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두 얼굴-33화 (33/152)

<-- 도망치려 하였더냐. -->

"아악!"

화려한 침상에 죽은 듯 늘어져 있던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한때 여인들깨나 홀렸던 얼굴은 반쪽이 되었고, 그 얼굴을 감싼 손가락에 툭툭 불거진 마디가 볼썽사납다. 곁을 지키던 어미의 눈에 안타까움이 떠올랐으나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은호야, 또 꿈을 꾸었느냐?"

"... 예, 어머니."

어미가 건네준 물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아낸 은호가 다시 자리에 누웠다. 오늘 꿈에 나온 그의 신부는 꽃가마를 빼앗아 달아난 괴한들에게 둘러싸여 그를 향해 처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서방님, 서방님. 고운 혼례복은 갈가리 찢어져 걸레짝이나 다름없고 첫날밤에 자신이 내려주었어야 할 머리는 귀신처럼 풀어헤쳐진 채 그녀가 짓밟히는 장면이, 눈을 뜬 지금도 은호의 머릿속에 가득하였다.

"이제 그만 잊어버리거라. 이 어미가 황성에서 가장 아리따운 규수를 찾아 혼담을 넣어주마, 응?"

어미인 기씨의 애달픈 목소리가 은호의 가슴을 울렸다. 단식까지 불사하며 조르고 졸라 데려온 신부 하나 지키지 못해 허무하게 빼앗긴 주제에 이리 자리보전하여 부모의 속을 썩이다니, 이런 불효가 또 어디 있으랴. 은호는 침상을 짚고 일어나 기씨가 내밀어 준 물그릇을 받아 마시고는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소자 갑갑하여 저녁에 산보나 좀 다녀올까 합니다."

"그것이 참이냐? 괜찮겠느냐?"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 기씨의 주름진 입가에 모처럼 환히 웃음이 피었다. 움직여봐야 그저 앞마당, 뒷마당 떨어져가는 낙엽이나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 전부이던 아들이 바깥 출입을 하겠다니. 용하다는 의원 죄다 불러보아도 마음의 병이라 약이 없으니 스스로 일어나 움직이는 수 밖에 없지 않았나.

"예, 어머니. 저자 나가서 바깥바람도 좀 쏘이고 어여쁜 규수가 있으면 데려와야지요."

파리한 안색으로 농까지 하는 모습이 참말로 이제 일어나려나 보다. 기씨는 그저 기뻐 어쩔 줄 모르며 목욕물 준비하라 하마, 하고 직접 바깥으로 나갔다. 그 와중 은호는 어느 봄날 제 심장에 날아와 박혔던 눈이 동그란 계집아이 생각에 또다시 울컥 피눈물이 올라온다.

살아는 있는 것이냐. 대체 그놈들은 어찌 산 같은 재물을 내버려두고 가장 귀한 너 하나만 달랑 업어갔더냐. 필시 누군가 원한을 가지고 한 일이 분명할진데 그것이 어데 청렴하고 어지다 소문난 서씨 가문의 탓이랴? 척진 이를 줄세우면 황성 밖까지 닿을 자신의 가문이겠지.

죄책감과 분노, 슬픔이 뒤섞여 만들어낸 은호의 원망은 어느 새 제 가문을 향하고 있었다.

**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마주보고 선 두 사람 사이를 데굴데굴 굴렀다. 그 바람에 뺨을 치고 지나간 낙엽조각이 신호라도 되는 듯, 흑운을 노려보고 섰던 화연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 보세요. 제가 나가고 나면 흑운님께선 어찌 되시는지."

"모릅니다."

"죽는거죠?"

흑운은 답하지 않는 편을 택하고 입을 굳게 닫았다.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주 운이 좋으면 살 수도 있을 것이고. 그는 황제의 처분에 따를 일이지, 예서 자신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었다.

"나, 여기서 도망 안 가요."

"진심이십니까?"

"네. 없었던 일로 해요."

화연은 쌩하니 돌아서서 다시 정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궁녀들에게 주워 듣자니 황궁이란 문과 기둥에도 눈이 있고, 바닥과 천장에도 귀가 있는 곳이라지 않았나. 자신이 어떻게 도망쳐 보았자 결국은 저 미친 황제가 흑운을 찢어 죽이는 비극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그래, 도망치려면 혼자 도망쳐야 한다. 고작 저 하나로 인해 애꿎은 목숨을 그리 보낼 순 없지. 그나저나....

"흑운 님."

"예."

"근래들어 자꾸 지나는 궁인들이 저를 쳐다봅니다. 기분 탓인가요?"

누가 들을세라 소곤거리는 화연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흑운이 고개를 조금 숙여야 했다. 부드러운 체취가 내딛는 걸음마다, 내어놓는 말끝마다 흑운의 코로 스며들어 그를 어지럽혔으나 흑운은 노련하게 표정을 굳히며 다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기분 탓은 아닙니다."

"그럼 왜 쳐다보나요?"

