰라. 그래서 지금 서툴지만 이렇게 보여주는거야. 이게 내 진심이야. 마레이 드 파웬.”
필리아는 온전히 마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전에 부끄러웠다는 게 전부 거짓말처럼.
우쭐해져 있던 것인지도 몰랐다. 필리아가 그런 것처럼 마레이도 객관적인 느낌으로 필리아를 바라보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자, 피빛을 닮은 붉은색 눈동자가 미미하게 떨리는 게 보였고, 두 뺨이 붉게 물든 걸 볼 수 있었다.
“필리아…?”
필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슬며시 움직여 마레이를 바라보았다. 부끄러워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마레이는 참을 수 없는 애정을 그녀에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화가 난 것일 수도 있지만,
마레이가 느끼기에는 그녀는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애써 스스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너무나도 서툴러서 차가운 말로 이번일을 넘어가고 싶어할 정도로 부끄러워하고 있다 생각이 들었다.
“부르고 아무 말도 없고… 왜 부른 거야?”
“미안해요.”
“하아… 사과할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필리아의 고운 이마가 잔뜩 찌푸려졌다.
“그냥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제가 어떻게 노력하면 될까요. 필리아가 절 좋아하게 할 수 있을까요?”
마레이의 적극적인 물음에 필리아는 슬며시 웃어 보였다. 그리고 붉은 눈동자를 한동안 감더니, 다시 눈을 뜨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게, 이제는… 아니. 이번에는 나도 모르겠네.”
필리아는 어깨에 닿은 은보라빛 머리카락을 빙빙 꼬며 다시금 광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웃고 있는 것 같았다.
필리아와 마레이는 카페에 앉아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서로 진지한 질문을 건네고 주기를 반복하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카페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길을 건너려는 마레이를 붙잡고 필리아가 멱살을 잡고 짧은 프렌치 키스를 건넸다.
입술 박치기라고 하는 게 옳을 것 같은 어색한 입맞춤.
“힘내줘, 나의 왕자님.”
들릴 듯, 말 듯 한 필리아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간다. 서둘러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겼다. 부끄러움에 그녀의 귀가 새빨갛게 물든 것인지, 저녁을 다가서는 노을의 빛이 붉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필리아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사라졌다. 필리아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라벨라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입을 가리고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한 마디를 남겼다.
“꼬맹이 주제에 잔망스럽네.”
“....해서, 제군들보다 어리지만, 동급생임을 명심하길 바란다.”
줄리아의 파란 눈동자가 강의실을 꼼꼼히 훑었다. 앉아있는 학생들을 그녀의 시선이 닿자 다들 몸을 크게 움츠렸다. 침묵으로 일관된 분위기에는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은 긴장감만이 맴돌았다.
등을 꼿꼿이 펴고 정자세로 앉아있는 학생들을 보노라면, 마레이는 여기가 벨테르 학교인지, 말로만 듣던 제국군사관학교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줄리아는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했는지, 옅은 미소를 띄우며 마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궁금한 게 많을 것 같군. 간단히 질문 시간을 가져보도록 할까?”
병사들은. 아니, 학생들은 줄리아만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을 시선들이었지만, 마레이가 넘치도록 쏟아부은 정액이 배 안에 가득 들어있고,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팬티가 허용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정액덩어리들이 튀어나올 것 같다 보니 평소보다 딱딱한 얼굴로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화가 난 듯한 그녀의 모습에, 평소에도 줄리아 앞에서 입을 꾹 다물기 급급했던 학생들이 긴장한 것은 어찌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질문 시간을 준다고 했다.”
줄리아의 말이 끝나자, 학생들이 전원 손을 번쩍 들었다. 이 신기한 광경을 보면서 마레이는 알 수 없는 압박감을 잔뜩 느끼고 있었다. 왜인지 이대로 줄리아에게 모든 걸 맡기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마레이는 서둘러 맨 앞에 앉아있는 남학생의 이름을 조심스레 불렀다.
호명된 남학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줄리아를 흘깃 보더니 몸을 크게 움츠렸다.
“조, 좋아하는 운동이 있어?”
“딱히 싫어하는 건 없습니다.”
줄리아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학생이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레이를 보는 눈동자에서 먼저 불러줘서 고마워라고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다음.”
“넷! 마레이 드 파웬은 무슨 수업을 들어?”
“다음.”
“라벨라 드 파웬 감찰국장과는 무슨 관계야?”
“다음.”
“혹시 진로가….”
“다음.”
“15살이면….”
줄리아가 다음을 외치면 학생들은 순서대로 질문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마레이는 이 기괴한 상황에 영문도 모른 채로 대답을 이어나갔고, 줄리아는 무작정 진행할 뿐이었다.
“다음”
“주, 줄리아 선생님.”
“무슨 일이지?”
마레이가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헙- 하고 숨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레이를 바라보는 파란색 눈동자에는 애정이 잔뜩어렸기에, 당사자는 모르고 있었지만. 북부전선의 마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겁 없는 전학생의 모습에 다들, 이 상황이 어디까지 흐르게 될 것인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지, 질문이 여러 개인 사람도 있을 텐데, 이렇게 강요하듯이 하면…..”
“강요? 내가? 강요했나?”
-아닙니다!!!
줄리아가 뒤를 돌아보며 묻자, 약속이라도 한 듯, 반 아이들이 같은 말을 내뱉었다. 마레이의 행동에 몇 명은 눈을 질끔 감고 있었다.
“뭐… 그래도,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사과하지. 나는 끼어들지 않을 테니까, 파웬에게 자유롭게 질문해보도록.”
학생들이 예상한 반응과는 정반대로 행동하는 줄리아의 모습에 다들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줄리아는 더이상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는 듯이, 팔짱을 끼어 가슴을 받치고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쭈뼛쭈뼛 한 여학생이 손을 들었다.
“저기….. 그 어제.. 필리아 공녀님이랑 같이 있던 사람 맞아?”
“네? 필리아 공녀님이, 필리아 더 블러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응, 공국의 공주님…..”
줄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묻는 소녀의 모습에 마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그리 기쁜 것인지, 방금전 질문을 한 여학생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두 눈을 크게 뜬다.
“공주님이랑은 무슨 관계야?”
“네? 치, 친구라고 해야 되나… 필리아에 대한 질문은…..”
“개인이 곤란해하는 질문은 삼가도록. 시간이 20분쯤 남았으니, 자유롭게 질답하도록. 나는 남은 업무가 있으니 처리하도록 하지. 조례는 이걸로 끝낸다. 길리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나와 마레이가 버벅거리며 대답하자, 줄리아는 가볍게 박수를 치며 가볍게 조례의 끝을 알려왔다. 줄리아가 호출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갈색 머리카락의 포니테일 소녀.
“예, 전체 차렷, 선생님께 경례!”
-감사합니다~
길리아라 불리던 소녀의 주도하에 학생들의 인사가 끝나자, 줄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마레이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뒤 교실 문을 나섰다. 칠판과 가장 가까운, 줄리아가 직접 지정한 자리에 앉았다. 학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공녀님이랑 진짜로 사귀는 사이인 거야?”
“공녀님이랑은 언제 만난 거야?”
“파웬가와 블러드가 약혼인 거야?”
필리아에 관한 이야기가 쉴 새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필리아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는 마레이는 잘 모르겠다고 말끝을 흐리자, 질문의 방향성이 아무렇게나 흘러가기 시작했다.
