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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두 얼굴-44화 (44/152)

<-- 혜국의 달 -->

"참으로 고지식한 자로구나."

어느 틈에 의자에서 일어난 황제가 눈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얼굴을 살피며 웃고 있었다. 조금 전 목에 칼을 들이대던 흑복의 사내 또한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폐하...!"

"좀 앉지."

현이 의자에 앉으며 손짓하자 태준 또한 일어나 맞은편에 앉았다. 미리 준비된 정갈한 술상이, 황공하게도 그를 위해 준비된 것임을 알아챈 태준의 얼굴이 감격으로 물들었다.

"받거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아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 황은 소리 무척 싫어한다."

"망극하옵니다, 폐하."

"망극도."

"예... 폐하."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태준이 술을 받아들자 현 또한 술병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똑같이 따라진 두 술잔이 석 잔째 비워졌을 때, 싱글싱글 웃으며 그를 바라보던 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식솔이 어찌 되느냐."

"양친 이하 남동생이 둘 있사옵고, 아버님께선 표 유자, 한자 되시옵니다."

어디서 많이 들은 이름인데. 기억을 더듬던 현의 머리에 문득 한 사내가 떠올랐다.

"태사... 표 유한? 그이가 네 부친이라고?"

"기억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태자태사. 태자를 곁에서 보좌하는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으나, 어찌 된 일인지 임명되자마자 몇 번 마주치지도 못하고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환관에게 슬쩍 물어본 바로는 그저 건강상의 연유로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하였다 들었건만, 그의 아들이라니.

"내 태자 시절 분명 그이를 보았다. 건강이 좋지 아니하여 낙향했다 들었는데."

현의 질문에 태준이 잠시 멈칫하였다. 허나 이미 목숨 내놓고 충언을 올리기로 결심한 몸이니, 황제께서 하문하시는 무엇이라도 곧이곧대로 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버님께선 무척이나 강골이시옵니다. 신이 알기론, 한겨울에 홑옷을 입으시고도 감모 한번 오지 아니하십니다."

그리 말하는 눈빛에 기개가 꼿꼿한 것이 거짓은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거짓으로 고할 일이 아니기도 하고. 또 그 망할 세력 싸움이구나. 현은 씁쓸하게 웃으며 다시 술 한 잔을 부었다.

"우승상에게 밉보였겠군. 그렇지?"

"황공하옵게도, 아니... 송구스럽습니다만 그러하옵니다."

아들이 이 모양이니, 그 아비가 얼마나 꼿꼿하고 고지식한 자인지는 안 봐도 훤하였다. 부러 아무 세력도 없는 이를 태사로 붙여 자신의 힘을 약화시키려 하다가 뒤늦게 그의 성품을 깨닫고 압박하여 잘라내었겠지. 현은 우승상에게 두루마리가 아니라 칼을 던져버리지 못한 것을 아쉽게 여겼다.

"이왕 목 잘라내기로 마음먹은 판이니 더 말해보아라. 현재 짐의 나라가 어찌 돌아가고 있느냐?"

"폐하께오서 다시없는 성군이시니, 혜국 또한 더없이 부유하고 굳건하옵니다. 허나 근래 들어...."

"남색?"

"그러하옵니다. 폐하께서 남색에 빠져 정무를 게을리하시는 동안 벌써 썩는 부분이 발생하고 있사옵니다."

허 참, 현이 코웃음을 쳤다. 게을리하면 얼마나 게을리하였다고, 또한 그 기간이 오래되면 얼마나 오래되었다고 벌써 썩어들어간단 말인가. 역시 그간 나라가 문제없었던 것은 옥체 버려가며 밤낮없이 대신들을 굴려 썩을 틈도 없도록 만든 덕이었던게다.

"호부좌랑이라. 젊은 나이에 꽤나 출세하였군. 나라 예산 어디로 새는지는 꿰고 있겠어."

"등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그리 잘 알지 못하옵니다."

