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두 얼굴-53화 (53/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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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 계집이 이곳에 있단 말입니까?”

우승상의 미간이 구겨졌다. 참으로 철없는 누이가 아닌가. 무릇 궁중암투의 기본이란, 화근을 되도록 빨리 제거함이거늘.

“쓸모가 많은 계집입니다. 당분간 살려 둘 생각입니다.”

“태후마마!”

오라비의 역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난밤의 황홀경에서 깨어나지 못한 태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오라버니께서 데리고 계세요. 계속해서 이 곳에 둘 순 없지 않겠습니까?”

“황상은 이미 신을 감시하고 있을 것입니다. 계집을 숨겼다가는 당장에 발목이 잡히고 맙니다.”

태후의 계획은 너무나 위험했다. 자칫했다가는 목표한 바를 이루기는커녕, 멸문되기 딱 좋은 상황. 그간 벌려놓은 일들이 얼마인데 고작 계집 하나로 인해 망칠 수는 없었다.

“계집을 처리하십시오, 마마.”

“황상께서 언젠가는 고 년이 살아있다는 증좌를 내놓으라 난리를 칠 것입니다. 아직은 살려 두어야 합니다.”

태후의 붉은 입술이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며 달싹였다.

“은호를 생각하세요, 오라버니. 그 아이가 또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웠다지요? 그 계집을 눈앞에 데려다 놓는다면 당장에 벌떡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막내아들의 이야기에 우승상 또한 멈칫했다. 조금씩 나아가던 은호는 그를 찾아와 신부를 구해달라 애원했던 날 이후 그 전보다 더욱 심하게 앓아누웠다. 가끔 미음이라도 조금 넘기고 기운을 차린 날이면 미친 사람처럼 시전으로 달려가 화연을 부르며 거리를 헤집었다. 그런 아들에게 계집을 넘겨줄 수만 있다면, 다시 예전의 건강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허나, 조금 전 말씀드렸다시피 황상은 이미 감시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귀신 같은 자들을 풀어서.”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

태후가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로 작게 읊조렸다.

“우리 쪽에도 있지 않습니까. 귀신보다 더욱 귀신같은 자가.”

***

숨이 막힌다. 답답하다. 조금도 움직일 수 없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화연의 몸은 마치 염습된 시체처럼 면포에 둘둘 감겨 말이 끄는 수레 밑바닥에 갇혀 있었다. 황궁을 들고 나는 모든 것들이 그전보다 더욱 철저하게 감시받았으나, 그 누구도 수레의 밑바닥을 뜯어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과 부족한 공기 속에서 그 수레를 끌고 가는 사내의 가느다란 휘파람이 화연을 옭아매었다.

“시팔. 계집 하나 때문에.”

휘파람 소리가 잠시 끊기는가 하였더니 낮은 투덜거림이 이어졌다. 좁디좁은 수레 밑바닥에 있던 공기는 화연 하나가 숨을 쉬기에도 모자랐다. 머리가 멍해진다 생각함과 동시에 화연은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눈 앞에는 낯익은 사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창백한 피부와 여윈 얼굴, 그리고 선한 눈매. 어디서 보았더라. 화연은 기억을 되살리려 하였으나 그 행동은 도리어 두통만을 불러왔다.

“으음….”

화연이 작게 신음하며 이맛살을 찌푸리자 사내가 황급히 물그릇을 건네었다. 하얀 그릇 가득히 찰랑거리는 물을 보자 그제서야 몇 시진 동안 아무것도 마시지 못했음이 떠오르며 목이 타는 듯 말라온다. 화연은 그것을 받아 꿀꺽꿀꺽 삼키고는 다시 사내에게 빈 그릇을 건네주었다.

“조금 더 누워 계십시오, 부인.”

“부… 인?”

무척이나 생경한 호칭에 화연이 다시 이마를 찌푸리고 그를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이윽고 그 사내를 기억해내었다.

“은호 공자님?”

자신의 이름이 불린 기쁨이 은호를 웃음짓게 만들었다. 도대체 얼마만에 웃어보는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은호가 야윈 손을 들어 화연의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자 그녀의 몸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기억이 나십니까, 부인?”

“기… 기억은 나는데… 부인이라니요?”

“우리는 부부지 않습니까. 양가 어른들께 허락받은.”

“허나, 우리는 아직 혼례를….”

“괜찮습니다, 혼례 따위는. 이미 그대가 나를 위해 혼례복을 입은 시점부터 우리는 부부입니다.”

선한 눈매가 다시 화연을 향해 둥글게 휘어졌으나 화연은 도저히 그를 곱게 볼 수가 없었다. 부부라니,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그리는 할 수 없습니다. 소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부인의 탓이 아닙니다. 부인께서 황제에게 끌려가 몸을 빼앗겼다 한들, 그것은 부인께서 원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화연이 먼저 원한 것이다. 곱게 돌려보내려던 황제에게 후궁 삼아달라 하였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말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서방님.”

