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환관. -->
입이 막혔으니 말은 하지 못하고, 읍읍대며 그의 어깨를 애타게 두드렸으나 입맞춤은 멈추기는커녕 더욱 깊게 그녀에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아까 풀다 만 매듭을 거칠게 당겨 푸는 현의 귀에 아주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꼬르륵.
거짓말처럼 손이 멈추고 입술이 떨어졌다.
"배가 고픈 것이냐?"
"... 네."
며칠간 월화궁에서 입맛에 맞지도 않는 식사로 억지로 끼니를 때우던 차에 휘황찬란한 수라상의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하니, 어찌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인가.
화연은 그것이 들어오던 순간부터 통째로 구워진 꿩의 자태가 눈앞에 아른거려 현의 입술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하아."
"저, 밥 먹고 마저 하면 안될까요?"
"먹어라."
애타게 기다리던 말이 떨어지자마자 화연은 그의 품을 벗어나 침상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시장기를 느끼며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들어 늘 하던 대로 천천히 음식을 음미하던 현이 식사를 하다 말고 멈칫했다. 넉넉하게 차려진 음식이 무서운 속도로 화연의 입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었다.
현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수저를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이러다 수라상이 텅 비어 버릴 것만 같다. 그의 인생에서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 식탐이었다.
"폐하, 너무 맛있습니다!"
한참을 정신없이 음식을 집어먹던 화연이 켁켁거리며 찬사를 터뜨리자 현이 문득 정신을 차렸다. 세상에, 그 많던 음식이 삼분지 일도 채 남지 않았다. 군데군데 비어 휑하기까지 한 수라상에 아까 올라왔던 꿩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너는... 그 조그만 몸 어디에 그리 음식이 들어가느냐?"
"예에?"
화연은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리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황제 또한 자신에게 뒤지지 않는 속도로 음식을 먹지 않았나. 마치 이 수라상을 화연 혼자 다 비운 것마냥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는 눈길이 심히 불쾌하다.
"이중 절반 이상이 폐하께서 드신 것이 아닙니까? 어찌 저더러 그리 음식이 들어가냐 하세요?"
"내가 먹었다고?"
이리 정신없이 음식을 먹어 본 것이 언제인지. 현은 그제서야 자신이 평소의 곱절, 그 이상을 먹어치웠다는 사실을 깨닫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늘상 수라상을 남기는 연유는 사실 아랫것들의 배를 채워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무엇을 올려도 맛이 느껴지지 않아 먹는 둥 마는 둥 하였던 것 뿐.
화연이 위험한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깊이 잠재우고 시해하거나, 복상사를 시키거나, 정신없이 음식을 먹는 사이 몰래 독을 넣을 수도 있는 여인.
마음 한켠에서 그리 죽어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속삭이는 소리를, 현은 못 들은 체 애써 무시하며 바깥을 향해 수라상을 내어가라 명했다.
***
평소보다 늦은 황제의 등장에 대전이 술렁인다. 늘 그림자처럼 옆에 붙어있던 환관장 대신, 왠 후덕한 환관 하나와 소환인지 정식 환관인지도 헷갈리는 곱상한 환관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 또한 어지러운 분위기에 한몫 하는 것이리라. 현은 그 분위기를 모른 체 평온한 어조로 조강을 시작했다.
"이부상서."
"예, 폐하."
"간밤에 인사이동이 있었다. 전임 환관장은 폐하고, 조 필두를 신임 환관장으로 기록하여 새로운 명패를 발급하라."
"황공하오나 전하, 허면 전임 환관장은...."
"죽었다."
한 차례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듯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 머릿속이 얼마나 바쁘게 돌아가는지 짐작이 가는 바이니, 현은 그린 듯 수려한 미소 아래 삐뚤어진 마음을 감추고 늙은 얼굴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다음 안건은?"
"지난번 들이라 명하신 병부상서의 여식이 내일 입궁할 예정이옵니다. 절차를 어찌 밟으리오까?"
"...아아."
잘 생긴 눈썹 사이에 몇 가닥의 주름이 잡히다가 이내 지워졌다. 가서 딴짓할 생각말고 일이나 잘 하라는 의미에서 여식을 들이라 명했던 자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평소 같았다면 아무런 생각도 없었을 사소한 일일진데 왜 이리 눈꼬리에 아른대는 초록빛 환관복이 걸리는지 모르겠다.
"그는 내명부의 일이니, 조강을 파한 연후 이부상서가 태후궁에 들어 절차를 논의하도록 하라. 다음."