“전학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조금… 그게....”
“수업은 뭐 들어?”
눈치 빠른 몇몇 학생들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들어올 때마다 빠르게 화제를 돌려주고 있었다.
“이하운 수업 듣는다고 했지? 그거 악평이 자자하던데 괜찮은 거야?”
“좋으신 분이에요.”
“선배에게 들어보니 시간 내내 달리기만 시키고 대련이라는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괴롭힌다던데, 진짜야?”
“그, 글쎄요. 그런 걸 해본 적이 없어서...”
마레이에게 이하운이란 호탕한 누나가 있다면 그런 느낌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시간표를 이렇게 빡빡하게 짜면 공부할 시간은 있는 거야?”
“그, 그러게요….”
셀린 페르디낭이 해주었던 이야기가 똑같이 튀어나왔다.
“일리엔이랑 이드리엔 수업을 동시에 듣는 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네?”
“원소 마법이랑 백 마법 이론기초 및 실습 말이야.”
“그, 그러게요….”
라벨라가 짜준 대로, 일리엔이 추천한 대로 수업을 있는 그대로 들었던 마레이였기에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아직 감조차 오지 않았다. 셀린 선배가 경악했던 것처럼 동급생들이 미쳐버린 듯한 황천의 시간표를 가지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조심해야 돼, 적정 성적을 맞추지 못하면 졸업을 못 한다고…. 4, 5년 동안 다니는 사람들도 꽤 있으니까. 뭐, 그런 사람들은 보통….”
셀린이 해주지 않은 무서운 이야기가 갑작스레 튀어나왔다. 졸업이라는 건 교육과정을 이수하면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나. 마레이가 아는 상식 내에서는 그랬다. 다만, 전학생의 무분별한 시간표를 보고 걱정하는 반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마레이가 아는 상식과는 무엇인가 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이체르… 이 사람은 좀 위험한 소문이 돌고 있어. 통일 전쟁 때, 금지된 마법을 썼다는 소문이 있어. 왠만하면 안 듣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금지된 마법이요….?”
여학생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지된 마법이라는 게 무엇인지 몰라 되묻는 거였지만, 마레이의 얼떨떨한 반응을 정말 마법을 썼냐로 듣는 것 같았다.
“어디서 온 거야? 응? 사실대로 말해줘. 어차피 여기의 대부분은 떳떳하게 온 애들이 아니니까~.”
“바, 방벽 주변에 있었어요.”
“방벽? 거기 진짜로 좋았는데… 부럽네~.”
마레이는 자신이 살던 작은 마을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호응해주는 여학생은 눈 덮인 설산이라든지, 휴양지라든지. 그런 이야기를 하고는 해서 무엇인가 핀트가 조금씩 어긋나는 것 같았다.
“파웬 가문이면, 황제님을 직접 본 적 있지?”
“텔레비젼에서만… 아, 공국의 축하 사절 때 직접 보긴 했어요.”
황제에 관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모른다는 마레이의 반응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곧장 화제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라벨라 감찰청장은 어떤 분이셔?”
“라벨라님이랑 같이 산다고?”
라벨라의 양자로 발테르에 온 것이었지만, 다른 학생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는 눈치였다. 적당히 대답할 수 있는 수준으로 대답하고 있었지만, 끝없이 밀려드는 질문들에 슬슬 버겁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자, 전학생이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있잖아.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
어느새 끼어든 갈색 머리 소녀의 모습에 다른 아이들은 모두 적당히 대답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흑색의 눈동자가 무척이나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지는 여자아이였다. 반장을 맡고 있는 것인지, 방금전에 줄리아에게 대표로 경례를 주도하던 여자아이.
“길리아 마리타라고 해.”
마레이보다 살짝 크다고 해야 할까. 살짝만 고개를 올리면 마주 볼 수 있는 키. 앞머리를 남겨두고 깔끔하게 묶은 포니테일. 짙은 눈썹과 오똑솟은 코.
“마레이 드 파웬이에요.”
길리아가 손을 내밀자, 마레이는 본능적으로 그녀와 악수를 했다. 부드러워 보이는 피부와 다르게 손에 딱딱하다 생각이 드는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무기술을 배우고 있는 걸까, 외견과는 다르게 악력이 있는 손이었다.
“라벨라님의 후계가 있다고 들었는데, 너였구나?”
“아… 네.”
양자(養子). 길리아가 소리를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뻐끔거렸다. 마레이는 흠칫 놀라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 사실이었기에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발테르의 총독이라는 명함이 붙어있지만, 사실상 발테르를 소유하고 있는 파웬가문에 대해서는 마레이가 알 방법은 없었다.
아니, 그런 것을 신경 쓰기에는 너무나 매력적인 여체들이 매일매일 어린 소년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있었다. 아니, 애정이라는 말보다는 애욕이라는 말이 정확하지 않을까. 발정난 짐승처럼 소년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 누구도 현실감이 들지 않을 광경이었으니까.
그리고 파웬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라벨라 또한 양모(養母)로서 마레이를 교육(?)하고 있다보니, 그런 것에 신경쓰지 못한다는 말이 정확하겠다만.
“먼 방계가문이니까, 기억 못 할 수도 있겠네. 뭐, 앞으로는 친하게 지내자고. 마레이.”
강인한 여자아이였다. 여자아이라는 말과 여성이라는 말의 기로에 서 있는 길리아 마리타는 여전히 마레이의 손을 놓지 않고 천천히 위아래로 흔들었다.
길리아의 입술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자신을 훑어보는 검은 눈동자에 마레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라벨라와 다른 여인들이 보는 애정 어린 시선과 다르게, 이상하게도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친척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흑안. 희귀한 눈동자 색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흔하지 않은 색. 오늘 첫만남인데도 불구하고, 친척이라는 이야기에 마레이는 묘한 친근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라벨라가 더욱더 혈연적 의미로 가깝겠다만, 어린 소년이 느끼기에는 사회생활을 하는 미모의 직장인은 너무나도 멀었고, 같은 학교, 같은 반에 있다는 점에서 묘한 심리적 거리감을 단번에 줄이고 있었다.
물론, 매일매일 이모(?)에게 임신을 강요하듯이 질내에 건강한 아기씨를 전부 자궁속에 뱉어내는 것으로 모자라, 각종 봉사를 받고 있는 소년이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나도 좀 놀랐어, 라벨라님이 양자를 들였다니. 뭐, 마리님이 자식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길리아에 대해서 아는 것도 딱히 없었기에 마레이는 적당히 웃어 보였다. 친척이 있었다면, 라벨라는 왜 길리아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가. 그런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친구를 사귀기 힘들어 보였는데 어떻게든 될 것 같다는 느낌에 그런 생각은 아무래도 좋았다.
“총독님은 만나 본 거야?”
“로렌님이요? 라벨라… 아니, 어머니가 다음에 시간이 될 때 인사드리러 가자고 말은 하셨어요. 요즘 이래저래 바쁘시다고 하셔서...”
발테르의 총독. 녹색의 용 등 수많은 이름이 있는 로렌 드 파웬이라는 용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라벨라는 로렌을 볼 틈도 없이 정말로 바빴기에 마레이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주인님이 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집으로 달려와, 어서 오세요 키스에서 시작해서, 오후 내내 비어있던 자궁에 다시 한번 끈적한 정액으로 자궁에 가득 받아들여야 하고, 식사 직전에 가벼운 샤워(?)에서 온몸으로 봉사 해야 되는 등, 할 일이 정말로 많은 그녀였다.
