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에서 실신해 버린 두 사람을 두고 온 마레이는 머리까지 완전히 말리고서 하교할 수 있었다. 마지막에 두 사람을 겹쳐놓고, 두 사람의 맞닿은 하복부 사이로 거칠게 페니스를 쑤셔 박았다. 까끌까끌한 음모의 감촉, 쌍둥이 자매의 끈적한 키스가 주는 황홀한 광경에 마레이는 금방 사정해버렸고, 맞닿은 두 사람의 배 사이로 흘러나오는 하얀 정액 줄기를 보며, 정액 버거 같다 생각을 해버렸다.
거기에 또 육욕이 치솟아, 이드리엔과 일리엔을 번갈아 가며 찌르고 번갈아 가며 사정해 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모두가 만족했다는 느낌을 받은 마레이는 가볍게 모든 걸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남은 두 자매는 이제 온몸에 덕지덕지 붙은 정액덩어리를 씻어내거나, 먹어 치운 뒤. 잔뜩 실금해버려 더러워진 바닥과 축축해진 매트리스, 흘러내리는 정액을 닦아낸 휴지 등을 치워내고 나서야 하교를 할 수 있을 터. 하지만 마레이는 두 사람에게 남은 일에 대해서는 무지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하교길에 굳이 중앙 광장을 지날 필요는 없었지만, 마레이에게 광장을 들리는 일은 요근래 중요한 일과가 되어버렸다. 물론, 지난번에 라벨라가 직접 찾아온 경우는 어쩔 수 없었지만. 오늘처럼 혼자 하교하는 길에는 빼먹지 않은 루틴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때 본 바이올리니스트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 아름다운 마음을 이끄는 음의 움직임과 신비로운 분위기. 거기에 왜인지 모르지만, 그 바이올린의 울음소리는 방벽 주변 마을을 떠올릴 때마다 가끔 느끼는 향수(鄕愁)를 달래주는, 마치 위로 같았다.
오늘은 없는 건가. 생각에 아쉬운 마음을 접고 돌아가려는 찰나, 그리웠던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
그리웠다. 마레이는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자마자 걸음을 서둘렀다. 운이 좋으면 몇 곡 정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에는 꼭 이름을 물어봐야지. 신이 난 마레이는 바이올리니스트에게 하고 싶은 질문들을 잔뜩 생각하며 광장을 중앙으로 달려갔다.
오늘도 칙칙한 로브를 머리끝까지 덮어쓴 채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마레이는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으며 연주자 주변에 둘러싼 사람들의 벽을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모두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곡만 하고 갈게요.”
로브를 둘러싼 연주자의 목소리였다. 무척이나 듣기 거슬리는, 뭔가 방해가 있는 것 같이 지지직거리는 목소리였다. 여자 목소리 같기도 했다. 뭔가 이질적인, 마법적인 무슨 느낌이 들은 그런 변조된 목소리 같았다. 마레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주변 사람들은 저 목소리가 거슬리지 않는 걸까. 다들 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지지직 거리는 라디오 같은 목소리였다. 무척이나 인조적었고, 거슬렸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이질감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저건…..
♬~
의식의 흐름이 멈춰선다. 바이올린의 선율에 마레이는 눈을 감았다. 무척이나 역동적이었지만, 고요했다. 움직임은 바람 같았지만, 물의 고요함을 담고 있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래, 이건 호수 같았다. 아침의 호수. 서늘한 사람이 호수의 위를 달려 나가고, 물이 잔물결로 흔들리며 무척이나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그런 아침의 호수.
마을 주변에 있던 호수가 떠올랐다. 아침 특유의 숲 냄새. 옅은 물비린내와 여름에도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 그 위에 뛰어노는 무엇인가가 보였다. 마레이가 손을 뻗자, 그 무엇인가가 빛무리가 되어 마레이를 향해 마주 손을 뻗었다.
넌 무엇이니. 빛무리는 반짝일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 호수의 경계에 있는 빛무리가 아른거렸다. 마레이는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갔다. 호수가 앞에 있었다. 반짝이는 빛무리가 더욱더 밝게 빛났다. 이제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았다. 마레이는 손을 뻗었고 빛무리에….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눈을 떴다. 방금전 무엇을 본 걸까. 온몸에 소름이 돋아 있었다. 아니, 전율이라고 해야 될지도 몰랐다. 아, 방금. 마레이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방금 본 건 환상이었을가, 아니면 현실이었을까. 환상이라 생각이 들지만, 모든 게 생생했다.
잔떨림의 호수, 그 사이로 보이는 이끼 낀 돌, 물고기들. 젖은 흙냄새, 물비린내. 그리고 땀이 흐를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른 발테르 광장의 열기를 잊어버릴 정도로 서늘했던 그 온도. 신발의 밑창은 젖어있었다.
몇 번이나 현실이었는지, 환상이었는지 알 수 없어 고민하는 동안 주변에 있던 구경꾼들도. 그리고 연주자도 어느새인가 사라져 있었다. 마레이는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연이야, 우연이군. 마레이 드 파웬.”
웃고 있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마레이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에 노인이 서 있었다.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마레이가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이 말은 좀 틀렸다. 지난번에 발테르 광장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노인이었으니까.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사이로 갈색빛이 숨어 있었다. 눈가 주변의 주름, 내보이는 분위기가 그가 노인임을 말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뜨겁게 불타는 눈동자는 그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게 했다.
“아, 안녕하세요. 그… 성함이...”
“할아버지라 불러줬으면 좋겠구나.”
이름을 알려주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이름을 알려주면 알아들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든지. 마레이는 잔뜩 긴장해서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발테르로 온 이후부터 신기한 만남이 쉬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익숙해져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할아버지. 그래도 성함은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름을 말할 정도로 유명한 사람은 아니라네. 거기에 일주일이란 시간은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지. 그래. 파웬군은 잘 지냈는가?”
이 사람은 자신을 알고 있었다. 분명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레이는 이 노인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접근했는지 알 수 없었다.
“네, 저는 잘 지냈는데….”
“발테르의 여름은 버티기 힘들 정도로 덥군. 뭐라도 마시겠나?”
어느새 마레이는 걷기 시작한 노인의 발걸음을 따라 걷고 있었다. 더위에 익숙하지 않은 듯, 땀을 뻘뻘 흘리는 노인의 모습에 마레이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 먹고 싶은 걸 고르자꾸나.”
“아, 제 것은 제가...”
“자네는 감사합니다 말 한 마디 하면 되는 걸세.”
노인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무척이나 강렬한 눈빛에 마레이는 거절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지난번에 무척이나 잘 먹더구나. 일단 간단하게 먹자꾸나.”
간단히라고 말했지만, 노인은. 아니 할아버지는 꽤나 많은 음식들을 가볍게 주문했다. 지난번에 마레이가 먹었던 것들과 똑같은 것들이었다.
“저, 이렇게 많이 사주시면….”
“손주 같아서 그렇다네. 부담 갖지 말게나.”
상대방은 말하는 게 무척 어색해 보였다. 장애가 있다거나 어려워한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아니, 어려워한다는 느낌은 맞았다. 그건 마레이가 어려운 게 아니라, 마레이와의 거리감을 제대로 잡지 못해서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저,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허허허, 그래. 그래. 파웬군. 내가 손… 아니, 이게 아니지. 손자 같으면서도 외인이라 생각해버려 사실에 거리감을 주고 말았군. 미안하네.”
노인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할아버지라는 단어도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분은 도대체 누구일까.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뭘 바라는 눈치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 이번 주는 어떻게 보냈는가?”
“아.. 그게… 그러니까….”
대부분은 적극적인 섹스 노예들과 하루종일 뒹굴었을 뿐이었다. 나머지는 공부, 숙제. 그리고 수업 정도일까.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마레이의 모습에도 노인은 웃고 있었다.
“그 나이대에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지. 공부만이 능사가 아니야. 파웬군은 공부를 잘하는가?”
어색해하는 마레이의 모습에 노인은 자연스레 이야기를 이끌어나갔다.
“아뇨, 그냥 평범하다고….. 좀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결핍을 아는 것이 배움의 첫 번째 자세이지. 자네는 좋은 학생이군.”
노인은 마레이를 무척이나 좋게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무슨 이야기를 해도 노인은 웃으며 마레이를 칭찬할 뿐이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별 게 없었다. 수업 내용이라든지, 그에 따른 생각 같은 것을 노인은 경청해서 들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날 쯔음에 회중시계를 꺼내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 다음에 봤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날 뿐이었다.
노인은 누구일까. 그 생각에 머릿속이 가득 차서 정신을 차려보니 집에 도착한 후였다.
이드리엔이 없어, 무척이나 고요했던 집안에서 마레이와 라벨라는 끈적이게 몸을 섞으며 충분한 휴식을 보낼 수 있었다. 일리엔에게 연락조차 없었던 걸 보아하니, 자신이 떠난 이후 쌍둥이 자매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생각에 불안해졌지만.
언니와 같이 한잔하고 있다며 집 안 사진을 찍어서 보내는 이드리엔의 모습에 마레이는 그냥 웃어버리며 라벨라의 엉덩이 구멍 안에 잔뜩 사정을 끝으로 잠이 들었다.
아침은 언제나와 같이 기상 펠라로 봉사하는 라벨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아침 해가 아직 떠오르지 않은 창밖을 보며 잠을 깼다. 간단히 씻으며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유혹해오는 못된 어머니를 불방망이로 잔뜩 교육시켜 착하게 만들어주고, 아침 식사 시간인데도 정액만 편식하는 라벨라를 잔뜩 혼내주는 것으로 아침 일과가 거진 끝이 났다.
