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친놈이었다. -->
“자, 한 번만 더 벌려보아라.”
도리도리. 거의 비워지지 않은 밥그릇에 현의 속이 타들어간다. 그나마도 현이 제 끼니 제쳐놓고 한입씩 떠먹인 덕이건만, 너덧번쯤 떠먹이기도 전에 화연은 다시 입을 다물고 도무지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딱 한 입만 더 먹자꾸나, 응? 자, 아 해보거라.”
“... 아아.”
성의없이 약간 벌어진 입에 쌀밥과 깨끗하게 발라낸 조깃살이 쏙 들어갔다. 현은 화연이 그것을 오물오물 삼키는 것을 보고서야 제 수저를 집어들어 먹는 둥 마는 둥 대강 저분질을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상당히 막나가던 화연은 이제 본격적으로 막나가기로 한 듯, 현이 무섭게 겁박하면 아예 입을 다물고 음식을 물려버린다. 허니 어쩌겠는가, 체면이고 체통이고 죄 내려놓고 이리 애걸복걸 떠먹이는 수 밖에.
처음에는 망극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필두조차 이제 적응한 것인지 그저 넋 놓고 옆을 지킬 뿐, 더 이상 머리를 바닥에 찧거나 하지 않았다.
“탕약 먹고 후원 나가겠느냐?”
끄덕끄덕. 현은 서둘러 석수라를 물리고 탕약에 꿀대추까지 살뜰하게 챙긴 후 흑운과 필두만 딸려 침전을 나섰다. 천자가 어쩌다 요 콩알만한 계집 몸종 노릇까지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조금만 수틀리면 화연은 또다시 입을 꾹 닫고 시선을 내리깐 채 몇 시진이고 그를 봐주질 않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많이 추워졌구나.”
침전을 나서 금원을 향해 걷는 두 사람의 뺨에 부쩍 차가워진 저녁 바람이 와 닿았다가 달아나기를 반복하자 현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네.”
현은 그녀가 짤막한 대답이나마 내어놓은 것이 기꺼워 빙그레 웃었다. 흑룡포를 벗어 화연의 어깨에 걸치니 조그마한 몸이 폭 싸여 옷자락이 바닥에 끌린다. 현은 그것을 화연의 머리부터 덮어씌워 앞섶을 손에 쥐어준 뒤 어깨를 단단히 감쌌다. 그렇게 내딛던 발걸음은 얼마 가지 않아 맞은편에 나타난 인기척에 의해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멈추어라. 황제 폐하 행차시다.”
흑운의 목소리에 다가오던 행렬 또한 그 자리에 멈추고,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앞으로 나서며 예를 갖추었다. 현은 의식적으로 화연을 등 뒤로 감추며 낯익은 여인을 아래위로 훑었다.
“윤 재인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현의 속도 모른 채 윤 재인의 가슴이 동동거린다. 멀리서 몇 사람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으나 그에 딸린 발소리가 턱없이 적어 황제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차였다. 그저 갑갑한 마음 달래고자 바람 쏘이러 나온 차에 폐하를 알현하다니,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내려주신 기회가 아니고 무엇이랴. 혹여 함께 걷자고 하실까, 부질없는 기대가 그녀의 마음을 복사빛으로 물들였다.
“아아. 윤 재인.”
심기는 불편하나 티는 내지 않았다. 침전과 후원이 이어지는 길에는 웬만하면 접근하지 말라 후궁전에 명을 내렸건만, 입궁한 지 얼마 안된 윤 재인은 알지 못한 것이겠지.
“날이 차니 일찍 들어가도록. 하고 내 후궁전에 명하기로, 웬만하면 이쪽으로는 걸음하지 말라 일렀느니. 앞으로는 주의하거라.”
“소… 송구하옵니다. 소첩은 알지 못하여….”
“몰랐던 것은 죄가 아니니 괜찮다. 허면 이만.”
곁을 지나가는 황제에게서 은은한 난향이 퍼져나와 주변을 물들인다. 내내 숙이고 있던 허리를 펴서 바라본 그 뒷모습에 윤 재인의 아리따운 미소가 차갑게 굳었다. 황제께서 소중하게도 감싸고 있는 조그만 인영이 걸친 것은 틀림없는 흑룡포. 마지막으로 월화궁 들었던 그날, 폐하께서 파정하시며 저도 몰래 읊조리시던 바로 그 이름의 주인이리라. 윤 재인이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서 오래오래 그들을 지켜보는 동안 후원을 향하던 현이 나지막히 흑운을 불렀다.
“흑운.”
“예.”
“갔느냐?”
“아닙니다. 계속 보고 계십니다.”
평소 같으면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나 화연이 함께 있으면 말이 다르다. 현은 불편함을 애써 억누르며 화연과 나란히 후원을 가로질러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정자로 올라섰다.
“와아….”