거기에 요근래에는 일리엔 크사크루라는 새로운 섹스용 펫이 들어왔기에, 조금이라도 마레이와의 단둘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에게 로렌을 만나는 것은 조금 뒤로 미뤄도 되는 일이었다.
물론, 그녀가 마레이를 탐탁치 않게 여기기에 조금 더 시간을 끌고 있다는 말이 정확하겠지만, 그 사실을 벤치에 앉아있는 소년소녀가 알 일은 없었고….
“부럽네, 나도 한번 뵙고 싶어서 연락을 드렸는데. 답장도 안 오던데.”
길리아 마리타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여전히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게 자조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기에 마레이는 어색한 듯 뺨을 긁었다.
“식사는 괜찮은 편이지? 맛도 맛이지만, 발테르 학교의 식당은 가격적인 면에서 훌륭하다니까.”
“아, 네….”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라벨라의 사랑이 가득 담긴 도시락이 있었지만, 마레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길리아와 식사를 이어나갔고, 잠시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바로 지금이었다.
“학교는 어때? 일반적인 학교랑은 많이 다르지?”
“아, 네. 수업을 선택해서 듣는 거랑 다양하고 또...”
그녀의 이런저런 질문에 성실히 대답하고 있었지만, 시골 촌놈이라고 부를 수 없는 마레이에게 있어서. 여전히 발테르의 문물들은 전부 신기하고 놀라웠기에 적당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길리아는 재미있다는 듯이 작게 웃고는 했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꺼림칙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마레이는 이렇게 친절한 친척을 안 좋게 보려는 자신을 몇 번이나 타이르기를 반복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자주 물어보고, 한 번 놀러 가도 될까?”
“네? 집에요…?”
“응, 라벨라님도 뵙고 싶거든. 한 번도 직접적으로 만난 적이 없어서. 멋진 분이잖아, 아름답고….”
라벨라를 칭찬하는데, 마레이는 묘한 고양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람들이 흠모하는 라벨라 드 파웬의 몸 안에 자신의 욕망을 전부 쏟아내는 것으로 모자라, 천박하게 엉덩이를 흔들며 페니스를 요구하는 모습을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라벨.… 아니, 어머니에게 여쭤봐도 될까요?”
“물론이지. 역시, 너도 라벨라님이라는 말이 익숙하지?”
길리아의 말에 마레이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찰국의 마녀와 그녀의 양자의 비밀스럽고 끈적한 관계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아직 마레이가 라벨라를 어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당연할지도 몰랐다.
물론, 이 모습을 라벨라가 본다면 본인의 훈육(?)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다며 속으로 좋아하고 있겠다만….
“나는 오후 수업이 따로 있어서 슬슬 출발해야 될 것 같네. 고마워. 마레이 드 파웬.”
길리아는 치마 끝을 붙잡고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귀족 가문의 방계를 본가로 초대하는 것에 의미를 둔 길리아 마리타가 받아들인 의미를 친척이 집에 온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인 마레이였지만 두 사람의 오해가 풀리는 데는 조금 오랜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길리아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지만, 아직 점심시간은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라벨라가 준 도시락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억지로 먹고 싶지는 않았기에 마레이는 소화라도 시킬 겸 학교를 무작정 걷고 있다가, 익숙한 뒷모습의 그의 눈에 들어왔다.
무리를 이끈다는 표현이 옳은 걸까. 앞서 걷는 세 명 뒤로 여러 명의 학생들이 따라 걷다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지 몇 명은 웃음을 크게 터트린다. 태양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슬며시 흔들리고, 슬며시 웃는 모습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슬며시 보인다.
반가운 얼굴에 마레이는 저 멀리 가는 사람들을 무작정 따라 걸었다. 필리아와 함께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다가가자, 필리아가 슬며시 무리에서 떨어진다.
“아, 여러분.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먼저 자리를 옮길게요.”
아쉬워하는 사람들과 손을 흔들고 홀로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필리아의 모습에 마레이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필리아가 자신을 본 것인가 순간 생각이 들었지만, 필리아는 마레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여전히 똑같은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아갔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하는 궁금증에 필리아의 뒤를 조심스레 뒤따라가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날카로운 무엇인가가 마레이의 배를 쿡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그대로 옷을 찢고, 살을 파고들 것 같은 위험한 느낌에 마레이는 몸이 꽁꽁 얼어붙는 느낌이 든다.
날붙이? 마레이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감각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자, 잠시만요.. 저, 저는….”
“마레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배를 누르고 있던 창날이 치워진다.
“필리아….?”
“깜짝이야…. 또 암살자인 줄 알았잖아.”
필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키보다 커 보이는 창을 놓자,바닥에 스며들듯이 사라진다. 지난주 품 안에 안겨 바들바들 떨던 모습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는 소녀가 머리카락을 베베 꼬며 시선을 돌린다.
“깜짝 놀랐다고요...”
“차라리 부르지 그랬어. 큰일 날 뻔했잖아! 정말이지….”
마레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필리아를 끌어안기 위해, 팔을 벌려 한 발자국 내밀었지만, 흡혈귀 공주님은 갑작스레 다가오는 어린 소년의 모습에 무엇이 그리 놀랐는지, 한 발자국 뒷걸음질 친다.
여체에 둘러쌓인 생활을 하다 보니, 정작 여심에 무감각해진 마레이는 곧장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필리아를 꼭 끌어안았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품 안에 가득 들어오는 소녀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필리아, 잘 지냈어요?”
“어...음.. 응. 하루 밖에 안 지났어.”
포옹을 풀고, 마레이는 다시 한 번 흡혈귀 아가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맞추려 하면서도, 정작 눈이 마주치면 붉은 눈동자가 다른 곳을 휙 하고 움직인다. 부끄워하는 기색이 가득한 그녀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마레이는 몇 번이나 그녀와 눈을 마주보려했고.
더이상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필리아는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앙다물기를 잠시, 눈을 한 번 질금 마레이의 손목을 잡아 이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할까?”
자신 있게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과 달리 마레이의 손목을 잡은 자그마한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과 동시에 살짝 촉촉한 느낌이 들었다. 여유로워 보이려는 모습과 다르게 실제는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의 차이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애써 강한 척 하려는 필리아의 뒤를 따르자, 그녀는 교내 카페로 마레이를 이끌었다.
“잘 지냈어요?”
“하루밖에 안 됐다니까…..”
“그래도요.”
마레이가 웃으며 대답하자, 필리아가 이전과 다르게 고개를 슬며시 끄덕이더니,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응.’이라 짧게 대답한다.
“공주님은…. 아, 공주님은 싫다고 했엇죠? 필리아 공주님은..”
필리아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풋하고 입을 가리고 웃었다. 길리아와 다르게 눈가가 둥근 호선을 그리며 웃는다.
“그냥 이름을 불러줘. 그리고 공주님이 아니라, 대공녀님이겠지.”
“네, 필리아.”
공국에서 본 방송에서는 공주님이라 부르기에 그런 줄 알았지만, 필리아에게 직접 들어보니 대공녀님이라는 말이 옳은 것 같았다.
“오후 시간 끝나고 찾아가려고 했는데, 네가 먼저 와버렸네.”
필리아는 애써 웃고 있었지만, 언제나 올곧게 펴진 어깨가 슬며시 내려가 있었다. 그리고 무어라 말하는 대신 은색 머리카락을 베베꼴 뿐이었다.
