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은 여기에서 나오는데. -->
"아야야야, 소소, 아파아."
"아휴, 미련하게 그걸 다 맞으시면 어떡해요. 적당히 비시든가, 아니면 폐하께 사람을 보내셨어야죠."
소소라 불린 궁녀가 피 맺힌 종아리를 차가운 물수건으로 닦아내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밤마다 환관복으로 갈아입고 침전에 들 만치 총애받으면서 어찌 이리 미련하게 구는지.
"비는 것은 안 되고, 폐하께 사람을 보냈다간 정무고 뭐고 다 끊고 달려오실게고. 어쩔 수가 있었나 뭐."
다시는, 그 어디에서도 무릎을 꿇지 말아라. 내 이름이 새겨진 이상, 너는 곧 나다. 언젠가 잠행 나갔던 객잔에서 사람들을 살려달라 빌었을 적에 현이 그리 말했었다. 헌데 어찌 회초리 따위가 무서워 무릎을 꿇을까.
"나 옷 가져다 줘. 폐하께서 돌아오실 시간이야."
"안 됩니다, 마마! 이 다리로 어찌 걸으시게요!"
"갈 수 있다니까. 빨리."
"절대 안 돼요. 잘못 움직였다 흉 지면 어쩌시려구요."
반드시 가야겠다는 화연과 절대 안 된다는 소소 사이에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진다. 그러나 별안간 문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집을 부리던 화연도, 말리던 소소도 말을 멈추었다.
"뭐가, 흉이 진다고?"
현은 이미 화연에게 붙인 그림자로부터 모든 자초지종을 들은 후였다. 윤 첩여를 제대로 밀어내기 전까지는 화연에게 기울이는 총애를 티내지 않으려 하였건만, 그녀가 매를 맞고 나왔다는 이야기에는 도저히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
그다지 숨길 생각도 없었던 화연이 무심하게 제 종아리를 가리켰다. 뽀얗던 살갗은 보기에도 처참하게 터져선 피가 흐르고, 그것을 닦아낸 영견이 벌써 몇 개나 옆에 쌓여 있었다.
"너는 가서 태의를 불러와라."
"예, 폐하."
소소는 한 공간에 있기에도 무서운 황제의 곁을 벗어난다는 사실에 안도한 듯 다급히 달려나갔다. 가까이 다가와 화연의 종아리를 들여다본 현은 굳은 얼굴로 소소가 상처를 닦아내던 물수건을 들어 직접 피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어찌 그 년이 너를 부른 즉시 내게 알리지 않았느냐."
"폐하는 정무를 보는 중이시니까요."
"그깟 정무가 뭐라고!"
현이 집어던진 영견이 바닥에 걸레짝처럼 내팽개쳐졌다.
"앞으로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있으면."
평소보다 배는 가라앉은 섬뜩한 목소리. 현은 비할 수 없이 분노했을 때나 광기에 사로잡혔을 때 이런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너를 모시는 상궁부터 궁녀, 그 아래 무수리들까지 차례로 목을 베어버리겠다. 웃전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를 그년들에게 묻겠단 말이다."
"제가 알리지 말라 했어요. 그들은 아무 잘못도...."
"그들은 너와 다르다. 세상 어느 누구도 너와 같지 않다. 네가 설령 내 심장에 칼을 박아넣는다 하여도 괜찮다. 허나 네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친다면, 목이 날아가는 쪽이 가장 편한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줄 것이야."
"폐하."
"내가 화났을 때에는 부르지 말거라."
괜한 궁인들에게 불똥이 튈라, 화연은 입을 다물고 자그마한 맨발을 감싸쥔 그의 손길에 신경을 집중했다. 이 사내의 감정은 다른 이들과 다르다. 이런 것을 은애라 부를 수 있을까. 사납고 거칠며 편파적인, 마치 집착이나 증오와도 같은 이것을.
"폐하, 태의 대령했사옵니다."
"들여라."
태의가 앉을 수 있도록 약간 비켜난 현은 그가 약재를 붙이고 꼼꼼하게 면포를 감는 과정을 감시라도 하듯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중간중간 화연이 쓰라림에 작은 신음이라도 내면 정말 무시무시한 눈길로 노려보았기에, 진료가 끝날 즈음에는 태의의 관복이 식은땀에 젖어 철썩 들러붙을 지경이었다.
"절대 흉지지 않도록 상처를 잘 보살피고, 하루 다섯 번씩 네가 직접 와 살피거라."
"황명을 받드나이다."
"이만 가라."
태의가 나간 후 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화연 또한 그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앞으로 삐죽 나온 입술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윽고 그녀 옆에 조심스럽게 누운 현이 분홍빛 뺨 위에 살포시 입술을 겹쳤다가 떼어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
"저 때문에 폐하가 폭군이 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
그러나 고개를 약간 틀어 바라본 곳에 폭군은 없었다. 성군 또한 없었다. 그저 정인만이 있을 뿐.
"이 궁도 간만이군. 네가 있으니 공기마저 다르구나."
현이 갑자기 새삼스러운 듯 넓은 내실을 둘러보았다. 예전에는 달랑 침상 하나와 탁자 하나, 의자 두 개가 전부이던 공간. 너무 휑해 말을 할 적이면 공허한 메아리가 되돌아오던 이 방은 화연이 있음으로 하여 정갈하고 고급스러운 세간들로 가득 채워졌다. 마치 그의 마음처럼.
