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두 얼굴-60화 (60/152)

<-- 이 안에, 다른 사내가 들어갔었느냐. -->

전 상궁이 내미는 물그릇을 말없이 받아 한 번에 삼켰다. 그러는 동안 황궁에 도착하기 전 있었던 일들이 그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화연을 숨길 만한 험한 산세들을 돌아가며 뒤지던 그는 숨기지 않았으나 극히 위험한 기척 하나를 발견해내고 조심스레 뒤를 쫓았더랬다. 그리고 그 기척이 사라진 벼랑 끝에서, 맞은편에 희미하게 보이는 조그마한 가옥 하나를 발견해 낸 기쁨과 놀람이란.

흑운조차 가장 간격이 좁은 곳을 뛰어넘으며 자칫하면 아래로 떨어질 뻔 하였으니, 그간 발견해내지 못함도 무리는 아니었다.

"폐하."

문 밖에서 들리는 낯익은 발소리에 흑운이 다시 침상에서 내려오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보다 한 발 앞서 방으로 들어선 현은 조심스레 그의 어깨를 눌러 제지했다.

"누워 있거라."

"불충입니다."

"황명이다. 황명을 어기려느냐?"

늘 공기처럼 자신의 공간에 들어와 있던 흑운이 사라지고 난 뒤, 현이 느낀 것은 허전함이었다. 화연이 사라졌을 때와는 또 다른. 실체도, 이름도 없는 도구에 불과한 그림자였음에도 그는 어느 새 현의 일상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씨를 찾았습니다."

"알고 있다. 어찌 되었느냐?"

"제운을 발견했습니다. 그 뒤를 쫓아 아씨를 숨긴 가옥에 도달하였으나 그 또한 저를 알아채고 먼저 공격을 해 왔습니다. 심각한 부상을 입혔으니 지금쯤 죽었다 생각됩니다."

"잘 했다.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 너는 쉬어라."

현의 입술이 진심을 담은 호선을 그렸다. 윤 귀비의 앞에서 짓는 웃음과는 전혀 다른, 눈동자가 따스해지는 그런 웃음을.

"그 공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현에게 간신히 떠올랐던 웃음이 순시간에 굳어졌다.

"우승상의 아들?"

"예, 폐하."

"... 알겠다."

현은 차가워지는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려 하지 않았다. 화연을 찾아냈다는 기쁨, 흑운이 눈을 떴다는 기쁨. 그리고 투기심과 분노가 한데 섞여 그를 빠르게 움직였다.

***

"염병할."

제운의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붕대를 갈고 있던 화연이 갑작스런 욕설에 눈썹을 찌푸렸다.

"진짜 살았나 보네. 독한 새끼."

"무엇을...."

"황상 왔다."

화연의 손에서 붕대가 툭, 더러운 바닥에 떨어졌다. 그대로 무거운 문을 밀치고 뛰어나간 화연이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여전히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질 않는다. 제운이 건너오던 벼랑 맞은편 또한 마찬가지. 그 사내가 미친 것이거나, 아니면 작정하고 저를 농락할 생각이거나.

"뭐야...."

다시 광으로 발을 돌리던 화연의 귀에 아주 희미하게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화연은 소리를 따라 집 바깥을 빙글 돌아 뒤편에 우거진 가시덤불 쪽으로 다가갔다. 소리는 분명히 그 맞은편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지도에 의하면 이 쯤입니다, 폐하."

"근처를 샅샅이 뒤져라."

화연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며 떨리는 손이 그 쪽을 향했다. 이어 스스로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가 터져나왔다.

"폐하, 폐하!"

잠깐. 화연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현이 한 손을 들어올리자 막 수색을 시작하려던 병사들의 움직임이 한 번에 멈추었다.

"폐하. 여기 있습니다. 폐하!"

환청이 아니다. 분명 메마른 가시덤불 너머에서 화연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다급하게 빼어든 칼이 다짜고짜 굵고 단단한 나무를 베어내자 호위대장이 화들짝 놀라 그를 말렸다.

"폐하, 위험합니다! 저희가 하겠습니다!"

"놔라. 저 안에...!"

날카로운 가시에 긁인 옥수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사색이 된 병사들은 한꺼번에 달려들어 웬만한 사내의 허벅지만한 굵기의 그 가시덤불을 한꺼번에 베어내기 시작했다. 도대체 몇 년간 방치된 것인지, 잘라내도 잘라내도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사이 맞은편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화연의 등에는 따스한 감각이 와 닿았다.

"오셨습니까, 부인."

"... 서방님."

은호는 앞에 있는 향기로운 머리타래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 목소리도, 이 체취도 이제 마지막이다. 은호의 팔이 힘주어 화연을 꽉 끌어안았다. 다급한 와중에서도 화연은 사색이 되어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바둥거렸으나 사내의 힘에는 역부족이었다.

"놓아 주세요. 폐하께서 보시면...!"

"보시면. 뭐."

마침내 한 사람이 지나갈 만큼 뚫린 가시벽에서 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은호는 그제서야 화연을 안고 있던 팔을 스르르 풀고 바닥에 엎드렸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대답 대신 빼어든 칼이 높이 들어올려져 햇살에 반짝인다. 창백하게 질린 화연이 그 앞을 가로막자 현의  표정은 더욱 차가워졌다.

