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두 얼굴-65화 (6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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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들은 이 자가 누구인지 아시겠는가?"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알 리가 없다. 아마 짐작조차 하지 못하리라. 당연히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선대황을 모시던 그림자의 수장이오. 제운이라고 하지."

장내가 경악으로 가득 차 어수선해졌다. 정전의 지엄함도 잊고 웅성거리는 대신들 가운데 오직 우승상만이 입을 꽉 다문 채 시선을 애써 바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십 년도 더 전에 죽었어야 할 자가 산 귀신이 되어 황궁 내를 버젓이 활보하고 있었소. 누가 뒤를 봐주었을 성 싶은가?"

"폐, 폐하. 설마...!"

태후를 지지하던 대신들의 낯빛 또한 우승상과 같이 시퍼렇게 질렸다. 역모다. 허가되지 않은 자, 그것도 선대황의 그림자를 황궁에 들이다니.

"명명백백한 역모의 증좌가 있을 적에는 절차를 생략하고 당사자를 구금할 수 있소. 내 말이 틀렸는가?"

"합당하신 처분이시옵니다!"

조금 전까지 우승상 파벌에 몰려 입을 다물고 있던 병부상서 파벌의 목소리가 기세등등하게 높아졌다.

"지금 구금된 태후는 십여 년이 넘도록 이 자를 태후궁에 숨기고 수족으로 부리고 있었소. 금위대장, 증인을 대령하라!"

닫혔던 정전의 문이 다시 열리고 한 사내가 들어섰다. 사내라 하기에는 덩치가 조그맣고 곱상하게 생긴 환관. 몇달 전까지 황제의 곁을 그림자마냥 지키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비밀스런 소문의 그 환관이었다.

"보아라. 이 자가 너를 납치한 자가 맞느냐?"

"예. 그러하옵니다."

황제의 하문에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답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화연은 크게 다친 제운을 죽이는 대신 역겨움을 눌러가며 살려낸 것이다.

"폐하께서 잠시 침전을 비우신 사이 이 자가 비밀 통로를 통해 침입하였나이다. 소인의 숨을 막아 기절시킨 후 어디론가 끌고 갔습니다. 그 장소가 바로 태후궁이었나이다."

"저... 저런!"

"모함입니다! 저 자가 태후궁에 실제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어찌 증명할 수 있습니까!"

우승상 파의 부르짖음에 현이 싸늘한 시선을 그에게로 향했다. 용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대신이 움찔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잠시 그의 얼굴을 눈여겨본 현은 다시 화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 증명해야지. 네가 갇혀 있던 곳이 어디더냐?"

"태후마마의 침상 옆, 바닥에 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 문 아래에 위치한 지하 공간으로 끌려 들어갔나이다. 저 자도 역시 그 곳에 숨어 지냈습니다."

"금군대장."

"예, 폐하."

"조사한 바를 말하라."

화연의 약간 뒤편에서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던 금군대장이 종이 한 장과 병사에게 건네받은 보퉁이를 현에게 바치고 뒤로 물러났다.

"환관의 증언에 한 치도 틀림이 없사옵니다. 또한 그 안에서 죄인의 것으로 보이는 옷과 무기들을 발견하였나이다."

현이 보퉁이를 풀어 바닥으로 털자 와르르, 검은 무복과 단도, 암기 등이 쏟아져 내렸다. 조금 전 모함이라 주장했던 대신의 얼굴은 이미 그 무복보다 더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보시오. 짐의 침소에 언제라도 침입할 수 있는 자가 이리도 많은 무기를 지니고 있었소이다. 증좌가 이리도 명명백백하니, 절차에 대해서는 더 논의하지 않아도 되겠지. 태후는 그대로 구금하되, 나머지 조사는 형부에 위임한다."

현이 우승상을 돌아보며 싱글싱글 웃었다.

"금일 퇴궐은 못 하시겠군. 금위대장, 태후의 오라비를 잡아들여라."

***

"천천히 좀 먹어라. 그간 굶었느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석수라를 비우는 화연의 모습에 현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을 건네었다. 잘 먹는 것은 무척이나 보기 좋으나, 마음 한켠으로는 필시 이러다 체할 것만 같다.

"나는 황궁 체질인가봐요. 역시 폐하 수랏상이 가장 맛있습니다."

화연이 곁에 있으니 현 역시 입맛이 돈다. 그는 싱긋 웃고는 화연과 거의 같은 속도로 빠르게 저분질을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뒤, 거의 다 비워진 수라상을 내어가는 전 상궁의 얼굴이 환해진 것은 물론이다.

