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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이 곳...."
"저 또한 나갈 수 없습니다, 부인. 부인을 황제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니 너무 갑갑해하지 마세요."
"허면 들어올 적에는 어찌 들어왔습니까?"
화연의 목소리가 침착함을 잃었다. 앞은 높디높은 절벽이요, 뒤는 단단한 가시덤불. 아무리 병력을 푼다 하여도 이 곳은 도저히 찾아내지 못할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으면 들어올 수 있습니다. 허나 혼자 힘으로는 어렵습니다."
"하... 하하."
화연이 허탈하게 쏟아낸 웃음소리가 유난히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은호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그녀를 쓸어내리며 조심스러운 손길이 어깨 위에 와 닿았다.
"황제께서 추적을 단념하고 나면 다시 건너갈 것입니다. 그 때는 조촐하나마 다시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고 남들처럼 살 수 있습니다. 당장은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부인."
은호는 화연의 반응이 너무 작은 집과 고립된 장소 때문이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그녀를 달래었다. 전자는 틀렸고, 후자는 맞다. 황제께서 추적을 단념하면. 은호가 자신을 달래겠답시고 꺼낸 그 말이 아픈 가시가 되어 심장에 박히었다.
현은 과연 언제까지 추적을 포기하지 않을까. 태사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들이 오매불망 그의 눈길 한 번, 손길 한 차례 받아보려 줄을 서는 황궁에서. 화연은 잠자코 은호가 이끄는 대로 다시 대문 안으로 들어가 처음 눈을 떴던 침상에 몸을 뉘었다.
"잠시 혼자 있고 싶습니다."
"밖에 있겠습니다, 부인.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르세요."
무어라 사족을 달 만도 한데, 은호는 그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며 그녀만을 위한 당부를 덧붙였다. 방 안에 홀로 남은 화연은 가슴에 손을 얹고서 잠시 눈을 감았다.
그가 추적을 포기한다면 사내는 자신을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하였다. 일단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그 때까지 저 사내의 믿음을 얻어낼 수 있다면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리 떠나고 싶어했던 황궁이 집이고, 그리 도망하고 싶어했던 현의 곁자리가 바로 제 자리였다. 가슴에 새겨진 그의 이름이 곧 황궁으로 들어가는 출입패가 되리라.
해 주겠다. 그까짓 부인 노릇, 못할 게 무어람. 다시 들어올린 긴 속눈썹 아래에서 검은 눈동자가 다시금 반짝, 빛을 발했다.
***
"흔적조차... 없다고."
나직한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린다. 발치에 부복한 흑운은 그 절망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이리 깊숙히 숨기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입니다."
아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겁니다. 흑운이 다음 말을 이어가지는 않았으나 현도, 흑운도 이미 최악의 상황을 그리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말로 하였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될까 두려울 뿐.
"병력을 풀고 용모파기를 붙여 공개적으로 찾는다면."
"안 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미치도록 잘 아는 사실이다. 수사망이 좁혀진다면 그들은 가장 먼저 화연의 목숨을 끊어 강물에 흘려보내리라. 현은 침상에 몸을 기대고 앉아 눈 앞에 화연의 이름이 새겨진 팔찌를 들어올렸다.
창을 파고든 저녁 햇살이 은판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녀에게 처음 연모를 고백했던 후원에서의 그 노을처럼. 눈을 감고 거슬러간 기억의 강은 화연을 처음 본 순간부터의 기억을 하나하나 흘려보내었다. 가만히 그 감각에 몸을 내맡기던 현이 갑자기 번쩍 눈을 떴다.
"정혼자. 우승상의 막내 아들."
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흑운 또한 문득 그를 떠올렸다.
"시전에서 도망하였을 적에 마주쳤다고 들었습니다. 숨겨주겠노라 제안하였다고."
"그 뒤에는?"
"다시 앓아누워 두문불출하고 있습니다."
빛을 잃고 어둠에 잠겨들었던 머리에서 희미한 실마리가 기어나온다. 왜 지금까지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남에게는 가차없으나 자식들에게만은 끔찍한 우승상. 그의 아들이 상사병으로 앓아누웠다면, 유일한 약은 당연하게도 화연이 아닌가?
"그를 추적하라."
"존명."
흑운이 바람처럼 빠져나간 침전에 휑하게 찬바람이 돌았다.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한 실마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을 끄집어 내었다. 태후는 그림자 중에서도 선택된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침전의 비밀통로를 이용해서 화연을 빼돌렸다.
그러나 현이 부리는 그림자 중에 간자가 있었다면, 그가 독이라며 건네는 약을 망설임 없이 삼키지는 못하였을 터.
