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야, 웃지 말고….”
“믿어요, 믿어요. 그냥 아는 친구가 떠올라서요.”
“그래, 그래.”
셀린은 아무렇게나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나풀거렸다. 그녀는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딱히 화가 난 것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공부는 어때? 잘 돼가? 필리아님이 잘 돌봐달라고 신싱당부하시는데, 나랑 겹치는 과목도 별로 없어서 큰일이네...”
“나쁘지는 않아요. 다 재미있고요.”
“시험을 보면 그 이야기가 쏙 들어갈걸? 원래 시험을 생각하면 모든 과목의 재미가 반의반 토막이 나버리거든.”
언제까지 웃을 수 있을까. 셀린은 무덤덤하게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같은 과목이면 숙제 검사라도 해줄 텐데…. 일과표 같은 건 만들어?”
“아, 그게.. 일단 만들 수는 있어요.”
“그럼 만들어 볼래? 아, 저기 테이블 있으니까 자리는 옮기자.”
셀린의 말대로 시간표를 만들어 보았다.
04:00~04:30:기상 및 신변정리
04:30~06:00:샤워 및 아침 식사 그리고 가벼운 운동.
06:00~06:30:개인 과외 시간.
06:30~06:45:등교
06:50~07:40:연구실에서 공부
07:40~08:00:수업 준비
08:00~17:00:수업
17:00~17:30:하교
17:30~18:00:저녁 식사 및 샤워.
18:00~20:00:공부.
20:00~22:00:숙제 및 공부
22:00~22:30:야식
22:30~02:00:공부.
“거짓말이지…?”
셀린이 시간표와 마레이를 몇 번이나 번갈아 보았다.
“그게… 거짓말은 아닌데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라벨라나 이드리엔, 일리엔이 말하기로는 섹스가 아니라 육체 공부, 보건 체육, 인체생리를 공부한다고 했으니 공부라고 적었을 뿐이었다. 있는 사실 그대로 바꿔 적는다면...
04:00~04:30:아침펠라 기상, 침대 위에서 질내 사정.
04:30~06:00:샤워 시중받으며, 식사하며 평균적으로 다섯 번 정도 사정.
06:00~06:30:한 몸이 된 라벨라와 가벼운 아침 이야기.
06:30~06:45:1 교시 수업이 자신의 암컷들이면, 등교.
06:50~07:40:1 교시 수업인 암컷의 연구실에서 육욕을 해소.
07:40~08:00:수업 준비라고 쓰고 간단한 숙제 검사하며 핸드 잡.
08:00~17:00:수업
17:00~17:30:하교
17:30~18:00:저녁 식사 및 간단히 학교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아침에 보는 풍경과 비슷.
18:00~20:00:개인 과외 수업. 참가자는 보통 매일매일 달라지는 편.
20:00~22:00:이드리엔이나 일리엔, 라벨라가 달라붙어서 숙제 점검 및 순수한 공부 시간.
22:00~22:30:야식을 먹으면서 육욕을 해소.
22:30~02:00:침대 위에서 교육.
이런 걸 어떻게 이야기할까. 중간중간 무슨 일이 있거나, 차이가 있었지만 지난 6주 정도를 생각해보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사람이 두 시간밖에 안 잔다고? 거짓말 하지 말고. 오랜만에 웃었네. 아하하하…. 하하…. 진짜?”
마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2시간 정도 자고. 아니 때때로는 30분쯤 자고 일어나서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오늘도 두 시간 자고 온 거야?”
“대충이요…?”
오늘은 30분 정도 잔 것 같았다. 아니, 란님의 허벅지가 부드러워서 1시간 정도 잤으니. 1시간 30분 정도 잤으니 비슷하지 않을까.
“이게 몇 개로 보여?”
“네 개?”
“이 건?”
“세 개?”
셀린은 이어서 여러 질문을 했다. 간단한 산수, 오늘 날짜. 간단한 문장을 따라 하기 정도.
“정말 두 시간 잔 거 맞지? 아니, 믿어야 하는데. 그게, 좀 그렇잖아. 믿는 게…. 힘들지.”
“아, 저도 잘 믿기지 않는데.. 어떻게 생활이 돼서...”
“공부할 때 집중은 돼?”
“네에… 뭐….”
라벨라가 파악하기로는 섹스하는 시간 내내는 푹 쉬는 것과 같은 시간이라고 했으니 실질적으로 하루의 대다수는 쉬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당연히 괜찮을 수밖에 없었으나, 자신의 체질이나 암컷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필리아님도 하루에 3~4시간 자고 힘들다고 자주 그러시는데. 그분이 너랑 같은 체질이었으면 지금보다 덜 힘들어하셨을 텐데. 아쉽네.”
“아… 네.”
필리아는 하루에 네시간 밖에 잠들지 않는구나. 그녀는 정말 열심히, 그리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뭐 하루종일 공부만 하고 있으니, 내가 오히려 배워야겠는데… 하아… 필리아님께 잘하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왔는데. 자신이 없네….”
“죄송합니다...”
네가 왜 사과하는 건데. 셀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레이를 다시금 살펴보았다. 파웬이라는 이름은 역시 만만하지 않았다. 수면 시간이 두 시간이라. 기가 질리다 못해 울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대부분 시간은 공부, 공부, 또 공부였다. 이런말 하기 부끄러울 뿐이었지만, 자신은 그저 타고난 재능 때문에 좋은 성적을 받고 있을 뿐이었다. 출발점이 다르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뛰다 보면 이미 저 멀리 앞서 나가고 있을 뿐. 가끔 목숨을 걸고 달리는 사람들이 앞서나가는 모습을 보면 박수를 칠 뿐이었다.
‘그리고 이 아이.. 정령술도… 혹시나...’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번이나 눈앞의 소년을 보았다. 귀엽게 생긴 얼굴, 아마 이런 동생이 있었으면 매일매일 끌어안고 귀여워해 줬을 것 같이 생기긴 했다. 남자라기보다는 여자아이. 아니, 묘하게 중성적이게 생긴 외모.
눈에는 독기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눈에 초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두 시간만 자고 생활할 수 있는 거지. 자꾸만 생각이 수면 시간에 머물렀다. 의심이 갔다. 그래, 거짓말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거짓말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아무 표정 없이 거짓말을 할 정도로 삐뚤어진 녀석이었다면 필리아가 자신에게 전심전력을 다 해 도와달라고 직접 부탁할 리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필리아님은 왜 이 아이를 좋아하는 걸까. 처음을 가져갔다고 하면 벌써 해버린 건가?
“셀린 선배?”
“아, 음… 미안! 다른 생각을 하느냐!!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지?”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의식의 흐름을 붙잡지 못했다.
“시간표 이야기요.”
“아, 맞다…. 일단 시험을 보고 나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 그전에는 뭐라 이야기하기가 애매하네.”
공부하는 시간으로 따지면 감찰국나 법무국으로 손을 뻗는 괴물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자신이 공부에 관해서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은 주제가 넘었다. 적어도 시험성적이 좋지 않다면 뭐라 할 말이라도 생기겠지. 지금은 의미도 없는 멘토멘티 시간에 필리아에게 마레이 드 파웬을 최대한 도와줬다는 모습을 보여드려야만 했다.
“혹시 궁금한 거 있어? 아, 흑 마법 관련은 정말 몰라서… 미안!”
마레이가 슬쩍 꺼내는 이체르 발렌타인의 교재에 셀린은 곧장 백기를 들었다. 마레이도 딱히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하하 웃어버렸다.
“그러면 정령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다행이도 알려줄 수 있는 이야기네.”
셀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령이라는 건 자연 그 자체라는 이야기를 하곤 해. 물론 인류가 알아낸 것은 없지만 말이야. 결론을 보고 현상을 역추적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뭐가 옳은지는 알 수 없어. 다만, 정령이라는 것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친화력이라는 게 필요하며, 또 계약이라는 관계로 묶여있을 수 있다는 게 현재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야. 물론, 정말로 위대한 정령사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 은거하거나, 비밀을 알면서 발설하지 않는 분들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내가 알고 있는 전부야.”
셀린은 자신이 말하고도 허탈한지 웃어버렸다. 그녀의 미소에 마레이는 따라 웃어버렸다. 자신에게 누나가 있었다면 셀린 같은 느낌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보통 등급을 나누고는 하지만, 그건 인간밖에 없었다고 하네. 엘프들은 원래 나누지 않았다고 하는데. 어느새 인간처럼 정령을 등급으로 나누어 부르고 있다고 하더라. 그 뒤로부터는 소환되거나 계약하는 정령들의 모습이 통일이 되었다는데. 이건 아마 인식과 관련된 게 아닐까 생각을 해. 사람들의 인식이 만들어낸 공통된 어떤 부분이 정령이라는 존재를 고정시키는 거지. 뭐,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정령사들은 화내겠지만.”
