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맞닿은 사이에서 -->
"아무것도 아니다."
"뭔데요. 보여 주세요."
"곤하구나. 자야겠다."
끝까지 보여 줄 생각이 없는 현의 태도에 화연의 눈총이 흑운을 향했다. 분명 옷이 구겨져 있다. 마치... 제멋대로 벗어 던졌다가 다시 주워 입은 것처럼. 화연은 벌떡 일어나 현의 무릎을 타고 앉아선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왜, 왜 이러느냐!"
흑운은 고개를 푹 숙이고 그들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묵직한 통증이 가슴을 죄어온다. 다행히 침전을 나가라는 명이 떨어지고, 그는 즉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폐하아...."
독한 술냄새에 섞여 처음에는 알지 못했던 향과 분 냄새가 또렷하게 느껴진다. 화연은 아주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현의 목에 팔을 감으며 끈적하게 귓가를 핥아올렸다. 다리 사이에서 양물이 벌떡 일어나며 음부를 쿡쿡 찔러왔다.
"옷 벗겨드릴까요?"
알싸하게 취해드는 술기운에 화연의 목소리가 현을 유혹한다. 그는 다급히 화연의 어깨 아래로 침의를 끌어내리고 눈 앞에서 흔들리는 유실을 한입 가득 물었다. 그런 현의 품으로 화연의 손이 끈적하게 파고들더니,
"찾았다."
집게손가락 끝에서 새하얀 속곳이 달랑거리며 빠져나왔다.
***
한편, 그 시각.
"서방님."
"부인...?"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누르며 잠에서 깨어난 은호의 눈앞에 화연이 있었다. 커다란 눈에 걱정을 가득 물고서 그를 내려다보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둘러보니 벼랑 위에 숨겨진 그 집이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듯, 붉은 햇살이 창문 가득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무슨 술을 이리 많이 드시었어요."
나쁜 꿈을 꾸었던가. 은호는 어지러운 와중에서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화연의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쳤다. 따스하다. 꿈이었구나. 안도감과 행복감이 가슴 가득히 퍼지며 다시 숙취가 밀려온다. 은호가 눈살을 찌푸리자 화연이 그의 머리를 안아 다시 베개 위에 곱게 올려놓았다.
"고맙습니다, 부인."
심장 소리조차 어여쁜 여인이다. 은호는 저도 모르게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늘게 뛰는 심장소리가 전해지며 점점 숨이 가빠져 온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가운데 입 안으로 물컹한 것이 파고 들어왔다.
빨고 싶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세차게 빨아들이자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히고, 자연스럽게 일어난 남근을 끈적한 손길이 휘어감아 천천히 아래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인, 무슨...."
"가만히 계셔도 되어요, 서방님."
여인의 손길에 익숙하지 못한 남근이 세차게 흥분하며 단전이 뻐근해져온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터져나올 듯한 기분에 다시 단단히 일어선 젖꼭지를 입안 가득 빨아들이던 은호는 문득 코를 파고드는 진한 사향 냄새를 느꼈다. 늘 풀잎처럼 청아하고도 달콤하던 화연의 체취가 아니었다.
"꺄악!"
은호가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놀란 기녀가 손에 쥐고 희롱하던 남근을 놓치며 작게 비명을 질렀다. 아니다. 그제서야 희미하게 정신이 돌아온 머릿속에 이 상황이 몽롱한 수묵화로 그려졌다.
햇살이라 생각했던 빛은 붉디붉은 등잔불이었고, 그를 내려다보던 여인은 아까 옆에 앉아있던 기녀였다. 그리고 그 여인도, 자신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빨고 있던 것은....
"이게... 무슨... 아, 일단 의관을 정제하시오."
다급히 이불을 끌어당겨 허리 아래만 덮은 은호가 고개를 돌리며 손짓하자 어리둥절한 기녀는 일단 곱게 개어진 옷을 대강 걸치고 그의 곁에 앉았다. 대체 이 사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방에 들어왔을 적만 하여도 부인, 부인 하며 다정하게 안아주던 분이셨건만.
"어찌 그러십니까, 서방님?"
"그리 부르지 마시오. 나는 혼인을 하였던 몸이니."
혼인을 하였던. 그 이질적인 어휘에 기녀가 품은 작은 의문은 곧 자신이 알 바 아니라는 생각에 지워졌다.
"서방님... 아니, 나으리께서 그리 부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놀란 은호가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화들짝 제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제발, 옷 좀 제대로 입어 주시오."
