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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재인의 눈이 벌린 입처럼 크게 뜨였다. 고작 8품 채녀로 입궁하여 아버님 뵐 면목이 없던 것이 엊그제같은데, 첩여라니. 게다가 만약 복중 아기씨가 황자이기라도 한다면. 수많은 계산과 순수한 감동이 어지러이 뒤섞여 그녀를 흔들었다.
"하고, 네 입궁 이후에 가족을 본 일이 있느냐?"
"아니옵니다. 신첩이 어찌...."
말끝을 우물대는 것을 보니 보고 싶긴 한 모양이었다. 화연도 이리 가족을 그리워했는데. 그리 손에서 놓아주기 싫어 기다리라고만 하던 자신이 이다지도 후회스러울 수가 없었다.
"첩지를 받고 나면 네 가족을 모두 황궁으로 초대해도 좋다. 짐이 너만을 위한 연회를 베풀어 줄 것이니."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윤 재인의 눈에서 드디어 감격의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무뚝뚝한 성정에 말은 아니 하시나, 이것이 연모이고 은애지정이 아니면 무엇이랴. 고작 후궁 하나를 위해 연회를 베풀어 주신다니. 조심스러운 현의 손길이 그 눈물을 닦아내며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었다.
"짐이 더 있고 싶으나, 정무가 바쁘구나. 내일 다시 오겠다."
"예, 폐하. 살펴 가시옵소서."
"나오지 말거라. 밖이 춥다."
배웅도 물린 채 밖으로 나가시는 황제는 뒷모습마저 빛이 난다. 윤 재인은 구름을 걷는 기분으로 그가 먹다 남긴 찻잔을 입에 대어 보았다가 홀로 생긋이 웃었다가 면경을 보았다가, 그래도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해 침상에 누워 이리저리 뒹굴다가. 그리 한참 뒤에야 몰려오는 졸음에 눈을 감았다.
***
"윤 수찬의 여식 윤 소유는, 후궁으로서 황제 폐하를 모시고 후사를 잇는 본분에 충실하였다. 이에 윤 소유에게 정3품 첩여의 첩지를 내리노라."
성의 없이 적은 교지와 함께 나비가 조각된 황금 비녀가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은 윤 첩여의 손으로 넘어갔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태후의 냉랭한 눈길이 음전하게 답하고 비녀를 받아드는 윤 첩여를 훑었다. 근래 들어 황상의 총애를 받는다는 소문이 자자한 여인이다. 여차하면 민씨를 대신하여 사용할 수도 있겠지. 그리 목 매달던 계집은 벌써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사내의 마음이란 여름날 민들레 씨앗보다도 가벼운 것이니.
"이제 모두 물러가거라. 내 윤 첩여와 잠시간 담소를 나눌 것이니."
비녀가 든 상자를 품에 소중히 안은 윤 첩여 앞에 다과상이 차려졌다. 참으로 곱습니다, 인사치레만 건넬 뿐 그것들에 손도 대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태후가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 드시지 않소이까, 첩여? 이 사람이 독이라도 탔을까봐?"
"그럴 리 있겠습니까! 소첩은 그저 입덧이 심하여...."
기실 입덧이 있을 시기는 지난데다 헛구역질 한번 없었으나 회임을 해보지 않은 태후는 그를 모른다. 그렇게 불쾌감을 흘려보낸 태후는 제 앞에 있는 차 한 모금을 들어 마시곤 짐짓 자애로운 목소리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황상께서 자네를 무척이나 총애하신다 소문이 돌던데."
"예, 소첩의 입으로 내어놓기 부끄러우나... 침소를 자주 찾아주시긴 하시옵니다."
"침소를? 언제부터?"
"소첩이 재인의 첩지를 받았을 즈음이옵니다. 회임 또한 그 즈음 하였습니다."
태후는 머릿속에서 재빨리 그 당시를 헤아렸다. 틀림없이 그 계집에게 환관복을 입혀 곁에 둔 그 때였다. 황제는 그 때부터 윤씨를 눈여겨보다 고 계집이 눈에서 사라지자마자 성총을 돌린 것이리라. 참으로 뒷구멍에서 할 짓 다 하고 다니지 않았나.
"그렇구먼. 축하부터 하네. 패물이 적다고 너무 섭해하지 말게나. 황상께서 첩여에게 직접 주고 싶다 하시어 기본적인 것만 준비하였으니."
"그것이 참이옵니까, 태후마마?"
고개를 번쩍 든 첩여의 입가에 아주 밝은 미소가 떠오른다. 연모 가득한 그 눈빛에 한 치의 거짓도 없으렷다. 태후는 다시 찻잔을 들어 전혀 자애롭지 않은 표정을 그 뒤에 감추었다.
**
윤 첩여가 후원에 앉아 들여다보던 새싹이 어느덧 푸릇하게 올라와 여린 이파리를 피워내었다. 겨울도, 꽃샘추위도 물러간 자리는 향기로운 봄 내음과 노란 송홧가루가 가득하다.
