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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두 얼굴-51화 (51/152)

<-- 그 계집보다 맛이 좋으시지요? -->

"바로 이 년이란 말이지."

태후가 증오를 가득 담은 눈길로 화연을 훑었다. 짜악, 날카로운 손톱에 긁힌 살갗에서 피가 흘렀으나 눈은 뜨지 않는다. 태후는 분이 풀리지 않는 듯, 그녀가 눈을 뜰 때까지 몇 번이나 반복해서 뺨을 후려쳤다.

"으윽...."

얼얼한 통증에 화연이 신음을 흘리며 깨어났다. 어둑한 방 안에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짙디짙은 분과 사향 냄새. 화연은 낯설지 않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훨씬 나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지난번 납치당했을 적에 눈앞에 있던 황제는 그녀를 향해 살의를 품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네년이 고 반반한 얼굴로 황상을 홀렸다지?"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이 앙칼진 목소리의 주인을 분명 알고 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하였으니 살 수 있을 것이다. 희미한 불빛에 익숙해진 눈이 목소리를 향하며 분노에 가득 찬 화려한 여인을 보았다.

"태후마마...?"

"그 더러운 입으로 누구를 불러!"

다시 힘껏 내려치는 손으로 인해 화연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몇 대나 맞은 뺨에서는 얼얼한 통증과 흘러내리는 핏줄기가 느껴졌다. 이를 악문 화연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당돌하게 물었다.

"저를 예서 죽이시렵니까?"

"당연하지. 최대한 고통스럽게,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릴 것이야."

자신은 손도 댈 수 없는 사내를 마음껏 가진 여인에 대한 투기가 태후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절대 편안하게 죽일 수 없지. 팔다리를 자르고 시체조차 온전하지 않도록 만들어 짐승의 먹이로 만들 생각이었다.

"제가 죽는다 하여 마마께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단지 폐하의 분노만 살 뿐입니다."

"네년이 세 치 혀로 살아나가고자 하는구나. 황상은 내가 안다. 고작 여인 하나로 나를 칠 수는 없음이야."

"제 옷을 벗겨 보십시오."

납치당해 의자에 묶인 주제에 참으로 당당하다. 믿는 구석이 없고서야 이리 당당할 수 있는가. 태후가 눈짓하자 옆에 있던 상궁이 칼을 들고 화연에게 다가섰다. 얇은 침의가 찢어지며 칼날에 스친 앞가슴에서 피가 흐르고, 태후의 안색 또한 구겨졌다.

"마, 마마. 이것은...."

앞가슴에 선명하게 새겨진 현(賢). 그 누구도 부를 수 없고, 그 누구도 쓸 수 없는 이름이, 고작 이 계집의 살에 새겨져 있다니. 태후는 싸늘한 손끝으로 그 글씨를 훑어내리며 작게 이를 갈았다.

"황상의 필체다. 이년은 도대체...."

"저를 가지고 거래를 하세요. 마마께서 무엇을 원하시든 황제께서는 저와 바꾸실 것입니다. 허나 저를 죽이신다면 아무리 마마라 하시더라도 그 분노를 감당키 어려우십니다."

"거래? 황상에게서 내가 받아낼 것은 그 무엇도 없다."

흔들린다. 황제의 이름을 본 뒤로 태후는 틀림없이 흔들리고 있다. 화연은 그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현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길게 심호흡을 했다.

"첩여마마를 황후로 앉혀 달라 하시면, 어떠세요?"

"하, 건방진 년. 네년이 감히 황후를 들먹여?"

"저는 그저 목숨 구명하여 서방님께 돌아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허니 저를 두고 거래하시어 첩여마마를 황후로 올리시고, 그 태의 용종을 태자로 만드세요. 허면 조금 더 손쉽게 원하시는 바를 처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태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작정 황제를 암살하여 억지로 황자를 용상에 올려놓기 보다는, 정식으로 태자를 임명한 연후에 천천히 일을 해결하는 쪽이 수월하리라. 게다가 민 대감이 국구가 된다면 이쪽은 더욱 큰 세력을 가지게 된다. 계집은 흔적이 남지 않도록 일단 황궁 밖으로 빼돌려 쥐도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면 될 일.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년이로구나. 그래... 당장은 살려 주지."

"마마, 지금 폐하께서 이리로 오고 계십니다!"

상궁이 다급하게 외치자 태후는 재빨리 밀실을 빠져나가 제 침전에 앉았다. 홀로 남은 화연은 소리를 지를까 생각하다가 곧 자신이 홀로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목 아래에 서늘하게 닿은 칼날이, 그녀가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소리를 낸다면 당장에 속으로 파고들어 숨을 끊겠다 경고하고 있었다.

"황상, 무슨 일입니까? 이 밤중에."

