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씹어 먹고 싶다. -->
"이제 신첩이 싫어지셨습니까?"
"그럴 리 있겠느냐. 이리 고운 너를."
쓸쓸하게 웃는 황제의 미소가 유난히도 아프게 느껴진다. 윤 재인은 팔을 뻗어 술잔을 쥐고 있는 어수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허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사내이기 이전에 이 나라의 천자니라. 이제 네게 줄 마음을 거두어 회임한 여인에게 주어야 할 터인데, 내 이리 또 너를 찾아오고 말았구나."
우수에 젖은 눈빛과 낮은 목소리는 여인의 마음을 세차게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윤 재인의 상상 속에서 어느 새 황제는 악독한 술수에 의해 마음에도 없는 여인과 혼례를 올리는 가엾은 사내였다.
허니 민 첩여는 온갖 술수를 부려 사내를 차지한 악녀가, 자신은 그가 세상에 둘도 없이 은애한 정인이 되는 것은 당연지사.
"폐하...."
현이 다시 술병을 들어 술잔을 차례로 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 재인을 품에 따뜻하게 감싸안는 그의 손에서 미량의 가루가 술잔 속으로 떨어져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그 와중에도 언젠가 화연을 이리 안아 주었던 기억은 현을 미소짓게 만들었다.
"어심이 번다한 정도가 아니다. 찢어질 듯 괴롭구나."
쿵, 쿵, 힘차게 뛰는 맥박이 귀를 타고 윤 재인을 지배한다. 그녀는 괴로워하는 황제로 인해 함께 찢어지는 마음을 달래고자 현이 건네준 술잔을 단번에 비워버렸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던 두 입술이 마침내 맞닿으려는 순간, 머리를 툭 떨구었다.
"... 휴우."
하마터면 진짜 닿을 뻔 했네. 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윤 재인을 들어올려 침상에 풀썩 내려놓았다. 빨리빨리 해버리고 화연이 기다릴 침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니 손이 저절로 빨라진다.
다급하게 옷을 벗겨내고 드러난 젖가슴을 빨아 흔적을 남기던 현은 문득 머리가 몽롱해짐을 느끼며 동작을 멈추었다. 천천히 들어올린 시선에 똑바로 뜨고 있는 윤 재인의 시선이 맞물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는 몸을 툭 떨어뜨리고 정신을 잃었다.
"폐하?"
지난번 만취하여 기억을 잃은 것이 너무나 아쉬워, 오늘은 술이 취한 척 연기했다. 적당히 잠든 척 하다 일을 시작하실 때 즈음 일어날 생각이었다. 시작은 좋았으나 오늘은 폐하께서 술이 과하셨던 듯, 일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잠이 드신 것이다.
윤 재인은 아쉬운 마음에 황제를 불러도 보고 흔들어도 보았으나 이미 수면약을 마신 현은 그녀가 무슨 짓을 하여도 일어나지 못했다.
***
"화연아, 나 좀 보거라."
".......”
현은 약기운이 무척이나 잘 들었던 탓에 조수라 시각까지 훨씬 넘기고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등골이 오싹해져 윤 재인에게 인사를 건네는 둥 마는 둥 다급하게 달려왔으나 이미 늦었다. 화연은 밤새 몇 번이나 깨어 현이 돌아왔는지 확인하고 다시 잠을 청하길 반복했으니. 그리고 아침해가 떠올랐다.
“내가 다른 짓을 하느라 못 온 것이 아니다.”
“곤합니다.”
조심조심 어깨를 두드리는 현의 손을 탁 쳐낸 화연이 딱딱하게 내뱉았다. 다른 후궁 찾은 것까지는 참으려 했다. 그래, 천자니까. 납득도, 이해도 가지 않았으나 애써 그리 생각하려 하였다. 헌데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다니. 설마하니 이럴 줄은 몰랐다.
“깜빡 잠이 들었다니까.”
“불면증이라면서요. 못 주무신다면서요.”
“정말로 잠만 잤느니. 아무 일도 없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부렁 하세요!”
참다참다 폭발한 화연은 벌떡 일어나 현의 옷깃을 잡아 제쳤다. 온통 분 냄새 풍기며 얼굴엔 연지자국까지 남겨가지고 와 놓고, 잠만 잤다고?
“이건 뭔데요. 여기 이렇게….”
말을 잇던 화연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결국엔 투둑 떨어져 내렸다. 눈앞에 드러난 가슴에는 여기저기 붉은 자국이 가득하니, 이것이 여인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 반응에 아래를 내려다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현은 반사적으로 옷깃을 빼앗아 꼭꼭 여미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니까!”
“나가세요!”