“인식 필터….?”
“재미있는 표현이네. 뭐, 옳은 표현일지도 모르겠고. 공부는 하고 있는데, 마법사처럼 커뮤니티가 활성화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알고 있는 건 다 감추고 있는 느낌이라서. 나도 뭐 밑바닥에서부터 정립해야 하다 보니 뭐가 맞는지, 틀린 지는 알 수 없어. 뭐, 지금 중요한 건 정령에 관한 이야기니까…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 정령과 계약하면 봉신 관계나 주종관계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설명하기 쉬운 것도 있고, 뭔가 있어 보여서 그런 말을 하는 편이야.“
셀린이 ‘부끄러운 이야기지.’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며 웃으면 안 되는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말이야. 그래도. 셀린은 무엇인가 망설이는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흐릿하게 새어 나오는 목소리에 마레이조차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선배….?”
“정령을 소환하게 된다면, 그리고 계약하게 된다면 친구로 여겨줘.”
“네.“
“혹시, 마레이는 친구에게 누군가를 상처입혀 달라거나, 죽여달라는 부탁을 하거나 하는 사람은 아니지.”
“네...”
셀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가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응, 아마. 매우 높은 확률로.”
셀린은 확신하는 것 같았다.
“창조 신화부터 정령은 등장하고 있었어. 일곱 신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 있어? 마법의 신, 에르제베르트. 무의 신, 칼펜. 천상의 신, 코르키엘, 용신 라비우스. 이런 것들 말이야. 태양신교가 주가 되고 나서는 뭐 다들 모르는 게 당연해졌다고 말씀하시긴 하는데.....”
“아… 그게… 처음 들어봐요.”
“뭐, 대부분은 잘 모르는 이야기니까.”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처음 듣는 이름들이지만, 이상하게 익숙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태양교 교리랑은 조금 다를 수도 있지만, 뭐 비슷해. 태초에 어둠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빛이 생겨났고. 어둠과 빛의 경계가 만들어졌는데, 거기서 태어난 것이 태초의 용, 신, 정령왕, 악마였다는 이야기야. 처음에는 모든 존재가 한 곳에 모여있어 매일같이 전쟁을 벌였다는 이야기.”
“태양교 이야기랑 같네요.”
“뭐, 여기까지는 같아. 태양신이 모든 것의 경계를 만들었냐, 아니면 신들이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고 스스로의 경계를 만들었냐는 차이가 있어. 뭐, 누가했는지는 중요한 건 아니잖아? 아무튼 차원이 나뉘게 되고, 우주와 하늘이 나뉘고, 대지와 바다를 나누며, 모든 것들의 경계와 차이가 만들어져 현 세계가 만들어졌다는 엄청 비슷한 이야기지. 태양교 사람들에게 하면 별의별 욕을 다 들을 이야기지만….”
“셀린 선배는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어요?”
“들은 건 아니고, 북부의 비석에서 해독한 이야기야. 뭐, 신화라는 게 어차피 비슷비슷하잖아? 별 신경은 안 쓰고 있어. 아무튼 우리는 정령에 대한 이야기 중이니까, 신화에서 내려온 이야기를 조금 더 생각해보자. 정령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인지, 그리고 상상력이 계약할 때 더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
셀린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완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야. 이건 그냥 정령에 대한 이미지를 잡기 위한 이야기일 뿐이니까. 오늘만 듣고 잊어버려. 알겠지?”
마레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해. 악마나 천사들이 살고 있는 다른 차원이랑 다르게 물리적인 접촉 방법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이격된 차원이 공동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거지.”
“그게 무슨 말씀인지...”
셀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도 무어라 설명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비슷한 위상에 존재하나, 다른 위상… 그러니까… 좌표값이 하나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게 편할 거야. xy평면 좌표는 같지만, z축 좌표가 달라서 위에서 보자면 중첩되어 있지만, 시각을 바꾸면 겹쳐지지 않는 상태라고 생각해.”
수학은 배웠지? 묻는 셀린의 물음에 마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근래 이드리엔이 가끔 알려주는 공간의 관련된 내용이었다.
“우리는 지금 세상에 맞추어 모든 감각기관이 적응이 되었으니까 z축 좌표가 맞지 않은 세계에 대해 인지하는 건 이상한 일이지. 가끔 정령안을 가지고 있다던지, 정령의 친화도가 극단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있다고는 하는데 만난 적은 없지만, 그 사람들의 경우는 감각기관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뭐, 장애라기보다는 축복이라는 말이 정확하겠지만.”
셀린이 두 손을 모으고 작게 중얼거리자, 자그마한 불씨가 나타나더니 붉은색 나비로 형체화 된다.
“만져봐. 괜찮아, 이 아이가 만져도 된다고 했으니까.”
셀린이 붉은 나비를 마레이를 향해 조심스레 내밀었다. 날개짓만 간간히 하는 나비는, 아니. 정령은 무척이나 따뜻해서 그대로 품 안에 꽉 안고 있고 싶었다.
“역시….”
“네?”
“그대로 안고 있어. 계속 설명해줄게. 정령들도 분명 이 세계에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은 형태야. 그렇기에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게 정상적이겠지만, 우리들이 이 아이들을 억지로 계약이라는 비물리적인. 마법적인 방법으로 끌어당겨 오는 거야. 어떻게 보면 화신체의 개념이라고도 생각해.”
그러니까 말이야.
“약간의 힘을 가지고, 우리들의 인식하는. 아마도 우리가 통념적으로 상상하는 그런 모습으로 변환되어 우리가 인지하는 것이라 생각해.”
“인간도… 저쪽으로 갈 수 있나요?”
“글쎄, 이론상으로는 가역적인 반응이긴 한데…. 정령들이 우리를 소환하지 않아서, 증명은커녕 확인할 방법조차 없어. 갑자기 이상한 애들이 널 소환하더니 도와달라고 하는 건데도 도와주는 아이들이야. 반대로 생각하면 정말로 착한 아이들이니까.”
셀린은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꼭. 꼭. 친구로 대해줘. 부탁할게. 자, 손을 줘. 어울리는 속성을 확인해야 하니까.”
셀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셀린은 두 손으로 마레이의 손목을 몇 번이나 매만졌다. 필리아에 비하면 물렁했다. 므랑데도, 이하운도, 자신의 암컷들도 이렇게 손이 말랑말랑하지는 않았다. 마치 한 번도 무거운 것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손. 부드럽다. 짧은 감상이 들었다.
“좀 이상한 감각이 들 수도 있지만 조금만 참아.”
-찌릿.
셀린이 붙잡고 있는 손목에서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겨울철 무방비하게 문손잡이를 만졌다가 정전기에 된통 혼난 느낌이랄까. 아프다라는 표현이라기보다는 찌릿한 느낌이라는 게 옳은 것 같았다.
“큿..! 무, 무슨…!!”
셀린이 마레이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난 뒤, 토끼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마레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인간이…. 아니야….”
셀린이 몇 번이나 뒤로 물러섰다. 파란색 눈동자에는 적의가 숨김 없이 흘러나왔다.
“네? 셀린 선배?”
“가까이 오지마. 방금 그 마력은…. 넌 도대체…!”
위험해. 셀린 주변으로 알 수 없는 일렁임이 보였다. 위험하다. 에르덴이 준 팔찌가 부르르 떨렸다.
“마레이 드 파웬… 방금 그건 인간이라기보다는... 아…!”
셀린은 무엇인가 깨달은 듯 두 눈을 크게 뜨다가 머리를 거칠게 헝크러트렸다.
“파웬가였구나.... 너무 놀라서... 미안해. 미안!!”
셀린은 수업 시간에 오답을 크게 외친 학생처럼 잔뜩 붉어진 얼굴로 뺨을 긁적이며 다가왔다.
“그 다시 확인해도 될까?”
“아, 네….”
셀린이 무엇을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 안에 있는 마력이라는 게 정상적이지 않다는 건 이해했다. 크사크루 자매는 단순히 이론뿐만 아니라 제자를 키우듯 마법을 알려주고 있는 데도 이런 말은 없었기에 당황스러운 감정도 컸다.
“이게… 용의 피… 큿… 아냐, 괜찮아. 이런 건 또 처음이라…. 조금만. 더.. 더… 크흐윽…! 아아악!!”
