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국의 달 -->
"안 드세요, 폐하?"
차와 다과는 먹을 생각도 없는 듯, 화연만 바라보던 현이 그제서야 꿀에 절인 앵두를 하나 집었다.
"차가 별로인가요? 손도 안 대시네."
"아까워서. 네가 처음으로 끓여준 차가 아니냐."
뭐만 하면 처음, 처음, 처음. 대체 왜 처음에 이리 집착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화연은 한숨을 폭 쉬고는 현의 손에 억지로 찻잔을 쥐어주었다.
"허나 이리 안 드시면 결국 버리잖아요. 제가 또 해 드릴께요."
그제서야 현이 찻잔을 받아들고 한 모금을 마시더니 빙그레 웃으며 내려놓았다.
"참으로 맛이 좋구나. 또 무엇을 잘 하느냐?"
"음... 사실 수는 잘 못 놓고요. 글씨는 잘 써요. 그림도 그릴 줄 알고요."
"글씨와 그림?"
현은 내심 놀랐다. 그저 팔랑팔랑 놀러다니기 좋아하는 왈가닥인줄만 알았는데, 글씨와 그림이라니.
"허면 서책도 좀 읽느냐?"
"그럼요. 제가 오자마자 책부터 찾아 읽는 것 못 보셨어요?"
"허나 그건... 서책이라기엔 조금...."
화연이 읽던 가마수두라는 한 면이 글씨요, 한 면이 그림으로 되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그림책에 가까운 것이다. 게다가 그 내용마저 그다지 바르지 아니하다.
"거기 있는 책은 다 그런 것이었는걸요. 패설이나 가마수두라밖에 없었어요."
"아, 그렇구나."
현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화연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허면 오늘 내 서고에 가겠느냐? 네 읽고 싶은 책 모조리 가져와도 좋다."
"그것이 참입니까?"
"그럼. 보자, 석수라 들고 가면 되겠구나."
"그때는 석강 가셔야지요."
"하루쯤 가지 않아도 된다."
휘장 뒤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흑운은 기가 찼다. 베갯머리까지 접근하지 않더라도 화연이 당장 말만 하면 황제는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줄 기세였으니. 허나 또 다르게 생각해 보면 자신이 황제라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듯 하다. 제발 화연이 상식을 벗어나는 청만 올리지 않기를 바라는 수 밖에. 흑운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화연은 고개를 저으며 현을 말렸다.
"그래도 석강은 가셔야 해요. 벌써 며칠째 빼먹으셨잖아요."
"허면 석강 빨리빨리 마치고 가자꾸나."
대답은 없었으나 방긋 웃으며 다시 당과 하나를 입에 넣는 것이 만족한 모양이다. 현은 그 입가에 묻은 꿀을 손으로 훑어 제 혀로 할짝 핥았다. 달다. 본디 단 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 현이었으나 이 단맛만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아, 폐하."
"그래."
"어젯밤에 어디 다녀오셨어요?"
현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간 그대로 굳었다.
"잠시 바람이나 쐴까 하고... 후원에 나갔다 왔지."
"아침에 술냄새가 나던데요."
현은 바쁘게 머리를 굴렸으나 마땅한 변명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정전에서는 그리 영민하게 돌아가던 머리가 왜 지금은 텅 빈 기분이지. 그가 식은땀을 흘리는 동안 화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언가 이상한 현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월화궁 다녀오셨어요?"
"화연아, 잘 들어라."
현은 결국 변명을 포기하고 화연에게 솔직히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타는 목을 차 한 모금으로 축이고 나머지 말을 꺼내려 입을 열었으나, 눈앞에서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화연의 모습에 그만 말이 탁 막히었다.
"안 들을래요. 말하지 마세요."
"그것이 아니라...."
"이 궁 안의 모든 여인이 폐하의 것이라면서요? 제 것 제가 만지겠다는데 누가 무어라 하겠어요."
지난번 그가 한 말을 가슴에 담아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현이 어깨를 살살 토닥이며 달래 보았으나 화연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곁방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옷 갈아입을께요. 폐하도 차비하세요."
***
정전에 모인 대신들은 지루함을 감추지 못하고 열을 지어 서서 황제를 기다렸다. 이제 지각이 아주 일상이다. 황상께서 고 환관에게 아주 푹 빠지신 모양이오, 하고 수군거리던 그들은 무섭게 노려보는 우승상의 눈빛에 찔끔하여 입을 닫았다.
"황제폐하 납시오!"
이제는 들어서는 황제보다 그 뒤를 따르는 환관에게 더욱 시선이 모여든다. 현은 그것이 못마땅하여 자리에 앉자마자 괜히 큰 소리로 호통부터 쳤다.
"짐이 늦으면 늦으시구나 하고 안건부터 준비를 해 놓아야지! 이리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무슨 조강을 치른단 말인가!"
"황공하옵니다, 폐하!"
대신들의 고개가 땅을 향해 수그러들고, 그제서야 화연은 그녀에게 꽂히는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태도를 바꾸어 서안 위에 놓인 두루마리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싸늘한 긴장감이 대신들의 머리 위를 맴도는가 하였더니, 곧 지나치게 잔잔한 옥음이 그 긴장감을 파고들었다.
