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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두 얼굴-2화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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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수라를 드실 때만이라도 정무를 놓으심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환관이 조수라를 앞에 놓고 먹는 둥 마는 둥 서류를 들여다보는 황제에게 조심스레 고하였으나 통할 리가 없다. 대강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 말을 넘긴 황제는 마지막으로 조그마한 육전 조각을 입에 넣고는 젓가락을 놓았다.

"이제 내어가거라."

지밀인 하 상궁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황공하오나 폐하, 수라가 입맛에 맞지 않으시옵니까?"

"아니다. 수라간의 솜씨가 날로 좋아지는구나. 짐은 적당히 먹었으니 어서 내어가거라. 궁인들이 배가 고프지 않겠느냐?"

조용히 읊조리듯 말하는 황제의 목소리에서 어젯밤의 싸늘함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혜국의 태양, 모든 백성들이 우러르는 성군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오나 폐하...."

"황명이다."

안절부절하던 하 상궁은 어쩔 수 없이 얼마 비워지지 않은 수라상을 내어갔다. 근래 들어 입맛이 더욱 떨어지신 듯 하여 수라간에 일러 더욱 신경을 쓰라 하였건만, 물린 수라상으로 끼니를 때우는 궁녀들만 좋은 일 시킨 셈이었다. 더욱 좋은 찬을 올렸으니 일부러 많이 남겨 궁녀들의 배를 채워주려 하신 것이겠지. 내일은 차라리 정갈한 나물만으로 상을 채워볼까, 하 상궁은 잠시 쓸데없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가자."

"예, 폐하."

수라상을 물린 황제는 조금도 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이른 아침부터 그가 향하는 장소는 다름아닌 태후궁. 태후라기에는 너무나 젊고 아리따운 여인이 자리에 앉아 그의 인사를 받았다.

선황제께서 붕어하기 직전 맞아들인 계후, 그러니까 황제와는 하등 관계없는 여인이라 할 수 있으나 황제는 그녀마저 정성으로 모시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 문안을 빼먹는 법이 없었다.

"밤새 평안하셨습니까, 태후마마."

"황상 덕에 늘 평안합니다. 헌데 어찌 갈수록 용안이 수척해지십니까?"

"심려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근래 잠을 깊이 자지 못하여 그렇습니다."

"저런... 마음이 불안하여 그런 것입니다. 허니 이제 그만 덕망 높은 처녀를 간택하여...."

말을 잇던 황태후가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방금까지 그린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황제의 눈에 살기가 스쳐지나간 까닭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 황제는 이내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며 태후의 말을 대신 이어받았다.

"아직은 혜국이 안정되지 않았으니 국혼은 좀 미루고 싶습니다. 소자는 아직 젊으며 별처럼 많은 후궁이 있으니, 개중 수태를 하는 여인이 나올수도 있지 않습니까?"

후궁이야 열이든 스물이든 네 맘대로 들여보내거라. 하나도 남김없이 품어 줄 것이니. 허나 이 나라의 황후까지도 네가 주무르지는 못할 것이다. 황제는 속으로 젊은 태후를 비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면 소자는 이만, 정무가 바빠 물러나겠습니다."

"... 항시 옥체 평안하세요, 황상."

밖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는 연에 올라탄 황제가 잠시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불쾌하다. 들어설 적마다 불쾌하다. 짙은 분내와 향유로 가리려 애썼기에 더욱 역겨운 정사의 냄새. 선황제가 살아있을 적에도 황후궁은 늘 저 냄새로 뒤덮여 있었더랬다. 정작 그 때의 황제는 이미 늙어 후사를 볼 여력 따위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

"또 오랑캐들이 국경을 범했다고? 대체 그곳의 성주는 뭐 하는 자인가?"

황제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그 뜻은 결코 가볍지 않다. 좌우로 늘어선 관리들은 고개를 숙인 채 서로 눈치만 볼 뿐, 그 누구도 앞으로 나서는 이는 없었다.

