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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두 얼굴-6화 (6/152)

<-- 폐하께서... 해주세요. -->

"우승상, 아들 혼례는 잘 치렀소이까? 짐이 예부에 일러 특별히 선물까지 내렸거늘."

아침에 등청한 우승상의 얼굴이 거멓게 죽어있는 것을 본 현은 일부러 그를 콕 찝어 부르며 싱글싱글 웃었다.

"황공하오나 폐하, 보내주신 선물을 다시 돌려드려야 할 듯 하옵니다."

"아니, 그것이 무슨 소리요?"

고개를 숙이고 선 우승상의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신부를 데리고 오던 혼례 행렬이 산적을 만났다. 그를 대비하여 붙여둔 걸출한 무사들은 힘도 못 써보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산적들은 산더미같이 쌓인 예물 대신 꽃가마를 훔쳐 달아났다. 정확히 말하면 가마 안에 앉아있는 새신부를.

집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으리라, 대외적으로는 산적이 나타나자 놀란 가마꾼들이 우왕좌왕하다 벼랑 아래로 가마를 떨어뜨려 신부가 비명횡사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 소문이 이미 황성 전체에 쫙 퍼지고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이 분명한데 저리 공개적으로 캐묻는 의도가 빤하였다.

"... 혼례 행렬이 산길에서 산적을 만나, 그만 난리통에 신부가 비명횡사하고 말았나이다."

"저런. 참으로 딱하게 되었소이다. 그래, 아들은 어찌 되었소?"

얼굴 전체의 근육을 모두 사용하여 놀람과 걱정을 표현하는 현의 연기는 참으로 놀라웠다.

아들이 어찌 되었긴, 눈앞에서 그리 사모하는 신부를 빼앗기고 지금 폐인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지. 우승상은 평정심이 바닥나는 것을 느끼며 애써 담담하게 대답했다.

"크게 충격을 받긴 하였으나 다행히 다친 곳은 없으니, 의원의 말로는 며칠 쉬면 괜찮을 것이라 하옵니다."

"그나마 다행이로군. 산 사람은 살아야지."

잠시 고개를 들어 용안을 살핀 우승상의 눈에 아주 살짝 올라간 황제의 입꼬리가 보인다.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황태후 가문의 혼례 행렬을 습격한 산적, 귀신처럼 뛰어난 그들의 칼솜씨. 산 채로 납치되었건만 황성을 아무리 뒤져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사라진 신부와 습격자들.

하, 우승상은 저도 모르게 허탈한 한숨을 내뱉았다. 저 젊은 황제가 단단히 작정하고 자신에게 아주 큰 엿을 먹인 것이 아닌가.

"... 망극하옵니다."

"짐이 눈치없게 선물까지 보내서 미안하게 되었소. 오늘 내일 중으로 다시 예부로 보내면 될 것이외다. 그럼 잡담은 그만하고, 사관은 조강을 시작하라."

속으로 바득바득 이를 가는 우승상의 속내와는 상관없이 오늘 처리해야 할 안건들이 급한 순서대로 올려지고 다시 내려갔다. 그 동안 현은 눈에 띄게 구겨진 우승상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짐짓 기분이 좋은 체 농담까지 던져가며 여유롭게 정무를 처리하였다.

그림자를 시켜 조사한 바로는 화연에게 푹 빠진 우승상네 막내아들이 단식을 하고 드러누워 성사시킨 혼례라 하였으니, 지금쯤 눈앞에서 신부를 홀랑 빼앗기고 반쯤 폐인이 되었으리라.

그런 유쾌한 생각이 문득 화연과 그 곁에 서서 연모의 눈길로 바라보는 젊은 도령의 모습을 그려내자 어찌 된 일인지 문득 유쾌함이 눈 녹듯 사라지고 기분이 곤두박질쳤다.

"폐하."

늙은 환관의 목소리가 다른 곳으로 날아간 현의 정신을 다시 잡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아, 어디까지 얘기했지?"