"내가 여기를 왜 만들었는지 아느냐."
처음이었다. 현이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화연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그저 조심히 돌아누워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귀를 기울였다.
"나는 고작 구 세의 나이로 황태자위에 올랐다. 그때부터 부황은 나를 볼 적마다 한 가지 얘기밖에 하지 않으셨지. 성군이 되어라. 아침 저녁으로 문우를 들 적마다, 어쩌다 얼굴을 마주할 적마다. 그뿐인가. 모든 대신들, 상궁들까지도 나만 보면 성군, 성군. 이리 공부하여 성군이 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성군이 되시려면 이리하셔야 합니다, 성군이 되십시오, 성군이 되십시오."
아홉 살. 화연이 사가에서 어머니 치마폭에 누워 어리광을 부리고 아버지 등에 업혀 시전 구경을 나서던 시절이거늘, 똑같이 어린아이였던 현은 어른도 견디기 힘들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화연은 안쓰러운 마음에 가만히 현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십이 세에 황위에 올랐지만, 자나깨나 부황의 목소리와 죽은 형제들의 아우성이 나를 따라다녔다. 눈만 감으면 자객의 칼이 내 목을 칠 것만 같아 잠도 자지 못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성군의 탈을 쓰고, 성군이 해야 할 일들을 해냈다. 대신들의 의견에 귀기울이고, 백성 하나하나 억울한 일이 없도록 보살피고. 그리 열 다섯이 되니 또 할 일이 늘어나더구나."
"거기서 또요?"
화연이 질색하자 현이 피식 웃으며 흐트러진 머리를 쓰다듬었다.
"후사를 이어야지. 하루가 멀다하고 끊임없이 후궁이 들어왔고, 나는 너무 지쳐 그들의 처소를 찾아다닐 수가 없었다. 해서 침전 가까운 곳에 월화궁을 만들고 누군지도 모르는 여인들이 들어오는 대로 품었지. 최소한 성의는 보여야 대신들과 태후궁에 들볶이지 않을 터이니. 헌데 날이 갈수록 내가 온전히 나로서 쉴 수 있는 공간은 여기밖에 남지 않더구나. 모든 욕망도, 불안도, 성군답지 아니한 것들은 죄다 여기서 풀었다. 대신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으니까."
"허면 저는 폐하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빼앗아 버린건가요?"
"이제는 필요없다. 네가 있는 곳이 내 쉴 곳이고, 네 앞에서 나는 유 현이니. 너를 건드리는 것은 곧 나를 해치는 것과 같다. 그러니... 내 반드시 그 년의 사지를 베어 짐승의 먹이로 던져주마."
은애가 맞았다. 사납고 거칠고 편파적이고, 또한 집착과 증오로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어둠을 가지고 있는 사내는 원래 색정적일까, 그 사내가 현이기 때문에 색정적인 것일까.
"현."
"그리 부르니 좋구나."
분노로 꽉 물려있던 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성군이 아니어도, 저는 현을 은애해요. 온종일 현을 생각하고, 보고 있으면 안고 싶고, 안고 있으면 입맞추고 싶고, 입맞추면...."
"그만."
미소를 놓지 못한 입술이 화연에게 닿았다가 힙겹게 떨어졌다. 그의 눈에 스쳐지나간 그림자는 분명 정염이었다.
"좋긴 한데, 그리 말하면 내가 참을 수 없지 않겠느냐."
"안 참아도 되는데."
"상처가 덧날까 무섭다."
"그래도, 폐하아."
농밀한 속삭임과 함께 화연이 현의 손을 잡아 이불 속으로 끌어당겼다. 정확히는 촉촉히 젖은 다리 사이로.
"입을 맞추면 하고 싶은걸. 봐요."
하아. 현의 입에서 자신을 가라앉히는 한숨이 흘러나왔으나 손은 홀린 듯 매끈한 속곳 위를 어루만진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화연은 온몸이 민감해지며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서둘러 벗겨낸 옷가지들이 침상 위에 엉망으로 흩어졌다.
"시집가던 처녀를 업어온 줄 알았는데, 구미호 새끼를 잡아왔구나."
"그래서 싫으세요?"
대답은 없었다. 현은 이미 소담한 젖가슴 위에서 그를 유혹하는 분홍빛 유두를 젖이라도 나오는마냥 쪽쪽 빨아먹느라 바빴으므로.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나는 달큰한 향기가 한쪽으로는 부족하다. 현은 젖가슴을 양손으로 눌러 가운데에 모인 유두를 한꺼번에 쪽쪽 삼키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 절정해 버릴 것 같은 쾌감에 화연이 작게 몸을 떨며 신음했다.
"지나치게 좋은데."
아까 물은 말을 이제서야 대답하며 위를 올려다보는 현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세상에 그 어떤 여인이 이 사내에게 안기고 싶어하지 않을까.
화연은 저도 모르게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다가 아릿한 통증에 윽, 하고 인상을 썼다. 잠시 자신이 아픈 것처럼 마주 미간을 찌푸린 현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몸을 돌리도록 했다.
"너는 가만히 있어라.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