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애합니다, 부인. -->
"크윽...."
끊어질 듯한 신음과 함께 제운이 눈을 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희미한 곰팡이 냄새가 느껴진다. 젠장할. 잇새 사이로 낮은 욕설을 내뱉아 보지만 몸은 움직일 수 없었다.
방심했다. 설마 흑운이 황제의 곁을 떠나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실수였다. 그러나 설마 이 곳에서 그와 마주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였겠는가. 가만히 끊어진 기억을 정리하던 제운의 귀에 끼익, 무거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깨어나셨네요."
달을 등지고 있어 얼굴은 안 보이지만 누군지는 알 것 같다. 제운은 고통스런 와중에서도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살기어린 웃음을 흘렸다.
"...계집."
"못 배워먹어 그렇습니까? 말버릇이 안 좋으시네요."
화연이 옆으로 비켜서자 한 손에 등불을, 한 손에 약재가 든 바구니를 받쳐든 홍이가 그녀의 뒤로 숨었다.
"아씨, 쇤네는 무섭습니다요."
"꽁꽁 묶어 두었으니 움직일 수 없다."
"아이 참...."
홍이는 울먹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와 등불을 걸고 바구니에서 약재를 하나하나 꺼내었다. 화연은 여전히 문간에 선 채 손발이 묶인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씨...."
홍이는 일단 물에 적신 영견을 손에 들었으나 제운의 흉흉한 분위기에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애원하듯 화연을 돌아보았다.
"...하아. 나오너라."
마음 약해진 화연이 손짓하자 홍이는 살았다는 듯 쪼르르 밖으로 빠져나오고, 화연은 그녀 대신 좁은 광 안으로 발을 디디었다. 훅 끼쳐드는 피 냄새에 구역질이 올라왔으나 인상을 약간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직접 죽이시겠다?"
제운이 이죽거렸으나 화연은 담담하게 상처 부위를 물수건으로 닦아내었다. 아프지 않도록 조심조심 할 만한 배려까지는 없었기에, 그녀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제운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살릴 겁니다. 그리고 폐하께 넘겨드릴 겁니다."
"황상은 오지 않는다. 그가 살았을 거라 생각하나?"
"예."
화연은 상처에 피를 막아주는 약재를 대충 문질러 바른 후 붕대를 성의없이 둘둘 감았다. 무척 거친 손길이었으나 어쨌든 상처에서 흘러나오던 피는 멎었다. 제운에게는 전혀 반갑지 않은 치료였다.
"흑운은 나보다 더 심하게 다쳤다. 그리고 강으로 떨어졌지. 쓸데없는 희망 가지지 말고 그냥 날 죽이지 그래. 크윽!"
화연이 대답 대신 푹 찌른 상처에서 엄청난 고통이 휘몰아쳤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울부짖으며 혼절했을 정도였으나 제운은 그저 낮은 신음만을 삼키는 것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폐하를 모셔오시겠지요."
"시팔. 폐하, 지랄하네. 지금 황궁에 그 새끼 애 밴 계집만 둘이다. 설령 흑운이 살아 있다 한들 네년 따위 데리러 올 것 같으냐?"
푸욱, 손가락이 아까보다 더 깊이 상처 속으로 파고들었다. 화연은 제운을 칼로 찌르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손가락을 닦고 물그릇을 들어 그의 입에 갖다대었다.
"치워라."
"죽는 건 폐하 앞에서라 했습니다."
양 볼을 눌러 억지로 벌린 입 안으로 차가운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반은 마시고 반은 흘렸으나 어쨌든 물그릇은 비워지고, 화연은 그것을 바구니 안에 챙긴 후 밖으로 나와 문을 걸어 잠그었다.
"부인."
밖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듯, 은호가 바구니를 빼앗아 들며 화연의 손을 쥐었다.
"괜찮습니까?"
"... 아니요."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 사내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지가 부들부들 떨리며 공포와 혐오가 태풍처럼 휘몰아친다. 은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대는 화연을 부축하여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좀 누우세요, 부인."
"고맙습니다."
화연은 그가 부축하는 대로 자리에 누운 채 고개만 돌려 은호를 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알아챈 은호가 부러 싱긋 웃으며 동그란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개를 쓸어올려 주었다.
"서방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은호의 얼굴이 그 웃음 그대로 굳었다. 겁간을 당하고 정신을 잃은 며칠간, 식은땀을 흘리며 내내 황제를 부르던 화연의 목소리가 다시금 귀에 들리는 듯 하였다. 폐하, 빨리 오세요. 찾아낸다고 하셨잖아요. 폐하. 은애합니다. 폐하, 폐하....