셀린이 가슴을 부여잡고 히스테릭하게 거칠게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몇 번이나 거칠게 기침을 하고 나서야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겨우겨우 숨을 들이쉰다.
“선배, 괜찮아요…?”
“아, 응… 너무 신기해서… 이게 용…...”
셀린은 두 눈은 초점을 잃은 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인간, 엘프, 악마, 흡혈귀 그리고 순수, 전혀 연관이 없는 단어들의 나열에 마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미안해. 진정됐어. 방금 내가 뭐라고 했는지 혹시 들었어? 분명 머릿속에서 뭔가가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는데 남는 게 없네...”
“아뇨.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무슨 말을 하셨나요.”
셀린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레이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다행이었다. 왜인지 그녀가 말했던 단어들을 알려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 괜찮으신 거죠?”
“아아, 응. 무리해서 보려고 하다가. 수준에 맞지 않는 짓을 해버려서 오히려 잡아먹힐 뻔했네. 잠시만. 잠시만. 조금만… 조금만 시간을 주면 돼. 응. 조금만...”
주저앉은 채로 숨을 헐떡이는 셀린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마치 진이 다 빠진 것처럼 몇 분이나 숨을 헐떡이다가 그대로 푹 쓰러졌다.
“선배?! 선배!!”
몇 번이나 흔들어 깨워도 셀린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레이는 급하게 셀린의 맥박을 확인해보았다. 이상 없음. 눈꺼풀을 열어 동공의 수축을 확인했다. 이상 없음. 호흡은? 이상 없었다.
몇 번의 일련의 과정이 지나서야 마레이는 셀린이 단순히 기절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벨라가 필요한 일이 있을 거라고 알려준 방법이었는데, 이렇게 쓸 줄은 몰랐다. 그녀의 혜안에 마레이가 감탄해버렸다.
실상은 절조도 없는 하물을 가진 아들이 아무 여성이나 범하다가 실신시키길 반복하니, 중간에 확인하라고 알려준 것이지만…..
일반인이었다면 주변 사람이 기절했을 때 무슨 조치를 취했겠지만, 매일매일 여러 여성들을 실신시키길 반복하는 소년에게는 그저 편안한 자세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당연한 상식이 되어버렸고. 셀린도 우연치 않게 그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두고 떠날 수도, 그렇다고 어디에 옮길 수도 없었기에 마레이는 셀린을 조심스레 일으켜 자신의 무릎에 눕혔다.
셀린이 말했던 여러 단어들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인간, 엘프, 악마, 흡혈귀 그리고 순수. 가벼운 헛소리일 수도 있었지만, 육감이 단순한 헛소리가 아니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그런 말을 셀린이 한 것일까.
다른 사람에게도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라벨라나 에르덴, 아니면 일리엔에게 상담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점점 이런저런 일이 늘어나는 것만 같았다. 해결되기는커녕 여러 복잡한 일들이 계속 산적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잔뜩.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건 시험을 대비해서 공부하는 것밖에 없었다.
몇 번이나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은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한다는 생각을 해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몇 번이나 크게 심호흡하고 생각을 애써 떨쳐내서야 조금은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제서야 무릎에 누워있는 셀린에게 관심이 갔다. 호수 같은 사람이었다. 깊지 않은, 하지만 산속에 있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호수. 아침 호수에서 나는 맑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었다. 눈과 머리카락은 밑바닥이 보이는 호수처럼 너무 진하지도, 너무 얕지도 않게 파랗게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머리카락을 코에 가져다 대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청아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맑다고 해야 할까. 폐부 깊이 스며드는 달콤한 향과 다르게 가볍게 폐를 훑고 지나가는 옅은 향이났다.
“........냄새나?”
“아, 아앗!! 죄, 죄송합니다!!!”
셀린은 아무런 표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아니, 부끄러 하는 것 같았다.
“아, 아니.. 그게… 이상하게 맑은 향기가 나서….”
“맑은 향기?”
셀린이 되물었다.
“그게, 그러니까….. 새벽의 호숫가에서 나는 맑은 향기가 계속 나서… 저도 모르게… 죄송합니다.”
셀린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넌 정말로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지금, 당장 소환해보자.”
“네?”
“준비해.”
셀린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품 안에서 이것저것 물건을 꺼내더니 바닥에 마레이가 처음 보는 마법진을 이리저리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마법진을 그린 셀린은 옷이 푹 젖을 때가 돼서야 마법진을 완성했다.
“원래라면, 이런 급조된 마법진으로 될 리가 없어. 정령들이 좋아하는 물건 들을 잔뜩 늘어놓고, 마나석을 억지로 과부하 시켜 차원의 틈을 억지로 비집고 여러 과정이 필요해. 하지만 내 재, 재능의 반. 그 정도만 된다면...”
스스로 자신의 재능의 반이라고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인지 셀린은 얼굴을 붉힌 채, 몇 번이나 헛기침을 했다.
“웃지 말고… 자, 여기 가운데에 서 있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셀린이 그린 마법진 가운데에 서 있자, 뭔가 이상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간지럽다고 해야 할까. 아니, 이건 달랐다. 뭔가 보이는 듯하면서도 보이지 않았고, 들리는 듯하면서 들리지 않았다.
알 수는 있었으나,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바로, 바로 온다고…?”
셀린의 경악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지금 자신 앞에 거대한 무엇인가가 서 있었다.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타오르고 있었다. 끝없이 타오르고, 또 타올라서 결국 보이는 것은 새하얀 재뿐이었다.
[한 시대에 나를 부를 만한 아이가 두 명이나 있을 줄은 몰랐네.]
하얀 재가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금 타오르는 불꽃은 모든 것이 타버리고 남은 재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니,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가만히 있으렴. 흐음… 익숙한 느낌이 드는데…..]
불꽃이 제멋대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니, 일렁이고 있었다.
[용? 악마? 엘프? 뭐지, 이런 잡종은….?]
불꽃이 제멋대로 말하고 있었다.
[뭐, 좋아. 심심하기도 했고 날 차버린 그 녀석을 혼내주고 싶기도 했고. 자, 꼬마야. 손을 잡으렴. 내 이름은 이프리트. 계약하자.]
불꽃이 다가왔다.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왜인지 거부할 수 없었다. 몸이 녹아 없어져도, 재가 되어버려도 불을 향해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불나방처럼. 끝은 재가 될 것을 알아도….
[네 이름은?]
마레이 드 파웬.
[파웬? 파에에에에웬~?! 로렌 그 녀석이야?! 야, 야!!! 안 돼!! 안 돼!! 취소야!! 취소라고!!! 이런 씨...!!]
손을 뿌리치는 불꽃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그리고 세상이 새하얗게 변했다.
불에 맞닿은 손부터 불타오르고 있었다. 불은 무척이나 빠르게 팔을 먹어 치우고, 어깨를, 목을, 그리고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 삼켜냈다. 곧장 이 세상에는 마레이 드 파웬이라는 존재는 사라졌다. 그저 자신은 타오르고 있었다. 타오르고, 타오르고, 또 타올라 영혼까지…..
“마레이? 마레이? 마레이 드 파웬!!”
셀린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호수가에서 나는 청아한 향기, 피부를 스치는 미지근한 바람, 태양의 열기, 새의 지저귀는 소리. 막혀있던 오감이 다시금 되살아나고, 더욱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괜찮은 거야?”
“아, 네. 네? 네!”
셀린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방금전 온통 재 투성이인, 하얗던 세상은 꿈처럼 사라져 있었다. 방금 그건 뭐였지….?
“계약은 한 거야?”
“아, 그게.. 네… 한 것 같아요…. 이건 가요…? 문양이?”
마레이는 오른손등 위에 떠 오른 문양을 흘깃 보았다.
“그건 계약자밖에 안 보이는 거야. 정령술을 극의로 깨우치면 다른 사람 것도 볼 수 있다는데, 나는 아직 멀어서.”
셀린은 뺨을 긁적였다.
“그래서, 누구랑. 아니 뭘 보았어?”
“불이었던 것 같아요… 타오르는 불꽃.”
“불의 정령이라…. 한 번 마력을 불어넣고 나타나 달라고 이야기해 줄래?”
셀린이 시키는 대로 하자, 손등에서 카나리아 크기의 붉은 새가 나타났다.
“귀여운 아이네. 아, 이름부터 지어줘야겠다.”
“보통 카사나 샐러맨더 같은 걸로 부르지 않나요…?”
“그저 호칭 같은 거야. 너랑 나랑을 제국인이라 부르는 느낌이지. 새로운 땅에 왔으니, 새로운 땅에 쓸만한 이름을 지어주는 것부터 친구의 시작이 아닐까?”
