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두 얼굴-49화 (49/152)

<-- 그 계집보다 맛이 좋으시지요? -->

“... 이게 뭐에요?”

나오기는 나왔는데, 화연의 표정이 영 좋지 않다. 현은 무어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음을 물고 그 모습을 아래위로 뜯어보았다.

“뭐긴. 환관이 무어냐, 천자를 보좌하는… 말하자면 노비 비슷한 것 아니더냐?”

또 도망치면 도망친 노비라며 온 나라에 방을 붙일 생각이다. 그리하여 지금 화연이 입은 옷은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노비, 그 자체. 반면 현의 옷은 툭 건들면 금가루가 우수수 쏟아질 듯 화려한 비단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걸친 모든 것이 최고급품이었다. 돈 냄새 풀풀 풍기는 그가 휘적휘적 지나갈 적마다 상인들이 눈을 반짝이며 나으리, 이것 좀 보고 가십쇼를 외힐 정도였으니.

“이런게 어디 있어요. 나라의 법도가 지엄하거늘, 음… 아, 신분에 맞는 차림을….”

“신분, 환관. 맞네.”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화연은 입을 꾹 다물고 툴툴대면서도 현의 옆에 붙어 쫄랑쫄랑 따라가며 해가 저무는 시전을 구경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지난번 왔을 적에는 도망갈 생각으로 가득 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만, 오늘 이리 나와보니 참으로 별천지라 사고 싶은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그리 정신없이 구경하는 화연의 걸음이 눈만 떼면 옆길로 새는 통에, 어느 새 화연이 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현이 화연을 좇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주인 나으리, 주인 나으리!”

“뭐?”

은으로 만든 공예품을 파는 조그마한 상점에 마음이 달라붙고 만 화연이 현에게 쪼르르 달려와 눈을 반짝였다. 헌데 대체 이 쪼그만 계집이 그를 무어라 부르고 있는 것인가?

“노비잖아요. 그러니까 주인 나으리.”

푸흡, 그 생경한 호칭을 자연스럽게 부르는 모습에 현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언제는 입이 댓발 튀어나오더니 나름 마음에 들었나보다. 그것이 마음에 든 이는 화연뿐이 아니었다. 그녀가 주인 나으리, 하는 순간 정말로 제 것이구나 하는 기분이 현의 마음을 꽉 채웠으니. 혜국 아니라 온 세상을 통째로 다 준다 하여도 이보다 만족스러울 수는 없으리라.

“그래서, 무얼 갖고 싶으냐?”

“저거.”

화연이 한껏 애교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좌판 위에 늘어진 장신구들 중 하나를 가리켰다. 가까이서 보니 현의 엄지손가락만한, 이것으로 누구를 해칠 수 있을까 싶은 은장도. 시전의 물건치고는 세공이 꽤나 정교한 그것은 현 또한 꽤나 마음에 들었다.

“마님께 이거 하나 사다주십쇼, 나으리. 엄청 좋아하실텐데.”

정말 노비처럼 짐짓 목소리를 까는 화연 덕분에 또 웃음이 터진다. 선선히 전낭을 풀어 값을 치르고 돌아서려던 현의 눈에 또 무언가가 들어왔다.

“주인장, 이건 무엇인가?”

“아, 이거. 어린애들 달고 다니다 보면 잃어버리고 그러지 않습니까요? 그래서 이거 한쪽은 부모 손목에다 묶고, 한쪽은 어린놈 손목에다 묶고. 그리고 은판에다가 부모 이름, 아이 이름, 어느 동네 아무개 이런 것들 써서 달아놓습니다요. 허면 이리 복잡한 시전에서도 애 잃어버릴 염려가 없지요. 헌데 귀한 댁 자제분께 다실 것은 아니오만….”

넙적한 은판의 양옆을 가죽끈으로 꿰어 만든 팔찌 두 개가 한 쌍, 그 사이를 잇는 기다란 끈. 말하자면 소 코뚜레나 말고삐와도 같은, 현이 원하던 바로 그것이었다.

