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두 얼굴-16화 (16/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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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면경 앞에 앉아 머리를 빗어내리는 궁녀의 손길에 몸을 내맡기고 있던 민 첩여가 별안간 앙칼지게 소리를 지르자 근처에 있던 궁녀들이 모두 납작 엎드렸다.

"너 이년! 무슨 짓이야!"

"주, 죽여주시옵소서!"

민 첩여의 머리를 빗기다 실수로 한 가닥을 잡아당긴 궁녀가 덜덜 떨리는 손을 모아 싹싹 빌었으나 민 첩여는 가차없이 날카로운 뒤꽂이를 집어들어 그 모은 손 위에 꽂아버렸다.

"아악!"

거죽이 꿰뚫리는 통증과 함께 솟아오른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자 궁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민 첩여는 분이 풀리지 않는 듯 화려한 가락지를 잔뜩 낀 손을 들어올려 그 얼굴을 몇 번이나 힘껏 내리쳤다.

여린 뺨과 가락지가 부딪혀 쓸리며 생채기에서 솟은 피가 얼굴에 범벅이 될 즈음에야 매질이 멈추고, 다른 궁녀들이 양 옆에서 그녀를 부축해 데리고 나갔다.

"쓸모없는 년들."

다시 면경 앞에 앉은 민 첩여가 이를 바득 갈았다. 요 며칠 그녀의 기분은 바닥을 기고 있었다. 양물도 없는 주제에 욕정은 넘치던 전임 환관장. 재물을 건네고 젖가슴 몇 번 물려주면 못 이기는 척 월화궁에 민 첩여를 밀어넣어주던 그 늙은이가 별안간 사라지고 그 자리를 듣도보도 못한 소 같은 환관이 차지한 것이다.

아무리 달콤한 말로 꼬여내도, 서찰에 패물을 싸서 보내도 그는 민 첩여를 월화궁에 들여주기는커녕 한번 찾아오거나 답을 주지도 않았다. 서찰에 싸서 보낸 패물이 펼쳐본 흔적도 없이 돌아오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깟 환관놈 하나 눈앞에 대령해 오지 못하는 것들이 무슨 낯짝으로 죄다 모여 있는게야! 꼴보기 싫으니 죄다 나가라!"

분을 이기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집어던지는 민 첩여의 패악에 엎드린 궁녀들은 행여 또 불똥이 튈까 재빠르게 밖으로 사라졌다. 용케 방 안에 남아있던 측근인 배 상궁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허리를 숙여 민 첩여에게 다가갔다.

"저, 마마."

"네년은 또 뭐야. 당장 꺼지지 못해?"

민 첩여가 집어던진 연지통이 배 상궁의 귓가를 스치고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산산조각 난 연지통에서 붉은 연지가 피처럼 흘러내린다. 일반 백성들이 두어 달은 먹고 살 정도로 값비싼 물건이었으나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고정하시고 소인의 말을 들어보시옵소서. 신임 환관장 이외에 폐하께서 달고 다니시는 환관이 하나 더 있다 하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소곤소곤, 숙덕숙덕. 배 상궁이 말을 이어갈수록 민 첩여의 얼굴에 잔뜩 잡혔던 주름이 조금씩 펴진다. 조그마한 환관놈이 늘 황제의 그림자에 숨어 다니는데, 그 총애가 여간 깊지 않아 어찌 보면 환관장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소문.

입 무거운 침전의 상궁들 덕에 그가 황제의 수라상과 침상까지 차지한다는 사실까지는 누구도 알지 못하였으나 정무를 볼 적에도, 후원을 거닐 적에도 늘 곁을 떠나지 않는 작은 환관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 자를 구워삶는다면 다시 황제께 나가실 수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허나 폐하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며. 어느 틈에 구워삶는단 말인가?"

"아이 참, 마마도. 그 환관놈 또한 사람일진데 뒷간은 가겠지요."

"옳커니."

피를 머금은 듯 붉디붉은 민 첩여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자고로 마음정보다는 몸정이 무서운 법, 계속해서 살을 섞다보면 황제께서도 그 유별난 속집맛을 잊지 못하여 스스로 찾아주시지 않겠는가.

