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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아침 햇살에 먼저 눈을 뜬 은호가 나직히 화연을 불렀다. 옆에 곱게도 누운 그녀는 아직 깊이 잠이 든 듯 새근새근, 규칙적인 호흡을 내뱉고 있었다.
은호는 빙그레 웃음을 물고는 반듯한 이마 위를 조심스레 쓸었다. 그리고 시비를 불러 소셋물을 들이는 대신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방을 나섰다.
"아이고, 주인님. 쇤네를 부르시지 않구요."
이 고립된 가옥에서 은호와 화연을 제외하면 유일한 사람인 여종이다. 홍이는 끓고 있는 가마솥에서 직접 물을 퍼다 대야에 옮겨 담는 은호의 모습에 안절부절 옆에서 발을 굴렀다.
"아니다. 부인 소셋물 정도는 내가 가져가야지."
은호는 홍이를 내보낸 후 뜨거운 대야에다 찬물을 적당히 섞어 온도를 맞추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그것을 들고 방으로 돌아가는 걸음이 가볍다. 부쩍 살이 오르고 건강해진 그의 얼굴에서 다 죽어가던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부인. 그만 일어나세요."
아주 좋은 꿈을 꾸었는데, 은호의 목소리에 눈을 뜨는 순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화연은 아쉬운 마음으로 천천히 눈을 뜨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적당히 따뜻한 물에 적셔진 영견이 아직 잠이 덜 깬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닦아내린다. 화연이 보답하듯 아주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자 은호 또한 부드럽게 웃었다.
"잘 주무셨습니까?"
"예. 모처럼 푹 잤습니다."
다정한 아침 인사와 함께 화연의 얼굴과 목, 손발을 구석구석 깨끗하게 닦아준 은호가 대야를 밖으로 내어놓고 다시 들어왔다. 그 사이 화연은 단정하게 옷을 챙겨입고 침상 위에 흐트러진 이불 또한 손으로 탁탁 털어 정리했다.
"아침 드세요."
홍이가 소박하지만 정갈한 아침상을 가지고 와 두 사람 앞에 차려놓았다. 보름에 한 번, 시커먼 사내가 절벽을 건너와 식재료와 필요한 물건들을 놓고 다시 사라지면 홍이가 그것들로 음식을 만든다.
화연은 처음에 그가 나타났을 때 흑운인 줄 알고 반가움에 눈을 크게 떴으나 그는 화연이 알고 있는 흑운보다 훨씬 차가운 눈빛과 냉랭한 기운을 가졌다. 무엇보다 흑운과 다른 점은, 그녀를 보는 시선에 분명한 살기가 섞여 있다는 것이었다.
"답답하지요, 부인?"
오동통한 생선살을 발라 화연의 수저 위에 놓아주던 은호가 미안한 듯 물었다. 화연은 그가 알던 여인보다 훨씬 말수가 적어졌고, 눈동자는 더 이상 반짝이지 않았다. 그것이 모두 이리 좁고 갑갑한 곳에 그녀를 숨겨둔 제 탓인 듯 싶어 마음이 쓰였다.
"괜찮습니다. 서방님도 좀 드세요."
"먹고 있습니다."
아침상을 물리고 나면 두 사람의 일과는 단순했다. 은호는 서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고 화연은 수틀을 잡는다. 은호의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에 비해 화연의 수틀이 채워지는 속도는 무척이나 느리다.
화연이 수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현은 알았으나 은호는 몰랐기에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손이 느리구나, 혹은 신중하구나 생각하였을 뿐.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화연은 그녀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굳이 은호에게 알려 줄 생각이 없었으므로.
"부인."
"예, 서방님."
"부인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상관없습니다."
그림이라면 그냥 그려도 될 것을, 은호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화연의 의사를 물어보고 그에 따랐다. 곧 성의없이 읽어내려가던 서책을 덮고 화구를 내온 그는 의자에 화연을 앉히고 맞은편에다 빈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이 날, 두 사람은 해질녘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
"잠시 산책을 좀 다녀오겠습니다."
늦은 밤, 침수 준비를 마친 화연이 문득 답답증을 느끼고 은호를 돌아보았다.
"같이 가드리겠습니다."
"혼자 있고 싶습니다."
화연은 냉정하게 은호의 말을 자르고 그가 건네는 모피를 받아 침의 위에다 걸쳤다. 겨울의 강바람은 무척이나 차갑다. 그러나 아담한 앞마당을 지나 어두운 절벽 건너를 바라보고 선 화연에게는 그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의 추위가 훨씬 큰 탓일까.
무언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듯, 앞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은 그녀가 절벽 끝에 멈추어 섰을 때.
"아직 죽지 말지?"
우악스런 손이 화연의 마른 어깨를 잡아채었다. 너무 놀라 그 자리에 굳어버린 화연을 돌려세운 손의 주인은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이죽거렸다.
"누구 때문에 내가 예까지 와서 똥개 노릇을 하는데. 때 되면 어련히 알아 죽일 테니까 서두르지 말라고."
보름에 한 번 식재료를 가져다 주는 그 사내. 하필이면 오늘이 바로 보름째 되는 날이었던가. 화연은 온 몸의 털이 거꾸로 일어서는 기분으로 그에게서 벗어나려 뒷걸음질쳤으나 잡힌 어깨를 빼낼 수는 없었다.
