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은 여기에서 나오는데. -->
"소집이라 하여 거창한 것은 아니네. 내 회임하여 책봉식을 치른 터라, 그간 몸이 무겁다는 핑계로 내명부를 태후께 미루었지 않나. 태후의 자리가 공석인 고로 이제서야 제대로 내명부를 다스려 보려 함이니, 얼굴들이나 익혀 보자 이 말일세. 여봐라, 배 상궁."
"예, 황후마마."
"다담상은 안즉 멀었느냐?"
"이제 들이옵니다, 마마."
곧 문이 열리고, 줄줄이 들어온 궁녀들이 한 사람 앞에 하나씩의 다담상을 내려놓았다. 분명 후궁의 수에 맞추어 미리 준비하였을진데, 어찌 꼭 한 사람 분의 다담상이 남는 것인가. 황후는 초승달 모양으로 그린 눈썹을 찌푸리며 배 상궁을 돌아보았다.
"수를 잘못 센 것이더냐? 하나가 남질 않느냐?"
"황공하옵니다, 마마. 월화궁의 서 미인이 들지 않았습니다."
들었을 리가 없다. 처음부터 월화궁에는 전갈조차 보내지 않았으니. 민씨는 만족스러움을 싸늘한 표정 뒤에 감추고 덩치 큰 상궁 두 사람을 지목하여 명했다.
"가서 끌고 오너라. 감히 내명부 수장을 업신여긴 죄를 톡톡히 물어야 할 것이야."
***
화연이 없으면 수라를 제대로 들지 않는 현과 달리, 화연은 참으로 맛나게도 자신에게 온 조수라를 깨끗하게 비우고 주전부리까지 챙겨 먹었다. 세간살이를 싹 갈아치운 월화궁 안에 이러고 있으니 기억이 새롭다.
예 처음 왔을 적에 거친 밥상 때문에 얼마나 속이 상했던가. 그리 현을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리며 서책 하나를 펼쳐든 화연에게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짓입니까! 안에 미인께서 들어 계십니다!"
기세등등하게 쳐들어오는 덩치 큰 상궁들. 월화궁 상궁들이 간신히 내실 앞을 막아섰으나 상대는 경력도, 나이도 훨씬 많은 황후궁의 소속들이다. 주인을 닮아 독하기 그지없는 그네들은 제 앞을 막아서는 젊은 상궁들에게 손을 휘두르는 일을 망설이지 않았다.
짝, 짝, 짝, 손바닥이 억세게도 뺨을 내려치는 소리가 세 번째 울렸을 때.
"웬 소란이냐."
화연이 드디어 서책을 덮고 문을 열었다. 첩지 내려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게 무슨 흉한 짓인지. 화연은 현이 그리 걱정할 만도 하다 생각하면서도 절대 놀람이나 분노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턱을 약간 들어올려 상궁들을 내려다볼 뿐.
누구보다 노련한 궁인인 전 상궁이 직접 조언하기를, 상궁들에게 얕잡아 보이는 순간부터 모든 궁인들이 저를 깔볼 것이라 하였으니.
"함께 가주시지요, 미인마마."
누가 보면 황후가 직접 온 줄 알겠다. 상궁들은 그간 해오던 버릇대로 후궁마마를 대하면서도 예를 갖추지 않았다.
"자네들은 상궁인가, 후궁인가?"
뜬금없는 화연의 질문에 서로 얼굴을 마주 본 상궁들은 이내 시덥잖은 것을 다 묻는다는 듯, 비웃음을 섞어가며 답했다.
"황후궁 소속의 상궁이옵니다."
"허면 어찌 내 궁의 상궁들에게 손찌검을 하였는가."
"마마께선 첩지 받으신 지 얼마 되지 않아 황궁의 법도를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만."
어디 더 해보라지. 작은 몸집에 유달리 눈이 큰 화연은 언뜻 사슴마냥 순해 보이나, 실제로는 황제마저 이겨먹는 성질머리다. 허나 그녀가 칼을 품은 구미호라는 사실을 꿈에도 알 리 없을 상궁들은 계속해서 비웃음을 이어갔다.
"감히 후궁부 소속의 상궁 따위가 황후궁의 상궁을 막아섰나이다. 응당 내명부의 법도로 다스려야지요."
"... 아아, 내 황궁 법도에 밝지 않아 그를 미처 몰랐군."
부드러운 목소리 끝에 짜악, 유난히 갸냘픈 화연의 손이 상궁의 뺨을 매섭게 내리쳤다. 잠시 믿기지 않는 얼굴로 벌개진 뺨을 감싸고 있던 상궁이 자세를 바로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례합니다! 황후께서 보내신 이는 곧 황후마마의 대신이거늘!"
"감히 상궁 따위가 옥체를 모시는 후궁을 마주하고도 예를 갖추지 아니하였다. 내 몰랐으면 모르되, 자네들이 친절하게도 황궁의 법도를 일러 주었으니 응당 행함이 옳지 않겠느냐."
