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계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마레이는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고 고개를 푹 숙였다.
로렌의 보랏빛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할 때마다 마레이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어머니를 욕한 그녀에게 욱하는 감정도 슬그머니 일어나다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눈동자를 보면 항거할 수 없다고 해야할까. 마레이는 더욱 크게 몸을 움츠렸다.
“너무 아이를 추궁하지 말아주세요, 로렌. 마레이는 마리의 아이기도 합니다. 그아이의 재능의 반이라도 물려받았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겠지요.”
발테르에 와서 몇 번듣지 못했던 이름,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라벨라와 첫만남때가 아니었을까. 혼자만의 시간이 종종 있었던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는 매일매일 떠올리던 어머니라는 존재가 왜이렇게 낯설게 들리는 것일까.
란의 입에서 어머니의 이름이 나올때마다, 마레이는 당장이라도 이곳에 벗어나고 싶었다. 마리라는 이름이 란과 로렌에게서 흘러나올 때면, 하나뿐인 아들인 자신보다 다른 두사람이 어머니를 더욱 잘 알고 있었고, 더욱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죄스러울 따름이었다.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천박한 계집의 가호가 저렇게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는 성유물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음…..”
로렌과 대답을 주고받던 란이 입을 꾹 다물었다. 금색 눈동자가 마레이를 흘깃 보다, 둥근 호선을 그렸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괜찮다는 듯이 입가로 한 번 웃어보이고서는 란은 로렌을 올려다 보았다.
“개인적인 친분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살펴본 결과 보호나 치유 이외에 담겨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정말로 순수한 호의로 건네줄, 그런 물건이 아닌가요?”
“그 미친 계집애가 누군가에게 호의라고 하셨습니까…? 란님, 이번 대의 성녀는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
“저도 알아 보았습니다. 지켜보았고. 미숙하긴 하지만 제가 저 하늘로 존재했을 때에도 보기 힘들 재능을 가진 아이였죠.”
“재능 이전에 존재로서 결함이 있는 존재입니다.”
마레이가 본 에르덴 파벨은 무척이나 친근하면서도, 자신에게는 한 없이 상냥하고, 또 장난끼가 가득하면서도 마레이의 부탁을 언제나 들어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마레이로서는 두사람이 말하는 에르덴 파벨에 대해서 반박할 용기조차 들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험담을 늘어 놓는 로렌의 탐탁치 않았지만, 피는 이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엄연히 집안의 어른이었고 이 발테르의 총독이었으며, 또 학교의 총장도 겸임하고 있는.
마레이에게 있어서 하늘보다 더 높게 느껴지는 아득한 존재일 뿐이었다.
“문제가 생긴다면 로렌님께서 지켜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 모습으로, 이 힘으로 다른 신이나 악마들을 감당하기 어려우니까 말이죠.”
“란님…… 저는 당신의 봉인을 지키는 용(龍)이지, 당신을 지키는 존재가 아닙니다.”
“제가 믿을 건 로렌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인연을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로렌님께 그저 봉인당한 신일뿐입니까?”
란은 상처를 받은 것처럼 눈망울을 크게 뜨고 로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버려진 강아지처럼, 이별한 연인처럼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그 모습에 로렌은 애써 시선을 돌렸다.
“제가 당신을 지켜드리는 건 어렵지 않지만….. 저 아이를 경계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마리와 다르게 저 아이가 신뢰할만한 인간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로렌은 마레이를 경계하고 있었다. 아니, 경계는 비등하거나 자신에게 위협이 될만한 상대에게 하는 것이었다. 경계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는 혐오한다는 말을 하는 게 정확할까. 보랏빛 눈동자에 마레이가 들어올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고 애써 시선을 돌렸다.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조차 싫다는 듯이, 어린 소년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다는 듯이. 무시하고 있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레이에게 대놓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로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마레이가 보기에 그녀의 모습에서 수많은 욕설과 저주를 자신에게 퍼붓고 있다고는 생각이 들었다. 그정도로 로렌의 눈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당신께서 마리의 아이의 만나는 건 제가 용인할 수 있고, 묵인할 수 있지만…. 적어도 이 장소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성녀의 총애를 받고 있는 저런 꼬맹이에게 말이죠.”
“이곳은 제 땅이고, 제집이기도 합니다. 어미가 제 새끼를 집안에 들이는 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란님의 아이가 아니라, 마리의 아이겠지요.”
엄밀히 말하자면, 로렌은 마레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불편해 보였다.
“말장난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로렌, 당신이 불편하시다면 제가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란님이 아니라, 저 아이가 이곳을 떠나야겠지요.”
대화의 내용이 아니라, 서로에게 내뱉는 음색, 목소리의 톤을 생각한다면 싸운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로렌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마레이를 노려보았고, 거대한 존재가 자신을 내리누르는 압박감에 마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크게 움츠렸다.
“로렌. 당신에게 큰 소리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만하시지요.”
“....정녕 고집을 꺾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까?”
“오늘같이 길(吉)한 날, 로렌 님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마리의 아이가 되돌아왔을 뿐인데 당신께서는 왜 그리 화가 나신 건가요.”
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로렌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눈을 다시 뜨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녀의 아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저도 란님과 다투고 싶지는 않습니다. 조금 진정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니, 제 마음이 진정되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저 아이의 대한 처우도 그때 다시 이야기하지요.”
“조심히 가시길 바랍니다. 배웅은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일어선 채로, 란을 바라보던 로렌은 말없이 등을 돌렸다. 몸에 꽉 달라붙은 스타킹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로렌의 다리를 보고 갑작스레 드는 음란한 생각에 애써 고개를 숙였다.
“쯧….. 라벨라, 그 아이는 도대체....”
마레이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마레이가 단지 마음에 안 든 것인지 모르겠지만. 로렌은 마레이가 들으라는 듯이 크게 혀를 찼다.
“행동거지에 신경 쓰거라, 나의 눈은 언제나 너를 지켜보고 있을 터이니..”
경고나 다름없는 말을 내뱉은 로렌이 한 걸음을 내딛자, 그 앞에 검은 선이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곧장 좌우로 입을 크게 벌린다.
“금요일 저녁, 총독부로 부를 터이니 준비하거라.”
마지막 말을 남긴 그녀는 곧장 검은 공간 속으로 걸음을 옮겨 녹색용이 울부짖은 검은 코트의 뒷모습만 남기고 사라졌다.
폐를 짓누르는 거대한 존재감이 사라지자 마레이는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하고 그대로 힘이 풀려 옆으로 쓰러질뻔했고, 어느새 다가온 란이 마레이를 가까스로 붙잡는다.
“마레이 괜찮은 것이냐…?”
“아, 네…. 조금 어지러워서요.”
자그마한 손이, 정말로 어린아이처럼 작은 손이 마레이의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란은 조심스레 마레이의 머리를 천천히 내려놓으며 자신의 무릎 위로 옮긴다.
“무겁지 않으세요…?”
“더 누워있으렴.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란은 여전히 웃고있었다. 다만, 마레이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보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겠지만, 금색 눈동자에 떠오르는 감정이 물감처럼 번져서 이유도 모르게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울지마렴, 아가…..”
“아뇨, 아뇨… 저는.. 저는...”
“로렌 때문에 속이 상한 것이니?”
마레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뭐라고 말해야 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란의 감정이 흘러들어와 숨이 막힐 뿐이었다. 어머니를 알고 있는 작고 어려 보이는 무녀님의 감정이 눈동자를 통해서 스며들어오자, 속이 울렁거렸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슬펐어요. 너무 슬퍼서요.”
“로렌의 말이 심해서 그런 거니…?”
“아뇨.. 란님이 울고 있어서, 그게 너무 슬퍼서요.”
란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파르르 떨렸다. 란은 마레이를 내려보다, 작게 웃어 보였다. 새벽에 고개를 드는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미소였다. 보는 것만으로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옆에 있는 것만으로 행복할 것 같은 그런 미소.
하지만 마레이는 그런 웃음의 너머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의 편린에 물들고 있었다.
오염된다는 말이 정확할지도 몰랐다.
“나는 울고 있지 않단다. 보렴, 이렇게 웃고 있잖니.”
“어지러워요…. 놓아주세요..”
“그대로 있으렴. 용의 힘을 간접적으로 느꼈는데, 무리할 필요는 없단다.”
자그만한 손이 마레이의 어깨를 다시금 내리눌렀다. 억척스럽다고 표현해야 될 것 같은 강한 힘. 아무리 노력해보려 해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거대한 바위로 짓누르는 듯한 힘에 마레이는 일으키려는 몸이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란님, 아파요…...”
“한숨 자고 일어나면, 조금 괜찮아질 거란다.”
금색의 눈동자가 여전히 마레이를 내려보고 있었다. 금을 녹여만든 것 같은 눈동자 색, 동공을 감싸고 있다고 부를 수도 없이, 이리저리 깨진 금속조각을 얼기설기 묶어놓은 것 같은 홍채.
그 틈으로 쉴새 없이 알 수 없는 감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머리가 몽롱했다.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도 잠시, 조금씩 잠이 올 것 같았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영영 못 일어날 것처럼. 란의 무릎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일어나고 싶지 않도록. 얼굴을 매만지는 작은 손가락이 따뜻했다. 영원히 잠들 것처럼.
“란님, 란님… 란님...”
“그래.. 그래… 여기 있단다. 나는 여기 있단다. 우리 아가… 나는 여기 있단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너무나도 희미했다. 어머니의 품 안에 안겼던 그 희미한 기억처럼. 그렇기에 안도가 되었다. 당장이라도 눈을 감아도 된다는 듯이 평온했다. 눈을 뜨는 것조차 슬슬 힘에 부쳤다. 시야가 잔뜩 흔들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뺨을 간질이는 금색의 머리카락의 촉감에 뺨을 부비고 싶어졌다.
낯선 관경이 보였다. 마레이는 어떤 여자의 품안에 안겨 있었다. 앞을 보고 가던 여인은 중간중간 마레이를 내려다 보고 미소를 지어 보이고 다시 무작정 걷고 있었다.
“엄마….?”