“언제까지 만들 수 있는가?”

“오늘 주문하고 가시면 모레까지는 만들어 드립니다요.”

현은 망설임 없이 전낭을 풀어 묻지도 않고 은자 다섯 개를 꺼내어 좌판 위에 턱 올려놓았다.

“오늘 안으로.”

생각지도 못한 횡재에 단춧구멍만하던 상인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이 팔찌 한 쌍이라 해 봐야 은자 한 냥이면 넘친다. 헌데 다섯 냥이라니, 과연 걸친 의복만치 통이 크신 양반이라. 상인은 당장에 허리를 굽신거리며 재빨리 은자를 받아 챙겼다.

“예, 예! 두 시진 내로 해 놓겠습니다요!”

옆에서 보던 화연은 기가 찼다. 참으로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이로구나. 현이 상인이 건네준 종이에다 두 사람의 이름을 적어놓고 뿌듯하게 돌아서는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화연의 뒤통수를 간질였다.

휙 뒤를 돌아보니 한 무리의 여인네들이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정확히 말하면 현을 넋 놓고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돌아선 현이 화연을 바라보며 싱긋 웃음을 건네자 그네들 사이에서는 작은 한숨마저 터져나온다.

“빨리 가요, 주인 나으리.”

마음에 안 들어. 사실 흑룡포를 입고 금관을 머리에 올린 현도 꽤나 잘생겼지마는, 이리 비단옷 치장하고 접선 하나 챙겨드니 참으로 잘났다. 가늘고 긴 눈매에 여인네처럼 짙은 속눈썹, 매혹적인 콧날도 그러할진데 차갑게 다문 입매가 가장 잘났다. 그 입매로 저리 실실 웃으니 여인네들이 꼴딱꼴딱 안 넘어가고 배길까. 화연은 자신도 모르게 현의 손목을 덥석 쥐고 질질 끌어갔다.

“어, 저거!”

“또 뭐?”

얼마 가지 않아 화연의 걸음이 또 멈추었다. 그리고 현이 어이가 없어 가만히 있는 사이 그의 전낭은 이미 풀리고, 화연은 손에 검은 면사를 들고 싱글벙글 웃으며 현을 올려다보았다.

“나으리, 마님께서 얼굴 함부로 내보이고 다니지말라 하셨는뎁쇼.”

“그래서?”

“숙여 보십쇼.”

천천히 허리를 굽혀 화연과 눈을 맞춘 현의 콧날에 부드러운 것이 와 닿았다. 온 시전바닥 여인네 다 홀리는 이 요망한 얼굴! 그것을 눈 아래부터 턱까지 모조리 가려버린 화연은 그제서야 조금 안심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훨씬 낫습니다요, 나으리.”

“이게 무어냐, 산적도 아니고.”

“어느 산적이 이리 잘생겼답니까?”

중얼중얼 한 마디를 던진 화연이 앞서 나가자 현이 긴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빠르게 따라잡았다.

“다시, 못 들었다.”

“배 고프다고요.”

“말고. 정녕 잘생겨 보이느냐? 네 눈에?”

조금 전 제 입으로 한 말이건만 다시 하기엔 어쩐지 낯간지럽다. 화연은 그를 뿌리치려 나름 종종걸음을 재촉해 보지만, 그녀의 걸음 두 개가 현에게는 한 걸음이니 뿌리칠 수 있을 리 없었다. 티격태격, 앞서거니 뒤서거니 시전을 헤집던 두 사람의 발이 동시에 어느 객잔 앞에서 멈추었다.

"여기서 좋은 냄새 나요!"

“들어갈까?”

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맞이하는 객잔에서 맛있는 냄새가 풀풀 풍긴다. 그제서야 석수라도 들지 아니하고 나온 것이 생각나니, 뱃속이 당장 밥 내놓으라며 요동을 치는 것이 당연지사. 약속이라도 한 듯 나란히 안으로 들어선 그들에게 점소이가 달려나와 허리를 깊게 숙였다.