“아하….. 선배 괜찮아요?”
그제서야 셀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반쯤 풀린 눈. 덜덜 떨리는 팔과 다리. 명백하게 무리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처음치고는 무척 안정적이게 소환됐네. 거기에 이렇게 귀여운 새고…. 훌륭해. 너도 정령사에 자질이 있어.”
셀린이 붉은 새를 만지려 하자, 붉은 새의 형상을 띈 정령은 샐린의 손을 날개로 쳐버렸다.
“자존심이 엄청 강한 아이인가 보네. 지성도 높아 보이고…..”
샐린의 손을 이리저리 피하다가, 나무 위로 날아가 버리는 붉은 새의 모습에 셀린은 허탈하게 웃었다.
“다른 정령도 소환할 수 있나요?”
“소환할 수는 있지만, 그 아이랑 친해진 이후에 하는 게 좋겠다. 마구잡이로 소환하면 질투하거든.”
마레이가 손을 내밀어보았지만, 붉은 새는 나무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친해지는 노력부터 해야겠네.”
셀린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쿡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붉은 새는 마레이 주변을 빙빙 돌고 있었다. 매가 사냥을 할 때, 사냥감을 찾듯이 조금씩 높게, 높게 올라가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낯선 세상이라 긴장하고 있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선배, 괜찮아요? 조금 쉬셔야 할 것 같은데.”
“보통 때라면 괜찮다고 말했겠지만, 역시 지금은 무리네.”
셀린은 비적비적 걷다가, 가장 가까운 벤치에 주저앉았다. 붉은 새, 아니. 이프리트는 여전히 하늘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요즘 학교생활은 어때? 아니. 어제도 물어봤구나.”
셀린의 말에 마레이도 웃어버렸다.
“공부 이야기도 어제했고, 할 이야기가 없네….”
“네….”
필리아가 있었으면 둘 다 할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쉽게도 셀린과 마레이는 단둘이 있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애매한 거리감이 있었다.
“저기, 정령술에 대해서…...”
“정령술은 딱히 정립된 학문이 아니라서, 자기 주관적인 이야기들이야. 네가 한 번 경험해보고 나중에 의견을 나누는 쪽이지, 내가 너를 가르칠 정도로 깊은 깨달음이 없네.”
셀린은 자신 없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셀린 선배의 정령을 보고 싶은데… 괜찮아요?”
“아, 응. 어렵지 않지. 운디네. 운디네?”
몇 번이나 운디네를 부른 셀린이었지만, 정령이 나오지는 않았다.
“나오고 싶지 않다고 하네. 이런 일은 거의 없는데….. 다음에 보여줄게. 지금 워낙 지쳐서 다른 아이들은 무리거든.”
“아, 네…..”
정령이라는 건 생각보다 다루기 어려운 존재들이구나. 짧은 감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정령을 다룰 수 있는 게 맞는지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대단하네, 한 번에 소환할 줄은 몰랐어. 나보다 더 뛰어날지도 모르겠네.”
“대단한 건가요?”
“아, 음…. 응. 대단한 거야. 이런 말 하기 부끄럽지만, 우리 집은 꽤나 오래된 정령사 가문인데 다들 천재라고 치켜세워주거든. 정령술이라는 걸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재능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걸까. 셀린은 허무하게 중얼거렸다.
“마레이, 너는 왜 필리아 공주님의 편에 선거야? 파웬 공작가면 그럴 필요는 없었잖아.”
‘필요’라.
마레이는 셀린을 보았다. 셀린과 자신과 필리아는 동료라고 했다. 자신은 몰라도, 셀린은 필리아의 동료렸고, 그건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 같았다. 필리아는 이런 관계를 맺고 다니는 걸까. 입안이 텁텁했다.
“그냥, 필리아가 좋아서요. 필리아에 옆에 서 있었을 뿐이에요.”
“그래……?”
셀린은 아무 말 없이 마레이를 보았다. 푸른 눈동자에는 공허함만이 맴돌고 있었다. 그 차가움에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좋겠다.”
“뭐가요?”
“아니, 아니. 내가 무슨 말 했어?”
“좋겠다고 말하셔서….”
셀린은 좌우로 고개를 털었다.
“실수, 잘못 말했어. 응, 실수야.”
몇 번이나 실수라고 대답한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마레이도 그녀에게 무어라 할 말이 없었기에 어색한 침묵만이 두 사람 주변을 맴돌았다.
“사실, 나는….. 필리아님을 존경해. 좋아하고, 다만 계약 관계로 그분을 모시게 되었다는 게 아쉬울 뿐이야.”
“그런가요.”
“셰필드, 그 개자식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하나뿐이었거든.”
고해성사를 하듯 셀린은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저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그냥 약혼을 파기하면 안 되나요?”
“부모님이 계약에 묶여있거든.”
그래서 어쩔 수가 없네. 셀린은 웃었다. 아니, 웃으려고 노력했다. 그 계약이 무엇인지, 셰필드는 어떤 지 그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셀린과 자신의 거리는 고작 이 정도였다. 마레이는 작게 한숨을 토해냈다.
셀린과 별다른 이야기가 오고가지 않았다. 적당히 비슷한 질문과 비슷한 대답으로 그녀와의 이야기가 끝났다. 더 가까이 다가가기도, 더 멀리 떨어지기도 애매한 거리감에 숨이 막힐쯤에서야 셀린이 일정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떠났다.
도망치듯이 자리를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셀린이 떠나고나서야 하늘을 빙빙 돌던 붉은 새가 마레이의 어깨로 내려왔다. 반짝이는 붉은 깃은 루비처럼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저귀기는커녕 마레이를 감시하듯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계약했을 때, 이름이...
“안녕, 이프리트.”
새는 고개를 휙 돌렸다. 만져보려고 손을 뻗자, 손대지 말라는 듯 날개를 퍼덕였다. 새침하다고 해야 할까, 무엇인가 불만이 있는 것 같았는데, 이프리트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귀염성 없는 친구였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무엇인가 이 붉은 새와 자신을 잇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오감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이프리트, 저는 마레이 드 파웬이에요. 말했듯이요.”
붉은 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자신이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었다. 새의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대화하고 싶었지만, 역시 새와 대화하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란님에게 묻는다면 대화하는 법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계약했을 때에는 서로의 이름을 말했는데, 역시 현실에서는 무리인가 아쉬움마저 들었다. 자신을 지켜보기만 하는 이프리트는 여전히 어깨에 앉아있었고,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근처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성가대. 성가대를 잊고 있었다. 금요일마다 연습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주 찾아가기로 생각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마레이가 일어나 빠르게 걷는데도, 이프리트는 소년의 어깨에 계속 앉아있을 뿐이다.
성가대 연습을 구경하러 갔지만, 중간에 껴서 같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길리아가 중앙에서 높은 음역대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모습에 감탄해 박수를 치다가 성가대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같이 연습하게 되었다는 말이 정확했다.
거기에 마레이의 곁을 떠나지 않고 어깨에 찰싹 붙어있는 이프리트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다. 셀린이 역소환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기에 이프리트를 정령 세계로 되돌려 보내고 싶어도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쏟아지는 관심에 익숙해질 무렵, 성가대 사람들과 연습 중간에 가벼운 잡담을 할 무렵, 길리아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혹시 만져도 돼…..?”
“아, 이 친구요. 이프리트, 만져도 돼?”
이프리트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길리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지 말고, 내 가족이야, 이프리트. 길리아 마리타야. 마리타, 이 아이는 이프리트에요.”
“이프리트라… 이름에 비해서 귀여운 아이네.”
“네? 이상한가요….?”
“이프리트면 불의 정령왕의 이름이잖아. 뭐, 정령사들 중에서 자기 정령에게 왕의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은 종종 있으니까 이상하지는 않지.”
이프리트는 자신을 이프리트라 소개했다. 마레이는 자신 어깨에서 벗어나지 않는 붉은 새를 보았다. 이프리트는 마레이의 시선에도 주변을 살펴볼 뿐이었다.
“정령술에도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네. 예전부터 배웠던 거야?”
“아뇨, 오늘 처음 소환했어요. 기회가 닿아서….”
“정령술이 아니어도 좋으니 마법이나 다른 것에 재능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
길리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길리아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재능이 있다고는 말해주지는 않는구나.”
“길리아는 재능이 있어요!”
“무슨 재능?”
“그게.. 그게.. 그러니까...”