마리 드 파웬. 마레이가 기억하던 모습보다 더 젊어보이는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아니, 어려보였다. 자신의 기억에는 어머니였지만, 여기에서는 소녀였다. 희미해지던 의식이 다시금 수면밖으로 나오기위해 허우적거린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편안해질 거란다. 의식에 몸을 맡기렴.”
란의 목소리에 몽롱한 의식이 수면 아래로 더욱 깊게 가라앉는다. 깨어나려고 해도, 거대한 수압에 갇혀 어떤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낯선 공간에 펼쳐진다. 어머니는 신사에 앉아 있었다. 란이 자신을 데리고 온 이곳이었다. 마레이는 지나가는 벌레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고, 곧장 누군가가 뒤에서 마레이의 옆구리를 붙잡아 살며시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주변을 살피다, 금발의 여인의 얼굴을 보고 활짝 웃어보였다. 란처럼 여러개의 꼬리가 흔들리는 신비한 무녀님이었다. 아니, 본능적으로 그녀가 란임을 알 수 있었다.
눈을 떼어낼 수 없는 미모. 아름답다.
무의식적으로 수 많은 수식어들이 머리속을 스쳐지나갔지만, 모든 감각이 시각에 의존하게 되는 그녀의 모습에, 무엇인가 생각이 났지만 촛불처럼 금세 꺼져버렸다. 마레이는 멍하니 그녀를 볼 뿐이었다.
처음 란을 보았을 때처럼 소녀의 모습도, 지금처럼 어린 아이의 모습도 아닌. 성인의 모습이었다. 자신을 들어올린 란의 모습에 갓난쟁이인 마레이는 웃고 있었다. 란도 웃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는 웃고 있지 않았다. 평화롭고 그리운 이 풍경에 동떨어진 듯 마리를 슬픈 표정으로 란을 보고 있었다. 마치 무엇인가 대단히 잘못 된 것처럼.
“아이의 이름은 마레이로 하잖구나. 무슨 의미인지는 이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알려줄 테니….”
“스승님,”
마리는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저 모든 게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자신의 아이와 자신의 신이 어울리는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던 과거와는 다르게 마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마레이와 란을 바라본다.
“당신께서 왜 이런 과거를 떠돌고 있는 것인지요.”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마리?”
“가여운 분. 안타까운 분. 저희 어머니. 저희 스승님. 저희 신이시여….. 아이의 시간을 더듬어가며 왜 우리의 추억을 다시 한번 삼키시는 것인지요.”
“마리?
란은 어머니를 다시금 불렀다. 마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눈을 감았다. 눈과 같이 닫혔던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오래된 꿈에서 깨어나거라, 마레이.”
그와 동시에 눈이 떠졌다. 란은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을 뻐금거렸지만, 그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릴 뿐이었다. 그녀의 코에서, 입에서 옅은 숨결이 마레이의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무슨… 마리…. 넌…..”
“란님?”
란의 목소리가 잔뜩 떨리고 있었다. 흐느끼고 있다고 해야 할까. 란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화가 나지 않았다. 다만, 왜인지 모를 그리운 광경을 본 것 같았다.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다만,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미안하구나… 그래… 난… 난...”
“란님. 울지, 울지…. 마세요.”
란은 더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어린 소년의 위로에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잔뜩 찡그린 얼굴은 고통을 말하고 있었지만, 눈물이 말라버린 것처럼. 그녀는 울 수 없었다. 왜인지 그런 것 같았다.
“일어날 수 있겠니?”
“아, 네. 왠지 기분 좋은 꿈을 꾼 거 같아요.”
마레이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이전과 다르게 란은 마레이를 다시금 눕히지 않았다.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앉은 마레이는 란의 눈치를 살피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뜨니, 무엇인가 바뀌어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라벨라의 질안에 잔뜩 사정하고 나서 기분 좋은 냄새가 나는 그녀의 몸을 이불로 삼아 달콤한 낮잠을 잔 것 같은 충족감이 마레이의 안을 채우고 있었다. 깜빡 잠이든지 몇 분이 채 되지 않은 것 같았지만 푹 자고 일어난 것 같았다.
“자, 나를 보거라. 마레이.”
그녀의 말대로, 마레이는 자신 앞에 정갈한 자세로 앉아있는 란의 모습을 담아냈다.
짐승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자그만한 아이였다. 여우를 떠올리게 하는 금색의 뾰족하다고 생각이 되는 귀속에서는 하얀 귀털이 밖으로 솟아나 있었다. 어린아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작은 몸이었지만,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그저 자그마한 어른의 모습이었다.
묘한 달콤한 냄새가 란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저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침을 삼키게 만들 정도로 달콤한 냄새. 맡는 것만으로 몽롱해질 것 같은 향기. 손을 뻗어 목을 붙잡아 코를 박아 냄새를 맡고 싶을 정도로 좋은 향기.
폐 끝까지 채워 넣는 것으로 부족해서 저 여린 몸를 씹고, 핥아서 전부 손에 넣고 싶은 기분 좋은 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배가 고프다. 미친 듯이 배가 고팠다. 자그만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은 색욕을 넘어서 식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작은 몸과는 전혀 어울리지는 않은 색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니, 그녀가 관능이었다. 마레이는 자신의 바지 아래에서 양물이 빳빳하게 굳다 못해 쿠퍼액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 란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란은 그런 마레이의 모습에도 무표정하게 마레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가녀리다고 말해야 될 여리여리한 몸은 이상하게 기대고 싶은 포용력을 담아내고 있었다. 작아진 몸과는 다르게 그대로였던 옷이 슬며시 흘러내려 그녀의 하얀 속살을 들어내고, 매력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빈약한 몸에도 마레이는 이전에 느낀 적 없는 커다란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필리아에게 흡혈을 당해 발정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욕망이 마레이를 휩쓸고 있었다.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일어나 란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천천히 밀어 넘어뜨렸다.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란은 여전히 마레이를 보고 있었다. 짐승을 닮은, 아니, 그 누구도 닮지 않은 특이한 눈동자는 거대한 인력을 가진 것처럼 마레이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마레이는 조심스레 란의 몸위에 올라타 그녀의 입에 입술을 조심스레 핥아냈다.
달다. 달았다. 마레이는 게걸스럽다는 표현이 옳을 정도로 란의 입술을 핥고, 또 핥았다. 그로 모잘라, 그녀의 입안에 슬며시 혀를 밀어 넣다가 그녀의 목으로 붉은 혀가 투명한 물감을 이어나간다.
“으응….”
간지럽다는 듯이 몸을 움찔 떠는 란의 모습에 마레이는 더욱더 거칠게, 그리고 빠르게 란의 옷을 벗겨냈다. 옷 안에는 그 어떤 방해물도 없었기에 마레이는 거침없이 란의 새하얀 살을 핥고, 연분홍빛으로 반짝이는 작은 가슴을 슬그머니 베어 물었다. 몸을 움찔움찔 떠는 모습이 귀여워 말랑한 유실을 이빨로 잘근잘근 씹자, 무척이나 작은 몸이 부르르 떨린다.
부드러운 배를 슬며시 핥고, 솜털도 나지 않은 배 위를 혀로 슬그머니 움직여, 귀엽게 떠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 마레이는 자연스레 란의 붉은 하카마를 슬그머니 내리고 그대로 꽉 닫힌 둔덕을 혀끝으로 슬그머니 핥….
‘마레이.’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마레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의 밑에 란이 깔려 있었다. 너무나도 슬픈 눈으로, 그리고 아프다는 눈으로 마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마레이가 경험한, 애욕에 가득 찼던 눈동자들과는 다르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는 눈이었다. 그렇게 보였다. 어떻게 해야되는 건가. 모르겠다. 자신이 할 줄 아는, 아니 그렇게 해야된다는 생각으로 자신조차 멈춰세우지 못한 그런 눈.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다만 알 수 있었다.
“란님….?”
“괜찮단다. 이리로….”
란이 손을 벌려 마레이의 목을 살며시 감싸 안았다. 성욕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아니, 몸은 당장 그녀를 안으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마레이는 바지안에서 괴롭게 비틀거리는 페니스를 애써 달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당신은… 누구지요. 무엇인가요?”
란의 손길에서 벗어나 마레이는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슬며시 벌려진 란의 옷을 다시금 여미어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란 또한 말없이 마레이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역시 이런 어린 몸은 싫은 테지.”
하카마 밖으로 슬며시 나온 발목이 그렇게 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마레이는 처음 알 수 있었다. 복숭아뼈가 슬며시 드러난 작은 발을 왜 그리 핥고, 깨물고 싶은 것인지.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다.
“란님…. 어째서….”
“그냥, 변덕… 이라고 할까.”
란은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그 순간 란에게 느껴졌던 모든 감정이 전부 거짓인 듯, 평범한 여우여자아이가 마레이 앞에 있었다. 아니, 고귀해 보이는, 신성해 보이는 어린 무녀님의 모습에 마레이는 방금전까지 느꼈던 성욕이 모두 죄를 지은 것만 같다고 느꼈다.
“됐다….그저, 헛된 바램이 있을 뿐이니까. 아가, 내가 너에게 나쁜 짓을 해버렸구나.”
“...란님은 도대체…. 도대체… 누구십니까. 아니, 무엇입니까.”
“글쎄, 내가 누구일까…. 어려운 질문이구나. 답해줄 수는 없더라도 보여줄 수는 있겠지.”
란이 깍지를 낀손으로 마레이의 뒷목을 잡아 당겨, 자신의 이마와 어린 소년의 이마를 맞댔다.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달아오른 여린 뺨의 온기가 슬며시 전해진다.
방금전 느낀 거대한 인력이 다시 한번 마레이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부서진 금속들로 얽혀있는 홍채 가운데, 검은 동공 속으로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산이 보였다. 아주 높은 산. 크기를 짐작하지 못할 만큼 커다란 산. 아주 멀리서도, 대륙 끝에서도 보이는 거대한 산. 실제로 존재할 리가 없는 그런, 눈으로 가득 덮인 산이 있었다. 바람이 불어, 산 위를 헤쳐 지나가자 산 전체가 흔들렸다.
