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두 얼굴-19화 (19/152)

<-- 물을 달라는데. -->

"쯧쯧, 멍청한 년."

민 첩여가 환관에게 뇌물을 건네려다 온갖 수모를 겪고 내탕금과 궁녀들마저 모조리 빼앗겼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가 태후의 귀에도 들어갔다.

미모도 뛰어나겠다, 색기도 흐르겠다, 뒷배도 든든하겠다. 여러 모로 마음에 드는 소모품이라 잘 키워서 손발로 쓰려고 했건만 이제 다 글른 것이 아닌가.

"그래서, 황상이 침전에 들였던 계집은 아직도 못 찾아내었느냐?"

"예, 마마. 대체 어디서 데려온 것인지, 황은을 입을 만한 궁녀는 물론이고 무수리까지도 죄다 뒤져보았으나 나오질 않았사옵니다. 남은 것은 월화궁의 궁녀들뿐이온데, 그곳은 섣불리 손을 대었다간 경을 치고도 남을 것이옵니다."

월화궁 또한 황궁의 일부이나 그곳의 궁녀들은 내명부의 소관이 아니었다. 허니 온 황궁을 뒤져 찾아낼 수 없었다면 그곳이 분명할진데, 그러하다 보기엔 또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월화궁의 아이를 침전까지 데리고 올 리가 만무하지 않느냐. 하, 이럴 때 환관장 영감탱이를 써야 할 터인데. 어찌 주변에 이리 쓸모없는 것들 뿐인지."

태후는 못마땅하게 혀를 차며 짜증스럽게 눈앞에 놓인 탁자를 발로 찼다. 와장창, 값을 매길 수 없는 귀한 다구가 깨어지며 사방에 뜨거운 찻물이 튀었다. 그래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아 애꿎은 궁녀들을 노려보던 태후는 문득 민 첩여를 대신할 후궁 하나를 떠올렸다.

지난번 황상이 친히 들이라 명하였다던 병부상서의 여식. 지금까지 내명부에 일에 관여한 적이 없던 황상이 직접 불러들였다니 투기심에 눈이 멀어 침전까지 달려가 패악을 부렸으나, 쓸 만한 계집이 없는 지금은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지난번 첩지 받아간 고년이 누구지?"

"채녀 한씨이옵니다, 마마."

"가서 불러와라."

병부상서의 친딸이라면 뒷배도 그만 하거니와 언뜻 보니 외모 또한 제법이었다. 황상의 품에 계집들을 안길 때마다 속은 쓰리지만 어찌하랴. 어떻게든 제 사람으로 하여금 황손을 낳도록 해야 그 다음을 이어갈 수 있으니. 태후는 엎드려 바닥을 닦는 궁녀들의 등을 내려다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

"폐하, 이제 조강에 드셔야 하옵니다."

필두의 애타는 목소리가 드디어 현을 침전에서 끌어내었다. 그러나 내키지 않는 발은 몇 걸음을 움직이지 않아 다시 뒤를 돌아보며 그 자리에 멈춰섰다.

"흑운."

"예."

"내가 없는 동안 서 환관을 지켜라. 단 일각도 혼자 두어서는 안 된다."

"존명."

새벽나절, 끙끙대는 소리에 눈을 뜬 현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전날까지만 하여도 건강하던 화연이 온몸에 끓는 신열과 함께 식은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지 않은가. 누가 태후의 끄나풀인지 알 수가 없으니 태의를 부르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고, 열을 내리는 탕약을 다려왔으나 아예 넘기질 못한다.

결국 전 상궁은 해가 뜨기도 전에 평복으로 갈아입고 바깥의 의원을 데리러 황궁 밖으로 나갔다. 그래서 지금 화연을 맡길 이는 흑운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명을 받았으니 일단 화연이 앓고 있는 곁방으로 들어오긴 하였는데,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모른다. 그냥 침상에 누운 화연의 얼굴만 바라보던 흑운의 눈에 전 상궁이 놓고 간 물동이와 한 무더기의 무명 수건이 들어왔다. 흑운은 수건을 물에 적셔서는 불덩이마냥 뜨거운 동그란 이마 위에 올렸다.

"어머니...."

그 손길을 자신이 아플 적에 돌봐주시던 어머니의 손으로 착각했는지, 화연은 오락가락하는 정신 속에서도 어머니를 부르며 가느다란 손을 이리저리 더듬었다. 잠시 망설이던 흑운이 손가락 하나를 그 손에다 쥐어주자 화연은 그제서야 마음을 놓은 듯, 깊은 숨을 내쉬며 다시 잠이 들었다.