"병부상서, 그대가 말씀해 보시오. 짐이 보낸 국방비는 죄다 어디로 가고 성벽 하나 방비하지 못하여 오랑캐 따위가 짐의 백성을 털어가는지."

"황공하오나 전하. 워낙에 외진 지역이라 병사의 수 자체가 적어...."

"그렇군. 병사가 문제란 말이지."

황제의 얼굴에 자애롭기 그지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짐의 병사를 내어줄 터이니 그대가 직접 이끌고 국경으로 가시오. 그에 소요되는 예산 또한 넉넉히 줄 것이니 걱정은 말고. 아, 그리고 그대에게 아리따운 여식이 하나 있었지?"

"폐, 폐하...."

병부상서의 수염이 파르르 떨려온다. 지금 황제는 자신의 하나뿐인 여식을 인질로 내어달라 하는 것이었다.

"내 지난달에 후궁 서넛이 병으로 죽질 않았소. 하여 후궁전이 텅 비어 스산하니, 내일이라도 당장 여식을 입궁시켜 주시오. 허면 이제 병부상서가 내 장인이 되는 것인가?"

"제 여식은 불민하여 황제께 내어놓을 만한 아이가 못 되옵니다. 황명을 거두어 주소서."

"황명을 거역하겠다, 이 말이로군."

"그것이 아니오라, 폐하...."

"황명을 어긴 자는 반역의 죄를 물어 삼대를 멸할 수도 있지 않소이까. 꽃 같은 여식이 피어보지도 못하고 그리 되어서야 쓰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으며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병부상서에게는 너무나 긴 시간이었으나 그것은 단지 일각에 불과했을 뿐. 이윽고 그의 주름진 얼굴이 바닥을 향해 숙여졌다.

"황명을 받드옵니다, 폐하."

"역시, 만고의 충신이로고."

황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국경을 침범한 오랑캐에 관한 서류를 치우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신하의 외동딸을 빼앗은 일 따위는 그의 마음속에 아무런 가책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황제의 관심사는 오직 혜국 백성들의 평안과 부국강병, 그리고 그로 인한 황권의 안정 뿐. 그 속에서 대신들이란 그저 소모품이나 밟아도 밟아도 고개를 드는 잡초에 불과했다.

"그러고 보니 빈 자리가 보이는군."

잠시 고개를 든 황제의 눈에 이빨이 빠진 듯 휑한 자리 하나가 들어왔다. 그 옆에 섰던 대신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황공하오나, 폐하. 우승상 대감은 아들의 혼례로 사흘간 휴가를 내었나이다."

"아아, 그랬지. 벌써 그리 되었나. 허면 오늘이 혼례날인가?"

"아니옵니다. 내일 친영(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려옴)이 치뤄진다 하옵니다."

"허면 짐이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예부상서는 격식에 맞게 선물을 준비하여 오늘 중으로 우승상의 집으로 보내어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오전 중에 올라온 안건을 모두 처리한 황제는 잠시 머리를 식히자며 환관을 거느리고 궐내 산책길에 나섰다. 그러나 기실 머리를 식히기보단 혼자 생각하기 위한 시간이라는 표현이 옳았다.

우승상 주 연철. 비록 꼬리를 돌돌 말아 숨을 죽이고 있으나 선황제 시절, 그가 황권을 유린하며 혜국을 손아귀에 쥐고 휘둘렀던 것을 지금의 황제는 똑똑히 기억한다. 그의 여식인 황후. 지금의 그 더러운 황태후를 앞세워서.

"... 그 꼬라지를 내고서, 몰래 장가를 보낸다 이거지."

우승상 집안의 혼례라면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 필시 엉뚱한 사유로 꾸며낸 휴가계를 올린 것이리라. 허나 얼마 전 유배를 간 대신의 자리에 눈치없는 새내기가 올라와 있었다는 사실은 간과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기대하고 있다면야...."

황제의 얼굴에 수려한 미소가 번진다. 계집들이 보았다면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비비 꼬았겠으나, 이십 보 뒤에서 따라오라 한 황제의 명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그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오늘도 어련히 새벽까지 일을 해야 하겠거니. 반쯤 포기한 채 앉아 허공을 바라보던 대신들의 귀에 황제의 옥음 대신 가느다란 환관의 목소리가 꽂혀들었다.

