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친놈이었다. -->
“흑운.”
깊은 밤, 새근새근 잠든 화연을 곁방에 두고 조용히 나온 현은 침상을 향하는 대신 흑운을 찾았다.
“예, 폐하.”
“민 첩여를 처리해야겠다.”
아무리 마음에 차지 않는다 한들, 제 핏줄을 가진 여인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의 판단은 냉철했다. 그는 지금부터 황궁을 통째로 뒤엎을 생각이었으니까. 태후의 세력에서 나온 황손이란 그 계획에 크나큰 걸림돌이 될 것임에 자명하였다.
“숨을 막아 죽이고, 시체는 연못에 던져라.”
“존명.”
복중 용종을 해하라는 엄청난 명에도 흔들림 없는 흑운의 눈빛. 현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눈동자가 흔들린 단 한 번의 순간에, 화연이 그 시선 끝에서 미소짓고 있었던 것이. 죽어라. 그 말이 불쑥불쑥 입술을 비집으려 할 적마다 현은 크나큰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가라.”
황제의 은밀한 명을 받을 적이면 늘 그렇듯, 흑운은 벽으로 위장된 작은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기골이 장대한 사내였건만 그 걸음에는 소리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둠을 즈려밟고 민 첩여의 처소로 접근하던 그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없다. 민 첩여와 궁인들이 잠을 자고 있어야 할 그곳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
“왜 벌써 왔느냐?”
초조하게 흑운을 기다리던 현은 그가 너무 일찍 돌아오자 반가움보다 불안감이 앞섰다. 아니나다를까,
“안은 그대로 놔두고 사람만 사라졌습니다.”
전혀 반갑지 않은 보고에 현의 이마가 잔뜩 찌푸려졌다.
“하… 젠장. 한 발 늦었군.”
그 창기, 머리 한번 잘 돌아간단 말이야. 못마땅한 중얼거림과 함께 현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태후궁으로 들어갔겠지?”
“모자란 신의 소견을 하문하신다면, 그러합니다.”
“알았다. 일단 물러가거라.”
역모를 꾸민다는 증좌라도 있지 않은 한, 태후궁은 현이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었다. 필시 태후가 회임한 민 첩여를 보호하겠답시고 황급히 빼돌렸으리라. 화연에게 신경을 집중하느라 미처 그쪽을 생각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실수라. 내가 실수를 하다니. 현은 제 생각을 되씹으며 피식 웃었다.
“눈을 가리고, 총기를 흐릴 여인이라.”
화연이 처음 왔을 적 흑운이 한 말이 썩 틀리지 않았다. 당장은 지금까지 쌓아온 체계로 조정이 문제없이 돌아가는 듯 보이나, 제아무리 굳건한 강둑이라 한들 겨우 손가락만한 구멍으로 맥없이 무너지기 마련. 현이 틈을 보인 이상 그 틈은 점점 넓어져 종내는 황권을 무너뜨릴 것이었다.
“혹, 그 여인이 소녀인가요?”
별안간 들려온 또렷한 목소리에 생각에 잠겨 있던 현이 움찔 놀라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던 것인지, 검은 눈동자가 똘망한 빛을 발하며 문틈으로 빼꼼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깼느냐?”
대답 대신, 문을 열고 걸어나온 화연이 의자를 당겨 현의 옆에 앉았다.
“목 말라요.”
화연은 현이 건네준 물잔을 받아 쭉 마신 후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빈 잔을 다시 그에게 건네었다. 화려한 물잔이 조심스레 탁자에 놓이는 것을 바라보던 화연은 두 발을 의자 위에 올리고 무릎을 안아 조그맣게 웅크렸다.
“추우냐?”
“아니요.”
“헌데 어찌 그러고 있느냐.”
“이러고 있으면 생각이 잘 굴러가는 기분이에요. 폐하도 해보세요.”
그리 말하는 분홍빛 입술이 귀여워, 꽉 깨물어버리고 싶다. 현은 또 망할 양물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끼며 화연을 따라 의자 위에 웅크렸다.
“무슨 생각을 굴리느냐?”
“제가 총기를 흐리는 것을 어찌할까, 하는 생각이요.”
“그래서. 좋은 생각이 났느냐?”
“음… 잠시만요.”
화연은 정말 무언가 생각하는 듯, 무릎 위에 조막만한 머리통을 턱 올리고 허공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주홍빛 등잔불이 비추는 그 옆얼굴이 어찌 이리 현의 마음에 꼭 드는지.
“이리 쳐다만 보다 날이 새어도 좋겠구나.”
“지금 말 걸지 마세요, 폐하.”
