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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도망치려고?”
분노를 억지로 누른 목소리와 함께, 현이 집어던진 죽그릇이 문에 부딪혀 박살나며 사방으로 파편과 죽이 튀었다.
“네가 죽으면 이 침전 앞에 묻을 것이야. 죽어 보았자 도망치지 못한다.”
칼을 갈듯 살벌하게 내뱉는 말에도 화연은 그저 그를 흘깃 쳐다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 뿐. 화라도 내 주었으면, 울고불고 발버둥이라도 쳐 주었으면 현이 이렇게까지 미쳐가지는 않으리라.
“말을 하라고! 말을! 젠장할!”
바싹 마른 어깨를 붙잡고 거칠게 흔드는 손에 사람의 체온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 바람에 스륵 내려간 침의 아래로 제 이름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자 현은 허탈하게 웃으며 어깨를 놓고 검붉은 글씨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이것 때문이냐? 내 것에 이름 한자 새겼다 하여 짐을 이리 능멸하려 드는 것이야?”
“... 내 것이요?”
드디어 화연의 속눈썹이 위로 들어올려지며 현을 노려보았다.
“내가 왜 폐하 것인데요. 우리 어머니가 낳고 아버지가 키우셨는데!”
“혜국의 백성이면 모다 내 것이지. 너라 하여 다를 줄 아느냐?”
“허면 나가서 백성 하나하나 이름 새기시든가요! 왜 나만 갖고 그러는데, 어찌하여 꼭 나만!”
화연이 이를 갈며 바락바락 소리칠수록 현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올랐다. 눈 앞에 있는 여인이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이, 자신만을 보고 자신에게만 목소리를 내어준다는 사실이 그로 하여금 얼마나 삐뚤어진 행복감을 품게 하는지.
“이름 새기고 말고는 내 마음이다. 함부로 부르지도 못하는 황제의 이름을 몸에 새겼으면 감사히 여기거라.”
“아아, 감사요. 얌전히 시집가던 여인 납치하고 겁간한 것도 모자라 몸에 칼자국까지 내신 분께 감사요.”
“겁간? 황은이지. 네가 먼저 후궁 삼아달라 하지 않았느냐.”
“이게 후궁이에요? 첩지는커녕 환관복입혀 침전에 처박아 놓는 게?”
“황궁에 들어온 이상 모두가 내 여인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첩지가 있든 없든, 겁간이 아니라 황은이다.”
“내가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왔냐고요!”
잠시간 침묵 속에서, 두 시선이 서로 맞부딪히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리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당연하게도 현이었다.
“그래, 무엇을 어찌 해 주랴. 네 원하는 것 뭐든 들어주겠다.”
“내보내….”
“그것 빼고.”
현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시선이 문득 그의 가슴팍에 가 닿았다.
“나도 쓸래요.”
“... 뭘?”
“이름. 거기에.”
“옥체에… 칼을 대겠다고?”
불경한 언행을 지껄였다거나, 감히 용안을 노려보았다거나, 황명 불복이나 황제의 손을 묶었다거나 하는 죄목들은 그저 어린애 장난으로 여겨질리만치 엄청난 발언이었다. 병을 고치는 태의마저 종기 하나 째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다, 결국 붕어 직전에 가서야 간신히 칼을 대어 병을 고치고도 유배를 가지 않나. 헌데 감히 거기다 이름을 새기겠다고?
“제정신인 것이냐?”
“제가 제정신이게 생겼어요? 차피 굶어 죽으려 하였으니 폐하 가슴에 이름 하나는 남기고 죽으렵니다.”
하핫, 헛웃음을 흘린 현은 정말로 날선 단도를 뽑아내어 화연의 손에 쥐어주고 가슴팍을 풀었다. 평생 규방에서만 지낸 주제에 옥체를 칼로 찢겠다니, 손가락 하나라도 딸 깜냥은 있으면서 허세를 부리는 것인가. 그러나 화연이 망설임없이 한 획을 내리긋는 순간 그는 자신이 무척이나 잘못 짚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 잠깐!”
