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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넣겠다. 조금 아플 것이다."
현이 화연의 목을 부드럽게 끌어안고 속삭였다. 도대체 얼마나 아프길래 이러는 것일까. 화연은 이미 뜨겁게 흐려진 정신 속에서도 두려움을 가득 머금고 단단하게 근육이 불거진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보주가 옥문 속으로 머리를 밀어넣으려는 순간.
"안 됩니다! 마마! 마마!"
"이거 놓아라! 내 몸에 손대는 것들은 죄다 모가지를 뽑아 황궁 앞에 걸어놓을 것이야!"
앙칼진 여인의 고함과 필사적으로 말리는 상궁들의 목소리가 한데 뒤섞인 소란 속에서 문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감히 침전을 범하려는 여인을 막기 위한 필두의 뒷모습이리라.
짝, 짝, 절대 물러나지 않는 환관장의 뺨을 내려치는 소리가 몇 번이나 반복되자 붉게 열이 올랐던 화연의 얼굴도 시시각각 하얗게 질려갔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현은 일단 화연의 몸을 이불로 감싸 자신의 뒤에 숨기고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폐, 폐하. 태후마마께서...!"
"황상, 황상! 어찌 이 어미를 이리 괄시하실 수가 있습니까!"
서슬퍼런 태후의 목소리는 차라리 비명과도 가깝다. 그것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고막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기분. 현은 더 참지 못하고 옷도 입지 않은 채로 버럭 고함을 질렀다.
"문을 열어라!"
딱 버티고 선 채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던 필두가 옆으로 물러남과 동시에 침전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침상에 버티고 앉은 황제의 모습에 모든 궁인들은 이마를 바닥에 대고 엎드렸으나, 태후의 눈길은 수그러들기는커녕 더욱 노골적으로 현을 노려보았다.
"황상, 이 어미와 의논 한마디 없이 후궁을 들이라 하셨다구요!"
"그것이 어쨌단 말입니까? 보시다시피 분주하니 물러가시지요."
늘 표면적으로나마 자신에게 부드럽던 황제의 태도가 급변했다. 태후는 순간적으로 당황했으나 이내 그의 뒤편으로 빼꼼하게 나온 새하얀 발에 분노를 집중하며 침상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
"그만. 더 이상 가까이 오심을 윤허하지 않습니다."
"그 뒤에 숨긴 그 계집 때문에 어미를 이리 박대하시는 겝니까? 내 황상의 옥안을 흐린 저 년을 당장 끌어내어 도륙을...!"
"흑운."
태후의 목 아래 서늘한 것이 닿았다. 태후에 대한 예우로 칼날이 아닌 검집을 들이댄 흑운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태후가 큰 충격에 빠지기에는 충분한 듯 보였다. 당장 바락바락 악을 쓰던 태후의 독설이 뚝 멎었으니.
"뭐 하고 섰느냐. 마마를 태후궁으로 뫼시어라."
"예, 폐하."
힘이 센 환관들이 딱딱하게 굳은 태후를 양옆에서 잡아끌고 침전을 나갔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태후는 의미없이 황상을 부르짖었으나 그 목소리도 곧 기나긴 복도 끝으로 멀어지고, 현은 조그맣게 앓는 소리와 함께 이마를 짚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랗게 떠진 화연의 눈동자에서 조금 전 그녀를 지배한 쾌락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놀랐느냐?"
"...예, 많이."
"하아."
화연을 취하기 직전 태후가 들이닥친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황궁은 이런 곳이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화연을 후궁으로 앉힌다면 한 달을 못 가 어떻게든 목숨을 잃고 말리라. 현은 한 팔로 화연을 끌어당겨 품에 보듬고는 나지막히 지밀을 불렀다.
"전 상궁. 밖에 있느냐?"
"예, 폐하."
"내 목욕간에 목욕물을 준비해라. 이 아이가 씻는 동안 네가 직접 시중을 들고 그 누구도 들이지 마라. 흑운, 따라가서 지켜라."
궁녀들이 분주하게 목욕물을 데우는 동안 전 상궁은 고개를 돌린 채 하얀 비단천으로 화연의 몸을 감쌌다. 비록 첩지는 없으나 황제의 침전에 들어 황은을 입은 여인인 까닭에 그 손길은 누구보다 조심스러웠다.
누에고치처럼 감싸인 화연이 필두의 등에 업혀 침전을 나갈 때까지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현은 혼자 남게 되자 긴 한숨을 몰아쉬며 침상에 드러누웠다.
