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번만 더. -->
"네게 세상 모든 것을 주마. 황은도, 재물도, 권력도 네게 다 쥐어주마. 네가 원한다면 모든 후궁들의 목을 잘라 황궁 문 앞에 걸어놓겠다. 허니 나를 피하지 말아다오."
달콤하기 그지없는 속삭임이건만, 듣고 있는 화연은 그저 치가 떨릴 뿐. 아무런 감흥도 받지 못했다. 재물이나 권력이 무슨 소용이며 애꿎은 후궁들의 목을 잘라내어 무엇할까.
새삼 얼굴도 모르는 자신의 낭군이 떠올랐다. 차라리 그 날, 보내준다고 했을 때 돌아갔다면 그에게 시집가서 곱게 꽃잠자고 은애지정 나누었을까. 이렇게까지 미친놈인 것을 알았다면 절대 남아있겠다 하지 않았을텐데.
화연은 뒤에서 자신의 젖가슴을 탐욕스럽게 주물럭대는 거친 손과 벌써 다시 일어서서 엉덩이를 찔러오는 양물을 잘라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힘없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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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폐하 듭시오!"
황제가 조강에 들지 않은 지 벌써 일곱 날째. 오늘도 어련히 환관장이 들어와 옥체 미령하다 하시겠거니, 하고 제멋대로 삼삼오오 모여 떠들고 있던 대신들이 화들짝 놀라 이리저리 부딪히며 제자리를 찾아 들어간다. 그 와중에도 꼬리처럼 따라 들어오는 그 조그만 환관을 한번씩 눈여겨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왜 이리들 정리가 되지 않는가? 우승상, 그대가 말해보라."
"황공하옵니다, 폐하.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대신들이 화연에게 집중하지 못하도록 들어서자마자 다짜고짜 시비를 걸긴 하였으나 오늘 현의 기분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온갖 겁박을 해야 죽 한숟갈 겨우 손대던 화연이 어제부터 제대로 수라를 함께 든 데다가 어젯밤은 싫다는 표현도 없이 그를 받아들여주지 않았나. 게다가 조강에 드셔야 한다며 스스로 환관복을 꺼내입기까지 하였으니, 정전으로 오는 내내 눈꼬리에 아른거리는 초록빛 옷자락이 심히 마음에 들었다.
"사관은 조강을 시작하라."
별다른 잔소리 없이 조강을 여는 옥음에 대신들이 살짝 안심하는 가운데 우승상이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다.
"변방으로 나간 병부상서가 승전보를 전해왔사옵니다. 가을걷이한 작물을 수탈하러 침입한 오랑캐를 모조리 섬멸했다 하옵니다."
"오, 병부상서가?"
며칠 전 그리 보낸 병부상서의 여식이 떠오르며 마음 한구석에 미안함이 몰려온다. 아무래도 오늘은 가서 좀 찾아주어야겠다 생각하며 받아든 두루마리에는 베어낸 오랑캐의 수와 아군의 피해가 상세히 적혀 있었으나, 아군 쪽에는 거의 피해가 없다시피했다. 황제의 입꼬리가 만족스러운 호선을 그리자 대신들 또한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병부의 최으뜸 자리는 투전으로 얻은 것이 아닌가 보군. 호부, 이번에 공물로 들어온 물건 중에서 청색 비단을 골라 곡식과 함께 병부상서의 집으로 보내어라. 돌아오거든 새 관복을 지어 입도록."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황제는 늘 이런 식이었다. 잘못한 것을 과하게 역정을 내고 반대로 잘한 일에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과하게 칭찬을 하니, 대신들은 어느 새 똥개처럼 길들여져 먹이를 받아먹기 위해 안간힘을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것이 가랑비에 옷 젖듯 쌓이고 쌓여 오늘날 혜국의 태양이라는 낯간지러운 별칭까지도 얻게 된 것이다.
"다음 안건."
처리해야 할 두루마리는 황제가 그간 정무를 게을리했음을 보여주듯 산을 이루고 있었다. 오전 일찍 시작한 조강은 근 두어 시진이 가깝도록 이어지고, 대신들의 얼굴이 죽은 파리빛이 되어갈 때쯤에야 드디어 현이 마지막 두루마리를 덮었다.
"웬만한 일은 다 보았으니 석강은 내일로 미루도록 하지. 일 보고들 알아 퇴청하시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저절로 허리가 숙여지는 반가운 말에 죽어가던 대신들의 얼굴이 다시 피었다. 이제는 그 원인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는 저 환관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들어 만면에 미소들을 머금는데, 우승상의 표정만이 묘한 의문을 품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제대로 보이진 않으나 왠지 어디선가 본 듯한 기분. 잠시 기억을 헤아리던 그의 생각은 어쩐지 싸늘하게 느껴지는 옥음에 의해 잘려나갔다.