아니, 산이 아니었다. 흔들리는 것은 나무도, 눈도 아닌, 수많은 털들이었다. 마레이는 고개를 들어 보였다. 크기를 짐작할 수도 없는 여우가 마레이를 내려보고 있었다. 여우의 발아래에는 하얀 구름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상상 속에서조차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자신이 딛고 있는 대지보다 더욱 커 보이는 여우의 금색 눈동자가 마레이와 마주치고, 다시 한번 꿈에서 깨어났다.
“보았구나. 마리또한 너와 같은 것을 보았지. 그렇다면 너에게 또한 같은 말로 설명하자면, 신화 속에 버려진 짐승이라고 말을 해야겠구나.”
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마레이에게는 닿지 않았다. 꿈에서 깨어났지만, 마레이는 여전히 꿈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불바다였다. 하늘에서는 검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방금전 본 거대한 여우가 크게 울음을 터트리고, 그 여우보다는 작지만 크기를 짐작할 수 없는 거인들과 수 많은 종족들이 무기를, 마법을 휘두르며 여우와 싸우고 있었다.
거대한 짐승은 거인의 목을 물어뜯고, 손톱으로 대지를 찢어내고, 포효로 해일을 일으킨다. 그렇게 수백 번의 해가 뜨고 지는 시간 동안 여우는 대지 위의 생명들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몇 번이나, 수백번의 해가 뜨고 진 이후에야, 짐승의 목에 수십개의 무기가 박혀들었고, 그 위로 일곱의 존재만이 대지 위에서 살아 숨쉴뿐이었다.
“죽여라, 칼펜. 우리의 검은 모두 부러졌다.”
거인의 어깨에 앉아있는 마녀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죽일 수가 없습니다. 에르제베르트.”
거인의 도끼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잔뜩 금이 가 있었다.
“........그렇다면 봉인하죠. 신성은 빼앗었습니다. 코르키엘”
악마가 기분 나쁘게 웃고 있었다.
“리리스, 경쟁자가 죽었을 뿐이죠. 이제는 이 땅은 우리의 것입니다.”
천사가 날개를 흔들자, 금색의 깃털이 대지 위에 떨어지다 스며들었다. 여우는 그들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목에 꽂힌 수십 개의 병장기들로 인해 그 어떤 말을 내뱉지 못했다. 이를 들어내고 낮게 울부짖는 모습에 일곱의 존재들이 흠칫 놀란다.
“제기랄…. 저주의 무기가…..영원하지 못할 봉인이 의미가 있는 건가요. 에르제베르트.”
“오천 년씩 주기적으로 확인해 줘야 합니다. 당신의 아이들이 이 신을 봉인하고 관리하는데, 가장 어울리겠지요. 아이들의 수명은 길어봤자 삼천 년이니... 라비우스?”
마녀가 요사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숨을 고르고 있는 검은 존재가 있었다.
“수작 부리지 마라, 네년의 입을 찢어버리기 전에.”
금색 눈이 크게 떠지고, 날개 달린 짐승이 몸을 일으키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에 맞는 힘, 그에 맞는 보상을 우리들이 각자 드릴 것입니다. 이 땅을 떼어드리죠. 어차피 중요한 것은 처음으로 우리의 승리라는 것이니….”
“내가 만족할 만한 댓가를 가져오길 기대하지. 에르제베르트. 그리고 모두들.”
검은 존재가, 아니 거대한 용이 검은 하늘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마레이는 꿈에서 깨어났다.
“.....보면 안 되는 걸 보았구나.”
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무서운, 아주 괴기스러운 꿈을 꾸었다. 과거를 꾸었다. 과거를 보았다. 아니, 그건 꿈이었을까.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의 감정을 뭐라 표현해야 될지 몰랐지만, 그 감정들의 파도 중 하나는 두려움이었다.
마레이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라비우스, 에르제베르트, 바알, 코르키엘……… 라비우…? 라비? 라? 왜… 왜 기억이? 기억이 안 나. 제가 방금 무슨 말을 했죠?”
“아무말도 안했단다.”
“란님?”
방금 내뱉은 말이 기억나지 않았다. 방금 말을 내뱉었던가? 마레이는 뻐금거리던 자신의 입에서 목소리가 나왔는지, 나오지 않았는지도 기억할 수 없었다. 몽롱했다. 아니, 정신은 정말로 멀쩡했다.
방금전까지 란을 밀어넘어뜨려 범할 뻔했다는 것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란에게 그녀의 정체를 물었고, 그녀가 보여준 광경에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커 보이던 거대한 늑대를 보았다. 그리고.
그리고?
“무엇을 보았느냐?”
“거대한 늑대….. 그리고… 거대한 늑대.”
무엇인가 본 것 같았다. 거대한 늑대, 그리고?
그리고 무엇을 보았지? 본 것 같았다. 아니, 보았던가? 무엇을 보았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아니, 왜 혼란스러운 거지? 알 수 없었다.
“제대로 보았구나.”
“....란님?”
의식의 흐름이 끊기며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눈앞의 여우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왜 란의 이름을 부를 때 이렇게 떨고 있는 걸까.
“아주, 아주 오래된 악마. 최초의 악마. 악신. 마리는 나를 그렇게 불렀단다.”
악마라는 말보다는, 천사라는 말이 어울릴 외모로 란은 웃고 있었다. 아니, 웃는 척을 하고 있었다.
악마.
무척이나 불길한 이름이었다.
인신 공양을 하는 이교도, 북부군이 막아내고 있는 오크들, 남동쪽 산맥을 넘어오는 야만인들, 수백 년째 전란을 이어나가고 있는 산맥 저편의 이국의 지배자들에게조차 악마라는 이름을 씌우지 않았다.
신이 있는 세계에서 악마라는 이름은 흔하게 내뱉을 수 있는 단어는 결코 아니었다. 이성과 합리를 내세운 현 제국의 체계에서조차 악마라는 단어는 일종의 터부였다.
왕국이라는 이름이 제국으로 오르기까지, 거대한 산맥으로 변두리에 위치한 남부지대를 제외한 대륙의 비옥한 땅을 전부 먹어 치우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20년도 되지 않았다. 제국이 아무리 합리와 이성을 내세워 제국민들을 가르친다고 해도, 지향점과 현실의 거리는 아직도 아득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구 왕국들의 수도, 현 중심도시라 불릴만한 거대한 중앙관리의 핵심이 되는 몇몇 중심부와 거리가 떨어질수록 미신과 이교도들은 아직도 제 몸을 불사르며 더욱 큰 존재감을 퍼트리고 있었다.
서쪽의 이교도들과 암처럼 퍼져있는 미신들로부터는 거리가 먼 북부 방벽 언저리의 마을 출신인 마레이에게 있어서, 란이 내뱉는 악마라는 단어는 실제로 그 의미보다 더욱 크게, 더욱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악마라는 단어 하나로 벌벌 떨 거나, 지금 란에게서부터 도망칠 정도로 마레이는 어리석지도, 무지하지도 않았다.
“믿지 않는 눈이구나.”
란은 눈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신비한 금색의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을 감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정도로 길게 늘어진 눈꼬리를 따라 입이 길게 선을 그은다. 입을 슬며시 가리며 란은 한참 동안 쿡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뇨, 믿어요.”
란의 웃음소리가 멎었다.
“란님을 보았을 때, 익숙하다는 느낌은…… 달랐거든요.”
마레이는 왼쪽 눈 위로 손을 올렸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안대의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끊어지지 않은 신기한 물건. 성녀라 부르는 에르덴 파벨조차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물건.
그런 물건이 가리고 있는 자신의 왼쪽 눈.
그 눈이 란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마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가끔은 자신이 안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도 있었다. 사람들 시선에서 섞인 동정에서,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했으니까.
지금에 와서는 일리엔이 걸어준 환각 마법 때문에 남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어린 소년으로 보일 뿐이지만.
“너무 오랜 시간을 살아왔고, 너무 많은 것들을 보고 지나쳤구나. 의미도 없이 바라보던 것들을 하나, 둘 따라 하다 보니. 나라는 존재는 희미해지고, 또 작아져서 이제는 그 무엇도 될 수 있고, 그 무엇도 아닌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단다.”
란은 알 수 없는 말을 이어나갔지만, 마레이는 란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이제와서야 그녀의 뒤에 흔들리는 여러 개의 꼬리에 시선이 집중되었다는 말이 정확할 테지만.
“그렇게 흐려지다 보면, 눈앞의 모든 것에 익숙해진단다. 그건 상대 또한 마찬가지일 테지. 응….? 어디를…. 꼬리가 마음에 드는 게냐?”
“아, 그게….”
제대로 집중하고 있지 않는 마레이의 모습에도 란은 가볍게 웃어넘기고 자신의 꼬리를 슬며시 잡아 당겨 마레이에게 천천히 내밀었다. 아무것도 아닌 모습에도 느껴지는 고혹스러운 느낌에 마레이는 긴장한 듯, 조심스레 란의 꼬리를 받아드렸다.
“부드러워….”
손바닥에 닿는 기분 좋은 촉감에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입밖으로 소감을 내뱉었다. 란은 무엇이 그리 기쁜지 입을 가리고 작게 웃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반응적으로 웃던 모습과는 다르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손아귀에 놓인 부드러운 꼬리마저 순간적으로 시선에서 사라진다.
“꽤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지만, 막상 널 만나니 무엇을 해야 될지 모르겠구나.”
란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슬프고, 또 기쁘고, 또 안쓰러워서 마레이는 눈앞의 무녀님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달싹였다.
“괜찮아요.”
“그래, 그런 친절함은 또 마리를 닮았구나...”
어머니의 이름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아버지의 친척인 사람들도 잘 모르던 어머니, 지금 엄마(?)의 역할을 맡고 있는 라벨라 또한 잘 모르던 어머니. 슬그머니 기억의 저 너머로 흐릿해지는 친모의 이야기가 듣고 싶은 어린 소년은 드디어 란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어떤 분……. 글쎄, 어려운 질문이구나.”
어떤 분.
어떤 ‘사람’이 아닌 어떤 ‘분’.
‘분’.
마레이가 내뱉은 말을 몇 번이나 곱씹은 란은 마레이를 슬픈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마리는 악마의 혼혈이었단다. 들은 적 있니?”