그러나 우승상 파와 병부상서 파로 극명하게 갈린 정전은 하루하루 얼음이 깨어질 날이 없었다. 현은 그 사이에서 그들의 싸움을 흥미롭게 관찰하며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 애매한 황제의 태도가 그들의 싸움에 더욱 불을 지르는 것을 모르는 듯이.
"침전으로 모시오리까?"
그 날도 그런 날이었다. 황금빛 용이 조각된 팔걸이에 팔을 얹어놓고 턱을 괸 채 무심하게 정전을 내려다보다 이만 파하시오, 한 마디 하고 그 소란을 빠져나온.
"아니다. 윤 첩여에게 가지."
필두의 물음에 현이 성의 없이 대답했다. 그는 틈만 나면 윤 첩여를 찾아가 아무런 볼일도 없이 시간을 죽이고 나오곤 했다. 그리고 약삭빠른 대신들은 그가 없는 틈을 타 윤 첩여에게 금은보화를 안기며 얼굴도장을 찍었다. 그리 병부상서의 세력이 커져 우승상을 견제할수록 현에게는 좋은 일이었기에, 그는 알면서도 아무런 말도 내어놓지 않았다.
"예, 폐하."
현이 오른 연은 부드럽게 흔들거리며 정전을 벗어나 윤 첩여의 처소로 향했다. 그 행렬이 어느 지점에 갑자기 멈추고,
"꺄아악!"
소스라친 궁녀들의 비명이 조용하던 황궁을 뒤흔들었다.
"찾았습니다."
피와 물을 뚝뚝 흘리며 현의 앞을 가로막은 흑운은, 그 한 마디만을 간신히 남긴 채 흙먼지를 일으키며 털썩 쓰러졌다.
***
"어떠하냐?"
초조한 현의 물음에 바깥에서 급히 구해온 의원이 고개를 조아렸다.
"체온이 낮고 상처가 깊으며, 무엇보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하루 이틀 안으로 깨어나기는 힘들겠습니다."
"목숨에 지장은 없느냐?"
"보통 사람이었다면 벌써 숨이 끊어졌을 것이오나, 워낙 강골이신데다 신체능력 또한 놀랍습니다. 정신만 돌아오면 살 수 있습니다."
"정신이 안 든다면?"
"그것은... 아직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현이 보기에도 흑운의 상태는 위험했다. 검을 쥐는 오른팔을 제외한 모든 곳에 자상이 있다 보면 되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게다가 물에 빠졌었는지 온 몸이 흠뻑 젖어 있기까지 하였다. 흑운을 이 정도로 몰아붙일 수 있는 이는 아마도 제운일 것이니, 화연을 데리고 오는 과정에서 생긴 마찰이리라.
"으... 윽."
"정신이 드느냐?"
현의 목소리에도 흑운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 와중에서 전 상궁이 고약을 바르는 상처가 고통스러운지 낮은 신음을 흘릴 뿐. 만일 저가 감히 황제의 침상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벌떡 일어날텐데. 현은 부질없는 생각에 홀로 피식 웃었다.
"전 상궁."
"예, 폐하."
대답을 하면서도 전 상궁의 손길은 빨랐다. 피에 물든 무복은 조각조각 찢어져 옆에 쌓이고, 흑운의 온몸은 이제 흰 붕대로 가득 채워지는 중이었다.
"입 단속들은."
"잘 해두었으나... 워낙 본 이가 많아 장담하기는 어렵사옵니다."
하긴, 대낮에 황궁 한복판에 나타난 피투성이의 사내라니. 대체 어떻게 들어왔는지조차 의문스럽다. 소문이 나지 않았다면 그것이 더욱 이상한 일이리라. 흑운이 이 정도라면 아마 그를 이리 만들었을 제운 또한 무사하지는 못할 터, 그것이 한 가닥 위안이 되어주었다.
"저쪽 방을 열어라."
현이 턱짓으로 가리킨 쪽을 돌아본 전 상궁은 그만 놀란 눈빛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던, 침상 바로 옆에 위치한 쪽방. 화연이 잠을 자던 바로 그 방이었다.
"폐하,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다. 열어라."
단호한 목소리에 전 상궁이 마지막으로 붕대의 매듭을 단단히 묶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열린 문 안은 화연이 마지막으로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그대로였다. 계절을 잊은 거위털 이불과 그 옆에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초록빛 환관복까지.
현은 흑운을 안아올려 직접 그 침상 위에 올려놓았다. 붕대로 단단히 매어둔 상처에서는 벌써 새로운 핏물이 배어나와 하얀 이불 위에 얼룩을 만들어 내었다.
"네가 직접 돌보아라. 어느 누구의 손에도 맡기지 말 것이며, 그 누구도 이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예, 폐하."
화연을 찾았다. 그러나 흑운이 깨어나기 전까지는 그녀의 위치를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조금만 기다려 다오."
현은 화연의 팔찌가 채워진 왼쪽 손목을 습관처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그간 단 하루도 놓은 적 없었던 희망의 끈이 환하게 빛을 밝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