라벨라는 어린 아들을 향해 엉덩이를 치켜든 채로 정액이 줄줄 흘러나오는 엉덩이 구멍을 있는 힘껏 벌리고 있었다. 움찔움찔 떨고, 당장이라도 귀여워 해주세요 외치는 듯한 살 주름 투성이인 구멍에 마레이는 한 번만 더…? 라는 생각을 했지만, 더이상 했을 경우 이체르 발렌타인 교수의 수업이 늦을 수밖에 없었기에.
마레이는 둥글게 생긴 마개를 꺼내, 라벨라의 엉덩이 구멍에 천천히 밀어 넣었다.
“읏… 마레이…. 이건.. 어디서...”
“이드리엔이 줬어. 자, 조금만 더 활짝 벌려봐, 엄마. 아니. 힘을 조금만 더 풀어봐. 옳지, 옳지. 다 들어간다. 다 들어간다. 좋아. 잘했어.”
항문 안에 엄청난 양으로 싸질러 놓은 정액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마개를 끼워넣는 어린 아들의 행동에도 거부하지 못 한 채, 숨을 헐떡이며 묵직한 고무와 플라스틱이 잔뜩 섞인 감촉을 받아들인다.
“자, 이제는 아래야. 아래도 활짝 벌려줘.”
“아읏.. 네에엣.. 네에에… 마, 마레이가 원하면… 흐으읏..!”
-푸우욱.. 푸욱..!
젊고 아름다운 모친의 엉덩이 구멍에 넣어두었던 마개보다 조금 더 작은 크기의 바이브가 소년의 힘에, 정액으로 가득 찬 질육안으로 밀려 들어간다.
“응, 예뻐, 엄마. 아니, 라벨라. 정말 예뻐.”
“그런가요… 읏.. 으읏… 하나, 입으면…. 안 되겠네...”
가슴에 겨우 닿을 정도로 작고, 어린 아들의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행위에도 라벨라는 들뜬 듯 허리와 어깨를 부르르 떨며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거기에 슬금슬금 새어 나오는 정액 줄기에 라벨라는 팬티를 세 곂이나 겹쳐 입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분의 속옷을 챙겨 가방 안에 넣어두었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학교에 도착한 마레이는 서둘러 이체르 발렌타인 교수의 수업이 있는 강의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평소보다 늦은 것이지 지각한 게 아니기에 교실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때, 자신에게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던 선배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어서 마레이는 맨 앞자리에 앉아 두 사람을 기다렸다.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시야가 깜깜하게 변했다.
“누구일까요~.”
마레이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려 했지만 꽤나 무거운 무게감이 머리를 짓눌러 일어날 수도 없었다. 누구냐고, 이 목소리 익숙했다. 그리고 무척 밝고.
“일리엔….?”
“땡~, 아쉽네요~.”
아쉽다면 이드리엔 밖에 없었다. 요근래 이드리엔이 무척이나 애정표현에 적극적이게 되었지만 이런 장난을 칠 것 같지는 않았다. 줄리아의 목소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이드리엔….?”
“완전 틀렸다구요!”
일리엔 맞잖아. 마레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리엔이 아니라, 렌이라구요. 렌. 다른 사람들 없을 때에는 렌이라 불러주시기로 했잖아요. 어제도 잔뜩 불러주셨으면서!”
시야가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마레이가 고개를 들자, 머리에는 무척이나 무거운 가슴이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섹스 도중 꽉 쥐어보기도 하고, 가지고 놀기도 했지만, 이렇게 느껴보니 무척이나 무거웠다.
“아, 미안해… 렌.”
“후후, 네. 잊어버리면 섭섭하다구요?”
일리엔은 마레이의 옆자리에 바짝 당겨 앉았다.
“오늘 이체르 선생님 수업이 아닌가요…..?”
“맞아요, 발렌타인 교수 수업이에요. 언제나 정시에 오는 사람이니까, 잠시 이렇게 괜찮죠?”
싱긋 웃는 일리엔의 모습에 마레이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렇게 옆에서 같이 수업을 들을 수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아쉬워요.”
“네?”
“수업을 하는 거랑, 수업을 같이 듣는 건 다르잖아요. 막, 동급생이라든지. 두근두근 연애라든지. 같은 학생이라면 그런 게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져도 상관없는 그런 자유로운 관계고, 대놓고 애정표현도 할 수 있고…. 뭐, 전 주인님이 밤에만 귀여워해 주셔도 감사할 따름이지만요.”
일리엔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말이에요.”
두구두구두구…. 입으로 드럼을 치는 소리를 내며 쇼핑백을 꺼냈다.
“아, 이건 뭐에요??”
“엄청엄청 맛있는 케이크 집에서 구한 한정 케이크에요! 구하느냐고 힘들었다구요?”
망치와 모루가 있는 무늬가 있는 쇼핑백이었다.
“.....어, 이 쇼핑백은 케이크 집에서 준건가요?”
“아, 하하하. 좀 특이하죠? 드워프가 만든 거라 그래요, 손재주도 좋고, 만든 물건도 완벽한데. 이상하게 포장이나 표지 같은 거에 대해서는 센스는 영 별로라서요. ‘르 말랭’이라. 들어보셨어요?”
“아, 네. 필리아가 엄청 칭찬하던 양과자점이라고….”
역시, 엄청엄청 맛있다구요~? 일리엔은 가슴을 쭉 펴 내밀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포장을 뜯는 일리엔의 모습에 마레이는 당황해 그녀를 말린다.
“주신 건 감사한 데… 지금 먹기에는...”
“괜찮아요, 괜찮아요. 발렌타인 선생님도 같이 먹으실 거거든요.”
일리엔은 발렌타인과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레 비싸 보이는 케이크를 책상 위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난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일리엔 교수님.”
“아, 발렌타인!! 아니. 아니, 발렌타인 교수님 어서 와요!”
어느새 열린 문 앞으로 로브로 온몸을 가린 발렌타인 교수가 서 있었다.
“일리엔 교수님. 그래도 수업 직전인데… 이렇게 들어오시면...”
“마레이를 제외하고 학생도 없잖아요. 자, 빨리 와서 먹어요. ‘르 말랭’에서 받아온 한정 케이크들이라구요?”
이체르 발렌타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테이블에 앉았다. 로브 안의 이체르의 표정을 볼 수는 없어 보였지만 묘하게 들떠 보였다.
“이 귀한 걸 어떻게 이렇게 많이...”
“르 말랭 점장이랑은 개인적인 인연이 있어서 말이야.”
일리엔은 즐겁게 웃으며 발렌타인에게 포크를 건네주었다.
“개인적인 인연이요….?”
일리엔의 말에 묘한 단어에 마레이는 되물었다.
“어릴 적에 우리 집에서 주방장을 하신 분이시거든. 아직도 가면 아가씨~ 아가씨~ 해서 큰일이야. 더이상 고용인이 아닌데도 말이야.”
좋은 할아버지야. 일리엔은 눈동자에는 옅은 그리움이 담기다, 사라진다. 그리고 곧장 포크로 케이크를 잘라냈다.
“자, 마레이도 먹어봐. 아~ 앙~”
“아, 저는 제가 잘라 먹을게요.”
이체르 발렌타인 교수가 보고 있음에도 일리엔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마레이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일리엔이 내민 포크를 피하자, 일리엔은 섭섭한 듯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래도, 한 번 먹어보라니까. 응? 아앙~”
“일리엔 교수님…..”
이체르는 당황한 듯 일리엔을 불러 세웠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제자님일라구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자, 마레이. 아앙~”
마레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벌려 일리엔이 주는 케이크를 받아먹었다. 일리엔은 황홀한 표정으로 제 손으로 주인님에게 간식을 먹이고 있다는 사실에 연신 기쁜 듯 웃어버린다.
“그리고, 일리엔 교수님. 마레이 말고도 다른 학생도 있습니다.”
“아직 안 왔는데요. 뭘~? 아, 케이크는 넉넉하게 가져왔으니까 괜찮아요.”
이체르는 답답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레이는 정말 괜찮은 걸까 생각을 하며 이체르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보니 이체르 앞에 있던 케이크가 게눈 감추듯 사라져 있었다. 어디 갔지….?
“자, 자. 이제 수업 시간이니까. 가시죠, 일리엔 교수님.”
“아잉~. 딱딱하게 그러지 말고. 이체르 교수님. 조금만 더요~ 더~.”
“안됩니다.”
일리엔은 이체르와 무척이나 친해 보였다. 애써 부탁하는 일리엔의 모습에도 가볍게 무시하는 걸 보아하닌 꽤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 같았다.
“뭐, 저도 수업이 있으니까….. 아, 남은 건 쉬는 시간에 같이 먹어요. 마레이, 이체르? 그럼 전 갈 테니까!”
일리엔이 빈 알루미늄 포장지를 깔끔하게 치우고 테이블을 물티슈로 완전히 닦아낸다. 순식간에 깔끔하게 변한 테이블. 일리엔이 자리에 일어나 문의 경계선에 섰다.
“마레이~ 바이바이~ 이따 봐요~ 이따~.”
부끄럽지도 않은지 큰소리로 외치며 손을 흔드는 일리엔의 모습에 마레이는 고개를 푹 숙였고, 이체르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고생이 많네.”
“아니에요….”
이체르는 말없이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달콤한 냄새가 그녀에게 은은히 새어 나왔다. 케이크 냄새가 아니라 체향. 무척이나 끈적하고 달콤한 냄새였다. 밀크 초콜릿일까. 한동안 말없이 테이블에 앉아있던 두 사람은 수업 종이 치는 걸 듣고도 움직이지 못했다.
