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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두 얼굴-17화 (17/152)

<-- 네 아랫입이 심히 욕심이 과하니. -->

다시 오솔길을 따라 돌아가는 배 상궁의 눈에 나무에 붙어 선 조그만 환관이 보였다. 황제의 곁에 매미처럼 붙어다닌다는 소문의 그 환관. 그렇다면 저기 있는 황제의 호위는 필시 이자를 지키기 위해 온 것일진데, 한낱 환관 따위에게 호위라니. 말이 되지 않는다. 배 상궁은 온갖 의문을 품은 채 이 사실을 그의 주인에게 고하려 급히 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쓰십시오."

"아, 네. 고마워요."

뒷간으로 들어간 화연이 다시 문을 열고 고개를 쏙 내밀었다. 흑운이 그녀가 말한대로 멀리 떨어져 귀를 막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하루에 너덧 번은 뒷간에 오면서 그때마다 저리 확인하는 화연의 행동에 흑운은 저도 모르게 피식 입꼬리를 올리다 급히 제자리에 돌려놓고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런 흑운과 눈이 마주친 화연은 민망한 듯 한번 씩 웃고는 다시 뒷간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볼일을 보았다.

"가요."

화연은 누가 보아도 그 기분을 알 수 있는 표정을 지녔다. 예를 들어 볼일을 보아 상쾌하다던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이 향하는 다음 장소는 우물가. 여인들이 볼일을 본 뒤에 손을 씻는다는 사실을 몰랐던 흑운은 처음에 화연이 난데없이 우물을 찾기에 근처를 죄다 뒤지며 가장 가까운 우물을 찾아내야 했었더랬다.

"읏차."

우물 속으로 두레박을 던져넣고 다시 길어올리려는 화연의 몸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제가 할께요."

화연이 줄을 놓지 않고 고집을 부렸으나 흑운이 그 가느다란 손에서 두레박을 뺏아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위험합니다."

"물 긷는게 뭘요. 항아님들도 다 하는 것인데."

대답 대신 길어올려진 맑은 물이 두레박 속에서 찰랑대었다. 흑운이 그것을 살짝 기울이자 화연은 졸졸 흐르는 물에 손을 씻고는 다시 그가 건넨 손수건에다 물기를 닦고선 돌려주었다.

"고맙습니다."

이쯤이면 대답이 없을 것임을 알 터인데 지치지도 않고 꼬박꼬박 말을 건넨다. 흑운은 그 사실을 무척 신기하게 여겼으나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다.

대신 깊은 밤이 되어 화연이 잠이 들고 나면 현에게 오늘 그녀가 무슨 말을 했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현의 눈이 닿지 않았던 그 짧은 시간에 있었던 모든 것을 보고했다.

평소에는 화연이 뭐가 먹고 싶다 하였다, 심심하다 하였다 등의 시시콜콜한 말들이 전부였으나 오늘은 달랐다.

"민 첩여? 그게 누구지?"

"소신이 본 바로는 폐하의 침수시중을 가장 많이 든 후궁입니다."

"그래? 젓갈한테 뇌물을 많이도 갖다바친 계집인가보군. 헌데 거기서 무얼 한 것이지?"

죽은 환관장은 어느 새 현의 입에서 젓갈이 되어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미 젓갈이 되어 그의 집으로 보내진 지 오래였으므로.

"길을 잃었다 하였습니다."

"잘도."

현 또한 말도 안 되는 소리임을 알기에 가소롭게 웃었다.

"필두가 뇌물을 받지 않으니 똥줄이 탄 게지. 게서 필두가 오기를 기다렸나보군."

"그보다는 아씨를 기다린 듯 합니다."

"화연이를? 왜?"

화연의 이야기가 나오자 현의 눈빛이 날카롭게 반응한다. 좋지 않은 일이다 생각하면서도 흑운은 딱딱하게 말을 이었다.

"최근 궁인들 사이에 못 보던 환관이 폐하의 총애를 얻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하여 뇌물을 받지 않는 환관장 대신 아씨에게 청탁을 하러 기다린 것으로 사료됩니다."

"미친년."

황제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스러운 욕설이 튀어나왔다. 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라면 바로 자신의 눈에 들어 황은을 입고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안절부절하는 계집들이었다. 그런 계집들만 보면 저절로 입이 비틀리고 욕설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마치 제2의 태후를 보는 듯한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리 원한다면 품어 주어야지."

현이 벌떡 일어나자 흑운은 옆에 던져졌던 황룡포를 집어 침의 위에 걸쳐주었다.

"아씨는 어찌하시겠습니까?"

"... 데려가야지. 깨워 나와라."

전혀 데려가고 싶지는 않지만 자신이 없는 빈 침전에 홀로 둘 수가 없다. 흑운이 쪽문을 열고 들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현은 어깨에 걸쳐져 있는 황룡포에 대강 팔을 끼워넣으며 문을 발로 찼다.

"필두."

"예, 폐하."

"월화궁으로 간다. 민 첩여를 불러라."

