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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몇이 죽었지?"
방 안에서 들려오는 현의 목소리는 아주 낮아서, 그 바로 바깥에 서 있는 흑운만이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열 아홉입니다."
열 아홉. 제운이 지금까지 베어넘긴 그림자의 수였다. 오십에 달하는 그림자들이 거의 절반 가까이 줄어든 것이다. 화연의 옷을 꽉 그러쥔 채 침상에 엎드려 있던 현은 낮은 욕설을 내뱉으며 조용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옷에서, 침상에서 희미하게 배어나오던 화연의 체취는 점점 옅어져 이제 거의 맡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추적을... 중단하라."
"폐하."
"너만 가라."
보통 사람은 그곳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실력자들이 바로 그림자다. 귀신처럼 모습과 기척을 숨기고 황제의 명을 수행하는. 그들의 수장인 흑운은, 흑운이 아니면 잡을 수 없다.
"불가합니다. 폐하의 곁을 비울 수 없습니다."
죽었어야 할 제운의 존재가 버젓이 살아있음을 안 지금, 흑운은 절대 현을 떠나서는 안 되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화연의 말간 미소가 그를 괴롭혔으나 뿌리깊은 세뇌와 흔들리지 않은 충심이 흑운을 냉정하게 만들었다.
"민씨가 출산을 하기 전에는 나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허나 시간이 얼마 없다. 지금까지의 피해 또한 너무 크지 않느냐."
우승상과 태후는 손을 잡고 현을 제외한 모든 황자를 암살했다. 지금 황가에 남은 핏줄은 단 하나, 황제뿐. 그리고 민씨가 황자를 낳게 되면 자신 역시 같은 수순을 밟게 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이제는, 그의 목숨을 걸고 움직여야 할 때였다.
"가라. 화연을 찾아와라."
"...존명."
흑운은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이고 바로 아래에 있는 그림자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한 뒤 황궁을 빠져나왔다. 이미 뒤질 만한 곳은 모두 뒤져 보았기에 목적지는 없었다. 그러나 태후는 절대 두 사람을 멀리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필요한 순간에 곧바로 처리할 수 있어야 하니까. 그는 지도를 펼쳐들고 가장 산세가 험준한 곳과 가장 사람이 붐비는 곳을 표기한 후 그곳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
"태후마마, 황제폐하 드시옵니다."
"황상께서?"
태후는 뒤에서 지분거려오는 제운의 손길을 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제운 또한 연기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흐트러진 침상만이 남았다. 태후가 반쯤 벗겨진 옷섶을 다 여미기도 전에 현이 문을 직접 열고는 성큼성큼 들어섰다.
"어인 일입니까, 황상. 연통도 없이."
상당히 민망한 광경임에도 불구하고 태후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는다. 되려 아주 느긋하게 옷자락을 마저 정리하고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기까지 하였다.
"첩지를 하나 내려야겠습니다."
"첩지요?"
태후가 미미하게 이마를 찌푸렸다. 황후의 출산이 여섯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이 시점에 뜬금없이 첩지라니, 후궁이라도 새로 들이겠다 이건가.
"윤 재인의 첩지를 첩여로 승격시키십시오."
"윤 재인이라면...."
기억을 더듬던 태후의 머릿속에 몇 달 전, 제 앞에서 덜덜 떨던 순진한 후궁 하나가 떠올랐다. 얼마 전 오랑캐들을 모조리 섬멸한 후 승전보를 가지고 돌아온 병부상서의 여식.
"너무 뜬금없군요. 아니 되겠습니다, 황상."
될 리가 없지. 병부라면 육부 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병권을 쥔 자가 곧 황권을 쥐는 법. 그런 자의 여식에게 세력을 보태 줄 필요는 털끝만치도 없었다.
"태기가 있습니다. 소자가 직접 확인하였습니다."
"태기요?"
현이 뱉은 말은 태후를 더욱 더 불쾌하게 만들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기감과 그에 섞인 투기심이 스멀스멀 치고 들어온다. 이제 몸을 완전히 세워 앉은 태후는 가늘게 뜬 눈으로 눈앞에 앉은 황제를 아래위로 훑었으나 그 표정에선 어떠한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아직 황자를 생산하지 않은 첩여도 태기가 있다는 연유로 황후에 앉혔으니, 윤 재인에게 고작 첩여의 첩지 하나 내려 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오늘 중으로 태감을 보낼 터이니 첩지를 내려주십시오."
"... 이 사람의 소관이 아니외다. 이제 내명부의 수장은 황후이니 그이에게 이르세요."
"얼굴 한번 못 보는 황후에게 무슨 수로 이른단 말입니까. 어마마마께서 황후에게 따로이 일러주시던가요."