출생의 비밀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야기였지만, 마레이는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현실감이 없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지금 이 자리에, 자신 앞에 앉아있는 존재가 악마의 어머니라 주장하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랐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될까…. 오백 년 전. 용사 하겐과 리리스 사이에 반인반마가 태어났단다. 그게 네 외증조모지만, 지상에 남은 이름은 없단다. 마계에서 무어라 불리고 있지만, 지상의 언어로는 발음할 수가 없구나…. 그리고 그 아이의 자식의 자식. 네 외할머니가 되는 레오나.”
하겐 드 파웬. 마레이의 고조부기도 했다. 하겐이라는 이름은 역사서나, 라벨라의 가문 교육 때에도 종종 들었지만, 리리스라는 이름은 처음 들었다. 하지만, 익숙했다. 들은 것 같은 느낌. 그것도 아주 근시일내에. 마레이가 기억을 되짚으려는 찰나, 란은 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레오나는 백 년 전 마계를 빠져나와 지상을 떠돌았고, 사십 년 전 북쪽에서 작은 영지를 가진 기사와 사랑에 빠져 마리를 가졌단다. 행복하게 지상에 뿌리를 내리려는 그 아이에게, 네 외조모에게, 외조부의 자살은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겠지.”
갑작스러운 외조부의 자살 이야기에 마레이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란을 바라보았다. 말을 이어나가던 란은 자신이 무슨 말을 잘못했는지 다시 한번 곱씹다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이런… 이라는 말과 함께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중간의 이야기를 빼먹었구나. 네 외조부는 기사였으면서, 동시에 독실한 신의 종이었단다. 그런 그에게 아내인 레오나가 악마였다는 사실은, 레오나가 진실로 그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진실로 받아드리기에는 힘들었던 것 같구나. 레오나가 악마라는 의혹을 받았지만, 십수 년 동안 부인하고, 부정하고 화를 냈던 그였으니까….”
이 세계에서 악마라는 이름이 가진 멍울일지도 모른단다. 입을 다문 란은 그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다만 눈을 감았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눈을 떴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금을 녹인 것 같은 노란 눈동자에 다시 한번 마레이는 꿈을 꾸었다.
독실한 신의 종이자, 영지민의 자랑이었던 신도이자, 영주이자, 기사였던 그는 아내가 악마를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자신의 애 검을 끌어안고 아내의 방을 찾았다. 늙어가던 자신과 다르게 변치 않고 영원토록 아름다운 아내.
그리고 그런 아내의 품 안에서 꼬물거리는 자신의 핏덩이.
단숨에 목을 베어내리라 생각하고 아내의 방을 들어간 기사였지만, 그는 한 아이의 아비였다. 핏덩이와 정말로, 정말로 사랑했던 아내의 모습을 보자 분노와 배신감은 몸을 잔뜩 웅크려버렸고.
기사는 아내 앞에 검을 내려놓고, 같이 죽자는 말을 한다. 레오나라는 이름을 부르며, 아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울부짖는 기사.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같이 죽어달라는 부탁을 하는 남편의 모습에 레오나는 입술을 꽉 깨문다.
품 안에 꼬물거리는 작은 핏덩이의 모습에 레오나는, 왜 남편이 그런 말을 꺼내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울었고, 기사는 레오나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얼마나 긴 시간일지 모를 긴 시간을 그 앞에서 지키며 울었다.
우리 도망쳐요. 레오나는, 외조모는 그런 말을 했다.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도망쳐도 소용이 없었다. 이미 수많은 교단에서 내놓은 증거물들이 두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다. 도망치고, 또 도망치더라도 집요한 집행관들은 그들을 찾아낼 터.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끝나는 게 맞았다.
그는 레오나 남편이었지만, 동시에 북부의 영주였다. 그가 도망친다면 악마 사냥꾼들이 이 영지를 가만둘 리가 없었다. 모든 게 불살라지고, 비옥하지는 않았지만, 겨우겨우 땅을 파먹고 살만했던 백성들의 터전 위로 저주가 쏟아질 터.
그렇기에 죽음으로 도망치려 했다. 자신의 아내인 악마와 악마의 피를 가진 딸아이와 함께. 기사는 하루를 꼬박 기다렸고, 대답 없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던 레오나의 머리 위로 칼을 높게…..
“그만. 제어하지 못하는 재능은 오히려 자신을 망가트린단다.”
누구의 기억인지도 모르는 흔들림속에서 란의 목소리가 마레이를 건져냈다. 방금전 보았던 광경은 무엇일까. 이상하게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알 수 없는 감정의 파도에 마레이는 눈물을 닦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그리고 자신 앞에는 란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제가…. 무엇을 본 건가요?”
“내가 본 것. 그리고 대지가 본 것.”
란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레이는 머릿속을 헤집는 것 같은, 누군가의 기억인지도 모르는 것을 기억 속에서 하나, 둘 지워나갔다. 몇 분의 시간 동안 잊으려고 노력하자, 이상하게도 희미한 장면으로 남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격한 감정도 희미해졌다.
“마리보다 더욱 뛰어날지도 모르겠구나…. 길조인지, 흉조인지 모르겠지만.”
“어머니보다요…?”
“공감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질척하고, 이해라고 부르기에는 무척이나 감정적이지. 대부분의 사람들. 지금에 와서는 너밖에 없는 그런 감각이라 해야 좋을지 모를 그 능력을 설명할 말은 있지 않단다. 과거에도 고작 몇 명에 불과했던 능력이기도 하니 이름조차 얻지 못했지.”
공감도 아닌, 이해도 아닌 무엇인가. 마레이도 자신이 본 것을 말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냥 보였고, 들렸고, 느꼈고, 기억할 뿐이었다. 곧장 희미해질 뿐이었지만.
“하나, 둘 제어하는 법을 배우다 보면 큰 힘이 되어줄 거란다. 하지만 싫다고 하면 억지로 배우게 할 생각은 없단다. 세상에는 모르는 게 더 좋을 때가 훨씬 많기 때문에…...”
란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진한 금색의 눈썹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입술이 뒤틀리는 듯이 억지로 움직였다. 무릎 위에 올려진 두 손이 상대방을 놓지 않기 위해 서로를 꼭 붙잡았다
배우지 않아도 좋다. 모르는 게 좋다. 란은 마레이가 거절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능력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이어졌고, 방금전에 보았던 그 광경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배우고 싶어요.”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써야 된다, 어떻게 해야 된다는 목표도 없이 어린 소년은 고집을 부렸고, 란은 한동안 마레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천천히 해보잖구나.”
란은 무엇인가에 들리듯, 바닥에 손을 대지 않고 자리에 홀로 일어났다.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어떻게 저리 자연스럽게 일어났는지, 마레이는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워낙 가까이 앉아있었기에 란이 한 걸음을 옮기자 곧장 마레이의 가슴팍에 코가 닿았고, 작은 손을 뻗어 마레이의 목을 잡아 천천히 자신을 향해 이끌었다.
“아가, 네 얼굴을 보여주렴.”
란과 마레이는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어린 소년은 무녀님이 말하는 얼굴이 무엇인지, 그녀의 금색 눈동자를 한동안 바라보다, 자신의 안대를 천천히 벗어 란을 보았다.
“.......역시 넌, 거기에 있었구나. ■■■. 잠깐… 너.. 무슨… 읏….!”
형이상학적인 도형들이 뜨고, 다시 고쳐지는 왼쪽 눈을 보며 란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란이 마지막에 부르는 무엇인가를 들을 수는 없었다. 언어라기보다는 울음소리 같은 무엇인가를 한 번 부른 란은 몸을 축 늘어뜨렸다.
갑작스레 주저 앉을 것 같은 란의 모습에 마레이는 황급히 그녀를 안아 들었고, 란은 길게, 길게, 아주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마레이의 가슴에 뺨을 기대다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떨어졌다.
“그만… 그만…!”
란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마레이의 가슴에 두 손을 올려 천천히 밀어냈다. 떠밀다시피 하는 그녀의 힘에 마레이는 당황한 듯 란을 내려다보았다. 란은 무엇인가 말하기 위해 입을 우물거릴 뿐이었지만, 제대로 된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금색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여, 곧장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이 된 란은 긴 소매 속에서 주먹을 꽉 움켜쥔 채로, 마레이에게서 천천히 뒷걸음친다.
"나에게 왜 그런...."
"란님?"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란은 몸이 다시 한번 크게 휘청이다가 한 걸음 앞으로 내밀며 간신히 몸의 균형을 맞춘다. 그리고 벌린 입사이로 길게 혀를 내밀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오늘은….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구나…. 다음에. 다음에 다시 오렴.”
“네? 란님?”
뒤로 물러서는 그녀의 걸음에 맞추어 마레이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거리를 좁히지도 않고 이동하던 둘의 걸음이 멈춘 것은 란의 등에 벽이 닿았을 때였다. 마레이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로, 란은 애써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하얀 상의가 꾸깃꾸깃 접힐 정도로 강하게 움켜쥔 그녀의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질척한 타액이 길게 선을 이으며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란의 몸이 움찔움찔 크게 떨린다. 갑작스러운 란의 발작에 마레이는 걱정이 되는 듯,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란님?”
마레이의 물음에 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곧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건너뛰어 문을 닫았다. 갑자기 뛰쳐나가는 그녀의 모습에 마레이는 란의 뒤를 쫓았지만, 방문을 열자, 보이는 건 신사의 밖이었다.
몇 번이나 신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을 열었지만, 보이는 것은 신사밖이었다. 분명 밖에서 안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면, 보이는 것은 신사의 밖이었고, 그 문을 통과해도 다시 문의 앞으로 자신은 빠져나오고 있었다.