“보고 싶었는데, 마침 보였어요.”
“아, 정말이지….”
필리아는 말을 이어 하지 못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고 얼굴을 가린다.
“....말라고.”
“예?”
“그런 말 아무렇게 하지 말라고, 부끄러우니까.”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차가운 커피를 쭉쭉 빨아 마신 필리아의 귓가가 묘하게 붉은 게 귀여워서 이상하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레이의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은 지, 상기된 얼굴을 가릴 생각도 없이 마레이를 째려본다.
“부끄러웠어요?”
“당연하잖아…. 정말이지… 그런 일도… 일도.. 해버리고….”
두통이 몰려오면서도 이상하게 싫지 않은 기분에 필리아는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던 어제와 다르게, 오늘 보여주는 여린 모습에 마레이는 당장이라도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은 욕망에 휩싸일 것 같았다.
“서로 믿고, 내가 너를 좋아하게 해달라고 말했 던거 기억해?”
“네!”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리고 기쁘게 대답하는 마레이의 모습에 필리아는 당황한 듯 입술을 오므리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 한숨이 늘어가는 기분이었다.
“.......충고하나하자면 그렇게 너무 몰아붙이면 부끄럽다고.”
필리아의 목소리가 끝부분에 와서는 기어가는 듯 작아진다. 핏빛을 닮은 짙은 눈동자가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이, 눈꼬리 끝에는 옅은 물기가 맴돌고 있었다.
“서로 믿는다는 말이 너무나도 달콤하게 들려서 난 두렵기도 해.”
시선을 돌린 채, 반개한 붉은 눈동자는 테이블 위에 반쯤 비어버린 커피를 담아내고 있었다. 숨을 내쉬는 듯, 눈앞의 소녀는 너무나도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그렇잖아, 누구를 믿는다는 건 상처받기 더 쉬워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누구에게 날 믿어달라는 말조차 쉽게 하지 못하거든, 심지어 가족한테까지도 말이야. 너를 위해서라는 말로, 생각으로 상대방을 위한다고 하지만. 결과가 어찌 되었든 상처를 주게 되더라.”
내가 부족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필리아는 뒷말을 삼키고 가볍게 웃어 보였다. 한숨을 내쉬는 모습보다, 힘없이 웃는 그녀의 모습이 더욱 불안하게 느껴진다. 또래라고 불러야 할 소녀가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기 때문일까.
“난 왕이 될 거야.”
필리아는 웃고 있었다. 힘없이. 아니, 이제는 너무나도 짙게 웃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귀 끝까지 올라간 입꼬리는 거대한 자조를 담아내고 있었다.
“지 애비의 등을 꽂는 미친년이라고 해도 좋아, 한 뱃속에서 태어난 동생을 잡아먹는 년이라고 불러도 좋아, 뭐라 해도 상관없어. 난 왕이 되고 싶어. 아니, 왕이 되어야만 해.”
어린 소녀의 외견과는 너무 이질적인 표정이었다. 타인에게서 한 번도 본적이 없는 표정은 두렵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웃고 있지만, 웃고 있지 않았다. 마레이를 보고 있었지만, 마레이의 너머를 보고 있었다.
“공왕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필리아가 입술을 오므렸다. 그리고 마레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무거운 침묵에도 무너지지 않은 소년의 검은 눈동자를 보고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전혀. 그딴 자리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그런데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말하는 건가요.”
“왕좌라는 건, 자신이 앉지 않으면 누군가 앉게 되니까. 내 동생이라면 차라리 상관 없어. 다만, 그 새끼가….. 잠깐. 심한 말이 나올 것 같아.”
자그마한 입에서 분홍색 혀가 슬며시 나와, 입술을 적신다. 슬며시 보이는 흰색 송곳니가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둘째, 그 창녀의 사생아. 그 녀석이 앉게 될 경우 우리 자매에게 끝은 지옥보다 더 끔찍하겠지. 뭐, 어떻게 될지는 눈에 선하니까.”
필리아는 무표정했다. 공국이라고 해도 한 왕국의 크기나 다름없는 거대한 땅의 지배자의 호칭이었다. 제국에서 단 하나 뿐인 공왕, 그리고 단 하나 뿐인 바다와 이어진 영지. 정략과 정치에 무관심한 마레이라도, 공국의 지리적 이점, 그리고 제국에서의 영향력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런 거대한 땅을, 하나 뿐인 이름은 눈 앞의 소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의 것이라 선포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는 은발의 흡혈귀 아가씨의 모습에 마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미묘하게 미지근한 온기. 자신보다 작은 손. 병적으로 하얗게 보이는 피부. 그러면서 여유로움을 가득 담아내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보자, 참을 수 없는 갈증을 느낀다.
“필리아.”
“네가 도와줄 필요는 없어. 이건 내 일이니까. 다만, 내 옆에 있으면 파웬가에서 본적 없는 더럽고 치사하고 구역질 나는 일들에 계속 휘말리게 될 거야. 날 혐오할 수도 있고, 우리라는 종족을 배척할 수도 있어. 도망칠 기회는 지금뿐이야.”
“필리아.”
“네가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될 거야. 정말로 큰 도움이 되겠지. 발테르 총독이 널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해도, 넌 파웬가의 정식 후계자니까. 그러니까, 지금 내 손을 놓으면 더러운 꼴 안 보고, 치가 떨릴 정도로 미친 인간들과 연관될 일도 없어.”
“필리아.”
“답은 네가 내리는 거야, 마레이 드 파웬. 너와 만난 게 우연이었지만 공국에서 너와 만났을 때. 너를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까 생각해봤어. 너무 쓸모가 넘치더라. 인연을 조금만 만들어 두면 엄청난 도움이 되겠다는 그런 생각을 했어.”
필리아라는 이름을 다시 부르려 했지만, 은보라빛 소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일부로 흡혈을 했어. 넌 너무 순수했거든. 조금만 좋은 말, 좋은 행동, 좋은 연인이 되어주면 분명 내 편을 들어줄 테니까.”
필리아가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 화가 나 있었다.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해야 된다 생각했어. 기회는 한순간이지만, 후회는 너무나도 오래가니까.”
흡혈귀 공주님은 손으로, 마레이가 잡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소년의 뺨 위로 손을 올렸다. 뺨에 닿은 작은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직접 마주하게 되니까. 무섭더라. 정말로 무서워서 어디로인가 숨어버리고 싶었어. ”
눈 앞의 소녀는 너무나도 화가 나 있었다. 그래,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지금 마레이에게 토해내고 있었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나도 모르게 계속 이어나갔잖아. 처음에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걸까,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니까 할만하더라. 그리고 나중에는 쾌락에 허덕이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참 웃기지?”
그래, 그녀는 자신에게 화가 나 있었다. 어디서부터 그녀가 화가 난 것인지 마레이는 알지 못했지만, 자신의 감정에 어쩔 줄 몰라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또 안타까웠다.
“필리아.”
“너도 내가 혐오스럽지? 나도 그래.”
필리아는 웃지 않았다. 아니, 웃을 기운도 없어 보였다. 왕의 자리에 뜨겁게 타오르던 그녀의 눈빛과 다르게, 붉은 눈동자는 빛을 잃고 잔뜩 흔들리고 있었다.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손아귀에 놓인 그녀의 손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리아, 당신에게 키스해도 돼요?”