"황혜강에 여름마다 강물이 범람하니, 이번 추수가 끝나고 나면 남는 인력을 차용하여 겨우내 강둑을 쌓자 하시었습니다. 하온데 폐하, 혹 옥체 미령하심이 아니옵니까?"

"괜찮소. 잠시 딴 생각을 하였군."

"안색도 좋지 않으십니다. 황공하오나 오늘은 이만 조강을 파하고 휴식을 취하심이 어떠실런지요."

"소신의 생각도 같사옵니다."

"소신 또한 그리 하심이 옳다 보옵니다."

"폐하의 옥체가 곧 이 혜국의 안위이옵니다."

여기저기서 기회를 놓치지 않은 대신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그의 휴식을 외친다. 그러나 그를 쉽게 들어줄 현이 아니었다.

잠시 그들을 둘러보던 현은 그만 일어나려는 듯 손에 든 두루마리를 다시 감아 옆에 내려놓았다.

"경들이 그리 짐을 걱정해 주니 어쩔 수 없군. 오늘 조강은 이만 파하도록 하오."

대신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의 빛이 번져간다.

"허나, 오전 중 처리하지 못한 일들은 미루지 말고 오후까지 처리해야 할 것이며 석강때까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내 집무실에서 보게 될 것이오. 허면 이만."

여유롭게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가는 황제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넓은 대전에는 푸스스,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들이 가득 찼다.

애송이로만 알고 황위에 앉혔더니 발톱을 숨긴 새끼 호랑이가 아니었는가. 역모라도 꾸며 끌어내리고 싶은 마음 굴뚝같으나 그것도 모두 시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수면시간조차 채우지 못하는 판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산더미같은 일을 되도록 빨리 처리하고 조금이라도 더 눈을 붙이는 것 뿐이었다.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소. 내일 모두 등청을 거부하는 것이 어떻소?"

"나 또한 이렇게는 못살겠소이다."

"그것이 잘도 먹히겠소. 삼년 전에 등청을 거부한 자들이 황실 능멸죄로 줄줄이 목이 걸린 것을 잊었소이까?"

"자자, 흰소리 그만들 하시고 빨리빨리 가십시다. 지금 가서 조금이라도 쉬어야 또 일을 할 것이 아니겠소."

대신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보태며 우르르 문밖으로 나가자 그를 지켜보고 있던 우승상이 못마땅하게 쯧, 혀를 찼다. 마치 잘 길들여진 소인 듯 황제가 원하는 대로 굴러가고 있지 않은가.

허나 십년 전으로 되돌아가 어린 황자의 손에서 옥새를 다시 빼앗아 올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 생각하는 그 또한 퇴청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임은 마찬가지. 우승상은 이내 문턱을 넘어 이미 앞서나간 대신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

"왜, 왜, 왜 이러십니까, 폐하...."

겁에 질려 평소보다 두 배로 커진 화연의 눈동자에 황제의 모습이 비추어 흔들린다.

"금방 끝난다."

"폐하, 폐하...."

화연은 현이 다가올 적마다 조금씩 뒤로 물러가며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황제가 대낮에 월화궁을 찾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들었다. 헌데 그는 침전으로 드는 대신 뜬금없이 자신의 방으로 찾아와  소매 안에서 시퍼렇게 날선 단도를 꺼내들지 않는가.

후궁 셋이 죽었다 했으니 이제 네 명째인가? 아니, 아직 후궁이 되기는커녕 황은도 입지 못했으니 그저 개죽음에 해당될 것이었다.

"저는... 소녀는 아직 죽고 싶지 않은데...."

