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친놈이었다. -->
“무어라? 폐하께오서?”
깊은 잠에 빠졌던 윤 재인의 침소가 소란스러워졌다. 후궁을 월화궁으로 불러들일망정, 절대 처소로는 걸음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그런 폐하께서 어찌 이 한밤중에 직접 걸음하신단 말인가? 윤 재인은 목욕재계할 시간도 없이 허둥지둥 물수건으로 몸과 낯을 닦고 단장했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입술에 막 홍화를 물들임과 동시에, 바깥에서 환관장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황제 폐하 듭시오!”
연통 보내자마자 바로 왔건만, 거의 완벽하게 단장을 마친 윤 재인의 모습에 현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대신들이 이 정도로만 빨리빨리 움직여도 일이 반은 줄겠구나.
“곱구나.”
“황공하옵니다.”
다정하게 건네는 옥음에 윤 재인이 살짜기 뺨을 붉혔다. 참으로 잘나고 또 잘나신 분이시다. 이런 분께서 밤중에 예까지 걸음하시다니, 역시 지난번 마주쳤을 적에 저를 눈여겨 보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어허, 짐은 그 황공 소리 가장 싫어한다 하지 않았느냐. 여봐라, 밖에 있느냐?”
“예, 폐하.”
“술상을 봐오너라. 내 오늘 재인과 더불어 술 한잔 하고 싶구나.”
곧 은은하게 타오르는 향촉 아래 정갈한 술상이 놓였다. 황공하옵게도 폐하께서 친히 술병을 들어 후궁의 잔을 채워주시니, 윤 재인은 몸둘 바를 모르고 그것을 받아 살그머니 앞에 놓았다.
“신첩도 한 잔 드리겠나이다.”
“아니아니, 되었다. 그리 고운 손으로 어찌 무거운 것을 들려 하느냐.”
그 따스한 말 속에는 화연에게만 술을 받고 싶다는 뜻이 숨어 있었으나 윤 재인이 그를 알 리 없다. 이제는 귀까지 붉게 물든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술잔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동안 제 술잔을 반쯤 채운 현이 그것을 들어올려 살짝 흔들었다.
“술은 좀 하느냐?”
-술도. 가장 좋은 것으로.
“그저 몇 잔 하옵니다.”
-저… 술 먹어본 적 없는데요.
“그래? 그만하면 되었다. 편히 마시거라.”
-그래? 허면 이 또한 처음이군.
술이 채워지는 순간 후궁의 내실은 허름한 국밥집이 되고, 앞에 놓인 정갈한 안주들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국밥이 되었다. 그리고 투명하리만치 맑은 술은 붉은 과실주로 변해 현의 입 안에 흘러들어갔다.
-어? 달아요!
할짝, 조심스레 맛을 본 화연이 눈이 동그래져서 외치곤 그대로 잔을 입에 털어넣었다. 현이 슬쩍 떠올리는 미소에 윤 재인의 가슴이 쉼없이 동동거린다. 자신이 비운 잔을 다시 채워주는 손, 그 위에 솟은 힘줄조차 그 설레임에 제몫을 보태고 있었다.
**
현이 나가고 난 후 흑운은 잠시 자신이 있던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사방이 고요로 잠든 가운데 이 거대한 침전에는 그와 화연, 단 둘뿐. 문지기의 순번을 헤아려보니 마침 그다지 힘든 상대는 아니다. 생각과 행동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화연이 잠들어 있는 방문을 당겨 여는 흑운의 손에 망설임이란 없었다.
"아씨."
가만히 불러보았으나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그에게 답한다. 흑운은 잠시 숨을 깊이 들이쉰 뒤 화연의 어깨에 손을 대었다. 그 어떤 순간에도 흐트러진 적 없었던 심장이 아래위로 격하게 날뛰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어깨를 살짝 흔들며 다시 한번 아씨, 하고 불러보았으나 화연은 얼굴을 약간 찌푸리며 돌아누울 뿐 일어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실례하겠습니다."
흑운은 화연의 목과 베개 사이에 팔을 집어넣고 조심스레 안아 일으켰다. 그제서야 내리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천천히 들어올려져 아직도 잠에 절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일어나십시오. 지금밖에 기회가 없습니다."
"... 뭘요?"
허리에 힘을 주고 몸을 바로 세우던 화연의 머리가 잠시 넓은 가슴에 기대어졌다. 쿵쿵쿵쿵, 아까보다 더욱 거세게 뛰는 심장은 이제 터져버릴 것만 같다. 흑운은 제 팔 안에 화연을 꼭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작은 어깨를 잡아 등을 조금 세게 두드렸다.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폐하께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그런데요?"