"... 독. 그림자."
두 개의 단어가 연결되며 하나의 가정을 만들어 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선례조차 없었기에 생각이 닿지 않았을 뿐,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그런 가정.
황제의 그림자는 오직 황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으므로 그 주인이 세상을 떠날 때 일제히 맹독을 삼키고 따라 죽는다.
만일 그 그림자 중에 살아남은 자가 있고 바로 그가 태후의 편에 붙었다면, 그리고 흑운만큼의 실력을 가졌다면. 아니, 흑운이라면. 비밀 통로로 화연을 빼돌릴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그녀를 황궁 밖으로 데리고 나가 흔적도 없이 숨길 수 있었던 것도 설명이 된다.
"대단하십니다, 태후."
선대황의 흑운(黑雲). 그 자가 살아 있다. 그리고 참으로 위험하게도, 태후의 명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
"...하여, 첩여 민씨를 황후에 봉한다."
현은 먼 곳에서 울리는 듯한 우승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제 손으로 적은 교지가 맞긴 한 것인가. 품행이 방정하고 그 덕목이 내명부의 귀감이 되는 바, 또 어쩌고 저쩌고. 태어나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연유들이 줄줄이 적힌 교지는 기어이 민 첩여를 황후에 올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선황제의 흑운은, 아니. 제운(祭雲)은 그 실력을 뽐내기라도 하듯 우승상의 집 주변을 감시하던 그림자 몇을 혼자 힘으로 죽인 후 화연과 그녀의 정혼자를 흔적도 없이 감추었다. 추적은 벽에 부딪혔고, 현은 화연이 나타나기 전으로 되돌아가 밤낮없이 정무에 매달렸다.
"폐하, 이제 그만 침전으로 드소서. 옥체가 상하시옵니다."
인경이 울리도록 집무실에 틀어박혀 서류만 들여다보는 현을 보다못한 필두가 안타까이 허리를 숙였다. 강인하던 팔도, 사내답고 잘 생겼던 얼굴도 제 빛을 잃었다.
메말랐던 황제의 삶에 처음으로 찾아든 은애지정은 생각보다 훨씬 지독하였으니, 그것이 사라진 자리는 이제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옥체가... 상하지. 그래."
몇 시진 만에야 고개를 들어올린 현이 중얼거렸다. 그는 화연이 나타나기 전보다 훨씬 많은 정무를 훨씬 빠르게 처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미쳤다는 소문이 황궁 안팎으로 파다했다. 그러나 황실은 그 소문에 대해 별다른 반박을 내놓지 않았다. 소문이라기보다는 사실에 가까웠으니까.
"술을 가져와라."
"폐하, 이곳은 정무를 보시는 집무실이옵니다. 침전으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술 가져오라고! 들리지 않는 것이냐!"
말려보아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직한 환관은 그가 집어던지는 물건들에 묵묵히 등을 맞았다. 그러한 필두를 대신하여 새하얀 술병을 든 흑운이 현의 옆에다 그것을 툭, 내려놓았다. 그제서야 현은 손에 든 두루마리를 옆으로 던지고 독한 술을 병째로 입에다 쏟아부었다.
술병이 다 비면 그것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난다. 현이 다시 술을 가져오라 외치면 흑운이 다시 한 병을 가져온다. 그렇게 세 병을 비우고 나서야 현의 머리가 서안 위에 기대어지고, 흑운은 그를 업어 문 밖에서 황제를 기다리던 연에 올려놓았다.
"월화궁으로 가자."
그 와중에 조금 정신이 든 것일까, 아니면 정신을 아예 놓아 버린 것일까. 허나 황명이기에 연은 그대로 방향을 돌려 월화궁으로 향했다. 술과 피로, 그리고 다른 복잡한 감정들에 절어 벌겋게 달아오른 눈이 화연과 함께 걷던 후원을 지나쳤다.
"잠깐."
축 늘어져 있던 현이 한 손을 들어 연을 세웠다. 비틀비틀, 쓰러질 듯 위태로운 걸음이 연못가에 덩그러니 홀로 선 정자 위로 올랐다. 흑운은 그 뒤를 묵묵히 따랐으나 그와 함께 정자에 올라가지는 않았다. 현은 아마 그 장소를 타인과 공유하고 싶어하지 않을 테니까. 화연이 머물던 침전의 곁방에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듯이.
"은애한다. 내 진정으로, 화연아. 너를."
차디찬 맨바닥에 쓰러져 누운 현이 중얼거렸다. 당연하게도, 그에 대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