"폐하께 여쭈십시오."

어찌 모를까. 황궁을 돌아다니는 소문의 주인공인 환관에게 당연히 따라붙는 그 더러운 시선을. 호기심에 찬 궁인들의 시선이면 그나마 다행이리라. 끈적하게 화연의 몸 곳곳을 훑는 늙은 대신들의 눈빛을 발견할 적마다 흑운은 당장에라도 칼을 뽑아 그 눈깔을 후벼파고 싶은 본능을 억눌러야만 했다.

"왔느냐."

자리를 비운 사이 조강이 마무리된 모양. 텅 빈 정전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현이 화연을 보고 환히 웃으며 일어서자 궁인들의 얼굴이 절로 경악에 물들었다. 황제께서 대신들을 먼저 내보내고 앉아만 계시기에 무얼 생각하시나보다 하였더니, 저 환관을 기다린 것이 아닌가.

이러쿵 저러쿵, 수군수군, 쑥덕쑥덕. 소문은 이제 뼈가 자라고 살이 붙어 황제께서 그 환관을 어찌어찌 하셨다느니, 심지어는 지엄한 정전에서도 그 짓을 하였다느니 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 날 또한 석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잘 어울리는구나."

고운 여인네의 옷을 입혀주고 싶으나 그녀를 알아볼 이가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필두가 구해온 물빛 남복이 화연의 흰 피부와 무척 잘 어울리는 것이 한 가닥 위안이었다. 이미 채비를 마친 현은 싱긋이 미소를 짓고는 잠시 떨어져 있던 그녀를 품안 가득히 안았다. 아주 잠깐 눈에 보이지 않았는데도 어찌나 마음이 불안하던지.

"가자. 내 오늘 너 사달라는 것 죄다 사줄 것이다."

"먹고픈 것두요."

"그래, 먹고픈 것도."

한사코 따르겠노라 고집을 부리는 필두를 침전에 남겨둔 두 사람은 어둠을 밟고 황궁을 나섰다. 그저 높은 담장을 사이에 둔 같은 공기일진데 어찌 바깥은 이리 청량한 바람이 불어오는지. 기분좋게 심호흡을 하는 화연의 앞에 따각, 윤기가 좔좔 흐르는 갈기를 가진 멋진 말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말을 타고 가나요?"

"걸어가려면 한참 걸린다. 말을 타 본 적이 있느냐?"

"타 보고는 싶었는데... 아버님께서 그것만은 아니 된다 하셔서요."

"허면 오늘이 처음이구나."

"네, 그렇죠."

처음. 그 말이 늘 가난하던 현의 마음속을 늦가을 풍년마냥 그득히 채운다. 현은 말등에 훌쩍 올라타서는 아래에서 똘망똘망 그를 바라보는 화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라.”

겁도 없이 그 손을 잡고 현의 뒤에 붙어앉긴 하였으나 올라오고 보니 무섬증이 인다. 눈앞에 있는 탄탄한 허리에 팔을 감으니 어젯밤 그리 깨물어 먹은 복근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 그리 만지지 말거라.”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 갈라진 사이사이를 더듬으며 이 사내의 벗은 몸을 떠올리던 화연이 화들짝 놀라며 복근 위에서 손을 맞잡았다. 그 동작에 현은 또 길게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안고 싶다. 안고 싶어 미치겠다. 그 생각을 없애려 부러 말 옆구리를 힘차게 걷어차 앞으로 달려나갔다.

“와아, 폐하! 더 빨리요!”

말은 처음이라더니, 요 쬐그만 것이 간도 크지.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주변을 둘레둘레 구경하며 환호성을 지르는 화연의 목소리에 현의 입꼬리가 흘깃 위로 올라갔다.

“꽉 잡아라.”

화연이 팔에 힘을 주어 허리를 꼭 안는 것이 무척이나 흡족하다. 현은 어둠 속에서 그들을 따르는 열댓 명의 그림자들이 얼마나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지는 생각도 않고 이랴, 고삐를 내리쳐 눈 깜짝할 사이 야시장이 한창인 저자 입구에 다다랐다.

“가자.”

“말은요?”

“예 두면 알아 할 것이다.”

황제랑 저랑 둘 밖에 없건만 누가 무엇을 알아 한다는 것인지, 선뜻 이해되는 말은 아니나 마음 쓸 바도 역시 아니다. 차피 이 말을 타고 다시 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니. 허나 그리 생각하는 마음 한구석이 어쩐지 쓸쓸해져 온다. 화연은 손을 뻗어 바로 옆에 있는 묵빛 옷자락을 살그머니 쥐었다. 현은 그저 그것이 기분 좋아 체신머리없이 실실 웃으며 나리, 이것 좀 보고갑쇼 하고 떠드는 상인들의 목소리를 가락 삼아 춤추듯 가벼운 걸음으로 야시장을 누볐다.

“나 먹고픈 것 다 사준다 하셨죠?”

“그랬지. 무어가 그리 먹고 싶으냐?”