흡혈귀 아가씨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무표정하던 얼굴이 잔뜩 구겨지다, 크게 떠진 눈망물이 조금씩 작아지며, 졸린 듯 눈꼬리가 축 쳐진다.
“.......위로할 필요는 없어.”
“당신에게 키스하고 싶어요. 아주 진하게. 입안 곳곳이, 가슴에도, 배에도 전부. 리아가 그런 생각을 안 하도록. 모든 걸 잊어버릴 정도로...”
“정말이지….. 정말이지… 기분 나쁜 위로야. 최악의 위로라고 할 수 있겠네.”
필리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웃고 있었다. 자조도, 냉소도, 조소도, 실소도 아닌 정말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네 진심은 알겠어. 고마워.”
필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게 기지개를 켰다.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겠다는 듯이, 축쳐진 자신을 일깨우겠다는 듯이.
“그래도, 연애소설은 조금 봐주면 좋겠네. 나 그런 거 무척이나 좋아하거든.”
수업은 없지만, 더이상 있기에는 부끄러워서 버틸 수가 없네. 안녕이야, 마레이. 필리아는 마레이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리고 걸음을 옮겼다.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작고, 또 귀여워서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점심시간은 정신없이 끝나있었다. 자신을 기다리던 음란한 노예들를 깜빡할 정도로 마레이는 필리아의 대화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말실수라도 한 걸까, 혹시 필리아가 기분 나쁘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잔뜩 키워가며 멍하니 있다가, 점심을 끝내는 종이 친 이후에야 퍼득 정신을 차리고 교실로 되돌아갔다.
지각이라는 생각에 열심히 달려가 보았지만, 교실에 있는 학생은 몇 없었고 자신이 수업이 없다는 걸 깨달은 마레이는. 그제서야 자신이 일리엔등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연구실로 찾아갔지만, 이미 다들 수업에 들어간 이후였고.
다시 교실로 돌아갈 생각에 걸음을 옮기다, 어디서부터인가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 어느새 숲을 헤메이고 있었다.
주변에 높디높은 장벽과 산맥이 자리 잡은 한적한 마을에 살았던 마레이였기에 숲이라는 건 무척이나 두려우면서 친근한 존재였고, 한참이나 필리아나 줄리아 등을 생각한 소년이 길을 걷다 숲을 거닐어도 이상함을 느끼기에는 조금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결론은 지금 마레이는 미아였다.
길을 따라 움직였기에,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되는 일이었지만. 지금 보이는 풍경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기에 소년은 앞으로 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되돌아가야 하는 것인지 고민에 빠진 것은 덤이었다.
앞으로 가는 길이 익숙하다면 차라리 나았다. 길도 아닌, 왜인지 모르게 자그만한 산과 이어진 길도 없는 방향으로 걸음이 자꾸만 나아가려고 한 게 문제였다.
묘하게 퍼져나오는 달콤한 냄새. 계속 옆길로 빠지라는 본능의 목소리에 마레이는 이번 한 번만, 딱 한 번만 본능에 따라 움직이기로 했다.
매일 밤 본능적으로 의지해, 모친이 임신하는 것에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질내 사정을 하는 소년에게 본능적인 감각이라는 것은 무척이나 친숙한 것이었으니까. 아니, 본능적에 지배되기에, 양모(養母)임에 상관 않고 극상의 여성 안에 자신의 씨앗을 쏟아붓는 것인지 모르겠다만.
그렇게 몇 분이나 걸었을까, 거대한 붉은 도리이(鳥居)가 하나 서 있었다. 아니, 수십 개, 어쩌면 백 개가 넘어가는 거대한 도리이가 늘어서 있었다. 기괴하면서도 장엄하게 느껴지는, 묘한 신성함을 느끼는 광경에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붉은 도리이를 손으로 매만졌다.
그리웠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 거대한 도리이가 그리웠다. 익숙하고, 또 두근거린다. 이 거대한 붉은 건축물이, 왜 도리이라 불리는 것인지. 그리고 왜 그리운 감정이 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길게 늘어진 도리이들의 길을 걸어갔다.
얼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한순간이라고 해야 될까, 몇 번 걸음을 옮기지 않았는데도 어느새 발밑에 있는 수백 개의 도라이를 보고 마레이는 알 수 없는 신비에 몸을 잘게 떨었다.
불쾌한 감각이었다. 마치 온몸이 잘게 조각이 난 후, 다시 재조립 되는 것 같은 그런 느낌. 속이 울렁거렸다.
“오랜만이구나 라벨라.”
익숙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마레이는 황급히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시작했고, 구석에서 마대 빗자루를 들고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필리아보다는 조금 더 연상이라는 느낌의 여자아이였다.
다만, 그 소녀는 눈을 붉은 천으로 묶고 있었으며, 뾰족 튀어나와 있는 금색의 여우 귀에는 붉은색 글씨로 덧칠된 부적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기괴한 모습의 소녀였다.
그러면서도 신성하게 느껴졌기에, 불안하면서 동시에 두렵게 느껴진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너무나도 그리웠다.
“라벨라?”
여우 소녀는 앞이 보이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등하더니 마레이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아… 라벨라가 아니군요. 라벨라의 냄새가 잔뜩 나기에 그녀인 줄 알았더니. 다른 사람이군요. 혹시 그녀의 반려인가요?”
여우 소녀가 무어라 이야기하는지는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익숙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녀에게서 나는 달콤한 향기가, 목소리가, 모습이, 모든 게 다 익숙했다.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눈앞의 여우 소녀는 여전히 빗자루를 두 손에 꼭 쥐고, 마레이가 있는 방향을 보고 있었다. 아니, 붉은 천으로 가린 눈동자에는 한 점의 빛조차 담아지지 않았기에, 자신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있다는 말이 정확했다.
“라벨라는 오지 않았나요?”
하얀 얼굴. 필리아처럼 병적으로 하얗다기보다는 베어 물어 잇자국을 나고 싶을 정도로 깨끗하고 보드라워 보이는 하얀 피부 위로, 붉은색조를 띄는 분홍색 입술. 자그마한 입에 간간히 들리는 얇은 미성.
“네, 혼자….. 왔습니다.”
그리웠다. 이 단어를 제외하고 마레이의 감정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이상하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가 덜덜 떨려서, 지금 제대로 말하고 있는 것인지 걱정마저 들었다. 말을 어눌하게 내뱉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잘 오셨어요, 청소도 슬슬 마무리되어가니. 올라가서 이야기를 나눌까요?”
무엇인가 욱하고 가슴속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섣불리 말을 내뱉는다면, 이상하게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고, 눈앞의 작은 무녀님은 마레이의 대답이라도 들은 것마냥 등을 돌려 조심스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금을 녹여낸 것 같은 머리카락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도 묘하게 반짝이며 눈길을 사로잡는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가느다란 하얀 목덜미와, 그보다 더 하얀. 더러움이라고는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순백의 상의와 발목까지 덮는 붉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빗자루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앞서 걸어가는 여우소녀가 조심스레 계단을 오를 때, 붉은 하카마가 슬며시 들리며 보드라워 보이는 하얀 살이 보였다. 묘한 감정이 들어 마레이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라벨라를 좋아하나요?”
“.... 아, 네. 무척이나요. 무척 좋아해요.”