마법사의 장난, 주술 등 여러 이름으로 설명이 될 것 같은 풍경에 마레이는 몇 번이나 문을 지나고, 또 지나도 신사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란의 이름을 몇 번 부르다, 다음에 다시 오라는 그녀의 말을 상기하고 자신이 지나온 수많은 붉은 기둥을 따라 발테르 학교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외조모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리리스라는 이름, 악마의 신이라고 소개한 란, 그리고 오늘 처음 뵈었던 로렌 등이 마레이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왼쪽 눈을 본 란의 행동이 라벨라등의 모습과 슬며시 겹쳐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생각에 도달하자, 애써 의식하지 않은 란의 모습이 하나, 둘 마레이의 기억 속에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작아진 란은, 자신의 신장보다 큰 옷을 입어서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분홍색 유실이 슬금슬금 보이기도 했다. 어린, 미성의 목소리로 고풍스러운 말을 내뱉는 모습이라든지, 필리아에게 느껴지는 풋풋함과 동시에 로렌에게서 보였던 완숙함이 덧씌여지는 모습에…
마레이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애써 생각을 멈추었다. 어머니의 스승님에게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것도 자신보다 작은 몸에 욕정을 품다니, 죄책감이 그림자를 타고 흘러들어와 목을 조르는 기분마저 들기도 했다.
야한 그림책이나, 망상 덩어리들을 쏟아낸 매체들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성인의 비율의 어린, 아니 그냥 성인의 몸을 작게 줄여놓은 것 같은 사람들이 생겨나자, 어린애라는 생각은 들면서도 또 성욕이 드는 이율배반적인 성욕으로 가득 찬 몸에 마레이는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필리아의 몸에 흥분할 때부터, 윤리의식이 흐릿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어린 자신이 동년배의 소녀의 몸에 흥분하는 건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가슴에 간신히 올 것 같은, 몸이 어려진 란의 몸에 흥분하다니.
이런 생각들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산책로를 무작정 걷던 마레이의 눈에 낯설지 않고 익숙해져 가는 소녀의 뒷모습의 발견은 무척이나 반갑고, 또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멜란! 멜란!”
“응? 아….. 마레이구나. 안녕.”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므랑데는 마레이의 얼굴을 슬며시 보고 눈살을 약간 찌푸리다가, 무엇인가 생각이라도 난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작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잘 지냈어요?”
“.....응.”
므랑데는 두 손으로 바구니를 꼭 쥐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짐승을 닮은 눈동자, 금색의 머리카락에서 란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앞의 소녀는 자신이 말하는 걸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떨리는 눈동자는 여유롭다기보다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기도 했다.
“멜란은 공국 건국제때 뭘 했어요? 공국에서 왔다고 들었는데, 본가로 갔나요?”
“....발테르에 있었어. 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아, 죄송해요… 그게….”
갑작스레 사과하는 모습에 므랑데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두 손은 여전히 바구니를 꽉 쥐고 있었지만, 약간 고개를 숙이고 웃는 그녀의 모습에 마레이도 따라 웃어 보였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공국에 갔나 보네?”
“아, 네. 처음 가봤는데, 대단했어요. 거대한 시계탑이라든지, 운하라든지…..”
필리아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마레이는 가서 보았던 것들이나 먹었던 것들에서 이야기를 쏟아냈다. 므랑데 또한 공국의 수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인지, 중간중간 던지는 질문이나 장소에 대해서 마레이는 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좋은 가이드가 있었나 보네. 공국에서 추천하는 관광명소는 다들 아는데, 진짜로 좋거나 볼만한 곳은 사람들은 잘 모르거든.”
적당히 두, 세 사람이 앉을 만한 나무 밑동에 앉은 므랑데는 발을 앞뒤로 휘적이고 있었다. 어느새 옆자리에 앉은 마레이는 좋은 가이드라는 말에서, 생각나는 필리아의 생각에 대해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쯤은 돌아가고 싶긴 하네. 다음에 같이 갈 일이 있으면, 더 좋은 곳을 알려줄게. 그곳 지리는 가이드보다 내가 더 잘 알 테니까...”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잔뜩 흥분해서 설명하는 마레이의 모습에 므랑데는 흥미가 생긴 것인지, 아니면 경쟁심이 생긴 것인지 입술을 삐죽 내민 므랑데에 행동에 마레이는 네, 네. 잘부탁해요라고 적당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가는 길이에요?”
“잘따르는 아이들이 있는데, 그 녀석들 주려고…..”
. 바구니를 가슴까지 조심스레 들어 올린 므랑데의 모습은 작은 동물 같아서 꽉 끌어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도와드려도 돼요?”
“뭐… 상관은 없는데….”
서툴게 긍정하는 소녀의 모습에 마레이는 바구니를 조심스레 잡아 들었다. 어린 소년의 친절을 받아들이는 것인지, 므랑데는 슬그머니 바구니를 쥔 손을 옆으로 옮겼다. 두 사람이 나눠 든 무게였지만, 방심하고 잡아 들었다가는 휘청거릴 무게에 마레이는 잔뜩 긴장한 채로 바구니를 쥔 손의 힘을 더해갔다.
“안 무거워?”
“....무겁네요.”
므랑데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을 가리고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인간이나 일반 흡혈 종들은 힘이 약하니까…. 무리할 필요는 없어.”
“조금만 더….. 같이 들어드릴게요.”
마음대로 해. 적당히 대답한 므랑데의 눈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팔의 감각이 사라질 때쯤 므랑데의 걸음이 멈췄고 그녀가 두세 번 박수를 치자, 수풀 속에서 동물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므랑데는 동물을 좋아해요?”
“맛있다고는 생각해.”
자신에게 몸통 박치기를 하며 달려드는 토끼를 자연스레 안아 든 므랑데의 대답에 마레이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는 한없이 진지해서, 마레이는 말을 제대로 이어나갈 수 없었다.
“장난이야.”
므랑데가 기쁜 듯이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누군가와 말하는 것도, 같이 있는 것도 서툴러 보이는 소녀가 자연스레 웃고 있었다.
“난 친구가 없거든.”
므랑데는 품 안에 안긴 토끼의 앞발을 잡아 좌우로 쫙 펼쳤다. 만세를 부르는 토끼의 모습만을 보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마레이는 15살이라고 했지?”
“아, 네….”
“겨우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은 내가 말하기에는 조금 부끄럽지만… 여기도 일종의 사회 같은 거거든. 특히 총독과 황제가 직접 만든 학교이다 보니까, 각지의 유력가문의 사람들이 다 모인단 말이야. 공부를 배우는 곳이기도 하는 동시에, 미래에 유용하게 쓰일 관계를 만드는 곳이야. 마레이 드 파….. 아….”
므랑데는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깨달은 것인지, 입술을 꽉 깨물더니 두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발치에 있는 돌을 차서 수풀 너머로 가볍게 넘긴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지만, 나랑 친하게 지내지 않는 게 좋아.”
“네?”
“미래에 유용할 리도 없고, 또 친하게 지내면 미래에 민폐를 끼칠 것 같거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되묻는 마레이의 모습에 마레이는 웃어 보였다. 자조에 가까운 그녀의 웃음은 너무나 외로워 보였지만, 무어라 말해야 될지 모르는 어린 소년은 그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생활을 하다 보면 알게 될 거야. 오늘은 고마웠어.”
갑작스레 태도가 변한 므랑데의 모습에 마레이는 일어서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붉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지만, 므랑데는 마레이의 손을 조심스레 풀어냈다.
“누군가 나랑 왜 같이 돌아다니냐 물으면, 이하운 때문이라고 하면 될 거야.”
“멜란? 갑자기 왜…?”
“스스로의 처지도 잊어버리고 잠시 바보가 되었나 봐.”
“그…. 공국에 가자는 건…?”
“잊어버려. 다음 수업에 보자, 마레이 드 파웬.”
따라오지 말라며 신신당부하는 므랑데의 모습에 마레이는 용기를 내어 다시 한 번 그녀를 붙잡았다.
“그래도…. 내려가는 길은 같이...”
“언니랑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돼. 내 말 명심하고. 넌 착하니까,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자신이 가는 길과 반대로 돌아가면 교사가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그녀는 숲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길을 알고 있는 듯, 자신 있게 움직이는 므랑데의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오늘 있었던 일들이 하나도 정리되지 않았다. 머리를 잔뜩 털어내 봐도 생각은 떨어지지 않고, 누군가 말하고 싶어도 장황한 거짓말 같아서 이야기를 해도 비웃음만 살 것 같았다. 친모의 이야기가 끼어들어 있다 보니, 라벨라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미안했기에 속은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이렇게 죽을상이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 필리아... 안녕하세요.”
“점심에도 봤는데, 뭘 ‘안녕하세요’야.”
별 반응이 없는 마레이의 모습에 필리아는 더이상 말을 이어나가는 대신에, 곧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은보라빛 머리카락에서 기분 좋은 향이 흘러들었고, 마레이는 조심스레 필리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보통은 반대가 아니야…?”
슬그머니 몸을 움직여, 기대기 편하게 어깨를 빌려주면서도 필리아는 작게 툴툴거렸다. 마레이는 웃음을 터트렸다. 누나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이 차이가 얼마나지 않은 누나. 물론, 실제로 필리아가 연상이긴 했지만.
“힘든 일이 있었어요. 조금.. 말하기 힘든데.. 그게 그러니까...”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자신의 어깨를 빌린 마레이의 머리 위로 필리아가 머리를 기댄다.
“익숙해져야 할거야. 악의로 넘쳐나는 세상은 꽤나 피곤하거든.”
“악의요….?”
그래, 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의든, 호의든 제대로 돌아오는 게 거의 없거든. 물론, 바라지도 않지만. 뒤에서 찌르지만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해야 돼. 길리아 마르타 때문이지?”
“네? 아뇨… 좀 다른 이야기에요.”
필리아의 고개가 슬며시 움직였다,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헛다리 짚었네. 뭐, 다른 이야기라도 말하고 싶지 않으면 됐어.”
“네….”
가만히 앉아있다 보니 바람이 차가웠다. 필리아는 말 없이 온기를 나누어주었다. 몇 분동안이나 그렇게 있다가, 마레이는 너무 민폐가 아닐까 생각에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한 번에 전부 풀어낼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하나둘, 풀어나가면 될 것 같기도 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옆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무척이나 따스해서 믿음이 갔다.
“그…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가….. 아이가… 선배가..? 있는데요.”
말하고 싶었나 보네. 필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하고 싶은 말과 대답을 동시에 처리했다.
“자신과 친하게 지내면 안 좋을 거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 여기는 미래에 도움이 될 관계를 만드는 곳이라고 하면서… 방해가 될 거라고 하더라고 말하기도 했고, 제 이름도 많이 신경 쓰는 것 같고...”