***

"폐하께서 나를? 그것이 참이냐?"

아무리 정성들여 꾀어내도 절대 걸음하지 않던 환관장이 직접 민 첩여를 찾아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것도 폐하께서 친히 그녀를 콕 찝어 월화궁으로 데려오라 하였다는 말과 함께. 이것이 웬 떡이냐, 배 상궁이 그 작은 환관놈을 찾아가자마자 믿기도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속히 채비하소서. 늦으시었다간 폐하께오서 그냥 가버리실지 모르옵니다."

"내가 도착할 때까지 폐하를 붙들어 놓는 것이 너의 일이지!"

개 버릇 남 못준다고, 그리 기다리던 소식을 받아들었음에도 민 첩여의 패악은 놓을 곳 안 놓을 곳을 구분하지 못하고 필두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그러나 필두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그저 다시 허리를 숙이고는 말없이 물러갈 뿐이었다.

"빨리 하란 말이다, 이년들아. 내가 늦어 폐하께서 노화를 내시거든 네년들의 모가지를 죄다 쳐낼 것이야!"

붉고 아름다운 입술에서 나오는 말이라는 것이 거칠기 짝이 없다. 궁녀들이 머리를 올린다, 화장을 고친다 수선을 피우는 동안 배 상궁은 옷더미를 한 아름 안고 들어와 옆에서 이것저것 펼쳐 보였다.

이윽고 급한 단장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옷섶 아래에 사내를 홀리는 비기가 들어 있다는 향낭을 찬 민 첩여는 나는 듯한 걸음으로 사뿐사뿐 월화궁의 문턱을 넘었다.

"폐하, 민 첩여 들었사옵니다."

"들어라."

민 첩여는 쿵쿵 뛰는 가슴을 애써 부여잡으며 문으로 들어가 곱게 엎드려 절했다.한쪽 다리를 접어 무릎에 발목을 겹친 자세로 그녀를 바라보는 황제의 용안이 오늘따라 빛나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이리 가까이."

달콤한 옥음이 울리자 벌써부터 아랫도리가 젖어든다. 그러면 그렇지. 폐하께서도 실은 그녀의 속집을 잊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두고 계셨던 것이다. 민 첩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바닥에서 손을 떼고 일어섰으나, 다음에 이어진 차가운 말은 그녀가 무언가 큰 착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냉정하게도 깨우쳐 주었다.

"누가 일어나라고 했지?"

"소... 송구합니다, 폐하."

민 첩여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다시 바닥에 엎드려 침상을 향해 나아갔다. 가까이 갈수록 옥체를 감싼 싸늘한 기운이 그녀의 뼛속을 갉아내리며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으나 황은을 향한 욕망은 그것을 의식적으로 무시하였다.

"고개."

천천히 들어올린 민 첩여의 턱이 커다란 손에 쥐어져 이쪽 저쪽으로 돌아갔다. 처음으로 자세히 살펴본 후궁의 얼굴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아니, 그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내의 눈으로만 본다면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러나 현은 한쪽 입꼬리를 쭉 올려 비릿하게 웃으며 던지듯 그 턱을 놓고는 다시 허리를 세웠다.

"내 환관을 기다렸다지? 뇌물이라도 주려고?"

무언가 잘못되었다. 윤 첩여의 낯색이 새하얗게 질렸으나 그것은 고운 분단장 뒤에 숨겨져 겉으로 티는 나지 않았다.

"아니옵니다, 아니옵니다, 폐하! 신첩이 폐하를 연모하는 마음에 그만...!"

"하, 연모?"

그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연모라는 단어에 용안이 깊은 불쾌감을 띠다가 이내 그려낸 듯한 미소에 가리워졌다.

"이리 아리따운 여인이 그리도 짐을 연모하다니. 내 감동하여 오늘밤 네게 황가의 씨앗을 내려주겠다."

"폐... 폐하!"

언제 공포에 떨었냐는 듯, 민 첩여의 얼굴이 기쁨으로 붉게 물든다. 현은 친히 손을 내밀어 잠자리 날개와도 같은 능라옷을 한 번에 벗겨내고는 손바닥만한 속곳마저 거침없이 풀어내렸다.

두 손에도 넘칠 듯한 풍만한 젖가슴과 그에 대비되는 버들가지같은 세류요는 민 첩여의 자랑이었으므로, 그녀는 그것이 현에게는 그저 고깃덩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짐작조차 하지 못하였다.

"폐하...."

처음으로 황제께서 친히 옷고름을 풀어주셨다. 그것만으로도 민 첩여의 마음은 두둥실 떠가는 구름마냥 부풀어 올라서는 내어서는 안 될 용기마저 내고야 말았다. 아직도 웃음기를 물고 있는 황제의 입술에 촉촉히 젖은 제 입술을 가져다 댄 것이다.

그러나 두 입술이 채 맞닿기도 전에 힘껏 잡아당겨진 머리채로 인해 하얀 목은 보기 흉한 모습으로 꺾이고야 말았다.

"감히 옥체에 손을 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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