"비켜라."

"폐하, 제발."

"아직은 소인을 죽이지 마시옵소서."

담담한 은호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 치고는 너무도 평온한, 평소와 다름없이 부드러운.

"아직은?"

"소인이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한 번만 들어 주신 연후에 소인의 목숨을 예서 거두실지, 그를 결정하시옵소서."

우승상의 아들. 그렇지 않아도 발견하자마자 당장에 도륙을 내어버릴 생각이었는데, 덤불을 뚫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장면이 화연을 뒤에서 끌어안고 있던 장면이다. 이 상황에 드릴 말씀이라니.

"네 말을 들어줄 성 싶나 보구나. 잘못 짚었다."

"폐하!"

화연이 겁도 없이 칼을 들어올린 팔 안으로 안겨 들어온다. 갑작스런 포옹은 현이 손에서 칼을 떨어뜨리게 만들었다. 챙그랑, 바닥에 금속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 속에서 발끝으로 선 화연의 입술이 현의 입술을 입 안 가득 물었다.

"하... 아...."

"폐하. 저부터 봐주시면 안 돼요?"

그제서야 현의 눈동자 가득 화연이 담겨왔다. 밉다. 만나자마자 다른 사내를 싸고도는 그녀가 미치도록 밉다. 그런데도 현은 온 힘을 다해 화연을 끌어안고 조그마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네가... 아, 이 요망한 것."

잠시의 목숨을 연장한 은호와 현, 그리고 화연이 한 자리에 앉았다. 화연은 당장이라도 현이 은호를 베어버릴 것 같은 기분에 그의 손을 꽉 쥐어 제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은호의 아픈 시선이 그 손 위에 닿았다가 다시 들어올려져 담담하게 용안을 마주했다.

"네가 무슨 할 말이 있느냐."

"폐하께 드리고 싶은 물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네 목숨을 구명하지는 못할 것이다."

"목숨을 구걸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우승상의 아들이니 응당 뱀 새끼일 줄 알았건만, 병약해 보이는 외모와 벌레 한 마리 못 죽일 듯한 샌님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눈빛만은 당당하니, 만일 그의 아비가 다른 이였다면 좋은 인재가 되었으리라.

"그래서, 무슨 물건이냐."

"명단. 제 아버님께서 반역을 꾀한 자들의 명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핫, 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것이냐? 너 뿐 아니라 네 가문이 모조리 멸문되어 시신마저 건지지 못한다."

"제 가문이 지금까지 행한 악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대가로 바라는 것은?"

정치란 거래의 연속이다. 대신들이 하나를 원하면 그것을 내어주고 현은 또 다른 하나를 얻어낸다. 이 자가 원하는 것이 없다면 그것이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없습니다. 그저... 지금 광에 갇혀 있는 자를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 주십시오. 제 고모님과 함께."

"광에 갇힌?"

현이 무슨 말이냐는 듯, 화연을 돌아보았다.

"저를 황궁에서 빼온 자입니다. 흑운 님과 싸우다 크게 다쳐, 지금 광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 제운."

현이 낮게 이를 갈았다. 태후의 손발, 그 빌어먹을 그림자.

"더 할 말은?"

"없습니다."

"나가라."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고 밖으로 나가는 은호의 뒤에서 탁, 문이 닫혔다. 그와 동시에 현이 다급하게 화연을 끌어당겨 다짜고짜 입 안에 혀를 밀어넣었다. 거부하지 않고 열린 조그마한 입술 또한 가뭄에서 샘을 찾듯 허겁지겁 그것을 빨아 당겼다.

"너를, 내가... 얼마나...."

한참 뒤에야 입술을 떼어낸 현이 자그마한 얼굴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화연이 지금 살아 있고, 눈 앞에서 숨 쉬고 있다. 체온은 따스하고 입술은 촉촉하다.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는 손이 거칠게 옷고름을 잡아 뜯어버리고 제 이름이 새겨진 가슴을 확인했다.

"밖에... 사람이 많습니다, 폐하."

"아무 신경 쓰지 말아라."

현이 선명한 제 이름을 혀로 핥고선 중얼거렸다. 입 안 가득 들어온 유실에서 달콤한 체취와 그리웠던 맛이 한꺼번에 느껴진다. 금새 일어서서 그에게 반응하는 유두 끝을 살짝 깨문 혀가 그것을 힘주어 튕기며 자극했다.

"하아, 폐하...."

귓가에 농밀하게 감겨드는 목소리를 한 손으로 막아 버린다. 목소리를 들으면 더 미칠 것 같다. 드디어 찾아낸 정인의 실체를 하나하나 확인하려는 손이 가녀린 허리를 타고 내려가 동그란 엉덩이를 꽉 쥐고 이내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그가 그 동안 아무에게도 내놓지 못한 생각 또한 튀어나왔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만 답해라."

짐승마냥 거친 목소리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손가락이 얇은 속곳 위를 쓸었다. 그곳은 이미 촉촉하게 젖어 안에 숨겨진 속살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 안에, 다른 사내가 들어갔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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