"하아."

흑운의 입에서 어울리지 않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 뜨거운 열기가 손가락을 꼭 쥐고 있는 화연의 손에서 나오는 것인지, 조그만 손에 휘어감겨 꼼짝도 하지 못하는 손가락에서 나오는 것인지. 지금 눈앞에서 불규칙한 호흡을 내뱉는 여인은 잘못 건드리면 툭 부서질 듯 연약해 보여, 침상에서 그리 대담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아."

생각이 그 장면까지 미친 흑운의 낯빛이 붉게 물들자 그는 당황하여 손가락을 쑥 빼었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도 당황하는 것도 흑운은 거의 처음 겪는 일이었다. 젠장, 역시 위험한 여인이었다. 당장이라도 내보내지 않으면....

"물... 물 좀...."

흑운의 머리가 통제를 벗어나며 바삐 움직이는 가운데 희미한 목소리가 제정신을 돌려놓는다. 흑운은 어젯밤 현이 그랬듯, 한팔을 화연의 목 아래 넣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식은땀을 그리 흘렸건만 신기하게도 땀냄새 대신 은은한 향기가 코를 간질인다. 여인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더니 사실인가보다. 쓸데없는 생각을 떨치며 바싹 마른 입술에 물그릇을 대어주자 화연은 힘겹게 그것을 받아마시는가 싶더니 이내 스스로 넘기질 못하고 콜록대었다.

"못 드시겠습니까?"

화연은 대답 대신 다시 고개를 힘없이 떨구었다. 땀에 젖은 머리를 조심히 베개에 올려놓은 흑운은 잠시 그녀의 얼굴과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쪽문을 번갈아 보았다. 이것은 사심이 아니다, 아씨께서 물을 찾으셨다.

곧 시원한 물을 머금은 흑운의 입술이 까실하게 일어난 조그만 입술에 닿았다. 혀끝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완전히 목으로 넘어갔으나 화연은 갈증이 가시질 않는 듯 아기새처럼 입을 벙싯거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흑운이 세 번을 더 반복하여 물을 먹여준 뒤에야 조금 호흡이 안정되며 화연이 눈을 떴다.

"폐하...?"

"흑운입니다."

"아...."

흑운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인 화연이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 평소보다 훨씬 일찍 조강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급히 돌아온 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떠냐?"

"물을 조금 드셨습니다. 조금 전에 눈을 뜨셨는데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평소 화연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을 남김없이 보고하는 흑운이었으나, 화연이 손가락을 잡았다던가 입으로 물을 먹여주었다던가 하는 일들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다. 처음으로 주군에게 무언가를 숨긴 것이다. 그러나 현은 한치의 의심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흑운의 어깨를 한 차례 두드렸다.

"수고했다. 나가보거라."

"예."

밖으로 나가 조용히 문을 닫는 흑운의 눈에 걱정스레 화연을 내려다보는 현이 담겼다가 사라졌다. 그는 손수 이마에 올려진 물수건을 내려 새로운 물수건을 바꾸고 있었다. 황제가 병수발이라니, 신하 된 자로서 무릎이라도 꿇어야 할 판이었으나 흑운은 그러지 않았다.

"서 환관."

시원한 물수건에 화연의 눈꺼풀이 움찔하자 현이 아주 작은 소리로 화연을 부르며 힘없이 늘어져 있는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 걱정스러운 눈빛은 이내 흘러나온 화연의 목소리에 이내 차갑게 굳어버렸다.

"흑운...님?"

"뭐?"

"물... 더 주세요."

목이 탄다. 화연은 어지러운 정신 속에 조금 전 흑운이 곁을 지키고 있었던 것을 용케도 떠올리고는 입을 벌렸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현은 문득, 조금 전 물을 드셨습니다. 할 적에 그의 눈을 마주치지 않던 흑운을 떠올렸다. 현은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침전으로 나갔다.

"흑운."

"예."

"물을 달라는데."

발치에 부복한 흑운의 눈은 볼 수 없었으나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그 사실만으로도 현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들리지 않느냐? 물을 주어라."

흑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방으로 들어섰다. 목이 이리 타는데 왜 물을 주지 않는 거지. 화연은 희미한 정신 속에서도 괴로움을 느끼며 다시 흑운을 불렀다.

"흑운 님...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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