손끝이 쭈욱 뻗어져 가리킨 곳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국밥집. 고작해야 국밥? 현이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화연을 내려다보자 도톰한 입술이 멋쩍게 우물거렸다.

“예전에 딱 한번 오라버님 따라 시전에 나갔다 먹어 보았는데요. 그 맛이 어찌나 좋던지 아직도 잊혀지질 않습니다. 헌데 양친께서 어찌 그리 거친 음식을 먹이냐 노화를 내시는 통에 또 먹어볼 엄두도 못 내었지요.”

그 양친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간다. 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국밥집을 향해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그래, 네 먹고 싶다는데 사주어야지.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도 먹고픈 것 사주어야지.

“하이고, 헌헌장부께서 오셨네. 어여 이쪽으로 앉으세요.”

옥골선풍 두 사내가 난데없이 허름한 국밥집에 들어서니 여주인은 커다란 엉덩이를 유난히 실룩이며 그들을 맞이하고, 번잡하니 모여있던 사람들의 시선도 일시에 문을 향해 몰려들었다. 현의 이마에 불쾌한 선이 그어졌으나 그뿐, 감정을 애써 억누른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 화연을 가리고 가장 구석진 자리를 택해 앉았다.

“국밥 두 그릇.”

“예, 예. 술은 안 자십니까?”

현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는 앞에 앉은 화연을 훑었다. 국밥 한 그릇 제대로 먹어보지 못한 규방 아씨라, 술이라곤 입에도 대어본 적이 없으렷다. 묘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린 현은 전낭에서 동전 한 줌을 꺼내 여주인의 손바닥에 떨어뜨렸다.

“술도. 가장 좋은 것으로.”

“아이고, 감사합니다, 나으리!”

국밥 두 그릇에 술값으로는 넘치고도 넘치는 돈이다. 신이 난 여주인은 되지도 않는 콧소리로 감사를 표하고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귀한 객 오시거든 꺼내리라 담가둔 과실주를 넘치도록 술병에 담고 그릇 두 개에 펄펄 끓는 국물 붓고. 이 또한 인심이지, 첩첩이 부쳐둔 전붙이 두어 장 집어 허름한 접시에 담고. 여주인이 가져온 소박한 상과 술 한병이 탁자에 놓이자 국밥은 거들떠도 보지 않은 현이 술병을 들어 두 개의 잔에 쪼록쪼록 채웠다.

“저… 술 먹어본 적이 없는데요.”

“그래? 허면 이 또한 처음이구나.”

예상을 비껴나가지 않는 반응이 아까의 불쾌감을 싹 씻어내리고 현을 웃음짓게 만들었다. 누군가의 생애 첫 술을 따라준다는 것이 이다지도 기분좋은 경험이 될 줄은 몰랐으되, 그 어디 비할 바 없이 좋은 기분임은 확실하였다.

“자, 이렇게 들고.”

화연이 현을 따라 서툴게도 술잔을 들어올렸다.

“부딪히는 것이다. 이리, 맑은 소리가 나도록.”

챙, 주춤주춤 내민 화연의 술잔에 현의 술잔이 부딪히며 처마 아래 풍경과도 같은 맑은 소리가 울렸다. 의심의 눈초리로 그것을 바라보던 화연은 현이 먼저 술을 쭈욱 들이킨 다음에야 약간 혀를 내밀어 할짝 맛을 보고는,

“어? 달아요!”

얼른 손에 든 잔을 입에 털어넣었다. 세상에 이런 맛이, 매일같이 황궁 수랏상만 먹어오던 그녀였음에도 이 달짝지근하고 입에 착 달라붙는 맛은 무어라 설명할 수가 없는 별미였다.

“입에 맞느냐?”

“네. 이번엔 제가 따라드릴께요.”

현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냉큼 술병을 빼앗아 든 화연이 현의 잔에는 넘치도록 술을 따르고, 제 잔에는 아주 조금만 따랐다. 현이 조금만 시선을 돌렸다면 알 수 있는 일이었으나 해사하게 웃는 화연의 얼굴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그는 아무 이상함도 느끼지 못하고 다시 술잔을 들었다.

한 잔, 두 잔, 석 잔. 이윽고 술병에서 떨어진 마지막 방울이 똑, 화연의 잔 위로 추락했을 때.

“술 다 떨어졌네. 다시 가져올 동안 저어기, 볼일 좀….”

화연은 어지러운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의 눈이 약간 흐트러진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좀 전에 들어오면서 보니 이 집 뒷간이 유난히도 멀리 있더라, 그리 가는 척 하면서 슬그머니 뒤편으로 돌아 반빗간 옆에 붙은 쪽문으로 나오니 지나는 이 없는 어두운 골목이 눈앞에 드러났다.

일단 어디에 숨어 있다가 동틀 즈음 산을 넘으면 되겠지. 도망이라곤 쳐본 일 없는 순진한 화연은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 믿으며 열심히 숨을 만한 곳을 찾아 주변을 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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