대답하지 못하는 마레이의 모습에 길리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라벨라 드 파웬이라는 철의 여인의 양자가 된 인물이라면 비슷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상상했는데, 현실은 정반대였다. 물론,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런 모습이 너무 좋았다. 의지할만한 친동생이 생긴 것만 같았다.
“타고나지 못한 것을 가지고 한탄하거나 하지 않아. 아쉽긴 하지만.”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길리아의 말에 마레이는 하하.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무어라 말하기 애매할 때에는 이상하게 웃음으로 대처하는 것 같아 찜찜할 따름이었다. 연습은 무사하게 끝났다. 오늘은 샤샤가 늦게 오는 덕에 다들 빨리하고 빨리 끝났다고 하자~! 라며 서둘러 연습을 마무리했다.
“샤샤 선배의 노래는 좋지 않아요…?”
“좋아서, 문제야. 그걸 듣고 나면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거든.”
성가대원 중 한 명이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왜인지 알 것만 같았다. 길리아에 이어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곧장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총독 비서실에서 이번에 대량으로 물건을 사 갔다고 하더라고. 마레이는 뭐 알고 있는 거 있어?”
“네? 아, 로렌 님 관련해서는 저도 아는 게 없어서...”
“이런저런 물건을 너무 대량으로 사가더라고. 곰 인형, 장난감 이런 건 보육원이나 시설 같은 데에 뿌린다고 하는데, 보석이나 냉병기 수집품 같은 걸 잔뜩 사가니까… 예산을 털기에는 아직 연말도 아니고.. 혹시 아는 게 있나 해서?”
“아하하, 아는 게 없어서요… 로렌 님이 개인적으로 필요하신 게 아닐까요…?”
“총독이 그런 귀여운 취미가 있다고? 농담도~.”
마레이는 로렌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그녀가 증조부의 부인이라는 사실과 드래곤이라는 점, 그리고 왜인지 모르지만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기뻐했다는 점밖에 아는 게 없었다.
문제는 다들 자신이 로렌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거라 착각하고 있었다. 미혼인 라벨라 드 파웬이 양자를 들였다는 것은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나 다름이 없었다. 따라서 마레이는 차기 파웬 가문의 가주나 다름이 없었기에 파웬이라는 이름을 끔찍이 아끼는 로렌과 사이가 좋겠거니 지레짐작이었지만, 마레이로서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오히려 마레이가 생각하기에는 로렌과 자신의 관계는 나쁘다고 말하는 게 더 편한 관계였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시종장의 일침을 가슴에 새기는 것도 잠시. 제멋대로 떠들었다고 손을 잘라다가 선물이라고 주는 악취미.
그런 사람을 누가 좋아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로렌 드 파웬을 싫어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을 딱히 싫어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마레이도 로렌은 기피하고 싶은 대상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드래곤. 모두가 싫어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가문의 사람이고, 가족이었다. 좋아할 수는 없어도 그녀를 싫어하지는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그래서 피하고 싶은 거고.
그러면서도 이율배반적이게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로렌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왜 사람들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것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왜 용이 인간으로 사는 것인지. 란이 조심스레 꺼낸 애매모호한 이유가 아니라,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필리아 공녀가 제국 대학에 가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던데, 역시 집안 문제 때문에 그런 건가~?”
“왜, 저를 보고 말씀하시는 거죠….”
사람들의 시선에 마레이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아니, 그래도…. 필리아 공녀와 사귀고 있다고 이야기가 들려와서…. 혹시 아니야?”
“맞긴 하는데… 그래도 리아의 개인사를...”
“꺄아~!! 리아래! 리아래! 벌써부터 애칭이 있는 거야?”
필리아의 이야기를 묻는 사람들의 시선에 마레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비슷한 광경을 어디서 경험한 것 같았다.
“그래도 내전을 생각하기에는 좀 이르지 않을까?”
“필리아 공녀가 왕좌를 그렇게 쉽게 넘길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워낙 지지자도 많고, 이번에는...”
또다시 마레이에게 시선이 집중이 되었다.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미안, 미안. 모이면 이런 이야기라서...”
“아뇨, 오히려 궁금해요. 사정은 알고 있는데, 자세히는 몰라서.”
성가대 사람들은 슬쩍 마레이를 눈치를 보다, 순진무구한 눈망울을 보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아스모스 공왕 자체는 제대로 하는 일이 없으니까, 내부에서는 꽤나 골머리를 썩는 모양이야. 덕분에 아스모스는 공국 내부가 아니라 외부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같더라. 구 동북부 8연합과 붙는 건 그렇게 좋은 모양새는 아닌데.”
“동북부 8연합이요?”
“소문에 의하면 북부나 시그마 제국에 무기를 밀거래하는 모양이야. 요즘 이교도나 왕정복권 반란들이 중간중간에 터지다 보니 감찰국에서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 같고. 아니면 밀거래로 넘어가는 무기들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일지도 모르고.”
“다른 공녀는 뭐 하고 지낸 데?”
“뭐 언제나 같지, 사람들 피해 다니고, 동물들이랑 어울리고. 필리아 공녀가 덕분에 골치 아픈 모양이야, 경쟁자지만 혈육이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쪽 원로원을 지지 세력으로 두고 싶은 것인지 계속 감싸고 도는 것 같더라.”
“리아의 동생 이야기인가요?”
“말도 더듬더듬 거리고, 음침하고, 소심하고… 뭐 욕하는 게 아니라. 그냥 평가가 그런 거야. 2학년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필리아 공녀는 방치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켜주려고 내버려 두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필리아에게 드문드문 동생의 이야기를 듣고는 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는데, 이런 식으로 듣게 된다니 유감이긴 했다.
“지켜주려고 왕따당하는 걸 내버려 둔다고요?”
“추측이야. 지켜주려는 게 아니었으면 대공 위도 관심 없는 막내를 자신 곁에 두지는 않았겠지. 나라면 공국에 내버려둔 채로 아스모스랑 싸우게 만들었을 거야.”
섬뜩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성가대원을 보면서 마레이는 이 사람들이 귀족이구나라는 걸 다시 깨달아버렸다. 익숙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좀 씁쓸한 이야기지만, 가주가 사람 역할을 못하면 대부분 그렇잖아? 나도 여기로 유폐된 거든!”
성가 대원중 한 명이 호탕하게 웃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저 친구는 가무스 라 지에라고 지에 가문의 삼남이야. 첫째 형이랑 둘째 형이 치고박고 싸우다 보니 가주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고, 막내는 그냥 공무원이나 학자를 하라고 여기에 보냈거든.”
“그 영감탱이가 알아서 유산을 챙겨준다고 하니까, 괜찮아~! 괜찮아~!”
가무스 라 지에는 갈색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웃었다. 정말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호탕한 사람이었다. 남부지역에서 온 사람인 것인지 까무잡잡한 피부와 하얀 성가대 복장 위로 슬며시 근육의 윤곽이 드러났다.
“근데 아스모스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병신 띨띨이를 후계자로 내세운 거야? 알브라함의 귀족의 첩을 추행했다가 난리가 났다는 소문 들었어?”
“신문사는 틀어막았다는데, 대공도 아니고, 후계자도 아닌 놈이 개짓거리하는데 눈에 뵈는 게 어디 있어. 재판하겠다고 길길이 날뛰고 있다던데?”
“와, 소문 빠르다. 나 오늘 새벽에 아버님이 연락해서 알려줬는데. 발테르에서 사고를 치면 다리몽둥이를 부서버리겠다고 윽박지르셨다니까?”
마법이 상용화되면서 정보의 교류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고 있었다. 물론,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허리를 열심히 흔들기만 한 마레이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나는 필리아 공녀에게 배팅 중이야. 아스모스건, 원로원이건 나머지는 투자만 해도 손해 볼 것 같거든.”
“뭐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비슷한 결론이긴 해. 투자를 한 이상 원금도 못 찾을 것 같은 두 사람보다는 원금 이상으로는 무조건 챙겨줄 것 같은 필리아 공녀의 편이거든. 경계할 필요는 없어. 틀니 딱-딱- 거리는 늙은이들이나 왕의 선택이다, 집안의 선택이다 하면서 헛짓거리하는 거지.”
가무스는 치아를 부딪히며 인공치아를 부딪힐 때 날법한 소리를 흉내 냈다. 다들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필리아의 평가가 좋다보니, 왜인지 우쭐해지는 감각에 마레이는 최대한 무표정하게 앉아있기 위해 노력했다.
“강요하는 건 아니야. 우리도 필리아 공녀와 친해지고 싶은데, 워낙 바쁜 사람이다 보니 얼굴 보기도 힘들거든. 얼굴을 보더라도 대부분은 일 관련이라서. 여기 학생회 사람들도 꽤 되거든.”