"... 황상."
사내가 씹듯이 내뱉은 단어에 화연이 움직임을 멈추고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좀 전보다 더욱 짙어진 살기에서, 사내가 절대 좋은 의도로 그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네가 그 자식의 계집이지?"
"놓아 주십시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으나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 듯 하다. 사내는 낮게 휘파람을 불며 어깨를 잡지 않은 손으로 화연의 턱을 들어올렸다. 화연이 수레에 실려 황궁을 빠져나올 때 들었던 바로 그 소리. 그 때의 암흑이, 그 때의 공포가 화연을 뒤덮었다.
"그 자식이 내 여인을 맛보았으니, 나도 복수해야 하지 않겠나."
속에서 긁어올리는 소름끼치는 목소리와 함께 은호가 걸쳐준 모피가 바닥을 향해 흘러내린다. 떨어진 모피 위에 화연의 등이 닿았다. 막을 길 없는 차가운 강바람이 들어올려진 맨 다리를 할퀴고 지나가는가 싶더니 어느 새 드러난 시뻘건 양물이 뻑뻑한 옥문으로 들어서려 덤볐다. 커다란 손에 틀어막혀진 입은 소리를 지르기는커녕, 숨도 쉴 수 없었다.
"시팔. 안 들어가네. 그 새끼는 잘만 처박던데."
사내가 낮게 투덜거리며 양물을 거두었다. 손바닥에 침을 퉤 뱉고는 거침없이 하얗게 드러난 비부에 대고 문지르자 낯선 자극에 반응한 음핵이 맑은 액체를 만들어 내었다. 아주 조금이었으나 사내에게는 그 정도로 충분했다.
굵고 거친 손가락 두 개가 밀려든 옥문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온 몸으로 퍼져나가고, 숨을 쉬지 못한 화연은 그대로 고개를 툭 떨구었다. 잠시 손을 떼어 맥을 짚어본 사내는 그녀가 살아있음을 확인하자 다시 손가락을 옥문에 넣고 무자비하게 휘저었다. 그리고 이만하면 넣을 수 있겠다고 판단되었을 때 다시 양 다리를 잡아 벌리고 그 속에 깊숙하게 양물을 쑤셔박았다.
"아...흡!"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이 화연을 깨웠으나, 비명은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하고 다시 사내의 손에 틀어막혔다. 자신을 죽인다면 바로 이 사내이리라. 거칠게 추삽질을 이어가면서도 음욕 대신 살기를 품고 있는 눈빛이 화연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었다. 사내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고통이 온 몸을 잠식해 들어가고, 그 동작은 점점 쓸려 내려간 침의가 마침내 완전히 풀어져 달빛 아래로 소담한 젖가슴이 드러나는 순간 뚝 멈추었다.
"현?"
지금 짓밟고 있는 계집의 왼쪽 가슴에 선명하게 새겨진 글씨.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던 제운은 곧 그것이 황제의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꼴에 제 계집이라고 이름까지 써 놨단 말이지. 증오를 가득 담은 손이 그 이름이 새겨진 젖가슴을 터뜨릴 듯 꽉 잡고 비틀었다. 제운은 그대로 화연을 뚫어버릴 듯 추삽질을 계속하다가 마지막 순간 양물을 꺼내어 터져나오는 씨물을 음부 위에 아무렇게나 뿌렸다.
"눈깔 한 번 지독하네."
찬 바닥에서 일어나 바지를 대강 추스리던 제운이 낮은 욕설을 내뱉았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똑바로 쳐다보는 검은 눈동자가 무척이나 거슬린다. 명이고 나발이고, 그냥 강물에 던져버릴까. 제 계집 죽었다는 것을 알면 황상 얼굴이 볼 만할 텐데. 일어서 있던 제운이 다시 몸을 숙여 화연을 잡았다.
"부인!"
그때, 은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화연이 너무 늦는다는 생각에 데리러 나왔건만, 그가 조금 전 걸쳐준 하얀 모피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고 화연은 반쯤 나신을 드러낸 채 그 위에 쓰러져 있다. 은호는 허겁지겁 화연을 감싸안으며 아무 표정도 없이 옆에 선 제운을 노려보았다.
"너... 네 이놈!"
"태후가 겁간하지 말라고는 안 했습니다."
좀 더 빨리 던졌어야 했는데. 제운은 그 사실을 아쉬워하며 다음 말은 듣지도 않고 절벽 너머로 몸을 날려 사라지고, 뒤에 남은 은호는 다른 것은 생각할 틈도 없이 화연을 안아올려 집 안으로 달렸다.
"미안합니다... 내가... 아...."
등잔불 아래 드러난 그녀의 모습이 은호의 목을 쥐어짰다. 귀해서, 너무나 귀해서 그는 손 한번 대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여인이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배가 불러, 한밤중에도 몇 번이나 일어나 잠든 얼굴을 하염없이 들여다 보던. 그리 귀한 여인이 지금 갈가리 찢어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은호는 화연이 사라졌던 그 날보다 더욱 큰 고통을 느끼며 통곡했다.
복수. 화연을 짓밟고 사라진 사내와 그를 보낸 태후에 대한 복수심이, 그의 선하디선한 눈매에 꺼뜨리지 못할 불을 피워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