눈물을 글썽거리며 최대한 불쌍한 목소리로 애걸해 보았으나 얼음을 품은 듯 서늘한 그의 얼굴에는 아주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아, 이대로 죽는구나. 이럴 줄 알았다면 아까 점심이라도 많이 먹을 것을. 그렇게 포기한 화연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황제의 발치를 보았다. 창살 사이로 스며든 하얀 햇빛이 바닥에 아름다운 무늬를 그리고, 황제의 발은 그것을 천천히 즈려밟으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

이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보는 광경인가. 나쁘지 않은 생이었다 생각하며 화연은 천천히 눈을 감고 목을 빳빳하게 세워 자신에게 닿을 날카로운 칼날을 기다렸다.

-스윽.

드디어 바로 앞에 멈춰선 칼날이 무언가를 베었다. 허나 화연의 목은 아니었다. 천천히 눈을 뜬 화연의 눈에 뭐 하는 것이냐 묻는 듯 인상을 찌푸린 현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진 자신의 머리카락 한 줌. 그 머리카락과 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화연이 이윽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것은... 제 목 대신인가요?"

현은 대답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월화궁을 빠져나왔다. 앞에 놓인 연을 타고 집무실로 들어설 때까지 머리카락은 그대로 손에 쥔 채였다. 텅 빈 집무실에 앉은 그는 종이를 꺼내어 무어라 휘갈겨 적고 먹이 마르기를 기다려 머리카락을 그 종이에 곱게 쌌다.

마른 하늘의 날벼락같은 여식의 부고에 식음 전폐하고 드러누웠을 서 이흥이 아니겠는가. 적당한 구실로 대승상 자리에 올려 수족으로 부려먹기도 전에 죽어버리면 큰일이었다.

"흑운."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열두 폭 병풍 뒤에서 그 이름처럼 온통 검은 옷에 복면까지 쓴 사내가 걸어나와 현의 앞에 부복했다.

"이것을 서 이흥에게. 반드시 본인에게 직접. 내용물은 가지도록 하고 서찰은 태우는 것을 확인하고 오너라."

"존명."

흑운이 다시 병풍 뒤로 사라지자 현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도 한 사람의 인간일진데 어찌 피곤하지 않겠는가.

열두 살에 형제들을 모두 제치고 황위를 차지한 지 십 년, 그간 현은 그 누구보다 많은 일을 해내면서도 단 한 번도 깊이 잠든 적이 없었다. 그가 잠에 빠져드는 순간 짓쳐들어올 적의 칼날이 현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게 잠시 감은 현의 눈 앞에 정신 사납게도 그 맹랑한 계집이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지금 등장한 계집은 눈을 감은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죽음의 칼날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 칼끝이 얼굴 바로 앞에 도달하는 순간, 천천히 눈을 뜬 계집이 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를 범해주세요."

"으헉!"

화들짝 놀란 현이 뒤로 기대었던 몸을 바로했다. 아주 잠시 깜빡 존 것 같은데, 창으로 비쳐드는 햇빛의 방향이 다르다.

"꿈을 꾸셨사옵니까, 폐하?"

"어찌 짐을 깨우지 않았더냐!"

"송구하옵니다. 간만에 깊이 잠이 드셔서 그만...."

어찌 되었든 아주 간만에 달게 잔 덕에 몸도 가뿐해졌고, 그것이 환관의 잘못은 아니었기에 현은 작게 숨을 뱉으며 식은땀이 흐른 이마를 닦았다.

"석강 시간은?"

"지금 가시면 되옵니다."

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문득 아랫배가 뻐근함을 깨닫고 슬쩍 시선을 아래로 향하다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어지간해서는 절대 자제력을 잃지 않는 그의 남근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빳빳하게 서서 옷 위에까지 그 존재감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오늘 석강은 취소한다. 정4품이하 퇴청, 그 위로 일거리 가지고 여기로 오라 일러라."

천자는 무치라 하였다. 허나 이러고 대신들 앞에 당당하게 나아갈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고 지나가는 아무 궁녀나 잡아오기도 뭣하니 현은 그저 자리에 앉아 이것이 스스로 가라앉기만을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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