“놀랍게도 가무스, 저녀석도 학생회야. 성가대원 중에 몇몇이 샤샤 선배에게 납치되어서 말이야.”
길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반에서도 그렇게 잘 좀 지내봐라,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고지식한 반장이라더라! 길리아 마리타님, 역시 군인이 되실 분이라 그런지 아주 메뉴얼대로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반장이니까 지킬 건 전부 지켜야지. 모범이 되니까. 가무스 너야말로 감찰국에 가는 게 목표인 주제에 그렇게 설렁설렁 살 거야?”
가무스라는 남성과 길리아는 무척이나 친해 보였다.
“두 사람 친구인가요?”
“마레이, 여기 대부분은 친구야. 비슷한 처지이기도 하고.”
“비슷한 처지는 무슨…. 샤샤 선배 아니었으면 이런 딱딱한 여자애랑 말도 안 했어!”
길리아의 말에 가무스가 툴툴거렸다.
“이런 이야기는 별로니까, 다른 이야기나 하자. 길리아, 북부 전선 관련된 정보 있지? 좀 토해봐.”
“파후 장군이 몇 주째 전선을 비우고 있다고 하더라. 줄리아 선생님은 별다른 말씀은 없었고. 아마 파후 공작가 후계문제로 본가로 간 것 같은데. 줄리아 선생님이 공작위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더라고.”
“작위 같은 거 귀찮다고 하시던 분이?”
“뭐, 비밀은 아니라고 하셨으니 말을 하자면.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작위가 필요할 것 같다라고 하시더라고. 개인사인 것 같아서 더 묻지는 않았어.”
길리아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녀는 여전히 줄리아를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아니, 대부분 학생들이 그녀를 어려워한다는 말이 정확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보다는 마레이가 잘 알걸? 개인 과외를 받고 있으니까.”
“네? 네? 저는 들은 게 없어서...”
줄리아에게 딱히 들은 이야기는 없었다. 에르덴과 요즘같이 다니는 것 같았는데, 아마 두 사람의 모종의 이야기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기회가 된다면 침대에서 진실을 토해내게 하면 될 일이었다.
“아, 줄리아 선생님과 과외는 어때? 워게임 같은 거 자주 해?”
“그냥 지도를 보는 법이나 제국의 대전략 같은 걸 배우고 있어요. 군인에는 뜻이 없다고 말씀을 드렸기도 했고….”
“흐응~.”
길리아는 묘하게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드워프 왕국 물건들의 값이 오르고 있는데, 상인들의 장난질이야? 아니면 무슨 문제가 생긴 거야?”
“성벽올리고 성벽 밖 중계소에서 거래하는 놈들의 사정을 어떻게 알아? 상인이 장난을 친 거겠지. 드워프 왕국에 문제가 생기면 단순히 가격이 오른 걸로 끝나지는 않을 껄? 슈바펜 장군이 가만히 있을 리도 없고.”
성가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제는 따라 갈 수가 없었다.
“동북부 8국 연합에서 사건사고가 꽤 터지고 있는 모양인데, 신문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없네? 무시류나 식량을 좀 사둘까?”
“알브라함이 예술품으로 꽤 유명했잖아? 이번에 망나니 때문에 언급되다보면 자연스레 시장에 물건들이 풀릴 것 같은데. 미리 사두는 건 어때? 용돈쯤으로 차익은 나올 것 같은데?”
“수인족의 아란치니가 대규모 사냥대회를 열었다고 하는데, 그러면 남부군 소요 물품 관련해서 투자하는 게 낫지 않아”?”
학생들 사이에서 투자 이야기가 나올 즈음에서 마레이는 동떨어진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면 이 아이들도 귀족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된다. 아는 게 없는 마레이로서는 그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라는 일련의 과정의 연속이었다.
솔직히 노트에 적어서 다시 복기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왜인지 너무 눈에 띄어 버리는 것도 좋은 처세술은 아닌 것 같았다.
“마레이는 이런 이야기가 좀 그런가?”
“아뇨. 재미있네요. 저는 투자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어서…. 돈도 없고요.”
다행이도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을 보거나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에이, 발테르 총독령 일 년 세수가 얼마인데~.”
물론, 돈이 없다는 말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가끔 에르덴이나 다른 여인들이 몰래몰래 찔러주는 용돈을 생각하면 꽤나 많이 받는 편이었지만, 라벨라에게 순수하게 받는 용돈은 넉넉하기는커녕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녁 식사는 언제나 집에서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의도가 느껴질 때도 가끔 있을 정도니까. 거기에 로렌이 얼마를 벌고, 라벨라가 얼마를 벌던 자신과는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부족한 것도 딱히 없었고.
이야기는 흐지부지 끝났다. 성가대 뒤풀이라 학교생활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전부 미래와 돈에 관련된 이야기라서 그런지 마레이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아는 분야도 없었고, 잘 아는 거라고 해봤자, 자신의 암컷들의 성감대나 비밀스러운 특징들뿐이라서 더더욱 말할 수가 없었기도 했고.
“재미없었지?”
길리아의 물음에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재미있긴 했었다. 다만, 대부분은 듣고만 있었기에 다른 사람이 불편하지 않았을까 걱정이 들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신기했어요. 다들 열심히 사는구나 생각도 들었고….”
“그걸 재미없다고 하지.”
길리아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호한 그녀의 모습에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성가대 재미있어?”
“아, 네. 다들 재미있어요.”
흐음. 길리아가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뭐, 네가 재미있다면 상관없겠지. 난 슬슬 사관학교 준비하는 애들 모임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즐거운 주말 보내~!”
보면 볼수록 밝은 소녀였다. 첫 만남에서 반 아이들에게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딱딱하게 말하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스테인글라스 사이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바로 전까지 소란스러웠던 성당 안은 거짓말처럼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드디어 혼자가 됐네.”
성가대 연습 내내 보이지 않았던 샤샤가 갑작스레 나타났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마치 그림자에서 솟아난 것처럼 마레이의 옆에 앉아있었다.
“선배….? 언제 오셨어요?”
“처음부터 있었어. 저것 때문에 계속 숨어있었다고.”
샤샤가 스테인글라스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이프리트를 가리켰다.
“아, 정령이에요. 오늘 저랑 계약한 정령. 이프리트에요!”
이프리트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고개를 번쩍 들고 고개를 좌우로 움직여 주변을 살펴보고, 마레이에게로 날아와 어깨에 앉았다.
“이프리트….”
샤샤가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역시 이름으로는 별로인가요? 정령왕님의 이름이라고 하는데, 저는 이 아이의 이름을 이프리트라고 들어서.”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네?”
“아니, 너에게 한 말은 아니야. 이프리트, 장난은 그만 치시죠. 그런 모습으로 이 아이에게 왜 접근한 건지 설명 좀 해주시겠습니까?”
-흐음~. 역시 천족의 아이 눈을 속이는 건 무리일려나~?
어디서인가 여성 특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찾아온가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성당 안에는 자신과 샤샤 그리고 이프리트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프리트… 네가 말한 거야?”
-네가라니. 무엄해!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러는 거야?
짐짓 화를 내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고, 이프리트가 날개를 퍼덕이며 마레이 앞에서 천천히 날갯짓을 했다. 그리고 곧장 불이 크게 일렁인다. 갑작스레 2m는 넘어 보이는 불덩어리가 튀어나오자 마레이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는데, 불덩이 속에서 손이 뻗어나와 마레이를 꽉 붙잡았다.
“아, 뜨, 뜨….? 안… 뜨거워?”
“꼬맹이는 겁도 많네. 쯧쯧...”
불덩어리 속에서 들렸던 목소리가 선명하게 귓가를 간지럽혔다. 가느다란 팔과는 다르게 우악스러운 힘이 마레이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곧장 느껴지는 물컹함. 본능적으로 마레이는 이게 가슴이라는 걸 알아채버렸다.
“내 새로운 계약자니까,. 눈독 들이지 마. 천족 꼬맹이. 녹색용이 거슬리긴 하지만, 뭐 이 정도면 외모도 합격이고, 마음에 들었어.”
라벨라보다 커 보이는 키의 여성. 아니, 이프리트는 마레이를 꽉 끌어안은 채 작게 흥얼거렸다. 타닥타닥- 소리가 장작이 타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처음 보는 여성이 자신을 꽉 끌어안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너무나도 편안해서 밀어낼 수 없었다. 사심이야 없을 리는 없었지만, 야릇한 감각보다는 눈이 저절로 감기는 따스한 온기에 마레이는 이프리트를 밀어내지도, 끌어안지도 못한 채 어쩡정하게 서 있었다.