"황제가 남색에 빠져 국정을 게을리하고, 그나마도 그 상대에게 모든 것을 논의하여 한낱 환관이 국정을 마음대로 농단한다. 이것이 혜국에 망조가 든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오. 부디 폐하께오선 굽어 살피시어 충언에 귀기울이소서."
"망극하옵니다, 폐하!"
"우승상, 내게 올라오는 안건들을 미리 검토하는 것이 그대의 일이지."
"그렇사옵니다, 폐하."
"헌데 감히 이딴 상소가 내 서안에까지 올라오게 만들어!"
현이 집어던진 두루마리가 우승상의 이마에 정확히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목숨을 건 충언이옵니다. 신하 된 자로서 어찌 단 말만 올리고 쓴 말은 없애리오까."
실로 그러했다. 피 끓는 새내기 관리가 올린 상소였으나, 그것을 본 우승상은 얼씨구나 하며 무릎을 탁 쳤더랬다. 이 여론을 몰아가면 황제는 어쩔 수 없이 화연을 멀리 떼 놓을 것이고, 허면 그 틈을 타 그녀를 처리할 수 있으리라. 찢어진 이마의 통증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늘 번지르르 말은 잘 한단 말이야. 이것을 쓴 자를 내 앞으로 잡아오라."
"그것을 올린 자는 소신이옵니다, 폐하!"
"... 고개를 들라."
수많은 대신들 가운데 앞으로 나서는 젊은 관리가 낯이 익다. 기억을 더듬던 현은 이윽고 그가 우승상의 혼례를 고했던 자임을 깨닫고 설핏 미소를 띄우다가 다시 엄격한 얼굴로 돌아왔다.
"호부좌랑 표 태준이옵니다."
필두가 귀엣말로 사내의 정체를 황제에게 알려주었다. 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것을 말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은 태준은 용감하게 충언을 이어갔다.
"작금 황궁 안은 물론이옵고, 민가의 백성들까지도 이 망극한 소문을 입에 담고 있사옵니다.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 할지언정...!"
"사실이 아니라고, 누가 그러던가?"
현이 삐뚤게 웃으며 팔을 뻗어 화연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하마터면 헉,하고 소리를 지를 뻔 했던 화연이 간신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동안 대신들은 머리를 땅에 박아 그 장면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 중 단 한명, 표 태준만이 당당하게 서서 현을 똑바로 바라볼 따름이었다.
"사실이다. 내 하필이면 이 환관놈에게 푹 빠져 밤이고 낮이고 아랫도리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느니."
"폐... 폐하!"
민망스러운 언사에 대신들은 경악하며 폐하, 망극하옵니다, 황공하오나, 등등의 말들을 두서없이 쏟아놓았다. 현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연을 감싸안고 그대로 문을 향해 걸었다.
"아, 호부좌랑."
"예, 폐하."
"너는 황제궁으로. 감히 짐의 앞에서 허튼 소리를 지껄인 죄는 갚아야지."
말을 마친 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연과 함께 정전을 빠져나갔다. 뒤에 남은 대신들은 그가 앞마당을 벗어난 후에야 비탄에 찬 한숨을 내뱉으며 저마다 머리를 싸쥐었다.
**
"폐하, 호부좌랑 들었사옵니다."
"들라 하라."
잔뜩 긴장한 표정이나 기개만은 꼿꼿한 젊은 관리가 안으로 들어섰다. 현은 의자에 편히 기대어 앉은 채 예의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를 맞았다.
"호부좌랑 표 태준,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흑운."
인사를 받는 대신 조용히 흑운을 부르자 눈 깜짝할 사이 시퍼런 칼날이 그의 목 아래 놓였다.
"네놈이 올린 상소가 무슨 내용인지는 알고 있겠지. 지금이라도 바닥에 엎드려 용서를 빈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싸늘한 옥음이 태준의 등줄기를 훑어내린다. 눈을 감고 침을 꿀꺽 삼킨 그는 바닥에 엎드리는 대신 목을 길게 늘여 칼날에 가져다 대었다. 잘 벼려진 날이 닿은 목에서는 금세 선홍빛 피가 관복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신하 된 자가 어찌 목숨을 구걸하고자 충언을 마다하리오. 신 표 태준, 어심을 어지럽힌 죄를 죽음으로 달게 받겠사옵니다."
"그래? 쳐라."
휙, 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흑운의 칼이 허공을 가른다. 그 짧은 순간, 태준은 눈을 감고 지금까지 살아온 생을 속으로 더듬었다. 가난하지만 청렴한 집안의 장자로, 남들 다 하는 음주가무 한번 해보지 못하고 불철주야 공부한 끝에 당당하게 관복을 입었다.
없는 살림에 가장 좋은 비단을 사다 밤새 이 관복을 짓던 어머니, 칭찬 한 마디 없이 너는 이제 내 아들이 아닌 혜국의 아들이다. 그 한몸 불사질러 나라에 바치라던 아버지. 그래, 후회없는 삶이었다. 부모님께서도 정녕 이 불효한 아들을 자랑스러워 하시리라.
헌데 이상하다. 꽤나 긴 생각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목은 떨어진 것 같지가 않았다. 죽음이 오는 순간은 무척이나 길게 느껴진다던 말이 사실이었구나. 그리고 그 때, 큭큭 웃는 소리가 다시 그의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참으로 고지식한 자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