배운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단어들이 기억나고, 또 떠오른다. 머릿속을 헤집는 듯한 이상한 감각에 앞서 걸어가는 무녀님의 질문에 마레이는 뒤늦게 대답해버렸다.
라벨라, 라벨라 드 파웬. 어머니를 여의고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조금 부족함이 있었지만, 친척들은 분명히 마레이를 챙겨주고 있었고 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가족이라는 테두리에 묶여서 지내고 있었으니까.
막연하게 도시의 생활에 환상을 가지고 있을 때, 마침 라벨라에게서 연락이 왔고 발테르에 왔을 뿐이었다. 물론 양모가 되어준다던 젊은 여성을 성노예나 다름없이 만들어, 집 안에 있을 때는 라벨라의 안과 밖에 정액이 마를 틈도 없이 잔뜩 귀여워해 주는 상황은 분명히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 소년에게는 극상의 여체들이 계속해서 매달리고 정액을 달라고 조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중심을 잡고 이성적인 생각을 이어나가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침에 일어나, 모친의 입안에 한 발.
다 마시지 못하고 일부로 하얀 몸 위로 흘리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양모의 매력적인 모습에 그대로 밀어 눕히거나, 엎드리게 해서, 임신시킬 생각으로 가득찬 질내사정을 하고.
더러워진 육체를 씻는 중에는 집에서 기르고(?) 있는 못된 암캐가 주인님과 사모님의 끈적한 섹스를 보며 잔뜩 끈적하게 만들어낸 속살을 스스로의 손으로 벌려 어린 소년의 정액을 자궁 안에 가득 받아낸다.
꾹꾹 조이는 기분 좋은 살단지에 정액을 가득 쏟아붓는 것으로 모자라, 백금색의 음모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게 느껴지는 암캐 여선생의 배와 풍만한 가슴, 그리고 얼굴에 정액을 가득 뿌리고 난 뒤, 다시 목욕을 시작한다.
이때쯤이면 식사 준비를 마친 모친 또한 욕조 위에서 구걸에 가깝게 애원하며 자위를 하며 어린 소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모친의 질안에 가득 담긴 정액을 흉악한 고기 막대로 끄집어 내면서도, 새로운 정액을 주입시킨다.
다시 한번 달라붙는 암캐 엘프를 포함한, 셋이서 함께 욕실에서 마음껏 욕망을 배출한다. 기분 좋게 사정하고, 끌어안으면 끈적하게 달아오른 여체들의 체온에 파묻혀. 몇 분 눈을 감고 일어나면, 몇 시간 숙면을 취한 듯한 기분으로 가볍게 몸을 씻어내고, 식사 중 시중을 책상 위에서, 그리고 의자 아래에서 받아들이며 본격적인 아침을 시작한다.
학교의 시간표도 다르고, 여행도 다녀왔기에 고정화된 패턴은 아니었지만. 오늘 하루만 해도 마레이는 모두가 잠든 시간에 깨어나, 집에서 출발하는 시간까지 라벨라와 일리엔의 질안에 십회이상 사정을 한 이후였다.
그리고 교회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매력적인 에르덴과 이제 슬슬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져 기대하는 눈빛으로 흘깃 바라보는 이드리엔까지. 현자라고 해도 자제심을 잃기 충분한 여성들에게 둘러싸인 어린 소년에게 지금 상황을 논리적이나, 객관적으로 이해할 시간은 물리적으로 부족했다.
오늘만 해도 필리아아의 대화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시간까지 줄리아나 이드리엔을 붙잡아, 그녀들이 수업에 지각할 때까지 마음껏 싱싱하다기보다는 아직 미성숙한 어린 씨앗을 그녀들 배 안에 잔뜩 집어넣고 있었을 테니까.
뭐, 아무튼 끝이 없다고 불러야 되는 무한한 성욕에, 어린 소년의 정액으로 임신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극상의 여체들로 가득찬 생활을 하고 있는 마레이에게는 라벨라 드 파웬이라는 존재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분 좋은 나날들의 시작이자, 어찌 면 모든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그녀의 이름이 나올때, 흘러나오는 감정은 색욕뿐만 아니라 끝없는 감사와 사랑이 담길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단을 천천히 오르는 여우무녀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라벨라도 자신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군요.”
“가, 감사합니다.”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힘내요.”
섹스를 할 때에는 무한할 것 같은 체력과 반대로 조금은 운동 부족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 마레이에게 있어서 높디높은 계단을 오르는 건 무척이나 고된 일이었고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르다 못해 그대로 앞으로 누워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쯤에야 여우 소녀가 말한 조금만의 끝에 다다랐다.
여우 소녀가 건네준 물을 마시고, 숨을 고르고 나서야 마레이는 다시금 현실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육욕에 빠져 사는 나날이다 보니, 잠시만 멍하니 의식을 흘린다면 매력적이 여체들이 떠올라 성욕을 자제하기가 힘들었다.
여우 소녀가 눈을 가리지 않고 있었다면, 어린 소년의 것이라고는. 아니, 인간의 것이라고 믿기지 않은 흉악하고 거대한 페니스가 바지위로 한참이나 부풀어 오른 것을 바로 볼 수 있었을 터.
마레이에게는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사람들의 인기척이라고는 찾을 수 없고,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았다면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은 거대한 신사의 모습에 마레이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익숙함이 공존하는 것을 깨닫고 이상하게 시선을 한곳에 정착시킬 수 없었다.
“이 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신기한 건축 양식이긴 하지요. 가까이 가서 보시겠습니까?”
“아, 네….. 감사합니다.”
시선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지만, 마레이가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지 여우 무녀님은 친절하게 길일 안내하고 있었다. 이름조차 밝히지 않은 소녀.
마레이에게 내뱉는 존대에서 묘한 이질감이 계속해서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눈앞에 걸어가고 있던 소녀는 라벨라를 격식없이 그저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보이지도 않은데, 자신을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은데 라벨라의 반려라고 생각한 것일까.
불현듯 머릿속이 맑아진다.
왜 자신은 이 소녀를 따라가고 있던 걸까. 누구인지도 모르는 소녀를?
왜 이 소녀에게 익숙함을 느끼고 있던 걸까. 오늘 처음보았을 텐데.
왜 자신은 이 소녀를 보고…..
“이상한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우 소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하얀 상의와 붉은 하카마가 보이던 뒷모습에 나풀거리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솟아난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있었는데 보지 못했던 걸까. 나풀거리는 것은 꼬리였다. 아홉 개의 금색의 꼬리.
순금을 녹인 듯 반짝거리는 금색의 꼬리의 끝부분은 겨울이 막 찾아온 산처럼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수인(獸人)은 아닙니다. 인(人)이라 표현할 수 없다는 게 정확할지도 모르겠지요.”
분명 앞서가던, 몇 걸음이나 크게 뛰어가야 닿을 것 같은 여우 소녀가 어느새인가 마레이의 코 앞에 있었다.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생각을 읽는 것일까.
“생각을 전부 읽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당신에게서 피어나는 끈적한 욕망을 읽어낼 수는 있지요. 그리고 몸에서 잔뜩 나는…. 라벨라를 제외한 다른 여인들의 냄새도.”
마레이는 눈앞의 소녀의 눈을 가린 붉은 천의 의미를 자신도 모르게 깨달았다. 흉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귀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부적들이 어떤 용도로 쓰이고 있는지 알아버렸다.
“라벨라가 왜 당신을 여기로 보낸 것일까요.”