“참 재미없는 인생을 사는 얘인가 보네.”
나보다 더 말이야. 필리아는 애써 뒷말을 덧붙였다.
“물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온 애들도 몇 있겠지. 성숙한 녀석들은 잔뜩 있다 보니까. 보고 배우는 게 그랬으니까 그럴 수도 있고. 그래도 관계를 만들려고 친해진다니, 너무 속보이잖아. 그런 녀석들은 한가득 가져와도 사양이라고. 마레이,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아, 네…. 그 사랑하게 해달라고..”
필리아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얼굴을 돌리고 몇 번 헛기침을 한 후에야 진정한 그녀는 다시금 말을 이어나갔다.
“들을 때마다 부끄러워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네 정말…… 미래의 이득을 생각하고 만든 관계라면, 미래의 이득이 없어지면 버린다는 이야기로 들리네. 뭐, 그런 건 극단적인 경우겠지만.”
“협동심이나, 협력이니 말을 내세우면서 조별 과제를 잔뜩 내주잖아. 친하게 지내라는 말이기도 해. 사회성을 기른다 뭐다 말하지만 실상은 두루두루 잘 지내라는 의미야.”
“친구라는 건 동등해야 이루어지는 거야. 모든 게 동등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느 분야에서 동등하다는 게 성립이 해야 된다는 말이지. 그렇게 따지면 한 학교라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인위적으로 동등한 관계를 형성하는 곳이란 말이야. 특히, 발테르의 경우는….”
“몇 년도 안 된 이 학교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이유가 뭔데? 동문이라는 이름 하나로 얻을 이득은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거든. 이득이 되는 관계냐, 아니냐로 사람을 나누면 누가 친구가 되어주고, 누가 동료가 되어줄 건데? 미래의 이득 같은 말을 내뱉기는…. 그냥 발테르에 왔다는 사실 하나로 만족하면 될 것을...”
필리아는 쉴새 없이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마레이를 보고 말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마레이의 마음에 파문을 일렁이는 므랑데를 꾸짖는 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필리아는 마레이가 내뱉고 싶은 말을 제멋대로 토해내고 있었다.
“그 친구?라는 애가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왕따라도 당하는 것 같은데. 크게 혼내줘. 마레이 드 파웬은 미래의 이득 따위로 친구를 사귀지 않는다고, 그냥 당신이랑 친구를 하고 싶어서 옆에 있을 뿐이라고 말이야!”
양쪽 볼을 잡아 쭉쭉 늘리는 연상의 소녀의 모습에 마레이는 잔뜩 새어 나오는 발음에도 성실하게 대답했다.
“.....네.”
“필리아 더 블러드의 약혼자라면 그런 패기를 보여주란 말이야! 물론, 나 때문에 몇몇 조심해야 되는 쓰레기들이 있는데...... 시간이... 그건 다음에 이야기하자. 오늘 동생이랑 약속이 있거든.”
조금 더 필리아와 같이 있고 싶은 마레이는 벌떡 일어나, 그녀의 옆에 섰지만. 괜찮다며 마레이의 머리를 가볍게 툭툭 쓰다듬은 필리아는 아쉬운 듯 소년의 뺨을 두어 번 쓸어내리고 먼저 자리를 떠나갔다.
연상의 여인들에게는 고집을 부리곤하는 마레이였지만, 필리아에게는 묘하게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은 생각에 고집을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떠나는 그녀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등을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필리아와 헤어진 벤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마레이는 이드리엔을 따라 걷고 있었다. 수업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라 그런지 수많은 학생들로 교내는 금세 북적이고 있었다.
품 안에 책들을 잔뜩 안고 가고 있는 학생, 손을 붙잡고 재잘재잘 떠드는 여학생들, 한 숨을 푹푹 내쉬는 남학생과, 가방을 매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까지.
대부분 사람들의 얼굴에는 오늘 하루의 끝이라는 후련함과 짙은 피곤함이 잔뜩 섞인 얼굴로 교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교사와 가까운 동문 쪽으로 나가는 인파들을 역행하며 걷는 건 이드리엔과 마레이를 제외하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
이드리엔은 고급 원소술 이론이라는 두꺼운 책을 한 손으로 안아 든 채,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지나가는 학생들이 인사를 건네지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는 사람들은 몇 되지 않았다.
무례한 모습으로 비춰지지만, 사람들은 익숙한 듯 지나쳤고 마레이는 이드리엔의 뒤에서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또각또각 구두소리가 유난히 규칙적이고 크게 울려 퍼지는 것은 자신만의 착각이 아닌 듯, 사람들의 시선이 이드리엔을 향해 쉴 새 없이 이어지고 끊기기를 반복한다.
갑작스레 이드리엔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마레이를 보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날카로운 눈빛에 마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제자리에 꼿꼿이 선다.
“걸음이 늦어.”
작게 인상을 쓰고,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우물거리다가 이드리엔은 자신이 할 말만 내뱉고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걸음걸이에 따라 좌우로 움직이는 스커트에 감싸인 풍만한 스커트가 시선에 들어오고, 그 위로는 얇은 허리라인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몸에 딱 맞는 슈트를 보자, 사람들이 가득 붐비는 길 한복판인데도 마레이는 하체에 피가 쏠리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마레이의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자신의 걸음을 늦춘 이드리엔의 탓에 어느새 둘은 나란히 걸어가기 시작했고, 학생들의 시선은 더욱 더 짙게 깔리고 있었다.
“학교는 익숙해졌나?”
“아, 그게… 네. 조금...”
평소에 자신의 얼굴을 보며 욕설을 내뱉거나, 들뜬 숨을 내쉬는 모습을 전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이드리엔의 모습에 마레이는 당황한듯 말을 더듬었다.
“마법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다고 했는데, 일리엔 교수의 수업과 내 수업을 같이 듣는다니 솔직히 놀랐다. 자신이 있는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따끔한 질책에 마레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이드리엔의 옆에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마레이의 모습을 흘깃 바라본 이드리엔은 구부려진 소년의 목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일리엔 교수랑 상의해본 결과, 두 사람이 같이 가르치는 게 어떤가 이야기가 나왔다. 어차피 기초이론 쪽은 어떻게 보면 공통점이 참 많으니까 두 사람이 수업을 가르치는 걸로….”
“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는 마레이는 고개를 들어 약간 붉게 상기된 이드리엔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약간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얼굴은, 몸으로 수십 번 대화를 나눈 소년의 얼굴에는 약간의 기대와 수치심이 깃들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흠… 흠... 나나 일리엔 교수의 의견이 조금 맞아서 말이지… 내일부터는 함께 수업을…. 처음 듣는 이야기라 당황스럽기도 할 거다.”
“아, 네!”
예전이라면 일리엔과의 단둘의 시간에 이드리엔이 끼어든다는 건, 두 사람의 관계를 훼방을 놓는다는 의미와 다름이 없었지만. 지금처럼 한 손으로 책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가득 준 채로, 얼굴을 붉힌 채 자신을 흘금보고 있다는 건 완전히 다른 의미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해진 것인지, 아니면 딱히 할 말이 없는 것인지 이드리엔은 더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슬쩍 걸음을 늦추어 마레이와 함께 자신의 연구실로 걸음을 옮긴다.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건 알고 있지? 수업이 열려있지도 않은데, 한 사람을 위해서 수업이 만들어진 상황이니까….”
“아, 그게.. 네.”
이하운이나, 발렌타인이라는 선생의 수업, 검술 수업 같은 경우는 이미 시간이 잡혀있는 수업에 마레이가 들어간 것이지만. 일리엔의 원소 마법이나 줄리아의 전술학 관련 수업은 마레이를 위해 특별히 수업이 열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특혜라고 할 수도 있고, 다른 학생들에게 결코 좋은 눈초리를 받을 수 있지는 않다는 걸 길리아에게 듣긴 했다. 다만, 그런 걱정보다는 당장 눈앞에 육욕을 채우는 줄리아와 일리엔의 손짓에 마레이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만….
어느새 이드리엔의 연구실 안으로 들어온 마레이는 그녀와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만 있다는 게 정확한 말이지만. 자신의 밑에 깔려서 허덕일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이드리엔의 모습에 마레이는 긴장한 듯 등을 꼿꼿이 폈다.
“교수들 사이에서도 말이 꽤나 많아. 총독 때문에 대놓고는 못 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이 학교는 총독의 개인소유지만, 그래도 교육기관의 탈을 쓰고 있다면 어느 정도 공평성이라는 걸 보여줘야 해.”
답답한 듯, 잔에 가득 담긴 차를 한 번에 삼키고 이드리엔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줄리아 선생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뭐, 그분은 남이니까 상관할 일은 아니니까. 중요한 건. 언니가 그런 식으로 널 위해 수업을 열어버리니까 좋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상황이야… 넌 그런 것 따위 신경쓰지 않겠지만.”
“죄송합니다….”
마레이의 사과에 작게 코웃음 친 이드리엔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꺼내야 될지 모르는 소년도 이 어색한 침묵에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 내용물을 홀짝였다.
“그래서 수업을 같이 하기로 했어. 몇 명이 잠깐잠깐 시간을 내는 쪽이 어떻게 보면 더 모양새가 좋거든. 사람들은 우리 둘 중 한 명이 수업을 들어가는 줄 알고 있을 거고. 뭐 가끔 두 사람이 같이 있을 수도 있겠다만….”
자신을 원망하듯 올려다보는 초록색 눈동자라든지, 시선을 제대로 마주 보지도 못하면서도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거나, 다리를 벌리는 등 기대에 가득 찬 몸짓 같은 것은 일절 찾아 볼 수 없는 이드리엔의 모습에 마레이는 무어라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이런 말을 하기에는 이상하지만, 평소라면 자신이 그녀에게 다가가서 옷 위에 가슴을 슬그머니 주무르면, 애써 모른 척 하면서 슬그머니 허벅지 사이를 보기 좋게 벌리는 그런 암캐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으니.
하체에 피가 쏠리는 걸 억지로 참아내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크사크루의 쌍둥이 자매와 함께 교실에서 하나가 되는 상상을 하니, 흥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말을 이어나가던 이드리엔은 두 손을 모은 채로 허벅지 언저리에 있는 어린 소년의 손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 정도로 이야기를 하면 될 테니까..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할까.”