“서방… 님?”

이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나 제 목숨이 지금 이 사내에게 달려 있음은 알겠다. 화연은 이 남자의 비위를 최대한 맞추어 목숨을 연장하기로 했다. 현이 반드시 데리러 올 테니까. 온 나라를 이 잡듯 뒤져서라도 찾아낸다 하였으니, 반드시 그리 할 것이다.

“배가 고픕니다, 서방님.”

“아, 얼른 먹을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부인께서 깨어나지 않으시어 걱정하느라 그만.”

은호는 화연이 그간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을 기억해내고는 허둥지둥 방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화연은 그제서야 자신이 있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은호의 정체를 깨달았을 때는 우승상의 집이리라 생각하였으나 그는 아니었다.

우승상의 집이라기엔 너무나 작고 초라했으니까. 그녀가 황궁에서 자던 침전의 쪽방만한 크기에 침상 또한 작고 낡았다. 그나마 이불은 고운 비단으로 지은 새 이불이니… 새 이불.

"원앙... 금침?"

원앙이 새겨진 금침이었다. 혼례를 올린 부부를 위한 혼수품. 화연은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문고리를 잡았으나 소반을 받쳐든 은호가 문을 여는 것이 더 빨랐다.

“밖이 춥습니다, 부인. 근처를 둘러보고 싶으시거든 먼저 이것을 좀 드시고 의관을 정제하세요.”

화연이 깨어나면 먹이려 미리 준비한 듯,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타락죽이었다. 이 작고 초라한 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귀한 죽. 은호는 그것을 직접 떠서 후후 불어 화연의 입 앞에다 갖다대었다.

“아 하세요, 부인.”

-입을 벌리거라.

“제가… 먹을 수 있습니다.”

-먹지 않으면, 상궁마마님도 죽이실 건가요?

“예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것만 먹여 드리겠습니다.”

-그렇다.

그 때처럼 억지로 벌어진 입 안에 가득히 달달하고 고소한 죽이 가득 찼다.

“어찌 우십니까, 부인?”

화들짝 놀란 은호가 그릇을 내려놓고 영견을 꺼내어 눈물을 닦아내었다. 눈물과 섞인 타락죽에서는 찝찔한 맛이 났다. 그립다. 그 미친놈이 숨이 막히도록 그리웠다. 가슴에 새겨진 이름의 무게가 심장을 쥐어짠다고 생각하며, 화연은 눈 앞에 있는 죽그릇을 들어 있는 힘껏 벽을 향해 집어던졌다.

***

“폐하, 제발 수라를 하시옵소서. 옥체에 해가 갈까 심히 두렵나이다.”

수라상을 앞에 둔 필두가 바닥에 머리를 박고 빌었다. 침전에 있던 화연이 연기처럼 사라진 지 사흘째. 현은 단 한 저분의 음식도 입에 대지 않고 침상에 기대어 앉아 허공을 응시하거나 손에 든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내었다. 아주 가끔 흑운을 부를 때 말고는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도 않았고, 물론 정전에 나가지도 않았다.

“태후마마 드시옵니다.”

들라는 말도 없었건만 침전의 문이 열렸다. 턱짓으로 필두를 내보낸 태후는 손도 대지 않은 수라상과 흐트러진 침의 차림으로 침상에 기대어 앉은 현을 번갈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황상께서 옥체 미령하다 하시니, 이 사람이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훅 끼쳐드는 분 냄새에 토기가 올라온다. 현이 입을 틀어막았으나 태후는 아랑곳않고 요염하게 침상 위에 걸터앉아 그를 향해 화려하게 치장한 손을 뻗어왔다.

“아윽.”

현이 번개처럼 잡아 꺾은 손목에서 상쾌한 통증이 올라온다. 그녀는 작게 혀를 차며 다시 손을 거두어들였다.

“뭐, 용건부터 말하지요. 민 첩여의 황후 책봉식을 서둘러 주세요.”

현이 피식 웃었다. 황후. 화연을 앉히고자 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평생의 반려, 단 하나의 정실. 그러나 주인이 사라진 지금, 자리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말씀하셨다시피 옥체 미령하니 예부와 의논하여 알아 하십시오. 하고, 이만 나가주시길.”

태후는 잠시 아쉬운 눈길로 현을 훑어보다 아무 말 없이 일어나 침전을 빠져나왔다. 으르렁대는 짐승의 소리와 흐트러진 침의 사이로 드러난 날가슴이 참을 수 없이 그녀를 유혹했으나, 지금은 참을 때라는 것을 잘 안다.

“태후궁으로 가자.”

원래라면 예부를 찾아가야 한다. 그러나 황제로 인해 참을 수 없이 달아오른 아랫입이 사내를 삼키고 싶어 안달하고 있지 않나. 가마를 재촉하여 태후궁으로 되돌아간 태후의 걸음이 달리다시피 제 침소로 향했다.

“제운을 불러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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