짜악, 짜악, 있는 힘껏 상궁들의 뺨을 번갈아 내리치는 손바닥에 얼얼한 통증이 느껴지지만 개의치 않는다. 한 대, 두 대, 어느덧 여섯 대. 화연은 제가 부리는 상궁들이 맞은 세 대의 꼭 곱절을 돌려준 후에야 매질을 멈추고 그녀들 사이로 걸음을 내딛었다.
"황후궁으로 가시게. 예까지 온 연유가 그것이 아닌가."
덩실하니 회임까지 한 정실 황후의 상궁들이다. 첩지만 받았지, 아직 초야도 치르지 아니한 허수아비 후궁에게 모욕을 당한 두 사람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둥지둥 걸었으나 종내는 화연의 뒤를 따라가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들의 기세는 황후궁에 도착하자마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당당해졌다.
"마마, 미인 서씨 대령했사옵니다."
"들여라."
언뜻 헤아려도 서른 가까이 되어 보이는 후궁들. 화연은 그네들과 상석에 앉은 황후가 자신에게 그다지 호의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딱히 화연이 눈치가 빨라서가 아니라 누가 보기에도 그랬다.
정5품에서 8품의 품계만을 가진 후궁들 가운데 유일하게 정3품으로 황후의 바로 앞자리를 차지한 윤 첩여만을 제외하고. 그녀는 아예 화연에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월화궁의 서 미인,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서 미인. 어찌 내명부의 소집에 응하지 않았는가?"
"황공하오나, 소집에 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옵니다."
"못하였다고?"
"예, 마마. 소첩은 황후궁의 전갈을 받지 못하였사옵니다."
새빨갛게 칠한 황후의 입술이 살짝 비틀렸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배 상궁. 어찌 된 것이냐. 월화궁에 전갈을 보내지 않았느냐?"
"그럴 리 있겠사옵니까. 분명 모든 궁에 전갈을 보내었나이다."
"허면 서 미인이 거짓을 고한 것이로군?"
쿵짝대는 모양새가 유치하기도 하지. 황궁은 정녕 제정신으로 살 수 없는 곳인가. 화연은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예정된 수순인 듯, 황후의 외침이 온 방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소집에 응하지 않음도 모자라 거짓을 고하다니. 내 저것의 오만방자함을 두고볼 수 없음이야. 가서 회초리를 가져오너라!"
민씨의 눈이 독기로 잔뜩 일그러졌다. 며칠 전, 황제께서 어쩐 일로 찾아와 연회에 동석하자 하시니 꽤나 기세등등하게 옆에 딱 붙어 나갔더랬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저 여우같은 서 미인이 나타났고.
게까지는 별 생각이 없었으나, 민씨는 황제의 눈길이 계속해서 서 미인을 힐끔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 눈길이 그리 분하였건만 연회가 끝나고 바로 손을 보았다가는 티가 날 법 하니, 며칠간을 기다렸다 이제서야 속내가 빤한 덫을 놓은 차였다.
기실 더 얄미운 년은 윤 첩여였으나 회임한 여인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괜스레 동티나기 안성맞춤이라, 만만한 년을 먼저 잡겠다는 심산이었다.
"감히 소집에 응하지 않은 죄가 열, 웃전께 거짓을 고한 죄가 또 열이다. 똑바로 숫자를 세거라. 목소리가 흔들린다면 처음부터 다시 칠 것이다."
"아이고, 미인마마!"
화연이 딸리고 온 상궁들이 안타까이 발을 동동 굴렀으나 그네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목침 위에 올라선 화연의 종아리가 새하얗게 빛난다. 그리고 곧 그 티끌 한 점 없는 살갗에 시뻘건 줄이 무자비하게 새겨졌다.
-짝!
"하나."
-짝!
"둘."
말이 회초리지, 몽둥이나 다름없는 물푸레나무 회초리다. 한 대만 맞아도 살갗이 터지는 아픔일진데 어찌 목소리에 한 점 흐트러짐이 없는가. 황제께서 그저 쫓겨난 서 대감 등용하고자 여식에게 첩지 하나 내주셨겠거니, 은연중에 무시하던 여인들은 혀를 내두르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 경탄했다.
매질이 계속될수록 막아줄 뒷배 하나가 없어 묵묵히 회초리를 맞는 후궁보다 오히려 땀을 뻘뻘 흘리며 내려치는 황후 쪽이 더욱 독하고 초라해 보이는 것이다.
-짝!
"스물."
살갗이 벗겨져 피가 줄줄 흐르는 종아리가 치맛자락 아래에 감추어진다. 화연은 비틀거리면서도 뒤로 돌아 예를 갖추고 제 품계에 맞는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고작 저 정도의 여인이 차고 앉은 황후궁, 내 훨씬 잘 다스리리라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