“다른 학생이 안 오는군...”
이체르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묘하게 한숨이 많은 사람 같았다. 얼굴을 보고 싶었다. 살짝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듣기 좋았다. 가까이 있음에도 로브 안이 보이지 않았다. 마법적 처리가 되어 있는 것처럼 그 안은 까맣게 보일 뿐이었다. 아니 초콜릿 색인가. 무엇인가 있었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는 시간도 조금 지루하니, 하나만 더 먹을까…..?”
이체르는 내심 케이크를 더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럼… 조금만 더 먹을까요?”
“응..! 아니, 이게 아니라. 좋아. 좋다. 흠흠.. 흠...”
로브속에서 무척이나 성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브 안에 어떤 사람이 들어있는지 모르지만, 귀여운 사람이라는 감상이 남는다.
역시나. 이체르가 케이크를 먹고 싶다는 느낌은 정확했던 것 같았다. 로브 너머로 조각케이크를 음미하면서 먹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작게 콧소리도 흥얼거리고, 케이크에 집중하는 것 같은 고정된 모습에 마레이는 작게 웃어버렸다.
“제 거, 더 드실래요?”
“아 그게.. 그러니까… 그래도 될까?”
분명 케이크를 다 먹었음에도, 크림이 묻은 포크를 입에다 가져다 대는 발렌타인의 모습에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반쯤 남은 케이크를 건넸다. 로브 안은 마법적 처리가 되어 있어서 까맣게 보여야 했는데, 자세히 보자 안에 희미한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윤곽만으로도 이체르가 대단한 미인이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지난번에 온 남학생을 기다리면서 조각 케이크를 먹었는데도, 그 학생은 오지 않았다. 몇 번 보았다면 이름이 기억났을 텐데, 한 번만 만난 사람이라 그런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조금 희미했다.
“....안 올 모양이군. 수업을 시작하지.”
물끄러미 문을 보던 이체르는 포기하고 테이블을 치우고 분필을 붙잡았다. 마레이도 책을 피고 필기할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이체르가 옆에 앉았다.
“단둘인데, 판서하기에는 효율이 나빠. 직접 알려주지.”
발렌타인 교수는 펜을 자신의 책을 꺼내 마레이 옆에 두고 하나, 둘 마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흑마법이라는 말은 무척이나 포괄적인 용어야. 저주술, 혈족 특유술법 등. 일종의 비주류 마법들의 총칭으로 불리고 있다.”
이체르의 말에 마레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마법과 원소 마법의 차이에 대해서 강의해주던 일리엔과 이드리엔의 말이 떠올랐다. 세 개의 분류로 나눈 마법에 대해서 마법사들은 무척이나 불만이 많은 것 같았다.
“흑마법이라고 하면 대부분 저주나 사령술 같은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사실, 흑마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종족 특유의 마법들이다.”
흡혈귀들이 쓰는 피를 이용한 신비들, 드워프 종족 특유의 불을 다루는 마법들, 수인족들의 강체술. 오크들의 각인. 종족 특유의 마법이라고 하는 것은 엄연히 인간의 기준으로 작성이 되어 있었다.
다만.
“대부분의 엘프들이 쓰는 정령술은 왜 흑마법이 아니죠….?”
“글쎄… 어른들의 사정이려나.”
이체르는 웃어 보였다. 아니, 웃는 것처럼 보였다. 로브 안에 흐릿한 윤곽이 왜인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파웬군은 엘프들이라고 하면 어떤 게 떠올라?”
“엘프요….?”
당연히 마레이의 머릿속에 크사크루 자매가 그려졌다. 정액 범벅이 된 채, 침대 위에 널부러져 숨을 겨우겨우 내쉬던 모습에 하반신의 피가 쏠린다. 마레이가 제대로 대답하지도 못하고, 살짝 붉어지는 얼굴에 이체르는 뭘 생각한 것인지 쿡쿡 웃어버렸다.
“일리엔 교수님을 생각하고 있구나? 확실히 그분 같은 이미지가 보편적이긴 하지. 아름답고, 친절하고. 또 능력 있고….”
이체르 발렌타인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렸다. 일리엔 크사크루라는 존재를 자랑하듯, 허리를 슬며시 피며 기분 좋게 숨을 내쉰다.
“그러고 보니, 일리엔 교수님의 제자라고 했나. 학생들을 좋아하시는 분이지만, 제자는 들일 생각이 없다고 했는데…….”
“아, 네에….”
이체르의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자신을 훑고 있는 느낌. 마치 심사위원 앞에서 점수를 평가받는 것 같아, 불편하면서도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들었다.
“주제로 돌아와서. 엘프들의 이미지라는 게 인간들에게는 무척이나 긍정적인 방향이잖아? 대륙이 통일되기 전에도 신성시 여기는 마을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제국이 통일 전쟁에도 승리자의 편에 섰었지.”
“예. 발테르 총독님과 관련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체르는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고 마레이를 보았다. 꽤나 즐거워 보였다.
“그래, 너는 총독의 손자라고 했던가.”
이체르의 손에서 펜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검지와 약지 사이로 일정한 궤도를 그리다가, 엄지 위를 스쳐 지나가고, 다시 두 손가락 사이로 움직이는 펜의 모습에 마레이는 이체르를 봐야 된다 생각을 하면서도 하얀 장갑을 낀 손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마왕이 침략했을 때도 엘프는 인간의 옆에 있었고, 그 이전에. 수많은 이야기에 엘프들은 인간의 옆에 있었지. 커다란 위기일 때마다 일종의 동반자 같은 느낌이었어. 중간중간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던 드워프나 수인족과 다르게도 말이야.”
대륙전쟁 중 일어났던 종족전쟁, 드워프와 수인족들의 광기 어린 전쟁에서 엘프는 여전히 인간의 편에 서 있었다. 그렇기에 여황제는 엘프들의 영역을 인정했다. 라벨라의 이야기로는 발테르 서쪽에 대숲이라 불리는 영역이 있다고 했다. 정확한 명칭은 엘븐하임이라는 왕국이 존재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짐작도 못 한 거대한 크기의, 발테르의 몇 배나 되는 크기의 숲이 엘프들의 영역이라고 했다.
“인간들도 재능이 있다면 수인족의 강체술, 드워프의 불, 흡혈귀의 혈(血)마법을 쓸 수 있어. 정령술에 적합한 사람이 적은 것처럼, 다른 것들도 비슷하지. 하지만 배우는 인간은 없어. 배울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야. 이걸 아는 사람도 거의 없고.”
“사람도 쓸 수 있었나요?”
이체르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흡혈귀는 아니지만, 흡혈귀 특유의 혈(血)마법을 쓸 수 있어. 피의 창을 만든다던지, 시체를 폭발하는 그런 사령술 계열에서 내려온 가짜가 아니라, 진짜 혈(血)마법. 일종의 재능이지.”
이체르는 사람인 걸까. 마레이는 로브로 뒤덮인 여인을 보았다.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처음 맡는 체향이 그녀에게서 새어 나왔다. 크사크루 자매의 몸에서 나던 그 특유의 청량감과 비슷하면서도 무엇인가 다른 그런 냄새가.
“특이한 일은 아니야. 수인족의 국경선 주변 마을에서는 강체술을 쓸 수 있는 가문이 있는 걸 예전에 본 적이 있다. 지금도 거기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드워프의 불을 쓰던 인간도 본 적이 있어. 드워프의 밑에서 자라던 인간이었지.”
“와….”
놀라워하는 마레이의 모습에 이체르는 작게 웃었다. 이제 로브 속의 목소리가 귓가에 또박또박 들려왔다. 라벨라와 처음 만났을 때, 딱딱하고 낮은. 허스키한 목소리를 닮았지만, 조금 더 여리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마레이를 부르는 라벨라의 목소리는 귀가 녹을 것처럼로 달콤하게 변해버렸지만…..
“귀족의 혈통(blue blood)이라는 말이 몇 년 전까지 있었던 걸 생각해보면, 그런 특수한 재능이라는 건 어느 정도 유전적인 요인이 있다는 거겠지. 특히, 라벨라 드 파웬을 보면…. 아, 실례. 네 어머니 이야기가 예시가 되어버렸네.”
이체르는 곤란한 듯 뺨을 긁적였다.
“나쁜 이야기도 아니고, 괜찮아요.”
“기분 나쁘지 않다면 다행이네. 이 이야기를 할 때, 라벨라 드 파웬만큼 적합한 예시가 없거든. 뭐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라벨라 드 파웬, 네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는 자주 들어봤지? 뭐 천재성 같은 걸 이야기하면 빠지지 않는 사람이니까.”
마레이로서는 잘 모르는 이야기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라벨라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지만, 사실 피부로 체감하는 건 항상 따뜻하게 안아주는 자신의 파트너. 아니, 이런 단어를 쓰면 안 되지. 자신의 어머니었으니까.
“용의 피(dragon blood)라는 말이 있어, 전설 속에 등장하는 용사들이 사악한 용을 잡고 그 피를 뒤집어쓴 뒤에 피부가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시력이 좋아졌다 이런 이야기가 있거든. 이야기가 이상한 곳으로 흘러버렸네. 피, 그러니까 유전적인 의미에서 재능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의미야. 마법도, 검술도, 강체술도, 정령술도 쓸 수 있는 인간이니까. 그것도 그렇게나 강력하게.“
”강체술이요….?”
라벨라가 정령을 다룰 수 있다는 건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없었던가. 하지만 수인족의 강체술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마레이도 처음 들었기에, 라벨라가 쓸 수 있다는 건 정말 금시초문이었다.