"그래... 앞으로 잘 알면 되는 것이고. 서 환관."

느닷없이 황제가 뒤를 돌아보며 환관을 부르자, 벽에서 문이 열리더니 조그마한 환관 하나가 튀어나왔다.

"아니, 저... 저!"

"너무 놀라지 말거라."

눈이 커다래진 태준이 황망히 말을 더듬는 동안 환관은 어느 새 가까이 다가와 황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일개 환관 따위가 황제의 곁자리에 앉다니, 심지어 앉으라는 말도 없었는데! 태준의 표정이 시시각각 분노와 경악과 허탈을 오가는 것을 흥미롭게 구경하던 현은 크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잘 보아라. 여인이다. 혜국의 황후가 될 여인이니라."

"예, 예?"

이제 태준은 턱이 바닥까지 떨어져 매우 바보같이 보였다. 그 모습에 화연은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만 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허면... 남색이 아니라...."

"사내라면 질색이다. 손끝도 닿기 싫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느낌에 현은 얼굴마저 한껏 구기며 손사래를 쳤다. 이것을 기뻐해야 할지, 개탄해야 할지. 태준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어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영감. 서가 화연이라 합니다."

"호부좌랑... 표 태준이라 합니다."

얼결에 통성명을 하고 보니 그 목소리가 환관의 것이 아닌 여인네의 목소리였다. 게다가 서가 화연이라, 분명 이름까지 밝혔겠다. 의심할 바 없는 여인네임에 분명하다. 서가 화연, 서가, 서가. 황후가 될 만한 귀족 가문의 서가라면 태준이 아는 한, 단 하나밖에 없었다.

"서 이흥 대감의...? 허나 그 집에 하나 있는 여식은...."

"시집가다 가마째로 벼랑에 굴러떨어져 죽었다지."

끄덕끄덕끄덕. 태준은 차마 그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어 열심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 벼랑에 떨어진 것을 내가 주웠다. 지금은 이리 숨겨두고 있으나 곧 불온한 세력들을 몰아내고 나면 황후의 자리에 앉힐 여인이지. 그러기 위해서는 내 사람이 필요한데, 어떤가. 짐의 손발이 되는 것이?"

어느 새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운 용안에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황제의 위엄이 넘쳐흐른다. 잠시 그 말뜻을 정리한 태준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의 발 아래 엎드렸다.

"신, 표 태준.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나이다."

"이제 나가보거라. 필요한 일이 있을 적에는 흑운이 네게 갈 것이다."

현은 벌떡 일어나 길게 읍하고 나가는 태준의 뒷모습이 듬직하다 생각하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첫발이다. 그간은 그저 가지 정도 쳐낼 생각이었으나, 이제 지켜야 할 사람이 생긴 이상 그 뿌리까지 단번에 뽑아내고 말리라.

"와... 멋지세요."

"참으로 그러하더냐?"

"네. 무척 성군같았어요."

"내 입으로 말하기는 쑥스럽다만, 짐이 좀 그렇긴 하지."

조금 전까지 위엄이 넘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화연의 칭찬 한 마디에 완전히 풀어진 현은 하늘까지 치솟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내리며 은근슬쩍 자기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

"폐하께선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알 수가 없소이다!"

깊은 밤, 우승상의 별채는 때아닌 손님들로 가득 찼다. 그 중에는 회임한 민 첩여의 양아버지인 민 대감 또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오가는 대화들을 경청하는 중이었다.

"남색이라니, 게다가 지엄한 정전에서 아랫... 하, 입에도 담지 못하겠소!"

그들끼리 침을 튀겨가며 한 목소리로 황제를 이리저리 요리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우승상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 작은 동작 하나에 시전바닥마냥 소란스럽던 장내가 삽시간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말씀들이 과하오. 어찌 그리 망극한 언사들을 입에 담으시오?"

"소, 송구합니다, 대감."