"잠깐."
막 입을 열려는 화연의 입을 은호가 막았다.
"말하지 마세요. 내가 너무... 마음이 아플 것 같습니다."
"서방님."
"그리 부르지도 마세요. 내 욕심이 과했습니다. 나는 부인께... 아니, 그대를 부인이라 칭할 자격도 없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 아버님께서 그대의 집안을 무너뜨리고, 내 고모님께서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한 은호가 조용히 눈을 감고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심장을 쥐어짜는 기분이었음에도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부드럽고 다정했다.
"미안해요, 서방님."
은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과 함께, 화연이 조심스레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의 손을 떼어내었다. 언젠가 현에게서 도망치려 계획할 적에 했던 생각은 맞았다. 아무 일 없이 그대로 꽃가마 타고 시집갔더라면 분명 이 사내와 은애지정 나누며 평온하게 살았으리라.
그러나 과거는 과거일 뿐,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미 화연의 곁에 자리잡은 이는 현이었으니까.
"제게는 서방님께 나누어 드릴 마음이 남질 않았습니다. 허나 서방님께선... 정말로 좋은 분이십니다."
더 좋은 여인을 만나 행복하게 사세요. 축복하고 싶었으나, 이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녀만 하더라도 현보다 더 좋은 사내를 만났으나 전혀 행복하진 않았으니까. 은애란 그런 것이니까.
"괜찮습니다. 이리 부인과 함께 살아보지 않았습니까. 부인도 이제... 은애하는 정인의 곁에서 행복하게 사세요."
그녀의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에게 웃어주는 그 웃음이 좋았다. 욕심 낼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그래서 은호는 그 동안 천천히 화연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이제 주무세요.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예. 안녕히 주무세요, 서방님."
토닥, 토닥. 화연은 자신이 현을 재워주었을 때처럼 규칙적으로 몸을 토닥이는 은호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던 긴장이 한꺼번에 풀림과 동시에 졸음이 쏟아진다. 은호는 이내 색색 잠이 든 화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가슴 속 깊이 담았던 그의 정인. 지켜줘야 할 상황은 많고 많았으나 단 한 번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다. 그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야 홀로 후회했을 뿐. 그러나 이제는, 절대 보고만 있지 않으리라.
"한 번은... 부인에게 멋진 사내이고 싶습니다."
은호의 떨리는 입술이 화연의 입술에 닿았다. 아주 잠깐, 처음이자 마지막 입맞춤이었으나 그것으로 족했다.
"은애합니다, 부인."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띠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중요한 물건을 챙겼다. 사실 챙길 것은 많지 않았다. 화연이 반도 채우지 못하고 놓아버린 자수, 언젠가 그가 직접 그린 화연의 그림이 전부였으니까.
은호는 그것들을 품에 넣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문이 조심스레 닫히고, 잠시 후 화연이 천천히 눈을 떴다. 미안함과 연민, 그리고 복잡한 감정들을 담은 눈물이 한 방울, 베개 위로 굴러떨어졌다.
**
흑운은 의원의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하루 이틀 안에 눈을 뜨기는 어렵다는 말과 달리, 다음 날 바로 눈을 떴으니.
"... 으윽."
"깨셨습니까?"
흑운은 희미한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이 곳이 어디인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것에 걸린 시간은 단 일각도 채 되지 않았다. 아주 낯익은 방, 낯익은 체취가 그를 벌떡 일어나게 만들었으니까.
"큭!"
급히 몸을 일으키는 순간 밀려오는 통증에 흑운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전 상궁은 옆에서 혀를 차며 조심조심 그를 부축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께서 곧 오실 것입니다. 꼼짝 말고 이 곳에 계십시오. 물을 좀 가져올 터이니."
"허나, 이 곳은...."
"폐하께오서 친히 무사님을 이 곳에 데려다 눕히셨습니다."
전 상궁은 정중하나 단호한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흑운은 그대로 누운 채 방을 돌아보았다. 화연이 사라진 후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던 방, 정리조차 하지도 못하게 하던 침상. 그 침상에 깔린 이불에 덕지덕지 묻은 갈색의 핏자국은 필시 자신의 것이리라. 태어나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불충이었다.
"일단 드십시오. 곧 미음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전 상궁이 내미는 물그릇을 말없이 받아 한 번에 삼킨다. 그러는 동안 황궁에 도착하기 전 있었던 일들이 그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