현이 다급하게 손목을 붙잡았으나 이미 피가 배어 나오는 상처는 어찌할 수 없었다. 허나 여기에 화연의 이름을 새기었다간 자신이 눈감고 지나간다 해도 대신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으리라.
“이름은 아니 된다. 정 새기려거든 다른 글씨로 하여라.”
“그러지요.”
스윽 슥, 예리한 날이 단단한 가슴팍을 가를 적마다 화끈거리는 통증이 현을 덮쳤다. 아프다. 아프고 또 기쁘다. 심장이 터질 듯한 그 기쁨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현의 왼쪽 가슴에 어느덧 기쁠 희(喜)자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다 되었느냐.”
“네.”
현이 그리 하였듯, 화연이 시커먼 먹물을 면포로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이리 칼질하고 똑같이 복수한 것으로 마음이 조금은 풀어지는 기분. 너무 억울하고 분하여 참으로 죽어질 작정이었는데 그 분함을 한 획 한 획에 갈아넣고 나니 또 살 마음이 들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제 태명요. 집안의 기쁨이니까, 기쁠 희(喜).”
집안, 이라는 말을 하며 화연의 속눈썹이 비에 젖은 나비마냥 파르르 떨려온다. 안쓰러운 듯, 그 위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양친이 뵙고 싶으냐?”
“네. 아니, 아니요.”
“뵙고 싶은 것이냐, 뵙지 않고 싶은 것이냐.”
“보고 싶지요. 허나 양친께서 지금 절 보시면 기뻐하실까요? 산 것도 죽은 것도, 계집도 사내도 아닌 모습 따위 저는 죽어도 아니 보이렵니다.”
나비의 날개 끝에서 어룽지던 빗물이 종내는 후두둑, 사내의 손등 위로 떨어져 굴렀다. 현이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거친 손가락으로 닦아내 보았으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인지, 그 비는 멈출 줄을 몰랐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내가 너를….”
“폐하, 태후마마께오서 알현 청하시옵니다.”
현의 다음 말은 전 상궁의 목소리에 가로막혀 화연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급히 매무새를 단정하게 만진 현이 서둘러 밖으로 나가며 안으로 뫼셔라, 하는 목소리만이 쪽방에 남아 메아리칠 뿐.
***
“황상, 참으로 너무하십니다. 이 어미에게 문안 한번을 들지 않아 이리 걸음하게 만드십니까?”
“정무가 바빠 그러한 것이니 이해하시지요.”
간만에 마주한 이복아들의 얼굴이 부쩍 수척한 것이 태후의 눈에도 틀림없이 잡혀들었다. 허나 정무가 바쁘다는 말은 그저 새빨간 거짓. 그 환관 나부랭이에게 홀려 양기 쭉쭉 뽑아내느라 저리 말라가는 것이렷다.
“그래요. 기쁜 날이니 그렇다 해 두십시다.”
“기쁘다니요?”
“민 첩여가 회임을 하였습니다, 황상. 조금 전 태의가 다녀갔어요.”
기쁘기는커녕, 감정을 숨길 생각이 없는 용안이 시시각각 일그러져갔다.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럴 리 없다니요, 황상. 후궁전의 그 누구보다 황상의 침전에 자주 든 여인입니다. 회임을 하지 아니한다면 그것이 더욱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그래, 월화궁에 자주 들었을지는 모른다. 그 늙은 환관놈에게 재물을 써서 그리 하였겠지. 허나 결단코 씨물을 준 적은 없었다. 혹여라도 주워 모을까 자신이 보는 눈 앞에서 모두 처리하도록 하지 않았나.
“혜국의 경사입니다. 민 첩여의 궁에 내탕금을 기존의 배로 올려 돌려주고, 시중 드는 궁인들 또한 그리 하셔야 합니다. 또한 만일 태에 품은 용종께서 황자라면….”
“그만.”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태후의 말을 잘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