"우승상께선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가 보군?"
"화, 황공하옵니다. 잠시 국정을 생각하느라 그만."
"그래? 그럼 바쁘신 우승상만 야근하도록 하시고."
흑룡포를 탁 털며 일어난 현이 정전 밖으로 빠져나오자 오후의 햇살이 기분좋게 비쳐든다. 낮것상 받을 때가 되었구나, 생각하며 연을 물리고 직접 걸음을 내딛는 현에게 그 문제의 환관이 다가와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저, 잠시 실례 좀...."
끄덕. 작은 동작에 저쪽으로 사라지는 초록빛 옷자락과 그 뒤를 좇는 검은 무복이 마음에 들지 않다. 현은 흑운을 밀쳐버리고 대신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황제가 환관 뒷간까지 따라가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될 말이었다.
"흑운 님."
"예."
뒷간으로 향하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걷던 화연이 문득 흑운을 불렀다. 날이 갈수록 부쩍 어두워지는 목소리에 흑운 또한 함께 무거워지고 있었다.
"저...."
"말씀하십시오."
귀를 막아 주시라든가 멀리 떨어져 있으라든가, 그런 말이 아니었다. 날씨가 좋네요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화연은 높디높은 황궁 담장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아니에요, 중얼거린 후 뒷간 문을 열고 쏙 들어와 한숨을 쉬었다.
어제도 밤새 황제에게 시달린 아래가 소변을 볼 때도 따가우니 기본적인 볼일 보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작은 신음을 뱉으며 얼굴을 구긴 화연은 간신히 어찌어찌 뒷처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다 화들짝 놀라 멈추어 섰다.
"왜 멀리 안 계세요!"
"멀리 있으라 하지 않으시기에."
"아, 진짜. 알아서 멀리 계셔야죠!"
화연은 귀를 막지도 않은 채 바로 앞에 서 있는 흑운에게 잔뜩 짜증이 올라와 주먹을 쥐고 그의 팔을 마구 때렸다. 하나도 아프지 않은 솜주먹이건만 아프다.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흑운은 알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하얀 손목을 쥐었다.
"아야."
잡고 보니 눈에 들어오는 시퍼런 멍이 아픈 듯, 화연이 얼굴을 찡그리자 흑운이 멈칫하며 손에 힘을 풀었다.
"도망치고 싶으십니까?"
"네?"
"도와드리겠습니다."
동그란 눈이 놀라움을 담고 흑운을 응시한다. 그날 밤, 산 속에서 통째로 납치해온 꽃가마의 문을 열었을 때도 꼭 저런 눈이었다. 두려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그러면서도 그늘이라고는 없는.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이 여인은 가슴에 박혀 있었던 것 같다. 참으로 불충하게도.
"나갈 수 있나요? 여기서?"
황궁. 들어오기도 힘이 드나 나가기는 더욱 힘든 곳. 그러나 흑운은 그림자이고, 그림자에게는 그림자만이 지나다닐 수 있는 문이 있다. 화연을 처음 데리고 들어왔던 바로 그 문. 속으로 문지기의 순번을 헤아리던 흑운이 이윽고 가장 손쉬운 상대가 지키는 날을 짚어내고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내일입니다. 축시에 볼일을 본다 하시고 나오십시오. 제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허나, 그리 되면 흑운님께서...."
"저는 괜찮습니다."
"... 같이 가요."
화연이 단호하게 흑운의 양 손을 붙잡았다. 덜컹, 얼음마냥 차갑던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진다. 그러나 습관처럼 굳은 표정은 그저 고개를 미미하게 가로젓는 것으로만 거절의 뜻을 전했다.
"저는 안 됩니다."
"왜요?"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왜 황제의 뒤를 지키고 있는 것인지. 아주 어릴 적, 남들이 뒷산에서 장난감 칼을 가지고 편을 갈라 놀 적부터 진검을 잡은 그는 그림자가 되기 위해 살았고 그림자로서의 생이 전부였으니까. 이름도 없이 그저 흑운이라 불렸다. 선대황의 그림자, 또 그 선대황의 그림자가 그랬듯.
"저는 폐하를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미쳤어."
곱디고운 입술에 어울리지 않는 거친 말이 화연에게서 튀어나왔다.
"폐하도 미쳤고, 흑운 님도 미쳤어요. 여기가 제정신으로는 못 살 곳이라서 그래요?"
예, 그렇습니다. 흑운은 쓴웃음 뒤에 그 말을 삼키고는 황제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앞서 걸어갔다. 시각이 지체되면 또다시 고초를 겪는 것은 화연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