“몰랐어? 아, 이건…. 쯧. 솔직하게 말하자면, 예전에 라벨라 드 파웬과 싸운 적이 있었어. 엘븐하임이었는데, 강체술을 썼거든.”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내가 졌으니까 별 신경 쓸 필요 없어. 싸웠다고 해도, 그냥 대련 비스무리한 거라 서로 악감정도 없고.”
걱정하지 마. 이체르는 짧게 답했다. 그러고 보니 수업표를 짤 때, 라벨라의 의견이 강하게 들어갔었다. 그때 이체르와 이하운에 대해서 꽤나 좋아했던 것 같은데. 이하운도 라벨라를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라벨라가 기억하지 못했거나.
라벨라에 대해서 모든 걸 알 수는 없었다. 물론, 라벨라에게 묻는다면 전부 알려줄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남에게 라벨라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게 묘하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레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체르는 당황한 듯 마레이의 이름을 부르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화가 나거나, 무서운 건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래.”
이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레이도 이체르 발렌타인에게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에게 화가 났다. 라벨라에 대한 이 끈적한 소유욕이. 아니, 그냥 소유욕에 대해서 요즘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어제만 해도, 일리엔이 이드리엔에게 보여준 그 어른스러운 모습에 화가 났던 자신을 명백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게 없어야 한다는 그 아집을 놓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할 뿐이었다.
“분위기가 무거워졌네. 조금 쉬도록 하자.”
급하게 일어나는 이체르의 모습에 마레이는 당황해서 그녀의 로브자락을 붙잡았다.
“케, 케이크 드실래요?”
“.....그래.”
이체르는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는 양자라서, 어머니에 대해서 잘 몰라요. 입적한 지 얼마 안됬거든요.”
라벨라의 점의 개수, 성감대, 키스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 지, 가슴을 꽉 쥐면서 뒤에서 쳐박을 때마다 엉덩이 구멍을 움찔거린다던지 하는 것들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말 못 할 그런 음란하고도 비밀스러운 라벨라의 모습은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마레이였지만, 오히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타인들보다 더 모르고 있었다.
“......실례했어. 미안해.”
이체르는 기운이 빠진 듯 의자에 기대앉아있었다. 로브 너머로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켜내듯 그녀는 조금 뜸을 들이며 대답했다.
“아뇨. 왜, 교수님께서 미안해하시나요. 저는 입적돼서 무척 기뻐요. 양자가 되었다는 게 부끄럽지도 않고요.”
방벽 주변 마을에 있을 때는 상상도 못 할 일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무척이나 음욕적이고, 남들에게 말하지 못 할 도착적인 행위들로 뒤범벅이 된 나날들에 마레이는 어느새 흠뻑 취해있었다.
“다행이네….. 그러고보니 들은 적 있는 것 같았어. 내가 배려심이 부족했어. 이건 사과할게. 천하의 라벨라 드 파웬이 양자를 들일 줄은…..몇 년 전에 엘븐하임에 만났는데도 기억에 너무 강렬하게 남아서 오히려 시간 개념이 애매해져서 말이야.”
내가 말 주변이 없어서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모르겠어. 이체르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레이는 손사래 치면서 정말로 괜찮다는 것을 그녀에게 어필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말주변이 없다 보니, 이 상황에서 어떻게 말해야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을 들어볼수록, 이체르 드 발렌타인은 인간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흡혈귀도, 엘프도 아닌 것 같았다. 수인족인가.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 특유의 야생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슬슬 다시 수업을 시작할까? 아니면, 조금 쉴까?”
케이크를 다 먹은 이체르 발렌타인은 조심스레 플라스틱 포크를 내려놓았다. 맛있긴 했지만, 연속으로 케이크를 먹는 건 마레이에게 조금 부담스러웠기에 이체르에게 양보했다. 그녀는 벌써 두 개의 조각 케이크를 먹어 치웠지만, 조금 더 먹고 싶어 하는 눈치 같았다.
그녀의 하얀 장갑에 눈이 갔다. 왜 온몸을 꽁꽁 감싸고 있는 걸까. 때 묻지 않은 장갑은 그녀가 결벽증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조금 더 쉴까요…? 케이크 더 드실래요?”
“고마워.”
이체르가 웃는 것 같았다. 로브 속 얼굴을 보고 싶었다. 어떤 사람일까. 호기심이 마레이를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자신을 감추는 사람에게 그걸 물어보면서까지 짙은 호기심을 채우고 싶지는 않았다.
“자,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하자.”
아직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와 케이크 때문에 수업도, 쉬는 것도 애매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 집중해. 이제부터 속도를 더 낼 테니까.”
“네!”
판서보다는 옆에서 직접 알려주는 게 몇 배나 더 빠를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빠르기도 하고, 어려운 내용을 쉴새 없이 달려가기로 악명 높은 이체르의 수업이었기에 마레이의 손이 쉴 틈도 없었다.
불러주는 내용을 적고, 중간중간 자신이 이해했는지 확인하고. 다시 적어가기를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오히려 버거울 정도로 빠른 수업에 잡다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법 관련 수업을 이체르 수업 하나만 들었다면 진작에 머리를 쥐어 잡으며 죽는소리를 낼 수밖에 없겠지만, 크사크루 자매의 수업과 미묘하게 공통적인 이야기에 어떻게든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한참 집중해서 필기하는 소년의 모습에 발렌타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엔 언니가 제자로 삼을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네.’
오성은 나쁘지 않다. 그러고 보니 먼 방계라고 했나. 머리 색깔을 보면 용의 피를 물려받은 것은 아니었다. 마법적 재능은 몰라도, 지식을 흡수하거나 다른 분야의 지식을 끌어오는 건 꽤나 우수한 학생이었다.
자신의 수업을 따라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체르는 만족할 수 있었다. 제국의 똑똑한 아이들을 모아놓았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죄다 학점의 노예일 뿐이고 공부를 하는 녀석은 없었는데. 마레이의 모습을 보아하니 점수보다는 공부에 집중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뭐, 이런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제자로 삼은 걸까. 이론이 아니라 마법을 가르쳐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 부분… 일리엔 교수님 수업 때 들었던 거랑 유사한데….”
그렇지만 조금 사회성이 부족했다. 아니, 아직 모르는 걸까. 자신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지만, 오만한 교수들이 워낙 많다 보니 수업 중에 다른 교수를 언급하는 건 일종의 불문율이었지만 이 아이는 모르는 것 같았다.
“마법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수용(受容)과 변환 과정을 따르니까 비슷한 부분일 확률이 높아. 그 부분은 유사한 게 아니라 같은 작용이야. 마법이라는 건 하나의 뿌리로 시작했으니까. 자, 여길 보면...”
자신이 그런 걸 일일이 교정해줄 필요는 없었다. 뭐, 다른 교수들이 싫어한다면 자신이 가르치면 될 뿐이었다. 생각보다 소질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일리엔이 받아들일 정도라면 훌륭한 인재일 확률이 높았다.
“이드리엔 교수님의 해석에 따르면….”
“그래, 그렇게 해석하는 게 옳지. 잠깐. 이드리엔? 이드리엔 크사크루? 일리엔 교수의 쌍둥이 동생?”
“아, 네.”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의 모습에 이체르는 멍하니 소년을 보았다.
“그 성격 나쁜….. 아니, 아니. 그러고 보니. 일리엔 교수님의 제자인데, 이드리엔 교수 수업을 들을 수 있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리둥절한 소년의 모습에 이체르 발렌타인은 크게 한숨을 토해냈다. 학생 앞에서 한숨을 토해내는 건 지양해야 했지만, 이건 아니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라는 말이 정확했다.
“....이드리엔 교수에게 일리엔 교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건 말하지 마. 알겠지?”
“네? 그게 왜요.”
이건 얼마나 천만다행인가. 이드리엔이 보이는 그 묘한 소유욕과 집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일리엔이 자신의 제자에게 동생을 조심하라고 말했을 리 없었다. 자신도 이드리엔이 왜 일리엔에게 그렇게까지 끈적한 애정을 보이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데, 이걸 소년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냥, 일리엔 교수가 제자를 받는 걸 별로 안 좋아해. 이드리엔 교수가.”
분명 소년을 납득시킬 수는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따로 뭐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게, 두 사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체르 발렌타인도 이드리엔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될 때가 종종 있었으니까…..
이런 비논리적인 말로 소년을 설득할 수가...
“이드리엔 교수님이요? 오히려 좋아하시던데….?”
“뭐?”
그 성격 더러운 년이? 목 끝까지 터져 나오는 비명 섞인 외침을 이체르는 간신히 삼켜냈다. 그리고 눈앞의 소년을 다시 보았다. 아니, 다시 보기 위해서 꼼꼼히 살펴보았다. 1학년이라고 했나. 조금 몸집이 작은 남자아이였다. 귀염성이 있는 얼굴이었고, 조금 여리여리해서 아직은 여자아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래, 이 정도는 이드리엔이 용인할 수도 있을지도 몰랐다. 2차 성징도 오지 않은 것 같은 작은 소년에게 성질을 부릴 정도로 나쁜 년은. 아니, 충분히 부릴 사람인데. 이체르는 미간을 찌푸리고 소년을 보았다. 두 엘프가 공통적으로 마음에 들어 할 부분이 있지 않을까 몇 번이나 훑어보았지만, 딱히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단지, 귀엽다라는 건 잘 알겠다.
“신기한 일이네…. 일리엔 교수님이 제자로 들인 것도… 이드리엔 교수가 좋아하시는 것도...”
