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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운 님... 물...."
두 사내가 그 자리에 굳었다. 흑운은 화연에게 물을 먹이는 대신 허리에 찬 칼을 풀고는 몸을 돌려 현의 발치에 그것을 내려놓고 엎드렸다.
"신을 죽이소서."
"왜."
"제가 직접 먹여드렸습니다. 입 안에."
분노와 투기, 배신감, 그 모든 것이 뒤섞인 광기가 현을 뒤덮었다. 그는 말없이 흑운이 풀어놓은 칼집에서 칼을 꺼냈다. 스르릉, 그 소름돋는 금속성의 소리에 화연이 정신을 차리고 옆을 돌아보았다.
"폐하!"
힘겹게 짜낸 목소리가 이제 막 들어올려지는 현의 팔을 멈춰세웠다.
"... 깼느냐."
"폐하... 무슨... 흑운 님?"
칼날 아래에 엎드린 검은 인영은 틀림없는 흑운이었다. 이것이 어찌 된 일이지. 화연은 앞뒤 생각할 틈도 없이 그를 말리기 위해 몸을 일으키다가 휘청하며 침상 아래로 떨어졌다.
"화연아!"
현이 떨어뜨린 칼은 흑운의 얼굴을 스치며 조그만 생채기를 만들었다.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이 새삼스럽게도 생경하게 느껴진다. 흑운이 그 핏방울을 내려다보는 동안 현은 화연을 안아올려 눕히고는 물 한 모금을 입에 물어 화연의 입술에 갖다대었다. 간신히 그것을 받아마신 화연은 온 힘을 다해 팔을 뻗어 그의 목을 안았다.
"안 돼요...."
끊어질 듯 가느다란 속삭임이었으나 그 의미는 분명하다. 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있는 흑운을 노려보았다.
"나가라. 네 자리에서 기다리거라."
네 자리, 라는 말을 유독 강조한 현의 말이 끝나자 흑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칼을 집어들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전 상궁이 의원을 데리고 돌아왔으나 차갑게 얼어붙은 현의 표정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
"어머, 그게 정말이야?"
"그렇대두. 허니 그리 꽃 같은 후궁마마들이 가득한데 후사가 없으신 것 아니니?"
구석진 곳에서 머리를 맞대고 소곤대던 서넛의 궁녀들은 행여 누가 올까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면서도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나도 봤어, 그 환관. 웬만한 여인네보다 예쁘던걸? 사실 예쁜 여인네들이야 수도 없이 많지마는 예쁜 사내라니, 나 같아도 한번...."
"꺄아, 망측해라!"
꺄르르, 웃음이 터지며 서로의 등을 두드려대던 궁녀들이 별안간 오싹 몸을 떨었다.
"방금... 뭔가 지나가지 않았니?"
"좀 오싹한 기분은 들던데...."
"으으, 빨리 가자."
오싹한 한기를 느낀 궁녀들이 서로 몸을 맞대고 사라진 자리에 온통 시커먼 사내의 인영이 나타났다. 흑운이 내뿜은 살기는 아주 미미하였으나 한편으로 가녀린 여인들이 알아챌 만큼 차갑기도 하였다. 온 황궁이 입에 담기조차 망극한 황제의 소문으로 들끓게 된 것은 어찌보면 화연의 탓이었다. 정확히는 화연에게 집착하는 황제의 탓이었지만.
사흘 전.
"근래 들어 몸을 혹사하거나 크게 충격을 받은 일이 있으십니까?"
눈이 가려진 채 들어와 화연을 진맥한 의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사실 둘 다이니 할말이 없어 입을 다문 현 대신 전 상궁이 그러하다네. 하고 대답했다.
"큰 병은 아니나 며칠 더 앓으실 것입니다. 안정을 취하며 처방해드린 탕약과 식사를 잘 챙겨드시고, 또한 방이 추우니 따스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고 보니 방이 좀 싸늘한 것도 같다. 제대로 들어와 본 적이 없으니 몰랐다. 흑운이 다시 의원을 데리고 나가자 탕약을 달여와라, 방에 화로를 들여라, 이불을 거위털로 바꿔오라 하며 현이 난리를 피우는 통에 전 상궁만 바삐 움직여야 했다.
그때부터였다. 현은 태후궁에 문안을 뚝 끊은 것은 물론, 조강도 대충 석강도 대충. 심지어 대신들에게 빨리 하고 퇴청하라 닦달하며 야근도 제대로 시키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묘한 소문에 둘러싸여 있던 조그만 환관이 모습을 보이지 않음과 동시에 시작되자 소문은 실체를 갖고 황궁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황제가 계집보다 예쁜 환관을 침전에 숨겨놓고 틈만 나면 희롱하느라 정사를 게을리하기 시작했다는.
좋지 않다. 한참을 돌아다니며 그 소문을 조사한 흑운은 다시 황제궁으로 돌아가 현의 발치에 부복했다.
"그래, 무어라 떠들더냐?"
"폐하께서 남색이라는 소문입니다. 침전에 환관을 숨겨놓고 희롱하느라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 합니다."
"또?"
"후궁들에게 후사가 없음은 그 환관에게 정기를 모다 주어 정작 후궁들에게는 빈 양물만을 물리기 때문이라 하옵니다."
원색적인 소문을 조금의 미화도 없이 보고하는 흑운의 말에 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밤낮없이 일하여 팔자에도 없는 성군 소리까지 듣고 있는데 고작 사나흘 풀어져 있었다고 남색이라니, 참으로 재미있지 않은가.
"황궁의 소문은 곧 황성에도 퍼져나가 민심을 어지럽히옵니다. 속히 서 환관을 출궁시켜 소문을 바로잡으소서."
먼저 묻지 않는 한, 웬만해서는 절대 입을 열지 않는 흑운이 충언하자 현의 눈썹이 불쾌한 선을 그렸다. 정확히 말하면 충언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말 속에 화연이 담기어 기분이 나쁜 것이다.지금 베어버릴까. 허나 수많은 그림자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실력과 충심을 가지고 있는 흑운이다. 그가 사라지는 것이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저 속으로만 칼을 갈았다.
"건방지구나. 들어가거라."
"존명."
그때, 현은 보고야 말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흑운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뒤를 돌아보니 안아서 자신의 침상에 올려놓았던 화연이 막 잠을 깬 듯 부스스 일어나 흑운을 향해 방긋 웃고 있었다. 화연은 그저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익숙한 얼굴을 보고 인사의 의미로 웃음을 건넨 것이었으나 그것은 억눌려 있던 현의 투기심을 터뜨릴 충분한 불씨가 되어 주었다.
"폐하?"
전에 없이 무서운 눈빛으로 다가오는 현을 본 화연이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밀었다. 그 사이 흑운은 늘 그가 서 있던 휘장 뒤편에 기척을 숨기고 들어갔으나, 화연은 이미 흑운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했다.
"잘 웃는구나."
"네? 무슨?...."
"이제 웃지 마라."
사납게 으르렁대는 낯선 목소리에 화연이 굳었다. 낮에만 해도 열이 내린 이마를 짚으며 잘 했다, 내일 아침에 너 좋아하는 타락죽 들이라 하마. 하시던 분이 이리 갑자기 돌변한 것이 믿어지질 않는다.
어리둥절하게 무어라 더 말하려는 입술을 현이 사납게 집어삼켰다. 거칠게 매듭을 잡아당기는 손에 의해 화연이 입고 있던 하얀 옷은 거의 찢어지다시피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도톰한 입술은 짓씹혀 피가 흘렀다.
"폐하, 흑운님이 보고 계시는데... 제발...."
"흑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