어느새 자리에 일어선 이드리엔은 연구실의 문을 잠갔다. 그녀의 행동에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마레이는 엘프 선생의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커피색 스타킹으로 둘러싸인 길쭉하게 뻗은 다리, 허벅지 중간부터 허리까지 꽉 감싸 안은 타이트한 검은 스커트.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튀어나온 엉덩이 라인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잔뜩 존재감을 과시하는 거대한 가슴.
육감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것 같은 몸매와 약간 붉은 빛을 띄는 붉은 입술과 오똑한 콧날, 큼지막한 눈동자 위에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짐승도 아니고.”
“아우… 그게….”
차가운 눈초리. 눈을 마주치는 사람이라면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날카로운 눈빛에 마레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평소라면 자신이 이드리엔을 내리누르며 그녀를 자신 마음대로 이끌어나가야 했지만, 갑작스레 현실감이 가득한 이야기가 흘러나온 상태에서 자신을 몰아붙이는 이드리엔의 모습에 마레이는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끌려갈 뿐이었다.
“라벨라랑은 그 이후로 섹스했어?”
“아.. 그게.. 저...”
갑작스레 모친의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마레이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 이후면 언제를 말하는 걸까. 공국에 별장에서 셋이서 했을 때를 말하는 걸까.
“잔뜩 임신시키겠다고 곧바로 네 엄마 질안에 사정했잖아? 그거 계속 이어가고 있냐고.”
“아… 그게.. 저… 저는….”
이드리엔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평소의 그녀라고 생각할 수 없는 말들이 이어지자 마레이는 제대로 답을 할 수조차 없었다. 다만, 라벨라가 교육한 대로 적당히 대답을 피하고 있을 뿐이었다.
“못하고 있구나? 그렇지? 응?”
이드리엔은 고혹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묘하게 시선을 피하고, 주먹을 꽉 쥔 모습과 어린 소년의 눈에는 죄책감이나 후회 따위는 일절 없이 묘한 흥분과 갈증이 담아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바지 위로 잔뜩 존재감을 들어내는 하반신을 보면 알 수 있겠다만.
“내가 도와줄 게, 어때? 할래?”
“네? 이드리엔….?
어느새 이드리엔은 마레이의 바로 앞에 있었다.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에 알 수 없는 광기가 가득해서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눕혔지만, 느껴지는 건 부드러운 소파의 등받이 뿐이었다.
“언니랑 같이… 그리고 네 엄마랑 같이 하는 거야… 하고 싶지 않아? 내가 도와줄 테니까. 응? 라벨라랑 하고 싶지 않아? 내가 도와줄게. 언니처럼 네 아래 엎드려서 앙앙 울게 만들어 줄게. 어때?”
이드리엔은 자신이 내뱉을 수 있는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마레이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모친을 범하는 데 일절 양심의 가책도 없는 이 소년을 쥐고 흔들 수 있다고 믿는 그녀의 대담한 행동이었다.
“그저.. 저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임신하라 외치며 모친 안에 아기씨를 잔뜩 토해낸 마레이에게 있어서 이드리엔의 제안은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지만, 귓가에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이드리엔의 모습은 무척이나 자극적이고.
또, 지난번 공국의 별장에서 강제로 라벨라를 범하는 그 상황이 주는 거대한 쾌락과 충족감이 떠오르자, 별다른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분명 오늘 아침에도 이드리엔이 제안을 하면 어떻게 하라는 일리엔과 라벨라의 말이 있었지만, 막상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 넷이서 즐겁게 지내는 거야, 어때? 응? 라벨라도 사실은 엄청 좋아했잖아, 그때.”
“아, 이드리엔… 엄마는 그게...”
“그 이후로 라벨라랑 대화해본 적은 있어? 널 피해 다니지 않았어? 응?”
갑작스러운 상황에 본능적으로 모친와 자신의 관계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려는 소년의 말을, 이드리엔은 듣지도 못하고 끊어버린다. 상식수준에서 그런 추태를 아들에게 보이고 앙앙 울부짖었다면, 자존심이 강한 라벨라가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라벨라가 독기를 품었다면 했다면 마레이가 오늘 학교에 올 리가 없었겠지. 아예 사라졌다면 서운했을지도 몰랐다. 자신의 마음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 자꾸 의식이 제멋대로 흔들리는 이드리엔은 짙은 미소로 마레이 위에 앉았다. 정확히는 마레이 다리 사이에 한쪽 무릎을 밀어 넣어 잔뜩 화가 난 페니스를 자극시키고 마레이위에 올라탔다는 표현이 옳았다.
“정말로 싫었으면 널 내쫓거나, 무슨 일을 했을 텐데. 아무런 일도 없이 널 피해 다니는 거 맞지? 응?”
“네에….”
마레이의 턱을 붙잡고 자신을 올려다보게 만든 이드리엔은 확신에 들어찬 눈으로 마레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슬그머니 무릎 끝을 좌우로 움직이면서 페니스를 자극해나가자, 마레이의 허리가 슬그머니 떨리는 게 소파 너머로 느껴진다.
“내가 도와줄 테니까, 어때? 응? 내가 쫓겨나면 내가 널 키워줄게. 언니랑 같이 널 잔뜩 키워줄 테니까. 응?”
“아아… 그게.. 저..”
반항하지도, 거절하지도 못하는 마레이의 모습에 이드리엔은 어린 소년의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쉽다. 벗어나려고 했을 때만 해도 끝없는 절망감이 그녀를 붙잡고 있었지만, 소년을 리드해나가려고 하니까 너무 쉬웠다.
“하고 싶지 않아? 응?”
“그게.. 저는...”
망설이는 모습을 보니 참 우스웠다. 아무리 양모(養母)라고 해도 모친임은 틀림이 없었다. 그런 사람을 범해놓고도 또다시 범하고 싶어 자신의 물음에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니 우스워서 참을 수 없었다.
성욕만 가득한 이 꼬맹이를 두려워했던 자신도, 지금 자신 손에 놀아나는 꼬맹이도 전부 우스웠다. 처음부터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신의 움직임에 벌벌 떠는 소년의 모습에 이드리엔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과 함께,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진심을 본인 입으로 듣기 위해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익숙해지는 하교 길이었지만 마레이는 평소와 다르게 무척이나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은 또 처음이기에 낯설기도했다. 그도 잠시, 학교와 집 사이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기에 자동차는 곧장 속도를 늦추고 마레이의 집 앞에 천천히 멈춰선다.
바로 옆인, 운전석에는 방금전까지 소파에서 몸을 끈적하게 뒤섞었던 여선생이 핸들을 쥔 채로 조심스레 주차한다. 평소라면 절대 생각할 수도 없게 마레이의 안전벨트를 손수 풀어주는 친절한 이드리엔의 모습에 마레이는 당황한 듯, 딱딱하게 몸을 굳힌다.
“왜? 내가 이렇게 해주는 게 싫어?”
“아니, 그게… 이드리엔 선생님. 갑자기...”
말을 더듬는 마레이의 모습에 이드리엔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슬그머니 마레이의 팔을 자신의 가슴 사이에 밀어 넣고 몸을 기대온다.
“갑자기? 왜?”
“.....적극적이라고 해야 될까… 조금 달라져서요.”
“그냥, 즐기기로 했어. 너랑 있으면 생각보다 좋더라고, 언니랑 같이 섹스하는 것도 모두.”
라벨라가 보았다면 어색하기 그지없는 이유였지만, 적극적으로 어프로치하는 엘프 선생의 모습에 어린 소년이 어색하다고 느낄 틈도 없이 팔 사이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지방 덩어리의 감촉에 침을 꿀꺽 삼킬 뿐이었다.
“언니가 널 좋아하는 만큼, 널 좋아해 보려고…. 이렇게 끼워주는 게 좋지? 응?”
“아우…. 네… 그렇지만 밖에…”
낯선 차량, 그것도 꽤나 고급 모델의 차량이 시선을 이끄는 것인지 행인들의 시선이 차량을 스쳐지 나간다.
“괜찮아, 밖에서는 보이지 않으니까… 지금 여기서 해줄까?”
손을 둥글게 말고 슬그머니 위아래로 부드럽게 움직이는 모습. 슬그머니 입을 벌리고 분홍빛 혀를 길게 내빼는 모습에 순간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뻔한 마레이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내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아, 아뇨… 조금… 밖이니까….”
적극적으로 밀어붙일수록 뒤로 물러나는 어린 소년의 모습에 이드리엔은 이전까지 느껴본 적 없는 새로운 느낌을 소년에게 받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매만지면서 거칠게 허리를 흔들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은 귀엽다고 느껴진다.
부풀어 오른 고간위로 슬그머니 길쭉한 손가락으로 쓰윽 문지르자, 허리를 약하게 흔들며 작게 울음소리를 내는 모습은 어린 소동물처럼 사랑스럽고, 또 자극적이게 다가왔다. 스스로의 호흡이 거칠어진 것을 깨달은 이드리엔은 조심스레 자신의 몸을 소년으로부터 떼어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 더 이 어린 소년을 자신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것부터가 우선이었다. 밖에서 싫다고 한 주제에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마레이의 모습에 이드리엔은 모른 척 차문을 열고 나선다.
“이드리엔… 나… 그게...”
차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오기 직전 자신의 소매를 붙잡은 소년의 모습에 순간 그대로 눕혀 잔뜩 엉망진창이 되고싶다는 생각에 이드리엔의 몸이 멈칫했지만. 애써 시선을 피한 그녀는 마레이의 손을 떼어냈다.
“우선, 집에 들어가서 이야기할까?”
차에서 내린 이드리엔은 활짝 웃고 있었다.
“조용히 들어가야 돼, 알겠지?”
이드리엔의 명령이나 다름없는 말에 마레이는 별다른 내색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무어라 중얼거리자, 허공에 작은 마법 진이 생겼다 사라졌다. 일리엔이 보여준 적 있는 마법이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들어오는 걸 모를 테니까, 방심하고 있을 때… 어때?”
“아, 그게.. 저...”
이드리엔은 대단히 착각을 하고 있었다. 마레이가 중간중간 그녀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주려고 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계획에 흠뻑 빠져있는 이드리엔에게는 마레이의 말이 들릴 리가 없었다.