여우소녀는 웃고 있었다. 아니, 웃고 있지 않았다.
“저는… 저는….”
길을 잃고 찾아왔다. 그냥 간단하게 대답하면 될 뿐인데, 이상하게. 너무나도 이해가 되지 않게. 그런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억울하다는 말이 정확할까. 목이 콱하고 막히고 코끝이 찡하고 울린다.
“남자라면 울지 말고 이야기하세요.”
정중한, 그러면서도 조근조근한 존대. 하지만 그 속에는 거대한 압력이 담겼기에 마레이는 쉽게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눈앞의 여우 소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어린 소년의 모습에도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먼저 말하기 어렵다면 제가 먼저 하면 될까요.”
눈앞의 소녀는 공격적이었다. 아니, 적대적이라는 말이 정확할까. 여우 소녀의 모습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 처음부터 마레이에게 적대적이었다. 다만, 말하고 있지 않았을 뿐이고, 마레이가 몰랐을 뿐이었다.
별것도 아닌 사실에 마레이는 새어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공격을 당해서는 아니었다. 추궁을 당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그냥, 그냥이라는 말밖에 반복이 되었다.
“저는 이 신사를 관리하고 있는 무명의 무녀입니...”
“란님.”
눈앞의 소녀의 이름은 란이었다. 마레이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알고 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이름은 란이었다.
“제 이름을 라벨라에게 듣…. 지 않았군요.”
“란님.”
다시 한 번 눈앞의 무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울음이 새어나오다 못해, 끝없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목이 잠기고, 꽉닫힌 입에서는 울음소리가 터 나온다.
무녀는, 란은 입을 꾹 다물었다. 눈이 봉인된 채로, 귀가 강제로 닫힌 채로 란은 마레이를 살피고 있었다.
“그 어린 성녀가 보낸 건가요? 냄새가 희미하게...”
성녀 에르덴. 그녀가 보낸 게 아니었다. 마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코앞에서 내려다보는 그 모습이, 옅은 살내음이, 달콤한 내음이 너무나도 그립고, 이상하게 마음속을 헤집는다.
“왜인지 모르겠어요. 당신을 보면 그리워요.”
깊은 한숨과 함께, 마레이는 억눌린 목소리로 내뱉었다. 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마레이를 보고 있었다. 붉은 붕대로 가려진 눈이 봉인을 너머 마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 듯, 고운 이마에 약간의 주름이 잡힌다.
“란님, 저희가 만난 적이 있었나요?”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란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갔다. 몸이 닿을 거리. 숨결이 닿을 거리. 란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마레이를 보고 있었다.
“제가 미쳤는지도 몰라요. 근데, 그런데…. 이상하게 그리워요. 이름이 떠오르고, 당신의 모습이 떠오르고, 목소리가 떠올라요.”
“.........마리.”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란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흘러나왔다. 마리. 너무나도 그리운 이름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름이었고.
“란님은 어머니를 아시나요.”
“아아…..”
란의 입에서 간헐적 신음이 터져 나왔다. 보는 사람이 안타까울 정도로 덜덜 떠는 손으로 마레이의 뺨을 매만졌다.
눈앞이 보이지 않아 몇 번이나 뺨을 만지기 위해 목을, 귀를, 허공을 스쳐 지나가던 손이 뺨위에 조용히 가라앉았다.
“너였구나. 너였어. 마레이.”
“저를 아시나요?”
란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내리누르는, 피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전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리의 아이였구나. 그 어린, 그 작던, 내 품에 가득 안기던. 마리의 아이.”
란은 울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을 보자, 이상하게 가슴을 짓누르던 먹먹한 감정이 차갑게 식어갔다. 마레이는 더이상 울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뺨을 몇 번이나 매만지는 작은 손길을 느끼며, 조심스레 란을 끌어안았다.
“채 눈도 뜨지 못하고 내 손을 잡던 그 아이가 이렇게 되돌아왔구나.”
떨리는 음색. 란은 마레이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이제는 점점 흐릿해지는 어머니의 온기가 떠오르고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에 턱을 기대고 눈을 꼭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란이 마레이의 어깨를 붙잡고 조심스레 밀어냈다. 몇 번이나 숨을 몰아쉬는 란은 자신의 눈을 가린 붉은 붕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매듭을 향해 손이 가는 순간, 공간을 찢고 하얀 장갑을 낀 손이 튀어나와 란의 손목을 붙잡았다. 잡아챘다는 표현이 옳을지 몰랐다.
“란님, 안되는 거 당신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새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오는 동시에, 찢어지는 공간이 크기를 넓히고 여인이 걸어 나온다.
처음 눈에 들어오는 건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에메랄드빛 머리카락. 란과 마레이를 내려볼 수 있는 장신의 키. 란의 손목을 붙잡은 채, 내려보는 여인의 옆모습이 너무나도 익숙하면서 또, 낯설었다.
“라벨라…?”
“....쯧.”
라벨라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라벨라라고 생각한 여인은 마레이를 보고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크게 혀를 찼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란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나타난 라벨라의 모습에 마레이는 멍하니 란과 그녀를 바라보았다.
“란님. 진정하시지요.”
“마리의 아이가 찾아왔습니다. 잠시만이라도 안 되는 건가요. 로렌?”
란의 말에 마레이는 다시 한 번 자신 앞에 선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의 여인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라벨라가 잘 익은 과일이라면, 로렌은 슬며시 만지는 것만으로 과즙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농염하다 못해 치명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라벨라보다 훨씬 더 큰 키. 제복 위로 코트를 걸치고 있는데도, 극단적으로 큰 곡선을 그리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엉덩이와.
“잠시 시간을 허락해주셔도 안 되는 건가요. 마리의 아이의 앞에서 옷도 제대로 입고 오지도 못할 정도로? 잠시면 됩니다. 부디….”
“안됩니다.”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다는 말에 마레이의 시선은 자연스레 라벨라. 아니, 로렌의 가슴으로 시선이 갔다. 채 닫지 못한 단추 사이로 하얀색 브래지어가 슬며시 모습을 들어내고, 그 위로 깊은 골짜기를 만든 거대한 폭유가 보인다.
“......눈을 돌려라, 파내 버리기 전에.”
마레이의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로렌은 아무렇지도 않게 무서운 말을 내뱉었다. 마레이가 시선을 돌리자, 곧장 관심을 잃었는지 란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란님. 진정해주세요. 지금 감정적으로 움직이고 계십니다. 당신답지 않게 어째서 이리 약한 모습을 보이시는 건가요. 그저 인간의 아이일 뿐입니다.”
“한낱 인간의 아이가 아니라, 마리의 아이입니다. 진정하고 있기에 당신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렌. 부탁드립니다. 당신을 상처입히고 싶지 않습니다. 잠시라도, 잠시라도 좋으니 저 아이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부디….”
로렌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마레이를 바라보았다. 처음 라벨라를 만났을 때, 딱딱하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표정보다 더욱 완고해 보이는, 그러면서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보랏빛 눈동자에 마레이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추잡한 것. 그 아이는 어째서…. 이런...”
인간이라기보다는 인형에 가깝다는 말이 정확할지도 몰랐다. 어두운 보라빛 눈동자 위로는 아무런 것도 볼 수 없었고, 무표정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혐오감을 숨기지 않고 뚝뚝 떨어져 내릴 것 같은 혐오감에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로렌. 저와 대화 중인데, 어째서 그 아이를 괴롭히시는 것인지요?”