“아하하….”
이체르에게 이드리엔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예전에는 목을 조르고 협박하던 무서운 엘프였지만, 지금은 애정을 갈구하면서도 자극적인 플레이를 해달라 조르고 매달리는 애욕으로 가득한 엘프로 변한 이드리엔의 이미지에 마레이는 곤란한 듯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마레이를 보면서, 혹시 마법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니? 라고 묻고 싶은 이체르였지만 그걸 직접 물어볼 정도로 자신이 무신경한 사람은 아니었다.
“뭐, 사적인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고. 케이크도 많이 남았으니까. 일단, 지금 페이지에 적힌 저주술에 대해서 보자면….”
그리고 시간도. 이체르의 말에 마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쉬는 시간 종이 이제 막 치고 있었다. 중간에 쉬는 시간을 가진 두 사람이었기에 수업은 계속 이어졌다.
과거의 흑마법, 저주, 기타 비주류 마법들를 하나로 뭉쳐 놓은 게 현재의 흑마법이었다. 개론인데도 마레이가 공부하는 원소마법과 백마법 개론을 합쳐놓은 것보다 두 배 이상의 두께에 마레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죽어라 필기를 하는 것뿐이었다.
이체르의 수업은 듣기에는 즐거웠지만, 공부하기에는 두려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분량의 페이지가 쓱쓱 지나가고 있었다. 첫날 만났던 학생이 경고한 것처럼, 다른 학생들이 수업을 피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분량은 많았지만, 헛으로 넘어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책을 읽어주는 것도 아니라 본인의 생각과 주석을 매 페이지에 두세 줄씩 남기는 것은 기본이었다. 방금전 지나쳤던 내용을 복기하거나, 저 앞에 있는 내용을 끌어와 설명하는 걸 듣다 보면 마레이는 필기하는 것만으로도 한계라는 걸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 책을 전부 외우고 있는 것처럼, 수업할 내용을 그냥 암기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쭉쭉 밀고 나가는 진도에 숨을 쉴 수 없었다.
“종이 쳤으니, 20분간 휴식이야~! 아니, 이게 아니라.. 흠흠.. 휴식이다.”
이체르의 말에 마레이는 펜을 놓아버리고 곧장 책장에 엎어져 버렸다. 버틸 수 있을까. 한심한 생각이 이어졌다. 오늘 하루 나간 분량만 해도 정신이 없을 정도인데, 이걸 제대로 공부해서 시험을 볼 수 있을까. 걱정부터 앞섰다. 아니, 시험을 보려고 수업을 듣는 게 아닌데. 망치면 다시 공부하면 되는데. 왜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인지.
편협한 생각이었다. 속에서 숨의 덩어리가 맴도는 것 같았다. 몸을 일으켜 억지로 몸을 비틀며 스트레칭을 하자 역한 욕심과 함께 숨이 토해진다.
“힘들지?”
이체르는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여전히 로브 속에는 희미한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기뻐한다기보다는 자조하는 것 같았다. 마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싶은 질문이 산더미 같았다.
“다들 힘들 거라고 했는데, 제 능력을 과신한 것 같아요. 으으… 머리가 따끈따끈해서...”
이체르는 작게 웃음소리를 내며 마저 남은 케이크를 꺼냈다. 이드리엔은 두 사람이 먹을 양이라고 하면서 매 쉬는 시간마다 두 조각 이상, 그러니까 커다란 종이봉투 한가득 케이크를 두고 가 버렸다.
이체르 발렌타인은 무척 좋아하는 눈치였지만, 아무리 맛있는 조각 케이크도 매 시간마다 두 개씩 먹어 치워야 한다면 마레이에게는 조금 괴로운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밴 습관이 음식을 남기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아, 저는 배부르고 점심 약속이 있어서 더 드실래요?”
마레이는 자신 앞에 배당된 케이크를 이체르에게 권유했다. 그래도 필리아랑 점심 약속이 있는데, 여기서 케이크를 쉴 새 없이 먹었다가는, 깨작깨작 점심을 먹을 테고, 그럼 필리아가 화를 낼 것 같았다.
“그러면 고맙지. 일리엔 교수님이 널 위해 사 오신 것 같은데. 이거 미안하네…. 나는 르 말렝에 못 들어가다 보니까. 거절하기가 쉽지 않네.”
다음에는 내가 더 멋진 것으로 보답할게. 그렇게 이야기한 이체르는 두 손으로 마레이가 건네는 케이크를 받았다. 보답하실 필요까지야… 중얼거리는 마레이의 모습에 고개를 내저었다.
“일리엔 교수님도 초대할 것이니까, 거절하지 마. 일리엔 교수의 제자면 내... 아니. 아니, 잊어. 헛소리를 해버렸네.”
이체르는 당황한 듯 마레이의 시선을 피하고 플라스틱 포크를 집어 들었다.
“렌.. 아니, 말이 헛나왔네요. 일리엔 교수님과 친하신 편인가요?”
“렌이라….”
마레이의 말실수에 이체르는 무엇인가 곱씹는 듯 어린 소년을 보았다. 애칭을 부른다고. 아마, 단둘이 있을 때에는 렌 교수님이라 부르는 걸까. 부모님이 부르는 애칭을 제자에게 알려주는 걸 보면 이드리엔도 단순히 심심풀이로 제자를 기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설마 조금 더, 아니 많이 깊은 사이일까 생각도 했지만.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귀여운 소년의 모습에 고개를 털어냈다. 나 참, 소설도 아니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일리엔 교수 집에서 어릴 적에 신세 진 적이 있어. 그 정도니까, 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일리엔이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면, 굳이 이 소년에게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해줄 필요가 없었다. 이 아이도 자신에 대해서 일리엔 교수에게 제대로 들은 게 없는 것 같으니까.
“아…. 네.”
차가운 대답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체르는 이 소년이 조금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선을 지킬 줄 안다는 건, 상대방이 그어놓은 선을 쉽게 이해한다는 건 이 나이 소년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이 아이는 소심한 게 아니라 배려심이 넘치는 거다
“일리엔 교수님이 말씀해 주신다면 할 말은 없는데, 아니라면 나도 애매해서 말이야.”
이체르는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다정한 얼굴로 마레이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곧장 자신이 마법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앞의 소년에게 그 어떤 표정도 보이지 않을 거라는 걸 기억해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사람들하고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질문이 엄청 많았는데….”
쉬는 시간에도 책을 뒤적이는 소년의 모습에 이체르는 등받이에 허리를 기댔다. 학생이라면 이런 맛이 있어야지, 죽은 생선 같은 눈으로 필기만 하고 도망치던 다른 학생들을 마음속에서 실컷 걷어찼다. 성적을 위해 공부하는 녀석들이라면 자신이 사절이었다.
로렌, 그 성격 나쁜 녹색용이 한 소리하겠지만 그뿐이었다. 이 아이가 로렌의 성격을 조금만 닮았어도 지루할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수업 시간이 즐거웠다. 총명하면서도 호기심이 많은 학생은 언제든지 환영이었다.
“수업 중에 여기 다크 엘프에 관한 내용이 궁금했는데…..”
방금 한 말 취소. 이체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그냥… 필요 없어.”
더듬더듬 나오는 목소리에 이체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니, 성격이 나쁜 것일지도 몰랐다. 그 핏줄이 어디 갈 리가 없었다. 이 녀석 날 알고 온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체르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며 마레이를 보고 있었다.
“네?”
의구심을 표하는 소년의 모습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연기일까, 아니면 진심일까. 아무것도 모를 수도 있었다.
“시험에 안 나올 거야. 이제 별로 존재하지 않는 종족이고…. 거의 만날 일도 없을 거야.”
한심한 변명이었다. 시험을 생각하며 공부하지 말라고 자신 있게 떠든 주제에, 지금 급하게 튀어나온 말은 자신이 제일 혐오하는 종자들이 내뱉을 것 같은 말이었다.
“그러니까 더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실례를 저지를지도 모르니까...”
이체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입을 꾹 다물고 있을 걸. 한심한 변명을 한 자신에게 벌을 주고 싶었다. 거기에 이 소년을 한번 믿고 싶었고.
“다크 엘프 본 적 있어?”
“아뇨…..?”
이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크 엘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네? 그… 엘프의 친구… 정도요?”
이체르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슴 같은 눈망울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모습에 뭔가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이체르의 수업은 수업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했다. 차라리 과외라고 하는 게 정확했다. 바로 옆에 붙어서 펜으로 일일이 알려주고, 몇 번이나 재차 확인하는 수업에 마레이는 반 아이들이 말하는 개인과외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문제는 수업의 진도는 전 시간보다 더욱 빠르고,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판서로 수업하던 지난주와 비교가 불가능할 수준의 속도로 진행되는 수업에 숨이 턱 막혔다.
“저, 이 부분은..”
“다시 설명해 줄게.”
몇 배나 빠른 템포 중간중간마다 질문하거나 확인하지 않으면 이체르의 목소리를 따라잡지 못할 수준이었다. 흐름이 끊기는 중간중간 질문에도 이체르를 별다른 말 없이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바로 옆에 앉아, 아니 마레이의 책에 부연 설명을 적어주는 탓에 밀접한 그녀의 몸에서는 정신이 맑아지는 상쾌한 향이 묘하게 났다. 로브에서는 묘한 달콤한 향이 났지만, 찰싹 달라붙어 있다 보니 살결에서 나는 듯한 그런 냄새를 가리지 못했다.