"아니아니, 내 다 이해하외다. 다 대감들께서 나라를 걱정하는 충심으로 하는 말씀이 아니겠소?"

"아무렴요. 지당하신 말씀이외다."

우승상의 뱀 같은 눈이 좌중을 한번 훑고는 상석을 차지한 민 대감에게 가서 멈추었다.

"우리 민 첩여께서 태몽을 꾸셨기로, 글쎄 집채만한 범이 치마폭에 뛰어들기에 놀라 깨셨다지 않소. 게다가 그 치마 색깔이...."

조금 낮아진 그의 목소리를 들으려 대신들이 목을 길게 빼고 귀를 기울였다.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하오!"

허어, 대신들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나왔다. 붉은색. 오직 황후와 태후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색이 아닌가. 게다가 범이라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황자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그들의 귓가에 들리는 듯 하였다.

"혹, 산달이 얼마나...."

"여덟 달이 남았소이다."

그간 대화에 참여하는 대신, 짐짓 점잖은 체 수염을 쓰다듬던 민 대감이 드디어 한 마디를 던졌다.

"차차 준비를 해야겠구려. 황자를 맞을 준비를."

크하하하, 떠들썩한 웃음이 터지며 저마다 지금 황제가 얼마나 불민하고 방탕한지에 대해 입방아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 목소리들은 우승상이 한 권의 책을 서안 위에 올려놓자마자 다시 기어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별건 아니오. 우리가 한 배를 탔음을 증명하기 위한 것일 뿐. 혹시라도 이 중 술이 취하면 저도 모르게 헛소리를 한다거나... 그런 분이 있을 수 있지 않겠소?"

능글능글 웃던 우승상이 직접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갈았다. 조용한 방 안에 스윽 슥, 먹 가는 소리와 꿀떡꿀떡 침 삼키는 소리만이 울려퍼진다. 이윽고 투명하던 물이 찐득한 먹으로 변하자 우승상은 붓을 들어 맨 첫장에 자신의 이름을 쓰고 수결을 남겼다.

"저, 대감... 아직 복중 용종이 황자라는 보장도 없는데 이건 좀...."

누군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꺼낸 말에 다들 동조하는 듯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보장이 없다, 누가 그럽디까?"

"아니, 산달도 여덟 달이나 남았고...."

"황자요. 무조건 황자외다. 민 첩여께서 지금 어디에 기거하고 있는지 모르시오?"

그 엄청난 말에 간이 작은 몇몇은 얼굴이 새파랗게 얼어붙었다. 태어날 아기가 무조건 사내아이거나 반대로 무조건 계집아이일 수는 없으니, 저리 확언을 한다는 것은....

"내 이 자리 잘못 온 것 같소이다! 그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대신들의 뒷덜미를 우승상의 서늘한 목소리가 휘어잡았다.

"허면 처음부터 오지를 말았어야지."

그들이 손을 대기도 전에 열린 문 앞을 가득 메운 흑복의 사내들. 저마다 허리춤에 칼을 차고 복면을 한 모양이 여간 흉흉하지 아니하다. 돌아서던 대신들은 그제서야 줄을 잘못 서도 제대로 잘못 섰음을 알아차렸으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곧 우승상이 내놓은 빈 서책은 모인 대신들의 이름과 수결로 빼곡히 채워지고 말았다.

"혹시 모르니 이것은 이 사람이 가지고 있겠소이다. 조심히들 가시오."

처음의 들뜬 표정과 달리 차갑게 굳은 표정의 대신들이 주변을 살피며 우승상의 집을 나섰다. 그 와중 민 대감은 무슨 이야기를 그리 하는지, 별채에서 우승상과 단 둘이 술잔을 기울이다 새벽달이 뜨고서야 제 집으로 돌아가 누웠다. 탄탄대로. 일만 잘 풀린다면 그는 시시한 벼슬자리 정도가 아닌, 황제의 외숙 자리를 꿰어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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