“........예.”
로렌이 마레이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라벨라가 알려준 파웬가 특유의 문양, 녹색용이 어깨에 걸치고 있는 코트의 등 위로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코트가 벗겨지지 않도록, 양어깨에는 금으로 만든 체인의 고리가 등 뒤에 달려 있었다.
“제가 다치더라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란님. 당신을 지키는 게 제 사명이기도 합니다.”
“제가 아니라, 제 봉인을 지키는 게 당신의 사명이겠지요 로렌.”
“마리, 그 더러운 계집이 그렇게 중요...”
“로렌. 저를 화나게 하지 말아주세요.”
로렌이 입을 꾹 다물었다. 란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화를 참아내고 있다는 말이 정확할지도 몰랐다.
“저를 다치게 할 정도로 저 아이가 그렇게 중요하신 건가요? 지금 이 자리에 저 아이가 있다는 것 자체도 제가 얼마나 양보해드린 것인지 아시는 분께서 그런 말을 하시는 건가요.”
아무런 말도 못 하는 란의 모습에 로렌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억지임을 아셨다면….”
“제가 무엇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로렌은 입술을 오므렸다. 그리고 마레이를 흘깃 바라보았다. 보랏빛 눈동자에는 마레이로서는 이해할 수도, 읽을 수도 없는 너무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눈을 돌려라, 한 번만 더 나를 읽으려면 네 눈의 하나를 파버리겠다. 쯧. 그 여자의 자식답군… 위험한 재능을 이어받았군. 하지만 그 아이보다 위험해.”
“로렌?”
“봉인은 시간이 지나면 약해지고, 이미 수만 년이 지난 봉인이 당신을 묶어둘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이미 자연으로 돌아간 전 로드께서도 모르는 아득한 지식의 정수가 담긴 봉인. 이제는 미지의 지식이 되어버린 이 마법진의 원본을 당신을 알고 계시지요?”
“예.”
“당신의 힘으로, 당신을 다시 한번 봉인하세요. 이 아이의 가치만큼.”
두 사람의 대화에 마레이는 따라갈 수 없었다. 다만, 란이 억지를 부리고 있었고, 로렌은 댓가를 원하고 있었다. 지금의 이야기는 그 정도뿐이었다. 란은 아무런 고민도 없이 알겠다는 말을 내뱉고 로렌을 향해 손을 뻗었다.
로렌 손바닥을 펴자, 형이상학적인 문양이 얽히고설켜 하나의 구체로 보일 정도로 빽빽하게 차 있는 문양의 덩어리들이 허공에 생겨났다. 천체를 뒤엎을 정도로 커다란 구체가 떠있었고 그 문양의 구체를 향해서 란은 망설임 없이 손을 집어넣었다. 동시에 커다란 빛이 주변을 뒤덮었다.
“그년이나, 그년의 핏줄이나 마음에 드는 구석 따위는 하나도 없구나. 란님… 어째서….”
로렌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간신히 들릴 듯, 말듯한 그녀의 한탄이 마레이의 귓가에 간신히 닿는다.
“이러면 됐나요? 로렌?”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로렌의 앞에서 흘러나왔다. 로렌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마레이와 란 사이를 가리던 자신의 몸을 슬며시 옆으로 옮긴다.
마레이보다 조금. 아주 조금 컸던 여우 소녀는 어디로 가고, 마레이의 가슴팍에 간신히 닿을 것 같은 어린아이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몸에 비해 머리가 큰 인간의 어린아이와 다르게 이종족들처럼(마치 필리아나, 므랑데처럼.), 하나의 성인이 그저 작은 몸을 가진 것 같은. 만화책이나 소설에서 나올 법한 그런 어린 여우 소녀가 눈앞에 있었다.
“.......네 어미의 어렸을 적을 닮았구나.”
“란님….?”
어린아이가 활짝 웃어보였다. 귀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부적들이 검게 바스라져 바람에 휩쓸려 사라지고, 눈을 가리던 붉은 붕대가 그대로 흘러내려 목 언저리에 걸쳐 있었다.
위아래로 쭉 찢어진 동공이 마레이를 담아내고 있었다. 금색의 눈동자 안에는 수없이 많은 금속조각 들이 얼기설기 붙어있는, 기괴하면서도 신비로운, 그러면서 매혹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 이리 오렴. 안아보자, 우리 아기….”
방금 전까지만해도, 마레이와 엇비슷하게 보이던 소녀가 어린아이가 되어버렸지만, 마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운 향이 그녀에게서 났다. 그리운 온기가 그녀에게서부터 전해졌다.그대로 눈을 감으면 잠들어버릴 것 같은 편안함을 담아내고 있었다.
“많이 컸구나.”
란의 중얼거림에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슬픈 것인지, 기쁜 것인지 이제는 구별이 가지 않았다. 다만,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은 어린아이의 가슴에 말없이 고개를 부비었다.
“란님은 제가 올 것을 알고 계셨나요?”
“그래,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단다. 앞으로 몇 년후. 네가 성년이 될 쯤에 올거라 생각했단다. 몇년 전이었지.”
란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로렌또한 그녀 옆에 아무런 말도 앉아있었기에 마레이 또한 두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정갈한 자세로 앉을 수밖에 없었다. 다리에 아무런 감각도 없었지만,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로렌의 모습에 그 어떤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는…..”
”마리를 인생의 동반자인 푸른 별이 제 빛을 잃고 방황했을 때 마리의 죽음을 알았단다. 빛을 잃고 천체를 떠나야할 별이 다시 한번 빛을 내는 모습을 보고, 네 운명이 네가 성인이 될 때, 이곳을 거쳐지나간다는 걸 보았지만…... 기분 좋은 실수구나.”
란은 그저 웃고 있었다. 마레이에게서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로렌은 흘깃 란의 모습을 보고 다시 한 번 마레이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무표정한 그녀의 시선에 알 수 없는 증오와 혐오가 묻어 있었다.
아니, 아닐지도 몰랐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로렌앞에서 마레이는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란님, 저아이도 파웬가의 아이기도 하니, 제가 끼어들어도 괜찮겠습니까?”
“예, 물론입니다. 로렌, 어찌보면 저보다도 당신이 마레이에게 더 가족같은 사람이니까요.”
마레이는 로렌이 무척이나 불편했다. 어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옳은지 모르겠지만,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라벨라를 닮으면서도, 다른. 더 매력적이라고 해야될가. 농염하다고 해야될까. 그런 모습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라벨라에게 가문의 어른을 뵈었을 때, 어떻게 해야될 지 배우지 못했느냐?”
“아, 아닙니다. 로, 로렌님… 마레이 드 파웬이 인사드립니다. 제가 경황이 없어 뒤늦게 인사드린 점 죄송합니다.”
당황해서 인사조차 제대로 드리지 못했지만 마레이는 군더더기 없는 예법으로 로렌에게 인사를 드렸다. 긴장해서 말을 더듬었지만, 로렌은 그런 점을 문제삼지 않았다.
대부분 침대위에서 마레이를 교육(?)하는 라벨라였지만. 기본적인 예법이라든지 예의등 또한 착실히 가르치고 있었다.
“지금 학교에 있을 시간일 텐데,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것이냐.”
“중간에 길을 잃고, 붉은 토라이를 지나보니 란님이 계셔서….”
“길을 잃어서 그 결계를 뛰어넘었다는 말을 내가 믿으라는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