“이쪽으로 앉으십쇼, 손님!”

그를 따라 들어간 현이 자리에 앉았으나 화연은 옆에 서서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었다. 현이 무엇 하냐는 듯 제 옆자리를 통통 두드리자 주문을 받으려 기다리는 점소이가 약간 움찔하며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저, 손님. 주문을….”

“제일 좋고 맛있는 것으로, 돈 걱정은 말고 가장 귀한 술도 한 병.”

꾸벅 인사한 점소이가 음식을 가지러 달려나갔다. 현은 이제 의자를 직접 빼고 화연의 손목을 잡아당겨 자리에 앉혔다.

“아, 주인 나으리. 세상 물정을 이리 모르십니까?”

“뭐가.”

“세상 천지 어느 노비가 주인이랑 겸상을 하냐구요. 저는 저쪽 구석에 혼자 가서 먹어야지요.”

화연은 이 모자란 천자가 새삼 답답하여 가슴까지 콩콩 두드리며 열변을 토했다. 딴에는 맞는 말이었으나 전혀 그리할 생각이 없는 현에게는 그저 귀여운 투정으로 보일 뿐이었다.

“네 말마따나 내가 주인이니까, 네가 어디서 누구와 밥을 먹든 내 소관이지. 아니 그러하냐?”

“... 그런가?”

듣고 보니 또 그것이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화연이 혼란에 빠진 사이 번갯불에 구운 것인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꿩 요리와 청자에 담긴 술 한병이 그들 앞에 놓였다.

“맛있겠다!”

“맛있겠구나.”

현이 통통한 꿩의 살점을 솜씨좋게 발라 화연의 접시에 놓아주면 그녀는 사양할 생각도 없이 낼름낼름 받아 삼킨다. 아까부터 무척이나 별난 두 사람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이들은 그 모습에 확신을 가지고 저들끼리 수군대기 시작했으나, 이미 전투적으로 음식을 해치우는 화연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술도 한잔 하겠느냐?”

“네!”

지난번 마셔 보았던 술이 참으로 입에 맞았던 것이 생각나며 입에 군침이 돌았다. 화연이 씩씩하게 내민 술잔에 향기로운 술이 가득 채워지고, 현이 내민 술잔에는 화연이 따른 술이 채워졌다. 공중에서 맞부딪힌 두 잔에서 챙, 맑은 소리가 두 사람을 웃음짓게 만들었다.

“캬!”

술이라고는 한 번밖에 안 마셔본 주제에 짐짓 술꾼인 체 잔을 한번에 비워버린 화연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지난번 마신 과실주보다 훨씬 독했다. 그러나 현이 입에 넣어준 안주 한 점을 반갑게 오물오물 씹으니 이것 또한 나쁘지 않았다.

“맛이 좋으냐?”

“네. 한잔 더 주세요.”

입 맞추고 싶다. 현은 화연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며 다시 술잔을 채웠다. 그녀가 취한다 하더라도 앞에는 저가 있고 보이지 않는 곳에 줄줄이 붙은 그림자들이 있으니 뭐 어떠랴. 게다가 한 번쯤 보고 싶었다. 화연이 술에 취하면 무슨 행동을 할지.

“나으리, 아아.”

또 꿀꺽 술잔을 비운 화연은 이제 대놓고 안주 먹여달라며 입을 아 벌리었다. 현은 또 그것이 좋다고 체신머리없이 가장 맛있는 부분을 골라 쏙 넣어준다. 아마 필두가 보았다면 또 넋이 빠진 얼굴로 붕어하신 선황제께 용서를 빌었으리라.

“하이고, 말세다, 말세야!”

초저녁부터 술이 거나하게 취한 두 명의 사내가 옆자리에 앉아 빈정거리지만 않았어도, 아마 현과 화연은 그저 그렇게 술과 음식을 비우고 아주 기분좋은 저녁을 보냈을 것이었다.

“남색이 유행이라더니, 이제 아주 대놓고 지랄을 떠는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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