“이런 곳에서 뵙다니 놀랍군요. 그래도 당신 같은 분이….”
“용사 녀석 로렌이나 리리스랑 천년해로 할 것처럼 굴다가 그렇게 급사할 줄 누가 알았어? 결국은 지금 이 시대에 와서는 이녀석하고 라벨라 그 얄미운 꼬맹이만 남았잖아.”
이프리트가 작게 한숨을 토해냈다.
“그 악독한 계집애는 내가 불러 달라고 때를 써도 무시하고!! 뭐, 이렇게 착하고 귀여운 애가 나타났으니 뭐 됐어~! 아휴, 이 귀여운 것. 이 누나가 사랑하는 거 알지~?”
이프리트는 마레이를 꽉 끌어안은 채로 몸을 좌우로 기울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마레이, 괜찮아?”
“네에.. 괜찮아요.. 숨 쉬는 게 조금 어렵지만...”
위화감이 들었다. 뭐라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비슷한 느낌을 찾는다면 뭔가 가방을 하나 더 매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피는…..”
샤샤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어깨를 으쓱이고 작게 한숨을 토해냈다.
“귀찮은 게 붙어버렸네, 마레이.”
천사의 날개를 달고 있는 샤샤와는 정반대로 붉은 깃털이 이글거리는 날개를 달고 있는 여성.
“우리 불의 천사님은 정령왕에게 못 하는 말이 없네…? 귀찮은 것이라고 부르면 섭섭해.”
“하아…..”
이프리트와 샤샤는 꽤나 친해보였다.
“바뀐 것도 딱히 없는데, 물질계는 언제봐도 신기하네.”
이프리트의 붉은색, 아니. 주홍빛 눈동자가 몇 번이나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갈색 끼가 머무는 하얀 피부는 돌을 깎아 만든 것처럼 맨들맨들해보였다.
“뭐, 앞으로도 종종 나올 테니까, 이쯤 할까? 마레이 드 파웬.”
“네?”
“뭐, 넉넉해 보이지만, 아직은 어리니까 무리하면 안되니까. 난 정령계로 돌아갈게. 자주 불러 달라고 어린 계약자님?”
이프리트는 윙크를 하고 씨익- 웃어 보였다. 그리고 마레이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 위로 가져다 대었다. 라벨라보다 크다. 크사크루 자매 정도 될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크기를 바로 측정해버렸다.
“자주 불러주고, 세상 구경을 자주 시켜주면 이 누나가 좋은 거 시켜줄지도 몰라~?”
더욱더 다가와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웃는 이프리트의 모습에 마레이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프리트가 마레이의 손을 슬쩍 움켜쥐자.
-물컹.
탄력적인 가슴이 손아귀에 가득 들어, 아니. 수박만 한 가슴 크기에 손아귀가 다 들어갈 리가 없었다. 손가락이 파묻히는 감각이 너무나 생생해서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켜버렸다. 그리고 낯선 여성의 적극적인 유혹에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시선을 피해버린다.
“아~!! 정말~!! 너무 귀엽잖아!!”
마레이의 반응을 본 이프리트는 사냥에 능숙한 포식자처럼 갑작스레 달려들어 마레이를 꽉 끌어안았다.
“너, 이 누나가 즐겁게 놀아줄 테니까, 하루에 한 번은 꼭 불러! 알겠지? 응?”
부드러운 가슴에 파묻혀 숨을 쉬기 어려웠지만, 이미 크사크루 자매에게 익숙해진 마레이는 능숙하게 고개를 좌우로 움직여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한 거다? 이프리트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마레이도 따라 그녀의 손가락에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이프리트는 베시시 웃다가 마레이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마레이를 꽉 끌어안은 채 곧장 불타올랐다.
-화르륵!
“아, 앗!! 아….?”
뜨겁지 않았다. 온몸을 덮었던 불꽃은 거짓말처럼 사라져있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이프리트를 찾을 수 없었다. 옆에서는 샤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좌우로 젓고 있었다.
“아이고….. 골치 아픈 스토커에 걸렸네…?”
“이프리트요…?”
“그래, 정령왕인줄 알고 계약한 거야? 인간 중에 이런 친화도가 있는 사람이 존재할 줄이야...”
“몰랐어요….. 이프리트랑 계약한 사람이 또 있나요?”
샤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인간이라고 하기는 애매하지만 라벨라 드 파웬은 두 명의 정령왕과 계약했어. 뭐, 호기심에 계약이다 보니 계약 이후에 쓴 적도 없는 것 같지만…”
“하하….”
뭐라 대답해야 될지 몰라서 마레이는 그냥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일리엔 이나, 네 어머니인 라벨라. 아니면 총독. 아니, 로렌에게 말해두는 게 좋아. 정령들은 우리들이랑 달라서 뭔가 어긋난 게 있거든. 일반 정령이면 계약으로 구속이 되어 있으니까 주의하면 되지만, 정령왕들은 그것도 잘 안되거든. 거기에 제멋대로에다가 속도 좁고, 이해할 수 없는 구석도 많아.”
샤샤가 정령왕, 아니. 이프리트에 대한 독설을 끊임없이 내뱉고 있었다. 이프리트를 만난 것은 오늘 처음이었기에 샤샤의 말을 부정하기에도 이상했다. 샤샤가 남기는 몇 가지 당부사항을 듣고, 소환을 피하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듣고 나서야 그녀는 마레이를 놓아주었다.
샤샤의 반복되는 당부, 아니. 잔소리에 마레이는 자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 때쯤에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짧다고 하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동안 느끼는 피로감은 상상을 초월해서 마레이는 힘없이 광장에 있는 분수대에 주저앉아있었다.
누군가의 걱정과 관심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알았다고 말해도 같은 말을 다섯 번 이상 듣는 것은 고역이었다. 그게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여전히 분수대에서는 투명한 물로 된 물고기들과 물고기들이 이곳저곳으로 펄쩍펄쩍 뛰어놀고 있었다. 처음에 마법이라 생각했는데, 오늘로서야 뛰어놀고 있는 저 아이들이 정령이라는 걸 깨달았다.
분수대에 손을 슬며시 내밀자, 투명한 물고기들이 손끝 주변을 맴돌다 마레이를 향해 펄쩍 뛰어올랐다.
“앗...?!”
갑작스러운 물의 정령의 공격(?)에 깜짝 놀란 마레이가 뒤로 주저앉았다. 물고기를 닮은 정령은 허공에 떠서 마레이의 주변을 빙빙 돌다 다시 물에 들어가 버렸다. 장난 친 거라 생각은 들었지만, 떨떠름한 건 어쩔 수 없었다.
~♬
저 멀리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 같았다. 정령과도 계약을 하고, 일주일에 한두 번 보는 것도 힘든 바이올리니스트도 광장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분수대에 손을 뻗자, 물의 정령들이 마레이의 손 주변을 맴돌았다.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참 동안 무어라 재잘거리던 녀석들은 금방 흥미가 동났는지, 분수대로 들어가 버린다.
바이올린 소리도 이미 잦아들고 난 이후였다. 집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로렌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 걸음이 잘 떼어지지 않았다. 의미도 없이 광장을 하염없이 떠돌다가 악기점 주변에서 걸음이 멈춰 섰다.
주갈색 빛 바이올린이 유리창 너머에 놓여있었다. 빛을 머금은 갈색빛 자체에 넋 놓고 바라보게 된다. 너무나도 얇은 은빛 선들은 손을 가져다 대면 베일 것만 같았다. 자연스레 옆에 가격표를 보았다. 자신의 용돈을 삼, 사 년 모아도 사기 힘들 것 같은 엄청난 가격.
사회초년생들이 버는 월급에 몇 배에 해당하는 금액에 마레이는 바이올린을 살 생각을 말끔하게 포기했다. 라벨라에게 말하면 사줄지도 몰랐지만, 그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바이올린 좋아하나?”
“네? 아, 영감님...”
이제는 익숙한 얼굴의 노인의 모습에 마레이는 고개를 숙여인사를 했다.
“바이올린을 켤 줄은 아는가?”
“아뇨, 배우고 싶다는 생각은 해요. 소리가 너무 아름답잖아요.”
“내가 사주면 한 번 배워볼 텐가?”
바이올린 가격에도 노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보고 옅게 웃고 있었다.
“영감님의 호의는 감사하나,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아니, 엄청 부담스러운 가격입니다.”