화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단단한 가슴에 마구 주먹질을 하다가 결국 축객령을 내리고야 말았다. 불길하다. 나가란다고 정말 나갔다가는 다시는 그를 봐주지 않을 것 같다. 현은 본능적으로 그를 깨닫고 밖으로 나가는 대신 화연을 꽉 끌어안아 팔 안에 단단히 가두었다.
“나를 못 믿는 것이냐?”
“네.”
그래... 그렇지, 못 믿겠지. 눈앞에서 다른 여인들과 교접까지 했던 사내인데. 현은 그 때의 자신을 발로 차고 싶다 생각하며 계속해서 화연을 토닥였다.
“너를 황후로….”
“됐어요. 필요 없어요.”
혜국 전체를 탈탈 털어도 황후 자리를 마다할 계집은 지금 제 품에 있는 이 서 환관밖에 없으리라. 하필이면 왜 너를 마음에 담아서 이 고생인지.
“정말 솔직하게 말하마. 후궁의 잔에 수면약을 타려고 했는데, 그 와중에 네 생각을 하다가 실수로 그만 내 잔에 타버렸다. 그래서 약에 취해 잠든 사이 후궁이 혼자 이리 만든 것이야.”
“아, 그것 참 말이 되네요.”
“거짓같긴 한데… 사실이 그러하다.”
화연은 붉어진 눈을 들어올리고 현의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찬찬히 생각해 보니 이렇게 속상할 일이 아닌 것 같다. 애초에 이 미친놈을 진정 은애할 생각도 없거니와 은애하지도 않으니까.
그래, 어느 후궁을 품고 어디서 잠을 자든 무슨 상관이람? 저가 나를 은애하지, 내가 저를 은애하나. 화연이 속으로 그 망할 은애라는 단어를 수도 없이 중얼대는 동안, 현은 속으로 성현들의 말씀을 외우며 벌떡 일어나는 분신을 힘껏 누르고 있었다.
"... 가요."
"어디를?"
"씻으러. 분 냄새 나요."
화연에게만은 말 잘 듣는 어린아이와 진배없다. 현은 당연히 따라붙으려는 궁인들을 눈짓으로 물린 뒤 앞장선 화연의 뒤를 따라 목욕간으로 들어섰다.
"옷 벗으세요."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화려한 목욕간에는 시중드는 이 하나 없이 현과 화연, 단 둘 뿐이었다. 그래서 현은 화연이 내뱉은 말에 마음껏 당황을 표현할 수 있었다.
"내가... 직접?"
"벗겨드려요?"
"당연하지."
참으로 당당하시구나. 현이 양 옆으로 팔을 벌리자 화연은 그를 노려보며 겹겹이 입은 옷을 하나씩 벗겨내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현의 눈빛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것은 울긋불긋한 가슴팍을 보기 싫어서이기도 하였다.
"들어가세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현이 순순히 목욕통으로 들어갔다.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니 약기운이 다시 올라오는 것 같다. 현이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는 동안 화연은 수건을 적셔 그의 목덜미부터 닦아내기 시작했다.
연지 자국은 쉽게 지워졌으나 실핏줄이 터져 생긴 붉은 자국들은 아무리 문질러도 지워지질 않는다. 속상하다. 이제 화연도 제 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너무너무 속상해서 미칠 것 같다. 부질없이 그 자국을 반복하여 문지르던 화연은 결국 수건을 내려놓았다.
"화연아."
"가만히 계세요."
조그마한 입술이 다른 여인이 남긴 흔적을 덮었다. 피부를 세차게 빨아들이는 감각에 현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불그스름한 흔적을 새빨갛게 덮은 화연은 제 손으로 옷을 벗고 현이 들어있는 목욕통 속으로 쏙 들어왔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거든요. 심지어 제 앞에서 후궁마마 안으실 적에도 그저 신기하기만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화연이 손끝으로 가슴팍에 남은 자국을 문지르고는 다시 그 위에 입을 갖다대었다. 아무런 기교도 없이, 그야말로 제 흔적을 새겨넣기 위해 있는 힘껏 빨아들일 뿐이었으나 오히려 그것이 현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커다란 손이 복숭아마냥 탐스러운 엉덩이를 쥐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가만히 계시라니까!"
손을 찰싹 쳐내며 하나, 또 하나. 화연의 흔적이 윤 재인의 흔적을 덮어가는 동안 현은 터질 듯한 흥분을 억누르며 조금씩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이윽고 마지막 자국까지 덮은 화연은 고개를 들고 현의 눈동자를 살폈다. 마치 그 안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기라도 할 것 처럼.
"이제 제대로 말해 주세요. 폐하께서 하시는 일, 모두 다 알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