땅거미가 물감처럼 스민 노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자 아래 이름모를 나무들이 둘러싼 연못, 잔잔한 수면이 그 모든 것들을 그대로 비추어 만들어낸 또 하나의 후원까지. 이 세상같지 않은 황홀한 풍경에 심드렁하던 화연의 입에서 드디어 탄성이 터지고, 현의 얼굴에는 더없이 환한 웃음이 번졌다.
“마음에 드느냐?”
“네. 황궁에서 이거 딱 하나 마음에 드네요.”
“이거… 딱 하나?”
“딱 하나.”
호연이 강조한 딱 하나가 무척이나 서운하다. 그냥 마음에 든다 하면 될 것을, 어찌 이리 말을 서운하게 할까. 현은 그것을 티내지 않으려 애쓰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 화원에 데리고 나온 여인은 네가 처음이다.”
“저기 안에 월화궁 있잖아요.”
“내가 가는 길과 후궁전에서 오는 길은 다르다.”
“... 그럼 왜 저만 데리고 오셨는데요?”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밥 한번 먹이겠다고 숟가락 들고 절절매고, 아무 짓 안할테니 제발 잠이라도 같이 자자 애걸복걸에, 잠시 자리 비웠다고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하는 황제의 속마음이 궁금했다.
보통의 사내였다면 이 말과 행동들을 은애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어느 미친놈이 은애하는 여인을 남장시키고 감금하는 것도 모자라 몸에 칼질까지 한단 말인가. 그러나,
“너를 은애하니까.”
미친놈이었다.
"네?"
"은애한다고."
할 말을 잃고 딱 벌어져 있던 화연의 입에서 피식피식, 어이없는 웃음이 흘렀다. 웃기야 웃되, 아무리 보아도 기쁜 낯은 아니었다. 현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화연의 얼굴 앞에 용안을 들이대었다.
"어찌 그리 웃느냐?"
"하, 폐하."
그제서야 웃음을 멈춘 화연이 몸을 뒤로 빼며 긴 속눈썹을 두어 번 깜빡였다.
"소녀가 은애라는 것을 해본 적은 없지만요, 적어도 폐하께서 지금 저를 은애하시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 현의 얼굴 가득히 만족감이 떠올랐다.
"허면 이것 또한 내가 처음이구나. 네 첫정."
저 귀는 어찌 된 모양인가. 정작 하고자 하는 말은 쏙 빼고 저 듣고 싶은 부분만 주워들어서는, 심지어 그조차 곡해하여 저 좋을 대로 해석해 버리는구나. 화연은 잠시 심호흡으로 인내심을 끌어올린 후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 제 말 좀 잘 들어보세요. 폐하께서는 저를 은애하지 아니하시고, 저 또한 폐하를 은애하지 아니합니다."
"아니. 나는 너를 은애하고, 너 또한 그러하다."
"아 진짜!"
답답한 마음에 머리까지 덮어쓴 흑룡포를 확 끌어내리자 잔뜩 찡그린 조그마한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또 불끈. 현은 양물에 피가 쏠리는 것을 느끼며 화연의 손을 잡아 천천히 그곳에 갖다대었다.
"보아라. 그 어떤 천하절색에도 먼저 음심이 인 적이 없었는데, 너만 보면 이리 난리가 나지 않느냐. 이것이 은애다."
"음... 이건요."
미친놈에게 이것을 어찌 설명해야 할지, 화연은 그 고민에 빠져선 손에 닿은 방망이를 무심코 쪼물딱거렸다.
"제가 가마수두라에서 본 바에 따르면 굳이 색기가 흐르지 아니하더라도 자신과 궁합이 맞는 여인을 보면 절로 음심이 동하니, 그것이 바로 색욕이라 하였습니다. 허나 많은 통속소설이나 은애지정을 읊은 시구들에 의하면 은애란, 보고만 있어도 한없이 아깝고 늘 지켜주고 싶으며 앉으나 일어서나 그이가 마음에 가득 차 종내는 다른 무엇을 할 정신도 없다 하였으니... 아, 폐하께선 지금 제게 색욕을 느끼시는 것 같네요."
"그래.... 네 말이 맞다."
어째 목소리가 좀 끈적해진 것 같은데. 화연은 방망이에서 흠칫 손을 떼고 슬금슬금 몸을 옆으로 옮겼다.
"그렇죠?"
"보고만 있기엔 아까우니 차라리 안고, 늘 지켜주고 싶으니 환관복 입혀 옆에 두고, 다른 무엇 할 정신이 없어 정무도 놓아버리지 않았느냐. 네 말을 들으니 확실히 내가 널 은애하고 있구나."
아, 그게 또 그리 되는군요. 화연은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계속해서 몸을 반대편으로 밀어나갔다. 그리고 끝내 더 움직일 수 없는 난간에 닿았을 때.
“이제 그만 들어가자꾸나.”
담백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손이 화연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전 여기서 더 있을래요. 먼저 들어가세요.”
들어가서 무슨 짓을 하려고. 화연은 눈을 세모꼴로 치켜뜨고 몸을 털어 그 손을 떨구었다.
“여기…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