“그런가. 실례했군.”
노인은 웃고 있었다. 주름진 눈가가 호선을 그리며 마레이를 내려보고 있었다. 직접 옆에서 보니 노인의 키는 정말 컸다. 로렌보다, 아니. 이프리트보다 훨씬 커 보였다. 꼿꼿하게 선 모습에는 약간이나 위압감이 있을 정도였다.
“오늘도 혼자 시간을 보내는 노인을 위해 대화상대가 되어줄 수 있는가?”
“예, 오랜 시간은 힘들지만, 어느 정도는 괜찮습니다.”
노인은 이제 익숙하다 못해, 정이 들것 같은 카페를 가리켰다.
이 노인은 누구일까.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마레이는 간식에 손도 대지 않고 자신을 보고 있는 노인을 보았다. 주름진 얼굴과 다르게 여전히 타오르는 눈빛, 굳은살이 남아있는 손, 잔뜩 그을린 피부.
이하운이 살기를 내뿜었을 때와 다르게 묘하게 사람을 짓누르는 압박감. 이런 사람이 평범한 사람일 리는 없었다. 이름을 물어봐도 대답을 피하는 걸 보면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았기에 굳이 되묻지는 않았다.
“손녀와 레스토랑에 가려 하는데….”
잔뜩 긴장한 마레이에게 묻는 사소한 질문에 마레이는 터져 나올 것 같은 헛웃음을 삼켜냈다.
“이 주변에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 없더군. 혹시 추천해줄 수 있나?”
“좋은 곳은 많은데, 가격은 어느 정도로 생각하시는지요?“
“가격은 신경 쓰지 말게나, 이래 봬도 부유한 편이라네.”
“아, 그게… 어머니와 같이 간 곳이 있는데...”
야경이 보이는 레스토랑. 식사를 하러 갔다가, 극상의 여체를 나란히 유리창에 기대게 한 뒤에 번갈아 가며 박으며 즐긴 기억이 대부분이었지만 발테르에서 가본 레스토랑 중 그곳이 최고였다. 물론, 가본 레스토랑이라고 해봤자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만…
노인은 중요한 내용을 들은 것처럼 손바닥만 한 메모장에 마레이가 알려준 레스토랑의 위치를 적었다. 자신과 대화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기에는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노인은 마레이의 시선에도 여유롭게 차를 홀짝이며 마레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째서 군인을 선택하신 건가요?”
마레이의 질문에 노인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군인이 되려는 생각은 없었다. 기사 가문의 장자로 태어나 기사가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자랐거든. 주변의 기대에도, 내 기준에서도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는데, 급속도로 바뀐 왕국은 기사가 아니라 장교를 원하더군. 기사로 자라, 장교의 길을 밟게 되었으니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겠군.”
장교. 마레이는 왜인지 모르게 눈앞의 노인이 평범한 장교는 아니라 생각이 들었다. 기사 가문, 귀족 이런 것을 넘어서 지금 눈앞의 노인은 하나의 거대한 성채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직업을 후회한 적은 없으세요? 희생해야 되는 게 많잖아요. 군인이라는 직업은.”
마레이의 물음에 노인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기사보다는 음악가가 되고 싶었다. 검술에도 재능이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나는 피아노에 더 재주가 있었거든.”
노인의 고백에 마레이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후회하지는 않는다.”
노인의 눈은 주름이 새겨진 세월보다 더욱더 강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꽃은 죽음만이 잠재울 수 있을 터.
“대단하네요. 아니, 존경스럽네요.”
마레이의 대답에 노인은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주름 아래로 잔뜩 굳은살이 박힌 손바닥을 볼 수 있었다. 강인하다. 그런 짧은 생각도 들었다.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손녀가 부르고 있군.”
노인이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마레이에게 보란 듯 부르르 떨리는 시계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노인의 모습에 마레이는 다시금 고개를 숙여 작별 인사를 했다.
“즐거운 시간이었네, 파웬군. 더 지체하면 손녀 아이가 잔소리를 할 게 뻔해서 이만 일어나겠네. 다음에 또 봤으면 좋겠구나. 마레이 드 파웬.”
자리를 떠나는 노인의 모습에 마레이는 자신이 그에게 이름을 말해준 적이 있는가 생각했다. 여전히 테이블 위에는 간식들이 남아있었다. 부유하지 못했던 시절이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기에 마레이는 남은 간식들을 버리고 간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 없었다.
“마레이 늦지 않게 왔네요, 다행이에요.”
집에 도착하자, 라벨라는 평소처럼 깔끔한 정장으로 차려입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깔끔하게 묶은 포니테일에 묘하게 시선이 갔다. 하얀 목덜미가 그대로 보이자, 치솟는 음심에 애써 시선을 돌렸다.
“시간이 조금 빠듯하긴 한데, 입으로 해드릴까요?”
라벨라는 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허공에서 페니스를 쥐는 듯한 손놀림을 보이며 입을 벌려 혀를 쭉 내밀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레이는 벨트를 풀어, 씻지도 않은 페니스를 라벨라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후후, 엄청난 냄새… 엄마가 잔뜩 빨아줄 테니까, 그 뒤에는 깔끔하게 씻어야 되는 거 알죠?”
페니스 끝에 코를 가져다 대어 킁킁- 냄새를 맡는 모습을 보면 지적인 감찰국장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그저 발정 난 암캐의 모습이나 다름이 없었다. 귀두의 중간까지 뒤덮고 있는 껍질을 코끝으로 몇 번 긁는 감각에,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라벨라의 머리를 두 손으로 붙잡는다.
“킁킁.. 낯선 냄새.... 쯔읍…. 처음 보는 맛인데…”
붉은 빛 혀를 잔뜩 내밀어, 얌채처럼 귀두만 조심스레 핥짝이는 라벨라의 모습에 마레이는 허리를 슬그머니 내밀며. 자신의 물건을 모친에게 입안에 직접 머금으라는 듯 강요하고 있었다.
“아앙, 마레이. 엄마가 묻고 있잖아요~? 핥짝. 누구에요~? 쯔읍. 쪽.”
화를 내기는커녕 장난치는 고양이처럼 귀두 주변을 핥고, 빨고, 그리고 입을 맞추며 괴롭히는(?)라벨라의 모습에 마레이는 자연스레 란의 이름을 부른다.
“란님은 뵈었군요. 후후, 그분도 마레이의 ‘암컷’이라.. 이거 재미있게 되었네요.”
“우으.. 엄마.. 이제… 입안에 넣고 싶어...”
“잠시만요. 마레이, 순서가 있잖아요.”
아들의 재촉에도 라벨라는 가볍게 훈육한 뒤에, 손을 둥글게 말아 페니스의 끝을 잡고 천천히 뿌리 끝을 향해 움직인다.
-쯕.. 즈윽.. 쯔윽..
껍질 안에 숨겨져 있던 아직 누렇게까지는 변색되지 않은 정액덩어리들이 실처럼 뒤엉키며 뒤로 밀려나는 껍질을 따라 뒤로 느릿하게 따라 움직인다. 길게 늘어지는 정액덩어리들이 라벨라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투둑- 소리를 내며 끊어지고 페니스 위로 다시 떨어진다.
“제대로 씻을 시간도 없었나 보네요?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게 잔뜩… 후으.. 땀 냄새.. 쯔읍..”
“그, 그렇게 내, 냄새를 맡으면… 부끄러운데...”
마레이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로, 라벨라의 숨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큰소리를 내며 소리를 내는 것도, 혀를 내밀어 남아있는 치구를 빨아내는 것도, 평소보다 진득하고 농밀한 봉사에 천천히 숨을 내쉬며 사정 욕구를 진정시킨다.
-쯔읍.. 쯥… 쯔릅.. 쯕… 쯔읍.. 쯔읍.. 쭙..
입안에 머금고 강하게 빨아내면 끝나는 일이었지만,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씨뿌리기에 열중하는 마레이의 일과 덕분에, 오랜만에 맛보는 치구에 라벨라는 기쁜 듯 콧소리를 내며 귀두 뒤편으로 잔뜩 뭉쳐있는 치구를 소리를 내며 빨아 마시고 있었다.
“냄새나고.. 금빛 털도 있네.. 후후, 정말이지...”
라벨라가 혀를 내밀자, 그곳에는 기다란 금빛 머리카락이 정액덩이리 사이에 엉켜있었다. 아마도 란의 머리카락이라고 생각이 되는 금색의 머리카락을 라벨라는 검지와 중지로 잡아 요령 좋게 정액 덩어리 사이에서 길게 뽑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