자신이 직접 입궁하라 명해놓고 태후궁에 일을 미루는 것이 비겁하다 느껴졌으나, 뭐 어쩌겠는가. 이리하라 저리하라 말하는 대신 이 껄끄러운 안건을 빨리빨리 넘기고픈 마음뿐이니.
"남서 지역에 역병이 발견되었습니다. 아직은 그 규모가 작으나 그곳은 타국에서 들고 나는 상인들의 길목이라, 잘못한다면 그 여파가 황성까지 미칠 것이니 빠른 조치가 필요하다 보옵니다."
"역병?"
황제의 미간이 아까보다 조금 더 눈에 띄게 구겨졌다.
"그것을 가장 먼저 안건으로 올렸어야지! 고작 후궁의 입궁 따위를 맨 앞에 보고한다는 것이 말이 된다 보는가!"
벼락같은 호통에 대신들의 허리가 일제히 숙여지며 황공하옵니다, 폐하를 외친다. 기왕지사 앞으로 나선 김에 자신에게 주어진 안건들을 해결할 생각으로 후궁의 안건을 올렸던 이부상서는 사방에서 꽂혀드는 따끔거리는 눈초리를 피하고자 가장 깊게 허리를 숙였다.
"호부상서 들으라. 예산을 넉넉하게 편성하여 태의에게 보내고, 직접 인재들을 뽑아 남서로 내려가라 일러라. 약재는 모두 상급을 넘치도록 써야 할 것이며 인재 또한 그러하다. 만일 예산이 모자랄 경우는 황제궁에 배정된 예산 중 일부를 가져다 써도 좋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침상에서와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현의 모습에 화연의 입이 절로 벌어진다. 모든 안건들을 사리에 맞게 처리함은 물론, 나이가 곱절은 되어보이는 수많은 대신들을 손아귀에 쥔 듯 쥐락벼락하니 과연 혜국의 태양, 성군 중의 성군이라 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것이다.
비록 아직 황은도 입지 못한 신세이나 이미 그를 지아비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몸. 화연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에 조그만 미소를 매달다가 옆에서 슬쩍 눈짓하는 필두 덕에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폐하."
"특별한 일이 없으면 부르지 말거라."
길고 긴 조강을 마치고 다시 낮것상을 전투적으로 비운 화연이 슬쩍 현을 불렀으나 그는 냉정하게 말을 끊어내고는 서책을 펼쳤다. 그러나 성의없이 넘어가던 책장도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추고, 기어코 궁금증이 자제력을 이겼다. 보지만 않으면 될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현은 서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화연을 불렀다.
"왜 불렀느냐?"
"......."
"서 환관."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서 환관을 한번 더 불렀으나 화연은 대답이 없고, 대신 환관 특유의 가느다란 목소리를 그대로 지닌 필두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잠이 드셨습니다."
"뭐?"
돌아본 곳에 병든 닭마냥 선 채로 벽에 기대어 꾸벅꾸벅 조는 건방진 조그만 환관이 보인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데 용케도 넘어지지 않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안쓰럽기도 해서 현은 큭,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 하오리까?"
현은 필두의 물음에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잠든 화연을 번쩍 안아 침상에 뉘었다. 몸이 들어올려지자 화연은 잠시 눈을 뜨는가 하였더니 중얼중얼 알 수 없는 말 끝에 폐하아... 를 덧붙이고는 모로 누워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도 곤하구나. 잠시 오침 들겠으니 나가 있거라."
"예, 폐하."
필두가 문을 닫고 사라지자 현은 화연의 옆에 누워 가만히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화연이 잠든 용안을 빤히 들여다보았던 것과 똑같았으나 그 사실을 아는 이는 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황제를 지켜보는 흑운뿐.
잠시 그렇게 화연을 들여다보던 현은 그녀와 멀리 떨어진 곳에 드러누워 다시 천장에 새겨진 용의 비늘을 세었다. 이러다 저 비늘의 갯수를 모조리 외워버릴 판이었다.
"아응...."
더운 듯, 무거운 이불을 차낸 화연이 다시 돌아누웠다. 그 바람에 겉옷의 매듭이 풀어지며 그 속에 입은 하얀 속의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현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요망한 것. 어디까지 세었더라. 비늘이 하나, 비늘이 둘, 비늘이 셋... 열 다섯 개째의 비늘을 세었을 때, 현은 이미 그 요망한 것의 입술을 입안 가득 베어물고 있었다.
"하아... 폐하?"
========== 작품 후기 ==========
유연 시작이라 연속5편 땡겨보았습니다. 열두시 정각에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