허나 화연은 냉정했다. 그의 말을 똑 잘라 끊은 그녀가 계속해서 허공을 바라보는 동안 현은 그저 입가에 흐뭇함을 물고 고운 옆얼굴을 정신없이 구경했다. 조금 전까지 황권을 고민하던 생각은 화연이 나타나자마자 연기처럼 사라지고, 대신 저 어여쁜 입술을 어찌하면 한번 더 먹어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 폐하!”
자리에서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침상으로 데려가야지. 야무진 계획을 세우던 현이 화연의 목소리에 또 화들짝 놀랐다.
“왜, 왜?”
“제가요, 이래 보여도 한 총기 하거든요.”
“... 그래서?”
화연은 접었던 무릎을 펴서 땅에 발을 내려놓고 허리를 바로 세웠다.
“헌데 폐하께서 저를 은애하시느라 총기가 흐려지시잖아요.”
“그렇지.”
“그러니까, 제가 폐하의 생각을 대신 해 드릴께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현이 눈썹을 약간 찌푸리고 멍하니 있는 동안 불끈 일어섰던 양물마저 다시 가라앉는 기적이 일어났다.
“네가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할 셈이더냐?”
“음… 지금 폐하께선 무슨 고민을 하세요?”
“너.”
“빼구요.”
현은 싱긋 웃으며 아까 놔두었던 물잔에 다시 물을 따라 마셨다. 참으로 섬세하게도, 화연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에 고대로 제 입을 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양이가 한 마리 있는데, 웬 독사 한 마리가 고양이를 물어뜯으려 하였지. 해서 고양이가 그 독사를 잡으러 갔건만 잠시 한눈 판 사이 발톱이 닿지 않는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다.”
한 마리 범이라 일컫기에도 모자란 천자가 고양이라니, 참으로 체면 구겨지는 비유가 아닐 수 없다. 허나 한낱 계집의 물시중까지 드는 천자라면 고양이에 비하기에 알맞지 않겠는가.
“숨은 곳을 불태울 수는 없나요?”
“아직은.”
무언가 집중하여 고민할 적에 화연은 입술을 삐죽 내미는구나. 새로이 알게 된 그녀의 습관에 현의 마음이 흐뭇하다.
“뱀을 반드시 고양이가 잡아야 하나요?”
“음… 반드시 그러하진 않다.”
누가 민 첩여를 죽이든 상관없는 일이다. 허나 그 일을 할 사람이 자신 외에 또 누가 있단 말인가.
“허면 다른 뱀을 그곳에 들여보내어 대신 잡으면 되지 않을까요?”
“다른 뱀?”
“네. 무릇 뱀이란, 질투가 많고 음험하여 설령 동족이라 하여도 가차없이 물어뜯는다고 합니다. 허니 좀더 힘이 센 뱀을 잡아넣으면….”
“먼저 들어가 있던 뱀을 죽이겠구나.”
“네, 폐하.”
어찌 그 생각을 못하였을까. 꼭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더라도, 후궁끼리 서로를 시기하다 결국 죽고 죽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지금까지 현이 그 누구에게도 성총을 주지 않았기에 잊고 있었으나, 후궁들간의 암투란 꽃이 떨어지면 열매가 열리는만치 당연한 일이었다.
“참으로 내 생각을 네가 대신 해주었구나.”
“제가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소문이 자자했거든요. 아마 사내로 태어났다면 벌써 관직 하나 꿰어찼을걸요?”
“그래, 하고 나는 정녕 남색이 되었겠지.”
“남색… 이요?”
“그런 것이 있다. 다시 들어가 자거라. 시각이 늦었다.”
더 말을 잇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난 화연이 쪽방 문을 열었다. 침상은 여전히 조그마했으나 현이 황제에게나 올라갈 듯한 비단금침을 올리라 지시한 탓에 무척이나 폭신하고 부드러웠다. 그 위에 눕자마자 다시 몰려오는 졸음에, 화연은 크게 하품하고는 눈을 감았다.
“뱀… 뱀이라.”
다시 고요가 찾아온 침전에서 현이 나직히 뇌까렸다. 별처럼 많은 후궁이라 하나 모다 태후의 손으로 뽑아 올린 계집뿐이다.
허나 딱 한명, 얼결이긴 하나 제 손으로 뽑아올린 후궁 또한 분명 있었다. 화연과 후원에 산보 나갈 적에 마주쳤던 후궁을 떠올린 현의 입가가 만족스레 비틀려 올라갔다.
“필두 게 있느냐.”
“예, 폐하.”
“윤 재인의 처소에 연통을 넣어라. 내 지금 걸음하겠노라고.”
“송구하오나 폐하, 재인마마의 처소에 직접 가신다 말씀하시옵니까?
“그렇다. 즉시 준비하여라. 흑운, 예서 지켜라.”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 하였겠다. 현은 벌떡 일어나 대강 의관을 추스리고 필두를 앞세워 침전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