***
"저, 상궁마마님."
"예, 아씨."
"말씀을 낮추시면 안 되는 건가요?"
"예. 아니 됩니다."
행동, 말투 하나하나 무척이나 기품있는데다 나이 또한 어머니뻘인 전 상궁이 꼬박꼬박 공대를 하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라 물은 것인데, 대답은 공손하면서도 단호하기 그지없다. 화연은 전 상궁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녀를 등지고 문 앞에 서 있는 흑운의 등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흑운님... 이신가요?"
"예."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흑복의 사내는 화연이 몸을 감싼 비단천을 풀고 나신이 되어 목욕통에 들어간 후에도 문 앞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 존재가 너무나 신경쓰이는 화연은 결국 그에게 말을 건넬 수 밖에 없었다.
"계속 이 안에 계시는 건가요?"
"예."
"그...럼 돌아보지만 말아주세요."
"예. 무슨 일이 없는 한."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흑운의 낮은 목소리는 듣는 이에게 묘한 신뢰감을 준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 화연은 마지막에 덧붙인 무슨 일이 없는 한, 이 조금 신경쓰이긴 하였으나 돌아보지 않겠다는 대답에 마음을 놓고는 동동 떠다니는 꽃잎을 가지고 찰박찰박 물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목을 뒤로 젖히고 눈을 감으십시오, 아씨."
전 상궁은 삼단처럼 윤기가 흐르고 풍성한 화연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감기며 그녀를 자세히 살폈다.
당연하다는 듯 시중을 받는 태도에, 말투가 천방지축이긴 하였으나 못 배워먹은 티는 나지 않고, 백옥마냥 희고 부드러운 살결과 고생이라곤 모르고 자란 고운 손까지. 필경 어딘가 귀족 가문의 귀한 아씨임이 분명할진데 어찌 환관의 복장을 하고 황제의 침전을 드나드는 것인가?
온갖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전 상궁이 애기나인으로 입궁하여 지밀상궁까지 오르기까지 가장 많은 공을 세운 것은 바로 이 무거운 입이라 하겠다. 전 상궁은 무엇도 묻지 않고 그저 머리를 감긴 창포물을 옆으로 옮겨놓기 위해 들통을 번쩍 들어올렸다.
"아악!"
"마마님!"
늘 환관들이 들어올리는 무거운 들통이었으나 황제로부터 홀로 시중을 들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에 오늘은 그녀가 직접 옮길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꽤나 무거웠고, 물이 튄 바닥은 미끄럽다. 휘청대며 넘어지려는 전 상궁을 본 화연이 벌떡 일어나 붙잡은 덕에 큰 부상은 면할 수 있었으나.
"꺄악!"
이번에는 화연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꼭 감았다. 비명소리에 반사적으로 달려온 흑운이, 전 상궁을 넘어지지 않게 붙드느라 함께 휘청거리는 화연의 허리를 감싸 지탱한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으니까, 이것 좀...."
전 상궁과 화연이 몸을 바로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흑운은 손을 풀고 다시 자신이 서 있던 문 앞으로 돌아갔다. 화연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목욕통 안에 빠져죽을 듯한 기세로 몸을 파묻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흑운이 늘 어둠 속에서 화연과 황제가 하는 일들을 낱낱이 보아온 것을 그녀는 알 리가 없으므로.
"저, 흑운님?"
"예."
그를 불러놓고도 머리를 물에 넣고 숨을 참았다 다시 빼기를 반복하며 머뭇거리던 화연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보셨나요...?"
보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리 말해야 할 것이나 흑운은 그저 특유의 낮고 울리는 목소리로 화연이 원하는 대답을 내어놓았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거짓말."
"등밖에 못 보았습니다."
분명 거짓인 것 같은데, 믿고 싶은 것인지 믿게 되는 것인지. 화연은 그의 대답에 약간 마음을 놓으며 손바닥 가득히 물을 떠 얼굴에 끼얹었다.
"마마님께선 괜찮으세요?"
"덕분에 괜찮습니다. 놀라게 해 드려 송구합니다."
"아니에요. 저 때문에 다칠 뻔 하신걸요."
티끌 하나 없는 것은 이 여인의 살결만이 아닌 듯 하였다. 전 상궁은 아직도 가늘게 떨리고 있는 조그마한 어깨를 새하얀 수건으로 닦아내리며 부디 천지간 가엾으리만치 외로운 황제께서 이 작은 아씨로 인해 평안을 찾으시길 속으로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