이드리엔이나, 일리엔 살결에서 나는 것 같은 달콤한 향. 아니, 조금 더 옅은 달콤함과 숲을 떠올리게 하는 맑은 향이 났다. 북방의 추운 겨울에 침엽수림에서 나는 그런 짙은 향.
“듣고 있어? 이 부분은 중요한 부분이야. 여기를...”
“지, 집중할게요…!”
고개를 털어낸 마레이는 다시금 이체르의 설명에 집중했다.
“시간이 애매하네…...”
시계를 본 이체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도를 나가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오늘은 일찍 수업을 마치겠다고 말하면 되는데, 그냥 호기심이 들었다. 바로 옆에 귀가 새빨갛게 물들 정도로 헉헉대며 수업을 따라온 마레이 드 파웬에 대한 간단한 호기심.
“네?”
되묻는 마레이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였다. 일리엔이나 이드리엔 교수가 제자를 둘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다만, 그건 아주 먼 미래의 일이고 한창 연구 중인 두 사람에게 필요한 건 연구 보조였지, 제자가 아니었다.
학회에서 한창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는 크사크루 자매에게 학회의 마법사들은 널리고 널렸다. 마법사의 제자라 하는 건 일종의 상속권이 없는 친자나 거의 다름없었다. 마법의 미친 존재들이니 결혼을 하지 않는 경우가 꽤나 많으니, 어떻게 보면 상속권이 없다는 말도 애매모호했다.
제자, 마법사에게 제자라는 건 후계자라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제자라는 건 마법사들이 말년에 와서야 생기는 것이었다. 거기에 제국이 일반인에게 마법을 공개하면서, 마법사의 제자라는 말은 원로 한 인간들의 입에서나 나올 무거운 말이었다.
물론 엘프들에게는 아직도 익숙한 그런 것이었지만….
“일리엔 교수의 제자라고 했지? 요즘 뭘 배우고 있어?”
일리엔 교수와 대화를 한 지 꽤 되었다. 외부라 그래서 자신이 피한다는 말이 정확하겠지만, 세달 전에 엘븐하임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제자의 ‘제’자도 꺼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도 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의 입장이니까 자신이 생각한 제자의 뜻과, 일리엔이 말하는 제자의 의미가 다를 수도 있었다. 그걸 확인하고 싶었다.
“원소 마법이랑… 일리엔 교수님의 스승님들에 관한 이야기요? 계파에서 내려오는 마법이 있다... 아, 이건 비밀인데...”
마레이는 놀란 듯 이체르를 올려다보았다. 잔뜩 겁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일리엔의 스승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이체르에게는 자신이 생각한 제자가 맞다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스승이라는 작자가 무척이나 괴팍한 사람이었고, 무슨 마법을 쓸 수 있는 지는 몰랐지만. 일리엔은 자신에게 그 ‘계파의 마법’이라는 걸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눈치를 살펴보면 이드리엔에게도 말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못 들은 걸로 할게. 궁금하지도 않아. 실례거든. 뭐, 정상적인 마법사의 제자들은 각자의 비기가 있으니까. 큰 실수를 한 건 아니야. 그 내용물만 말하지 않으면 돼.”
“네…!”
마레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이체르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리숙하네. 때가 묻지 않은 것 같아서 왜인지 마음에 들었다. 소년에게서 묘하게 좋은 냄새가 났다. 일리엔 교수가 믿는 아이라, 그 나긋나긋한 사람에게 놀란 모습을 좀 보여주고 싶어졌다. 좋은 제자를 들인 것 같아 부러웠다. 누구는 아직도 수 련중인데, 혼자 완성되어 있는 것처럼 행동하니 부럽기도 했다. 물론, 그런 자부심을 부릴 정도로 성과를 내고 있는 사람이니까 이해도 되지만 말이야.
“그런데.. 이체르 교수님, 장갑 안 불편하세요?”
“불편해.”
마레이의 시선에 이체르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하얀 장갑과 로브로 온몸을 꽁꽁 가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제는 익숙하다 보니 별 신경 쓰고 있지는 않았다. 이 호기심 많은 꼬맹이는 자신의 정체가 궁금한 것 같았다. 벌써 짐작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 종족이라 그래.”
“네에….”
말을 길게 늘어뜨리는 소년의 검은 눈동자에서는 여전히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실망한 듯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왜인지 자신이 잘못한 것 같은 느낌도 주는 신기한 소년. 한 번쯤은 더 속아도 되겠지.
“잘 봐.”
이체르는 로브를 걷어 올렸다. 손목을 덮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장갑은 팔을 완전히 감싸고 있는 하얀색 롱 장갑이었다. 그리고 아주 느릿하게 장갑의 중간 부분을 잡아당겼다.
“우아…..”
하얀 장갑이 조금씩 밀려 나오면서 갈색 피부가 눈에 들어온다. 아니, 갈색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밀크 초콜릿에 하얀 우유를 가득 부어 만들어낸 달콤해 보이는 색깔의 피부였으니까.
“난 다크 엘프야.”
“아, 네….? 다크 엘프요?”
다크 엘프(dark elf)라고 하기에 검은 피부의 엘프를 떠올렸는데, 이러면 다크(dark)가 아니라 밀크 초콜릿 엘프(milk chocolate elf)라 부르는 게 옳은가 생각도 들었다. 맨들맨들해보이는 팔뚝은 무척이나 가늘었는데, 병약하다거나 말라보이기보다는 건강하다는 느낌을 준다.
“별로 놀란 기색은 아니네. 짐작하고 있었어?”
“아뇨, 그게… 다크 엘프(dark elf)라고 하길래 조금 더 까맣게…. 까맣다고 생각해서. 다른 종족이라고….”
마레이의 말에 이체르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웃긴 것인지 고개를 숙인 채 끅끅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는 곧장 얼굴을 가리던 로브를 걷어 올렸다.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이 로브 안으로 이어져 있었다.
“다크 엘프에 대해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토파츠색 눈동자는 묘하게 즐거워보였다. 마레이는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긴 앞머리가 귀 뒤로 넘겨져 있었지만, 워낙 길어서 그런지 한쪽 눈을 가리고 있었다.
“놀랐어?”
“아, 네. 뭐….”
마레이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덴을 비롯해서 가지각색의 미모의 여인들에게 충분히 높아진 소년의 미적 기준에 충족할 정도로 이체르는 아름다웠다. 특히 밀크 초콜릿에 우유를 잔뜩 넣은 것 같이 부드럽고도 달콤해 보이는 피부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이체르는 무엇인가 기다리는 듯 보였다.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로 마레이를 보며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마레이는 여기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해보았지만, 딱히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알 수 없었다.
“그, 저… 아름다워요.”
“....응?”
이체르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리고 뭐가 그리 우스운지 입을 꽉 다문채 웃음소리를 내었다. 오똑한 코 끝에서 짧은 숨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아, 고마워. 고마워.”
이체르는 한 쪽 눈을 감은 채, 마레이를 향해 손을 대충 휘저었다. 왜인지 그녀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이 말을 하는 게 맞았나보다. 마레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넌 좋은 아이네. 응, 착한 아이야. 이제야 알겠어. 일리엔 교수님이 왜 너를 제자로 들였는지.”
이체르는 갑작스럽게 마레이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얼굴이 저절로 붉어질 정도로 칭찬하는 그녀의 말에 볼을 긁적이며 이체르의 시선을 피했다.
“네? 아, 감사합니다.”
“감상은 그게 끝?”
“아… 그게, 그러니까.”
이체르는 뭘 원하고 있는 걸까. 흔들거리는 그녀의 발끝이 보였다. 더 칭찬해달라는 것일까. 마레이는 묘하게 이체르에 대해서 알 수 없었다. 이드리엔이나 자신의 여인들의 마음은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역시 남에 대해서는 여전히 애매모한 느낌만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엄청… 예뻐요. 까, 깜짝 놀랄 정도로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해버려서 마레이는 수치스러움에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이체르의 표정이 어떨지 몰라서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흉하지 않아? 이 갈색 피부. 엘프랑 닮았는데도 까맣잖아?”
“까맣다고 보기보다는 건강해 보이는데…..”
이체르는 자기 자신에게 불만이 많아 보였다. 아니 자신의 종족에 대해서 불만스러워 보였다. 제 갈색 껍질을 벗어내고, 일리엔 같이 하얀 피부를 갖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레이에게 있어서 이체르 발렌타인라는 존재는 무척이나 건강해 보이고 달콤해 보이는 육체를 가진 멋진 여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팔짱을 낀 손위로 묵직하게 내려앉은 게 가슴이라는 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한 입 베어 물면 달콤한 맛이 날 것 같았다. 저 안은 어떤 기분일까. 속살도 같은 색깔일까. 그런 천박한 생각에 마레이는 애써 이체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마레이의 생각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이체르는 쿡쿡 웃어버렸다. 마침 오전 수업을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쳤다.
“자, 수업이 끝났네. 가도 좋아.”
마레이는 꾸벅 인사를 하고 짐을 챙겼다. 이체르에게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묘하게 서두르다 책을 떨어뜨렸다. 이체르는 책을 주워주고 두꺼운 책을 마레이의 가방 안에 넣어 주기까지 했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마레이 드 파웬.”
문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마레이는 이체르를 보았다.
“예?”
“다음 주에도 올 거니?”
갑작스러운 이체르의 질문에 마레이는 놀란 듯 문 안으로 되돌아왔다.
“예? 다음 주에는 수업 안 하나요…?”
“아니, 아니야. 다음 주에는 조금 느긋하게 할 테니까. 복습은 열심히 하렴.”