민 대감이 혜국 방방곡곡에서 골라 뽑은 아리따운 처녀들 가운데 그녀를 양녀로 삼아 후궁으로 들여보낸 것은 이 속집 때문이었다. 발가벗은 처녀들의 옥문에 차례로 손가락을 찔러보던 뚜쟁이가 민 첩여의 차례에 화들짝 놀라며 이리 여물고 쫄깃한 속집은 처음 본다, 필시 한번 맛을 본 사내는 다시 찾지 않고는 버틸 재간이 없으리라 하였던 것이다.

"네가 직접 가거라. 반드시 답을 얻어와야 할 것이다."

***

화연의 하루는 단순했다. 침상 옆에 있는 쪽방에서 자고 일어나면 전 상궁이 가져다 주는 소셋물에 얼굴을 씻은 다음 현과 나란히 밥을 먹고, 현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또 밥을 먹고의 반복이었다.

게다가 궁중 용어를 완벽히 익히지 못했다는 이유로 전 상궁과 필두를 제외한 누구와도 말을 섞어서는 안 되었다. 게다가 지난번 태후가 침전에 난입한 뒤로는 현마저 그녀에게 말을 걸지도, 대답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화연은 심심해 미칠 지경이었다.

"폐하. 잠시 실례 좀...."

허리를 숙이며 살그머니 다가온 화연이 귓가에 속삭이자 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연이 현의 곁을 떠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바로 뒷간에 갈 때와 목욕을 할 때 뿐.

수많은 궁인들의 눈초리에서 벗어난 화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환관들이 쓰는 뒷간으로 최대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바로 몇 걸음 뒤에서 화연을 지키라 명 받은 흑운 또한 따라갔다.

"오늘 날씨 진짜 좋다. 그죠?"

"......."

"흑운님은 어찌 그리 한 마디도 안하고 사세요? 저는 입이 붙어 버릴 것 같은데."

"......."

"너무 가까이 오시면 안 돼요."

"......."

"귀 막고 계셔야 해요. 알겠죠?'

"예."

환관들이 쓰는 뒷간은 무척이나 구석진 곳에 있는데다 지금 화연이 향하는 곳은 그 중에서도 환관장만이 쓰는 전용 뒷간이니, 이 오솔길에서만은 입을 열어도 괜찮았다. 그래서 대답이라고는 예, 아니오뿐인 대화 상대라도 화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나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들을 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몇 마디 끝에 겨우 예, 한번을 대답한 흑운이 별안간 팔을 뻗어 화연의 입을 막았다.

"가만히 계십시오."

예, 아니오, 존명. 이 세 마디를 제외하고는 여간해선 다른 말을 하지 않는 흑운이 먼저 말을 걸었다. 화연이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흑운은 그녀를 끌어당겨 나무 뒤편에 숨기고는 천천히 인기척을 향해 다가갔다.

"뭡니까."

풀숲에 몸을 숨긴 채 환관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배 상궁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무복과 옆구리에 찬 검은 칼. 황궁에서 저러한 복장으로 다니는 이들은 황제의 호위들밖에 없었다.

환관의 뒷간에 황제의 호위라니. 빙글빙글 돌아가던 배 상궁의 머리가 턱 밑에 들이대어진 날카로운 단도로 인해 그 자리에 멈추었다.

"어디 소속입니까."

"그, 그것이...."

"말하지 않으면 수상한 자로 간주하고 금부로 모시겠습니다."

배 상궁의 등골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사내의 눈빛은 금부로 데려가겠다는 무시무시한 말이 한낱 겁박이나 허언이 아님을 여실히 드러내보이고 있었다.

"미, 민 첩여 마마를 모시고 있습니다."

"헌데 여긴 무슨 일입니까."

"그만 길을 잃어서...."

흑운의 단도가 거두어져 다시 품으로 들어갔다. 물론 그 말은 믿은 것은 아니다. 상궁씩이나 되는 자가 황궁 내에서 길을 잃는다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허나 딱히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으니 그저 둔 것이었다.

"돌아가십시오."

"예, 예."

다시 오솔길을 따라 돌아가는 배 상궁의 눈에 나무에 붙어 선 조그만 환관이 보였다. 황제의 곁에 매미처럼 붙어다닌다는 소문의 그 환관.

그렇다면 저기 있는 황제의 호위는 필시 이자를 지키기 위해 온 것일진데, 한낱 환관 따위에게 호위라니. 말이 되지 않는다. 배 상궁은 온갖 의문을 품은 채 이 사실을 그의 주인에게 고하려 급히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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