아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태도는 이래도 될까? 하는 그런 의구심으로 보이지 않았기에 소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곧장 소년을 앞으로 내몰 뿐이었다. 현관에 가지런하게 놓여있는 여성용 구두를 보고 이드리엔은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방에 있나 보네. 가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내. 도망치려면 내가 잡아줄 테니까. 오늘 해버리자고. 잔뜩 사진도 찍고, 영상도 찍어서… 약점으로 잡는 거야.”
“저.. 이드리엔… 그게..”
“겁나?”
“아니, 그게 아니라...”
라벨라와는 원래부터 그런 관계였고, 그저 그때는 장난으로 했다는 말을 들으면 이드리엔이 지금처럼 대담하고, 패륜적인 짓을 마레이에게 강요할지는 모르겠다만.
“나만 믿어. 응? 꼭 도와줄 테니까. 라벨라를 다른 남자에게 주고 싶어? 응? 다른 남자 아래 깔려서 울부짖는 라벨라의 모습을 보고 싶은 거야?”
“아뇨, 아뇨. 그건.”
“그럼 하자고. 도와줄 테니까.”
며칠 전에 자신이, 지금의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이드리엔은 속에서 올라오는 욕지기를 간신히 참아냈다. 전부 이 변태 꼬마잘못이었다. 언니를 이용해서 자신을 범하고, 두 사람을 침대에 끌어들여,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한 이 소년의 잘못이었다.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모습에 이드리엔은 마레이의 어깨를 강하게 잡아 쥐었다.
“할 거야, 말 거야?”
“아, 아파요… 하, 할 테니까.. 아프니까.. 이드리엔…. 조금...”
“좋아.”
하고 싶었으면서, 짐승만도 못한 소년의 앙탈(?)에 이드리엔은 입술을 길게 늘어뜨렸다. 이렇게 애를 잘못 키웠으면, 부모에게 자신이 당한 대로 갚게 해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대신 이자까지 두둑이 쳐서. 쌍둥이 자매를, 그것도 자신의 선생님 안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질내 사정을 하는 윤리관이 부족해 보이는 소년에게 자신의 양모를 임신시킨다.
상상만으로도 쾌락에 가슴 끝이 저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패륜적이고, 배덕적인 복수를 하는 동시에 언니를 자신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이 더러운 꼬맹이를 모친과 붙여 평생 그렇게 더럽게 살게 하는 방법도 있지만.
조금의 자비심을 발휘해, 다른 사람이 채 가지 못하도록 언니의 남편으로 만들어 셋이서 잔뜩 몸을 섞으며 사는 것. 그게 이드리엔이 생각하는 최고의 모습이었다. 라벨라?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주제에 자존심만 가득하니, 양자의 씨앗에 몇 명의 아이를 낳아보면 자기 주제를 알겠지.
순간 공국에서 어린 소년 아래에서 사이좋게 페니스를 나눠 핥던 장면이 떠오르자, 갑자기 찾아오는 쾌락에 조금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꼬맹이 주제에 그렇게 힘이 좋으니까, 언니와 자신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으니 한 명 더 추가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마레이를 따라 걸어 들어가자,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라벨라의 뒷모습이 보였다. 엘프의 눈동자를 닮은, 아니 그보다 살짝 짙으면서도 반짝이는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이 엉덩이까지 길게 내려오고 있었다.
길쭉한 다리에, 터질 것 같은 엉덩이가 짧은 스커트에 구속되듯 속박 되어 있었고, 뒤에서 보기에도 커다란 가슴이 라벨라의 움직임에 따라 출렁인다.
“자, 보이지? 어색하지 않게 엄마, 아니. 네 씨받이에게 인사부터 해.”
“네, 네…!”
속삭이는 이드리엔의 맞춰, 작게 대답한 마레이는 라벨라에게 다가갔다.
“라벨… 엄마.”
인기척이 나자 몸을 크게 움찔인 라벨라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마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랑 다르게 반갑게 포옹해주거나 짙은 키스를 하는 대신,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뒷걸음질 친다. 마치 이드리엔의 얕은 계략을 전부 알고 있다는 듯이.
“엄마?”
“....밥은 차려뒀으니까, 먹으렴. 나는 일이 있으니까, 밖으로 나갈 테니까.”
마레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시선을 피한 채로 라벨라는 에이프런을 풀고 곧장 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라벨라의 반응에 마레이는 당황스런 얼굴로 라벨라의 손목을 붙잡는다.
“할 말 없으니까…. 놓거라. 너에게 화내고 싶지 않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마레이는 라벨라를 꽉 붙든 채로 그녀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소년의 얼굴에 라벨라는 가슴이 미어지는 감정을 억지로 참아내고 있었다.
뒤에서 자신의 재주를 믿고 인기척을 숨기고 있는 일리엔의 동생의 수작이 뻔히 보였다. 자신의 마법을 맹신한 걸까, 라벨라에게는 웃기지도 않은 재주일 뿐이었다. 다만, 적당히 어울려주는 것도 좋아 보였다.
주제도 모르고 사랑하는 아들을 자기 마음대로 다루려는 암캐에게는 교육이 필요해 보였다. 다만, 일리엔과 다르게 거친 야생마의 제멋대로인 성격을 고쳐주기 위해서는 모른 척 연극에 어울려줄 생각이었다.
끝까지 올려주고, 저 밑바닥까지 처박아준다면 제 주제를 알겠지. 이런 건 자신이 아니라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종마의 언니가 해야 될 일이지만, 아쉽게도 이런 못된 역할을 맡을 재주를 가진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이드리엔이 보지 못하는 방향으로, 마레이에게 윙크를 길게 한 라벨라는 마레이의 표정이 밝아지는 걸 보고, 마레이의 손을 떼어내고 문 앞으로 걸어 나갔다.
“라벨라, 도망치려구요?”
“......이드리엔.”
라벨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황했다는 말이 정확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보이도록 라벨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주먹도 꽉 쥔 채로, 입술을 꽉 문 채로.
자신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오는 이드리엔의 모습에 맞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이드리엔의 얼굴이 이렇게 우스워 보이는 건 왜일까. 라벨라는 적당히, 겁먹은 척 다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붙잡아, 마레이.”
“아, 네. 넷!”
장난스레 웃으며 윙크를 하던 라벨라의 모습에, 지금의 상황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은 소년이었지만. 라벨라라면 어떻게든 해주겠지라는 생각에 지금의 상황을 그대로 즐기기로 했다.
반항하며 울던 라벨라의 연기는 정말로 실감이 나서, 정말로 라벨라를 강제로 범한다는 흥분으로 가득했던 밤이 떠오르자. 마레이의 검은 눈동자가 잔뜩 기대감으로 반짝인다.
반항하며 울던 라벨라의 연기는 정말로 실감이 나서, 정말로 라벨라를 강제로 범한다는 흥분으로 가득했던 밤이 떠오르자. 마레이의 검은 눈동자가 잔뜩 기대감으로 반짝인다.
“저번의 일은 불문율로 하기로 했습니다. 이쯤 하시죠. 더 하시면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드리엔..”
이드리엔은 여전히 자신을 내려보는 보랏빛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 양자에게 박히면서 앙앙 울부짖다 못해, 자신과 사이좋게 허덕였던 걸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애써 잊으려고 하는 것인지 몰라도.
자신을 더럽다고 노려보는 눈동자를 본다면 어서 빨리 망가뜨려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마레이의 짙고 농후한 정액이 매일매일 질 안에 가득 부어진다면 금방 임신할 터. 그때 표정을 당장이라도 보고 싶어졌다.
“여유만만하시네요, 라벨라.”
"닥쳐!"
여유만만해 보이던 라벨라가 거칠게 욕설을 뱉어내자, 이드리엔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한 것도 아주 잠시였을 뿐이구나, 무서워하고 있구나라는 확신이 들자. 이드리엔은 거칠게 라벨라를 밀어붙였다.
“닥치라고? 닥쳐? 엄마의 중고 보지를 써줘서 고맙다고 외치던 그 암퇘지주제에 나보고 닥치라고?!”
테이블까지 밀쳐진 라벨라는 거칠게 미는 이드리엔의 힘에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테이블 위에 쓰러진다. 잔뜩 떨리는 라벨라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느껴졌지만, 묘하게 뜨거워지는 그녀의 숨결에 이드리엔은 마지막 남은 죄악감이나 죄책감을 털어냈다.
“이리와, 마레이”
자신의 말을 잘 듣는 꼬맹이. 자신 아래 깔려있는 라벨라. 그전에 있었던 세 사람의 광란의 연회를 떠올리며 이드리엔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잡고 있을 테니까, 벗겨.”
“하지 마… 하지 마, 마레이, 하지 마…!”
이드리엔이 라벨라의 두 손을 잡은 채로 그대로 테이블 위에 밀어붙였다. 검은 스타킹이 신겨진 다리가 어린 소년이 다가오는 걸 허락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거칠게 허공을 휘저었다.
-짝!
이드리엔이 라벨라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반항하지마, 암퇘지 주제에!”
“하지마…! 하지말라고…!”
“얌전히 네 아들의 씨받이나 돼에...읏..!”
뺨을 맞았는데도 여전히 반항하던 라벨라는 거칠게 몸을 비틀어 가며 이드리엔의 배를 무릎으로 찍었고, 힘을 잃고 자신을 향해 쓰러지는 이드리엔을 도망치기 위해 밀어냈다.
“마, 마레이 놓...윽…!”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라벨라는 자신의 손목을 붙잡는 낯선 감각에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보았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몸을 회복한 이드리엔이 라벨라의 명치를 주먹으로 후려갈긴다.
라벨라는 이드리엔을 노려본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두 손은 나무줄기로 결박당해 등 뒤로 묶여있었고, 유연한 두 다리를 이드리엔에게 붙잡힌 채로 잡아 당겨져 M자 모양으로 위로 내밀어져 있었다.
주방용 가위에 제멋대로 잘려진 치마는 테이블 아래 버려져 있었고, 검은색 레이스 팬티와 허벅지 살을 꽉 조이는 스타킹의 모습 그대로 진상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