이체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좌우로 저은 뒤, 개운한 듯 등받이에 기대 기지개를 켰다. 마레이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필리아와 약속장소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다들, 너처럼 상관없으면 좋겠지만 말이야…..”
이체르의 중얼거림이 아무도 없는 강의실 안에서 사라졌다. 수업이 끝났음에도 이체르는 문너머를 한동안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이체르의 수업이라고…? 괜찮아?”
필리아는 떨떠름한 눈빛으로 마레이를 훑어보았다. 이체르 발렌타인의 수업을 들은 것치고는 혈색이 정상적이었다. 눈빛도 흐리멍텅하지 않았다.
“네? 아, 네.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마레이의 모습에 필리아는 턱을 쓰다듬으며 작게 끙- 소리를 냈다. 영혼이 빠져나간 표정이라면 그러려니 하겠다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느긋하게 걷고 있는 모습에 오히려 걱정이 될 뿐이었다.
“이거 몇으로 보여….?”
필리아는 손으로 브이- 자를 그리며 마레이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두, 두 개요?”
“그럼 이건?”
한 개요. 마레이의 대답에 필리아는 알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이제는 마주 보고 있었다. 자신보다 조금 작았는데, 벌써 키가 비슷하다니 조금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아니, 이게 아니라.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수업 시간에 졸거나 딴 생각했어?”
“아뇨, 잘 들었어요. 정말이에요.”
필리아는 눈을 게스츠름하게 뜨고 마레이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마레이의 말을 온전히 수긍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흐음…. 믿어.”
“네?”
갑작스레 믿는다고 말하는 흡혈귀 공주님의 말에 마레이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믿는다고, 수업 열심히 들었다는 거. 네가 말하니. 아니. 너니까 믿어. 그래, 이 말이 정확할 것 같아.”
은보라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따라 살랑거렸지만,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온전히 마레이만을 보고 있었다. 엘프를 닮은 길쭉한 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 감사해요. 필리아 고마워요… 읏.. 아니, 이게 아니라 리아. 고마워요!”
“후후, 별 말씀을 다 하시는 군요, 파웬공자.”
필리아는 치마의 양 끝을 슬쩍 잡아 들어 올리며, 귀족식 예법에 따라 인사를 건넸다. 당황한 마레이가 예법에 따라 인사를 하자 필리아는 하하. 웃어버렸다.
“장난이야, 장난. 마레이가 이렇게 반응을 해주니까 자꾸 장난을 치고 싶어져.”
“윽…. 봐주세요, 리아.”
마레이는 뺨을 긁적이며 필리아의 시선을 피했다. 치맛자락을 꾹 움켜쥔 그녀의 손이 보였다. 부끄러운 말을 쉴 새 없이 내뱉는 필리아의 모습에 마레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치, 칭찬하면 필리아는 안 부끄러워요….?”
“흐음.. 어떨까...”
필리아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뒤를 돌아 마레이를 보며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엄청, 엄청 부끄러워.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놀랍고, 너무 부끄러운데. 하고 싶어.”
부끄럽다고 직접적으로 밝히는 필리아의 말에 마레이는 그제서야 필리아의 모습을 온연히 담아낼 수 있었다. 치마를 꾹 잡고 있는 손은 긴장으로 약간씩 덜리고 있었고, 그녀는 귀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힘들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레이는 필리아에게 빠르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미지근한 온기, 언제나 대단하다고 느끼는 필리아도 한 명의 소녀였고, 지금 이 순간 노력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자,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고마워요. 저도 부, 부끄럽지만 칭찬을 잔뜩, 잔뜩 할 테니까요…”
“아하하핫. 그게 뭐야. 칭찬 교환이야?”
필리아는 손을 뿌리치는 대신 시선을 피하고 웃고만 있었다. 입안에서 웅얼거리듯 나오는 자그마한 목소리가 잔뜩 떨렸다. 다른 한 손으로 어깨까지 내려오는 은보라빛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뭐… 나쁜 기분은 아니네.”
엘프를 닮은, 뾰족한 귀가 슬그머니 파닥거리는 걸 보면 정말로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하면 필리아가 화를 낼 것 같다. 그녀에게서 달짝지근한 좋은 냄새가 나고 있었다.
이쪽의 눈치를 살피듯, 힐끔힐끔 보는 붉은 눈동자도, 새하얀 뺨도, 무엇인가 말하고 싶어하는 분홍빛 입술도, 가날픈 목도, 쇄골이 희미하게 보이는 분홍빛 원피스도, 원피스 밑으로 보이는 하얀 스타킹도, 검은 구두도. 전부. 아니, 이것보다는
달콤한 향기, 그리고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달콤한 체향. 너무나도 익숙하고 또 질리지 않는 암컷의 농밀한 체향. 그 냄새를 맡자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다행이도 주변의 인기척은 없었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는.. 꺄앗..?!”
마레이는 필리아의 팔을 이끌었다. 필리아는 놀란 듯 작게 소리를 질렀지만, 꽉 잡힌 팔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손목에서 쿵쾅쿵쾅 거리는 심장의 맥동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수풀로 그녀를 억지로 밀어 넣었다.
잔뜩 상기된 볼과 눈망울 끝에 고인 눈물에 곧장 넘어진 그녀 위로 올라탔다. 긴장한 듯 잔뜩 움츠리는 소녀의 몸. 라벨라등과 다르게 풍만하고 완숙한 매력과 반대로 풋풋한 느낌과 자신의 또래에게서 느낄 수 있는 두근거림이 좋았다.
“마, 마레이… 이건...”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 흡혈귀 공주님은. 이제 곧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을 이드리엔이 보면 뭐라고 말할까.
“음란한 아이네요, 필리아는.”
필리아의 두 눈이 커졌다. 그리고 더욱더 얼굴을 붉히며 마레이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드리엔, 그 주제도 모르는 육변기 암캐의 교육이 도움이 되는구나.
마레이는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라벨라가 은연중에 세뇌해버린 이드리엔의 평가를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무의식적으로 생각해,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 아래에 깔려있는 매력적인 소녀의 모습에 입맛을 다신다.
“몰라… 그렇게 보지 말라고….”
온몸을 끈적하게 핥는 듯한 시선, 잔뜩 떨리는 허벅지 사이에서는 쾌락에 잔뜩 각인된 육체가 제 스스로 준비를 하고 있었고. 필리아도 그걸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기에, 자신 위에 올라탄 소년의 눈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리드 해주길 원하고 있었다.
아주 못 된 아이였다.
필리아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거절하지도 않았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색하지 않아도 몸에 풀풀 풍기는 발정 난 암컷의 향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키스해도 돼요?”
“묻지 말라고...”
더욱 짙어지는 암컷의 향기. 자신 또래의 소녀에게 흘러나오는 이 달콤하고 도착적인 향기가 어울리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얼굴 보고 싶어요.”
“싫어…..”
두 손으로 잔뜩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린 필리아의 모습에 마레이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좌우로 벌렸다. 뜨겁게 달아오른 숨이 호흡을 통해서 뺨을 간지럽히고, 눈망울에 잔뜩 맺힌 눈물에 저도 모르게 혀를 내밀어 핥아본다. 짜다.
“읏….!”
필리아는 여전히 긴장한 듯,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눈을 질끔 감고, 다가올 각인을 기다리는 소녀의 모습에 마레이는 혀를 길게 내밀어 창백할 정도로 하얀 뺨을 천천히 핥아 내렸다.
약간 서늘하게 느껴지는 피부, 그 아래로 슬며시 올라오는 붉은 혈색. 뺨에서, 목으로, 그리고 쇄골을 핥아내자, 필리아는 몸을 뒤척이며 간지러운 듯 옅은 신음 소리를 냈다. 여전히 두 손은 단단하게 붙잡혀 있었고, 고개를 좌우로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크흐읏… 으응… 응… 흣..!”
쇄골 아래로 향하는 끈적한 혀 놀림에 흡혈쉬 공주님은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하복부를 들썩이며 허덕이기 시작하고, 허벅지 사이로 밀어 넣어 완전히 맞닿은 무릎과 맞닿은 팬티 사이로 끈적한 느낌의 액체가 덧칠된다.
요령 좋게 치아로 원피스 앞단에 단추를 풀어내고, 턱 끝으로 옷 사이를 벌리자. 귀여울 정도로 자그만한 브레지어가 탐욕스러운 정복자 앞에 나타난다.
“붉은색이라니, 예쁘네요. 준비한 거에요?”
“말도,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계속되는 공격에 필리아는 지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부끄러운 것인지 큰 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입을 꾹 다물며 주변의 인기척을 살피는 듯, 불안한 눈동자로 주변을 살핀다. 물론, 아무도 없었다.
“버, 벗을 테니까…. 끄, 끌어올리자 마..! 아, 아앗… 저, 정말…!”
성숙한 여체로 봉사하는 여인들과 다르게, 브래지어의 중간을 깨물어 위로 들어 올리자 너무나 쉽게 끌어올리지는 자그만한 가슴. 터질 것 같거나, 넘쳐 흐를 것 같은 거대한 가슴과 다르게 풋풋하고, 무척이나 말랑해 보이는 옅게 부푼 가슴.
그 중앙에는 딱딱하게 굳어서 제 존재감을 보이는 분홍빛 유실. 곤란하다는 듯이 말하는 필리아의 모습에도 마레이는 곧장 크림처럼 말랑한 가슴 위에 솟아 있는 딸기를 입안에 머금고 혀로 굴리기 시작한다.
-쯔으읍.. 쯥.. 쭈웁. 쯥.. 쯔으읍..
“흐읏… 읏….”