혼인까지 하였다는 사내가 이리 순진해도 되는 것인가. 기녀는 푸훗, 웃음을 터뜨리며 대강 걸쳤던 치마를 꼼꼼하게 여미고 상의까지 매만졌다. 좀 더 유혹해볼까 하였건만 분위기 보아하니 오늘 이 사내 잡아먹기는 다 그른 일이었다.
"다 되었습니다, 나으리."
가을날 잘 익은 홍시마냥 붉어진 얼굴이 다시 조심스럽게 손가락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곤 눈 앞에 있는 여인이 그나마 옷을 챙겨입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 손을 이불 위에 내려놓았다.
"혹... 내가 그대에게 무언가 결례를 범하였소이까?"
딴에는 무척 용기를 낸 조심스러운 물음이었으나 기녀의 입꼬리에는 장난기가 걸렸다. 순진한 도령 골려먹는 일보다 더 재미나는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결례를 범하셨지요. 암요."
"아, 젠장."
다시 손으로 얼굴을 감싼 은호의 입에서 평생 해왔던 말 중 가장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어찌 되었더라. 황제께서 말도 안 되는 명을 내리셨고, 술을 계속 마셨다. 그리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증좌. 증좌를 가져오라 하셨는데. 현이 별 생각 없이 던지고는 금세 까먹은 말이었으나, 고지식한 은호에게는 지엄한 황명이었다.
"증좌... 를 좀 주시겠소?"
"증좌요?"
"그... 그대와 내가... 그것을... 치렀다는...."
"그것이요?"
"있지 않소. 그... 하아, 남녀간의 일을...."
기녀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며 눈가가 붉어졌다. 웃음을 참느라 그런 것이나, 은호가 그것을 알 리가 없다. 깜짝 놀란 은호는 손을 들어 차마 건드리지는 못하고 그녀의 옷자락만 살살 쓰다듬었다.
"상처가 되었다면 미안하오. 그대를 함부로 대할 생각은 없었소이다."
"나으리."
짐짓 속눈썹을 내려깐 기녀가 은호에게 몸을 밀착해오며 속삭였다. 은호가 움찔하며 뒤로 피하려 하였으나 이미 가느다란 팔이 퇴로를 차단한 후였다.
"함부로 대하다니요. 보세요. 이리 소녀의 옷을 곱게 벗기어 손수 개어놓지 않으셨습니까."
돌아본 머리맡에 자신의 옷이 늘 하던 습관대로 개어져 있다. 조금 전 기녀의 옷도 그리 개어져 있었으니, 그녀의 말은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옷을 벗기다니. 붉어졌던 은호의 낯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게다가 소녀에게 부인이라 부르시며 그리 다정하게 만져주시더니."
"만졌다구요? 내가?"
"그럼요. 아주 달큰하게 젖가슴을 핥으시면서 온 몸을 주무르신 것을요."
"심지어... 뭘 핥아요?"
은호는 이어지는 말들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여인에게 실수한 일이라곤 없었건만, 술기운에 눈앞의 기녀를 화연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만지고 핥았다니.
"허나 큰 결례라면 범하셨습니다. 그리 소녀를 달구어 놓으시곤 그냥 주무시지 않으셨습니까. 부인, 지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시면서."
기녀의 마지막 말에 은호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화연이 아닌 다른 여인을 마음에 담는 일이 있을지언정, 마음에 없는 여인과 짐승마냥 교접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허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맞소?"
"아무 일요? 나으리께는 그 모든 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입니까?"
기녀가 울먹거리자 은호는 크게 당황하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여인을 울리다니, 세상에 그런 파렴치한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니, 미안하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소. 다만 내 부인을 깊이 은애하기 때문에...실수로라도 그대를 품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대에게 못할 짓이라. 허니 울지 마시오."
골려먹는 상대가 너무 순진하자 기녀는 재미가 시들해지고 대신 죄책감과 부러움이 밀려온다. 이런 사내에게 은애지정 받고 있는 부인이란 참으로 행복하겠다, 하며. 하룻밤에도 이 사내 저 사내에게 꺾이는 노류장화 신세로 꿈도 못 꿀 일이 아닌가.
이 멋진 사내의 부인과 제 신세가 참으로 비교되고 처량하니, 그간 설움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만 진짜 눈물을 쏟아놓아놓는다. 그녀 앞에서 은호는 기어코 여인을 울렸다는 자괴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증좌를 가져오라 했던 황명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