입가심으로 나온 달달한 주전부리까지 모두 해치운 화연은 현이 공부하라며 던져준 서책을 보는 둥 마는 둥 쭈뼛대며 그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할 말이 있느냐?"

산더미같은 상소문과 씨름하던 현은 결국 그 눈빛을 외면하지 못했다. 침상에 엎드려 서책을 들여다보는 척 하던 화연이 냉큼 그것을 덮고 일어나 그의 무릎에 가 앉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애교에 굳게 다물려 있던 현의 입꼬리가 제멋대로 기어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네. 청이 있어요. 들어 주실 건가요?"

"무엇이든."

조그맣게 속삭이며 머리를 기대오는 화연에게서 청아한 향기가 난다. 이러면 상소고 나발이고, 오늘밤은 다 그른 일. 화연은 앞섶을 파고 들어와 지분대는 그의 손길을 모른 체 하며 어깨에 기댄 머리를 부비적거렸다. 그리곤 살짝 들여다본 현의 얼굴이 땡볕에 내놓은 호박엿마냥 흐늘흐늘 녹아있다. 그는 벌써 능숙한 손길로 화연의 옷고름을 풀어내는 중이었다.

"살려주세요."

반쯤 드러난 새하얀 어깨를 어루만지던 손길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누구를."

"제발요...."

다른 사내를 살려달라 비는 목소리이건만, 어찌 이리 달콤하고 애절한가. 현은 그 청에 대답하는 대신 거칠게 옷을 잡아당겨 눈 앞에 있는 말랑한 팔뚝을 베어물었다. 으읏, 현이 깨문 연한 살갗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화연이 짧게 숨을 삼켰다.

"폐하."

"부르지 마라."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화연이 입을 다문 사이 현의 손을 빠르게도 움직여 그녀가 걸치고 있던 옷들을 죄다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졸지에 사방에 밝혀진 환한 등잔불 아래 나신을 드러낸 화연은 현의 소매 아래로 파고들어 몸을 숨기며 웅얼거렸다.

"불 좀... 꺼주시면 안 돼요?"

"당연히 안 되지."

현이 허리를 꽉 안고 젖가슴을 세게 주무르자 미간을 잔뜩 찌푸린 화연이 그를 밀쳤다. 미친놈이 많이도 유해졌다 싶었는데, 역시 미친놈은 미친놈이었다.

"싫어요. 그만요."

"무슨 생각으로 그 새끼 이야기를 꺼낸 거지."

"그분이 저를 살리셨어요. 허니 제발 죽이지만 마세요."

화연이 은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의 목숨을 현에게 구걸하는 것. 현이 싫어할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나, 창백하게 굳은 은호의 시신이 자꾸만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닥쳐라."

끓어넘치는 투기로 이글대는 눈빛이 화연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현은 지금 기어코 그녀에게서 피를 보려는 손을 애써 억누르는 중이었다.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다. 그 고통으로 저 조그만 머리통에 있는 다른 사내의 생각을 억지로 끌어내고 싶었다.

그 삐뚤어진 소유욕과 그래선 안 된다는 이성이 맞부딪혀 애꿎은 화연의 어깨만 다시 물어뜯었다. 묵직한 통증에 찌푸려지는 얼굴이 보기 싫다. 생각과 동시에 현이 벌떡 일어나 화연의 몸을 서안 위에 엎어 버렸다. 쌓여 있던 상소문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내 앞에서 다른 사내를 입에 담지 마라. 아니, 사내든 여인이든 그 누구도 담지 마라."

깨물었던 어깨를 서안 위에 찍어누른 현이 메마른 옥문에 손가락 두 개를 쑤셔박으며 속삭였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분노가 화연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훑어내린다. 아직 이물질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 않은 몸은 그가 하는 모든 행동에서 쾌감이 아닌 고통을 느끼고 벗어나려 발버둥쳤다.

"차라리 허수아비를 하나 갖다 놓으시지 그러세요."

"뭐?"

차가워진 목소리에 현이 멈칫하는 사이 화연이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노려보았다. 그저 사람을 죽이지 말아달라 부탁했을 뿐인데, 그게 이런 짓까지 당해야 할 일인가. 모멸감에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에서 저도 모르게 독설이 쏟아져 나왔다.

"아무 생각도 없는 허수아비를 가져다 놓으시라구요. 저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하아. 현이 깊게 숨을 토해내며 화연의 목덜미를 꽉 깨물었다. 밉다. 숨을 끊어놓고 싶을 정도로. 아니, 너무 좋아서 숨을 끊어놓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어지러운 와중에 확실한 감정은 단 하나, 지금 당장 그녀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네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면 된다."

"죽어버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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