어느새 자유롭게 풀려난 필리아의 자그만한 손은 주먹을 꽉 쥔 채로 스스로의 얼굴을 가린다. 얼마나 꽉 쥔 것인지, 붉게 손자국이 나 있는 손목은 총명함을 가득 담고 있는 눈을 비스듬하게, 그에 반대쪽 주먹은 하늘을 향한 채, 자그마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옅은 허덕임 소리, 그리고 아래에 깔려 움찔움찔 퍼덕이는 아담한 몸. 혀끝으로 굴려지는 단단하면서도 말랑한 분홍빛 살덩이 끝에서 모유가 흘러나올 것처럼 쭙쭙 빨아당긴다.
“크흐읏.. 으읏.. 읏.. 흐으읏…!”
부드럽지만, 볼륨감이 부족해 코끝에 닿는 딱딱한 감촉도 좋았다. 집요하게 가슴을 빨고, 물고, 그리고 핥으며 혀끝으로 유두 꾹꾹 눌러 집요하게 괴롭히자 야외임을 알아도 꽉 다문 치아와 잔뜩 벌린 입술 사이로 야릇한 신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쭈우우웁… 쭈우우웁.. 쭈우웁..!!
“히잇… 빠, 빨아 마시지마아앗.. 흐으읏..!”
잔뜩 끌어올려진 브래지어 바로 밑에 잔뜩 발기되어 있는 유두를 길게 빨아당기자, 그대로 따라 올라오는 자그만한 몸. 입꼬리 끝에 흐르는 타액이 볼을 타고 흙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그마안… 그마아안.. 아으읏… 우읏..!”
혀가 잔뜩 꼬인 발음이 옅게 흘러나오지만, 이런 미약한 저항은 귀엽게만 여겨질 뿐이었다. 오히려, 더더욱 가학심에 불타버려, 반대편 젖꼭지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 놓아 부드럽게 비비며 애무할 뿐이었다.
그렇게 필리아의 입에서 더이상 그만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끄으읏.. 끄으으읏.. 으으으읏… 우으읏..!!”
불쌍할 정도로 덜덜 떨리는 아담한 몸, 그리고 아담한 몸과는 반대로 무척이나 훌륭하게 조교 되어버린 육체는 본능 그대로의 반응을 보인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허벅지 사이로 끈적하고 투명한 액체가 왈콱 쏟아져 내릴 때까지 이어진 애무에 필리아는 몸을 축 늘어트린 채로 숨을 허덕인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는 이미 육욕으로 잔뜩 젖어 있었다. 필리아 더 블러드는 몇 번이나 숨을 겨우겨우 폐 속에 욱여넣으면서 덜덜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몇 번이나 고개를 흔들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음란한 아이네요, 필리아는.’
소년의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가 음란하다고? 가까스로 숨을 내쉬던 필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온몸에 기운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입꼬리만 간신히 파르르 떨릴 뿐이었다.
이 소년과의 일은 전부 엉망진창일 뿐이었다. 계획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고, 정신을 차려보면 짐승처럼 야외에서 이런 꼴이 되어버리고 있었다. 우스운 건 마냥 싫지만은 않다는 것이었다.
필리아는 팔로 얼굴을 가린 채 여전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신음소리를 죽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숨을 참아내서 그런지 멍할 따름이었다. 기분 좋은 부유감과 함께 탈력감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음란한 아이인가. 나는. 그렇게 힘없이 속으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어느새 천천히 자신 안에서 커져가는 소년의 모습을 따라, 말도 무게를 더해가 머릿속에 각인 되는 것 같았다.
“필리아?”
익숙한 목소리에 필리아는 멍하니 하늘을 보던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내려보는 소년의 검은 눈동자에 다시 한번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야외에서 몸을 섞다니 짐승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 짐승. 자신 위에 올라탄 소년은 한 마리의 완연한 수컷이었다.
“필리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도 필리아는 대답하기는커녕 희미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는 거지. 알 수는 없었다. 그저 몇 번이나 이런 패턴이 반복되고 있고, 자신은 점점 더 깊은 탁류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이런 걸 바라고 있던 건가. 필리아는 흐릿한 시야를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보았다. 하지만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음란한 아이네요.’
다시 한번 들리는 마레이의 목소리에 필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반박해야 되는데, 반박해야만 하는데. 숨이 턱 막힐 따름이었다.
“이제 넣을게요?”
“아…. 응…..응?”
마레이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필리아는 슬며시 팔을 좌우로 벌려 자신 위에 올라탄 소년의 모습을 보았다. 처음 봤을 때와 다르게 색소가 조금 빠진 붉은색 거대한 귀두가 보였다.
“자, 잠까안… 잠까앙…!”
인간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거대한 페니스. 저걸 자신의 몸에 넣을 수 있다는 게 더 신기할 정도로 거대한 고기 방망이의 모습에 필리아는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평소의 그녀의 모습에서 결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삑- 소리가 단어 사이에 들러붙어 나온다.
“필리아? 나, 이제 넣고 싶어요. 필리아의 이 질척한 보지에 잔뜩요. 네?”
“아니, 아니. 자, 잠깐만… 그, 그런 천박한 단어 쓰지 말고…!”
보지라니. 필리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살몽둥이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잔뜩 떨리는 전신에 입술 끝이 바르르 떨리지만,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필리아 안에 넣고 싶어요. 괜찮죠? 네?”
그게 그 말이잖아! 목 끝까지 올라온 목소리가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거근의 모습에 겁먹은 듯 잔뜩 억눌린다.
노먼의 소유인 호텔에서도, 발테르 학교 교사 뒷편에서도, 저 거대한 물건이 자신 안에 가득 들어와 온몸을 짓눌렀다는 사실이 꿈처럼 느껴졌다. 저런 게 들어올 리가 없잖아. 필리아는 두려움으로 가득 찬 눈동자로 자신 위에 올라탄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넣을게요, 네? 필리아~? 응?”
검은 눈동자는 어느새 포식자의 눈매를 닮아 있었다. 거칠게 내뿜어지는 숨결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고, 투명한 액체를 질질 흘리고 있는 고기 방망이에서는 무척이나 야릇하면서도 중독적인 냄새가 났다.
“자, 잠까안….. 마레이.. 자, 잠깐만…. 그, 그런 걸 넣으면.. 지금은.. 아, 안되는…. 넣으면...”
넣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필리아는 마른 침을 삼켰다.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기대가 됐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지금 저걸 내 안에 쑤셔 박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또 다시.
어떻게?
짧은 단어들이 머릿속에 느릿하게 움직인다.
“귀여워요 리아.”
“읏..!”
소년이 불러주는 애칭에 흡혈귀 공주님은 반항하지도 못한 채 수긍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해요, 사랑해요. 리아, 정말로요!”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과 다르게, 잔뜩 휘어질 정도로 거대한 물건을 한 손 쥔 채. 아니, 온전히 쥐지 못할 정도로 두꺼운 물건을 밑에 깔린 흡혈귀 공주님의 잔뜩 젖은 꽃잎 안으로 밀어넣는다.
-쯔으윽…..!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은 거대한 흉물이 자신과 비슷한 몸집의 소녀의 안으로 천천히 밀려들어 간다. 비좁은 입구를 억지로 벌리며 밀려 들어가는 페니스를 따라, 입구 주변으로 투명한 애액이 잔뜩 밀려 나온다.
“우우, 좁아요, 리아..!”
-쯔윽.. 쯔으윽.. 쯕..!
“흣… 흐으읏..! 처, 처, 천…. 흐큿…. 아읏..!”
필리아는 하복부에 있는 힘껏 힘을 주면서 배를 찢어 가르는 감각에 두 눈을 크게 뜬 채 겨우겨우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흡혈, 흡혈을 할껄. 흡혈을 해야 했는데.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가 없어 점차 붉어지는 얼굴에는 괴로움과 후회, 그리고 천천히 찾아오는 쾌락에 잔뜩 일그러진다.
“힘 풀어요, 리아. 넣기 힘들어. 으읏.. 조금 움직일 테니까. 참아요.”
가느다란 허리. 아니, 아담하다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까. 살짝 말랑한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딱딱하게 느껴지는 근육이 숨겨진 복부를 엄지로 꽉 짓누르며, 다른 손가락들로는 허리를 움켜잡고 있는 힘껏 필리아를 잡아당긴다.
“무. 무… 히이이이익..!”
-쯔으으으윽..!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거친 삽입에 필리아는 더이상 참아내지 못하고 거친 신음소리를 터트렸다. 주변에 누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따위는 배 안을 넓히며 밀려 들어오는 거대한 페니스의 감촉에 새하얗게 잊어버렸다.
-쯔으윽.. 쯔… 부욱..!
아파. 아파. 아파. 아프다고. 아파. 목이 으스러지도록 힘을 주어도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서, 오히려 몸을 제어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려고 힘을 주어봐도, 한계까지 수축한 근육이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자, 자, 잠…. 까아아… 아.. 아.. 아으… 으으… 자, 까… 우으...”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입만 덜덜 떨리며 움직이며 헛숨이 새어 나오며 어눌하게 단어를 흘릴 뿐이었다. 푸욱. 푸욱. 푹. 거칠게 밀려들어오는 페니스에 필리아는 꺽- 꺽- 소리를 내며 영원 같은 순간 동안 입을 쉴 새 없이 뻐금뻐금 거릴 뿐이었다.
“크흐으읏… 리아, 리아. 안은 진짜… 크흐… 조이고 따뜻해서… 좋아요. 리아, 좋아해요. 진짜로요. 조금만. 더어… 으읏… 조금만..”
-푹. 푹. 푸우욱. 뿌욱. 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