책봉식을 치루었음에도 민씨는 황후궁으로 거처를 옮기는 대신 계속해서 태후궁에 머물렀다. 태후 쪽에 제운이 있다면, 황제 쪽에는 흑운이 있으니까. 황자를 낳아 황태자로 봉하기 전까지, 그녀는 그 누구도 만나서는 안 되고 태후가 주는 음식과 물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입에 대어서는 안 되었다.
"아주 명분을 죄다 갖추고 오셨군요, 황상."
태후가 비웃듯이 던지는 말에도 현은 태연했다.
"분명 전하였습니다. 패물은 소자가 직접 내릴 터이니 그저 첩지만 주시면 될 것입니다. 내일 중으로 처리해 주십시오."
태기라. 태기가 있다면 차라리 잘 된 일이다. 황자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게다가 제운의 씨앗보다야 역시 황상의 씨앗이. 태후는 예까지 생각을 짚었으나 그와 별개로 지금까지와 다른 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상, 이리 당당하실 수 있습니까?"
"당당할 수 없는 연유라도 있겠습니까."
현은 흐트러지는 눈빛을 들키기 전에 재빨리 몸을 돌려 태후궁을 빠져나왔다. 윤 재인에게 태기가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달수 또한 민씨와 엇비슷하니 만약의 경우 시간을 벌어주거나 민씨를 밀어낼 수도 있으리라. 생각에 빠진 현이 오른 연은 조용히 움직여 윤 재인의 처소로 향했다.
"황제 폐하!"
불쑥 나타난 현을 본 궁인들이 화들짝 놀라 허리를 숙였다. 미쳤다는 소문이 파다한 그였으나 의외로 멀쩡한 얼굴로 수려한 미소마저 띄우고 연에서 내려섰다.
"윤 재인 안에 있느냐?"
"잠시 갑갑하다며 산보를 나가셨사옵니다."
"어디로?"
"뒤쪽 후원이옵니다. 지금 모셔오겠사옵니다."
"아니다. 내가 가지."
현이 걸음을 옮기자 수십의 궁인들이 줄줄이 뒤를 따랐다. 한눈에 들어올 만치 아담한 후원에서 여인 하나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어오는 얼굴을 애써 부드럽게 만든 현은 바닥에 쪼그린 채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윤 재인의 뒤에 섰다.
"무얼 그리 보느냐."
"폐... 폐하!"
깜짝 놀라 일어나다 비틀거리는 윤 재인의 허리를 현이 단단히 받쳐들었다. 바로 코 앞에 있는 수려한 얼굴에 윤 재인이 얼굴을 붉히며 눈을 내리깔았다. 쉼없이 동동거리는 가슴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조심하거라. 홀몸도 아니거늘."
"망극... 송구하옵니다, 폐하."
"날이 차다. 들어가자꾸나."
어깨를 감싸쥐는 손이 너무나 따스하여 추위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윤 재인은 그저 방긋 웃고는 현과 걸음을 맞추어 후원을 빠져나왔다.
남색에 관한 소문도, 반쯤 미쳐버렸다는 소문도 말짱 헛이다. 이리 멋지고 다정한 분이신 것을. 내실로 들어가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소담한 찻상이 놓이자 윤 재인이 고운 손길로 차를 내리기 시작했다.
"차를 잘 다루는구나."
규방에서 늘 하는 일이라는게 이런 것인걸요. 화연의 대답이 귓가를 울리는 듯 싶었으나, 그의 맞은편에 앉아 수줍은 미소를 짓는 여인은 화연이 아니었다. 윤 재인은 현의 앞에 찻잔을 놓고 자신의 찻잔을 쥐었다.
"또... 끓여준다더니."
현이 낮게 흘린 목소리에 윤 재인이 고개를 들고 그를 살폈다.
"무어라 하시었습니까, 폐하?"
"아니다. 차 맛이 좋구나."
조금 어두워지는 용안이 저에 대한 고뇌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런 윤 재인의 속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찻잔을 내려놓은 현이 빙그레 웃으며 반가운 말을 꺼내었다.
"내일 네게 첩지가 내려올 것이다."
"첩지... 라 하시면...."
"지금은 고작 정5품이 아니냐. 내 오늘 태후께 정3품 첩여의 첩지를 내려달라 하였으니, 내일 일찍 준비하였다가 태후궁에서 부르시거든 얼른 가 보아라."
윤 재인의 눈이 벌린 입처럼 크게 뜨였다. 고작 8품 채녀로 입궁하여 아버님 뵐 면목이 없던 것이 엊그제같은데, 첩여라니. 게다가 만약 복중 아기씨가 황자이기라도 한다면. 수많은 계산과 순수한 감동이 어지러이 뒤섞여 그녀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