이글거리는 눈빛이 태후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것이 참을 수 없이 그녀를 흥분시켜, 태후는 저도 모르게 가빠오는 숨을 억지로 다스려야만 했다.

"당장에 내놓지 않으면 그 목숨 부지하지 못하십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태후!"

눈 깜짝할 사이 달려든 현이 태후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칼을 뽑았다. 바로 눈앞에서 살벌하게 빛나는 칼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유로웠다. 심지어 이 상황이 무척이나 흡족하기까지 했다. 늘 상상으로만 품었던 이복아들이, 바로 지금 자신의 몸을 타고 앉은 것이다.

"그것으로 어미를 찌르시렵니까? 허면 찾는 것은 영원히 못 찾으실텐데. 이미 황궁을 떠났습니다."

분노에 찬 손이 태후의 어깨를 부서지도록 쥐었다. 그 고통에서 쾌감이 밀물처럼 번져 말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계집을 내어 드리지요. 내 원하는 바를 주기만 하신다면."

"이 창기년. 죽고 싶으냐."

"그 계집 있는 곳은 나밖에 모릅니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기거든 바로 죽이라 일러두었지요. 그냥 곱게 죽을까요? 얼굴이 제법 반반하던데, 죽기 전에 부리는 놈들 몸보신 좀 시켜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큭, 큭, 현이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겁박이라니. 약점 따위는 없었던 그에게 겁박이란 너무나 먼 이야기였다. 헌데 지금, 화연은 그에게 너무나 큰 약점이 되어 발목을 틀어쥐고 있는 것이다.

"아주 머리가 잘 굴러가십니다. 허나 그 아이 지금 죽지 않았다는 것을 어찌 믿습니까?"

"믿든 안 믿든, 황상 마음이지요. 그래서 어찌 하시겠습니까. 계집 목숨 두고 거래를 하시렵니까, 그냥 이 사람 죽이고 돌아가시렵니까."

현이 천천히 칼을 거두었다. 화연의 목숨이 걸린 이상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말씀하십시오."

태후의 입가에 만족스럽기 그지없는 웃음이 번졌다. 계집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그 목숨줄만 틀어쥐고 있으면, 굳이 복잡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더라도 황제를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민 첩여를 황후로 올리세요."

"그것이 탐나셨습니까? 그리 하시지요."

"그리고 또."

누워 있던 태후가 몸을 일으켰다. 현을 보는 눈빛에서 그동안 어떤 사내에게서도 채울 수 없던 욕망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오늘 밤, 예서 주무세요."

"하다하다, 이제 배덕까지 저지르시겠다?"

너무나 어이없는 나머지 헛웃음까지 나온다. 태후의 사생활이 심히 문란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꼬투리잡기엔 황실의 위엄이 땅에 떨어질 것이니 두고만 보고 있었다. 허나 이런 식으로 나오리라고 그 누가 생각했겠는가.

"싫으십니까? 그 계집이 보고 싶지 않으신가 봅니다."

태후가 제 품에 손을 넣었다가 서서히 빼내었다. 그 손끝에 딸려 나온 물건은 다름아닌, 현이 화연에게 채워 주었던 바로 그 팔찌.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은판이 등잔불을 받아 화려하게 반짝였다. 그것을 현의 손에 쥐어준 태후는 탄탄한 몸에서 한 겹 한 겹, 옷을 벗겨내며 숨을 가다듬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십니까, 황상."

늘 상상하던 바로 그대로였다. 크고 작은 흉으로 뒤덮힌 넓은 가슴의 단단한 근육도, 납작한 연갈색 유두도, 군살 하나 없이 매끈한 등허리도. 그 몸 위에 새겨진 여인의 흔적마저 태후를 달아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소용없으십니다. 이 몸은 그 여인이 아니면 반응하지 않으니."

현이 이죽거렸으나 태후는 그를 한번 올려다보고는 다시 제 앞에 펼쳐진 사내의 몸에 집중했다. 황홀하다. 그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적마다 구릿빛 날가슴이 위로 솟았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왼쪽 가슴에 새겨진 희(喜)자가 지금 밀실에 갇힌 그 계집을 뜻한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뭐 어떤가, 지금 이 색기어린 사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침소에 있는 것을. 곧 다가올 금지된 쾌락에 대한 흥분으로 태후의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초를 피워라."

손끝으로 현의 몸을 더듬어 내려가던 태후가 기대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명하자 상궁이 재빠르게 두 개의 초에 불을 붙인 뒤 옆에다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긴 그릇을 놓고 사라졌다. 선홍빛 초가 타닥거리며 이내 달콤한 향이 연기를 타고 방 안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아무 표정도 없이 앉아있던 현이 헉, 하고 숨을 들이쉬었을 때는 이미 그 향기가 폐부 깊숙히 스며들어 머리를 멍하게 만든 후였다.

"옥체에 해로움은 없습니다, 황상. 그저 즐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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