"떠나십시오. 침전에 그림자만이 지나는 비밀 통로가 있습니다."
조급함마저 느껴지는 흑운의 목소리와 달리 화연은 여유롭게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하품을 했다.
"아니요. 안 가요."
"저 때문이라면 함께 가겠습니다. 허니...."
"흑운 님 때문이 아니에요. 제 의지로 여기 있겠다 말씀드렸어요."
"어째서입니까."
흑운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화연을 내보내고 싶었다. 그 전에는 그저 화연을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면, 그래. 투기였다. 졸렬한 투기로 점점 가까워지는 두 사람을 떼놓고 싶었다. 허나 그는 감정이라는 단어의 의미조차 알지 못했기에 그저 혼란에 빠져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폐하께서 저를 은애하십니다."
"그렇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흑운이 기껏 일으켜놓은 화연의 몸이 다시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화연은 흑운을 향해 돌아누워 이불 속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는 늘, 제가 사내였으면 했어요."
이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그녀의 말은 묻지 않아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부모님과 가문에 도움이 되고 싶었거든요. 허나 여인으로 태어나 할 수 있는 일이 무에 있겠어요. 그저 숨죽이고 살다 좋은 가문과 연 맺어 사돈 덕이라도 보게 해 드릴 밖에."
"양친께서는 그를 바라지 않으실겁니다."
화연이 이불을 조금 더 여미고 방긋 웃었다.
"제가 바랐어요. 헌데 그 작은 소망마저 일그러져, 되려 원수의 집안에 시집가게 되었지요. 지난번 도망했을 적에 제가 누구를 만났는지 아세요?"
"모릅니다."
웬 사내와 함께 있었다는 보고는 들었다. 허나 살기도 느껴지지 않았을 뿐더러 기운도 무척이나 미약하여, 그저 운 나쁘게 휘말린 자로만 알고 모른 체 하였다고. 괜스레 민심을 흉흉하게 할 필요가 없으니 올바른 선택이었다 생각하였다.
"그 분요. 제 지아비가 될 뻔 하셨던. 절더러 쫓기고 있느냐, 내 숨겨 주겠다 하시더군요. 이미 그 집안은 제가 황궁에 있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예서 나간다 한들, 저를 기다리는 것은 또 원수의 집안이란 말이에요."
"그 집안 또한 피하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저는 폐하의 마음을 이용할 거예요."
티 없는 눈동자가 반짝이며 해사하게 웃었다.
"사내가 아니기에 입신양명하여 가문을 빛내지는 못하였으나, 최소한 이전의 광영을 되찾도록 할 수는 있겠죠. 폐하께서 저를 은애하신다면 말이에요. 정인을 위해 무엇이든 기꺼이 내어놓는 것이 은애지정 아니겠어요?"
지금 자신이 베갯머리송사를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알고 있다기엔 그 낯이 너무나 순진하고, 모르고 있다기엔 너무나 구체적인 계획에 소름마저 끼칠 정도였다. 화연은 달콤한 말로 황제를 꼬여내 정사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도 있고, 심지어는 침전에서 그를 직접 죽일 수도 있었다. 혜국을 통틀어 가장 위험한 여인이다. 그녀가 누구도 아닌 바로 그의 앞에서 해사하게 웃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한 이야기를 어찌 제게 하십니까."
"흑운 님을 믿으니까요."
"... 잘 들으십시오, 아씨."
눈을 감은 흑운이 이마를 한번 쓸어올리고는 다시 화연을 마주보았다.
"황궁에 믿을 수 있는 이란 그 누구도 없습니다. 저 또한 그렇고, 전 상궁도, 환관장도 물론. 황궁은 그런 곳입니다."
"네."
천진난만하게 대답한 화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반듯하게 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우나, 흑운은 그 동작을 이만 나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는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흑운 님."
"예."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흑운은 사방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짧게 대답했다.
"고마워요. 신경 써 줘서. 잊지 않을게요."
흑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뒤로 돌아선 시선에 화연이 가득 담기었다. 어느 새 다시 일어나 앉은 화연의 말간 웃음은 그 어느 날처럼 온전히 흑운만을 향하고 있었다. 몸은 그대로 홀린 듯 움직여 강인한 팔 가득히 화연을 끌어당겨 안았다.
"이만 놓아주세요."
흑운의 생에서 가장 감정이 요동치던 순간은 단 일각도 되지 않았다. 가슴팍을 밀어내며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꿈은 깨어지고, 화연의 곁을 떠난 흑운은 다시 자신이 있을 자리로 돌아가 기척을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