"금일은 야근을 하지 않아도 되니 퇴청하시라는 황제 폐하의 진언이십니다."

"그것이 참이오?"

"예. 폐하의 마음이 바뀌시기 전에 빨리 나가심이 나을 것입니다."

언제 황제의 마음이 바뀔 지 모른다. 환관의 무서운 경고에 대신들은 허겁지겁 책과 서류들을 정리하여 쌓아두고 달려나갔다. 운이 좋았으니, 내일 혼례를 치를 우승상 댁에 고개를 내밀고 선물이라도 좀 바칠 여유가 생긴 것이다.

대승상의 자리가 비어있는 지금 권력의 정점이라면 단연 우승상이 아닌가. 비록 지금은 풋내기 황제의 객기에 고개를 숙이고 있으나, 그의 여식이 다름아닌 황태후였다. 그 뿌리깊은 권력이 어찌 한순간에 무너질까.

각자의 시커먼 속을 숨기고 대신들이 퇴청한 그 시각. 침전에 앉아 책장을 넘기던 황제는 문득 갑갑증을 느끼고 책을 덮었다. 곁을 지키던 환관이 그 책을 받아 정리하며 조심히 여쭈었다.

"월화궁으로 뫼시리까?"

"아니다. 나가서 좀 걷지."

황제의 귀에 환관이 실망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내가 침상에 있는 동안 네가 궁녀들을 멋대로 희롱하는 것을 내 모를 줄 아느냐. 황제는 피식 웃으며 밖으로 나가 발길 닿는 대로 이리저리 거닐었다. 그러다 그 발길이 궁녀들이 머무는 처소 부근까지 닿았을 즈음.

"으...으윽...."

고통에 찬 여인의 신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황제의 귀에 꽂혀들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나 어쩐지 억눌린 듯한 그 소리가 황제의 관심을 잡아끌었다. 손을 들어 고하지 말라 신호를 보낸 그는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걸었다.

"화... 황제폐하!"

그곳에 있는 것은 의자에 묶인 채 신음하는 궁녀와 그녀를 둘러싼 채 각자 몽둥이를 들고 선 상궁들. 그나마 몇 대 맞지는 않은 듯, 묶인 궁녀의 꼴은 아직 사람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급작스레 나타난 황제의 모습에 상궁들은 혼비백산 몽둥이를 숨기고 바닥에 엎드렸다.

"무슨 일이냐?"

"폐, 폐하...."

"빨리 말해보거라."

개중 가장 나이가 든 상궁이 더듬더듬 입을 여는데, 그 말이 진행될수록 묶여있는 궁녀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이 아이는 침방에 있는 궁녀인데, 대식(對食:동성애)을 하였다는 고발이 들어왔사옵니다. 헌데 그 상대가 누군지 절대 입을 열지 않아 내명부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이리 심문을 하던 차이옵니다."

"대식이라...."

황제의 눈이 잠시 묶여있는 궁녀의 몸을 훑었다. 얇은 침의는 이미 물에 흠뻑 젖어 몸에 달라붙어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고, 육감적인 몸에 비해 얼굴은 순수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처녀의 눈빛이었다.

상대가 다칠까봐 입을 열지 않는단 말이지. 참으로 가련한 은애지정이로구나. 황제의 몸 안에서 자신이 가져보지 못한 그 감정에 대한 반발심이 왈칵 일어났다.

"그렇다고 연약한 여인을 이리 때려서야 쓰나. 풀어 주어라. 짐이 데려갈 것이다."

"예, 폐하."

누구의 명이라 토를 달 것인가. 상궁들은 무릎을 펴고 일어나 궁녀의 몸을 묶고 있던 밧줄을 풀었다. 환관이 달려가 쓰러질 듯 비틀대는 궁녀를 부액하여 황제의 앞으로 데려왔다.

"내 침전으로 데려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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