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은 여기에서 나오는데. -->
"이 정도면 되었다. 네 부친을 데려와라."
"예, 폐하."
멀리 나갈 것도 없었다. 이미 사색이 된 노비로부터 침입자의 인상착의를 전해들은 태준의 부친, 유한은 이미 급히 의관을 정제하고 달려오고 있었으므로. 현은 생각보다 일찍, 전 태자태사를 마주할 수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오래간만이로구나."
"소신이 불충하여 소식을 전하지 못하였나이다. 그간 옥체 강녕하시었사옵니까?"
벼슬에서 밀려난지 꽤나 세월이 흘렀건만, 그는 현이 기억하는 모습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꼬장꼬장한 눈매도, 꽉 다문 얇은 입술도. 그렇기에 현이 신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대를 다시 황궁으로 불러들이겠다. 호부좌랑과 더불어 서 미인의 세력이 되어주게."
"예, 폐하."
무슨 일이냐 물을 만도 한데 한 치의 의문도 품지 않고 즉각 대답하는 모습 또한 마음에 든다. 처음에는 윤 첩여를 조종하여 그쪽부터 처리할 작정이었으나, 그 건방진 년이 화연을 건드려 제 수명을 재촉한 것이다.
게다가 갓 첩지를 받은 화연을 은연중 무시하는 후궁들의 태도라니. 이번 일로 인해 현은 화연을 꽁꽁 감추고 보호하는 일이 능사가 아님을 깨달았다. 화연이 황후의 자리에 당당히 서길 바란다면, 조금 어려운 길일지언정 반드시 그리하도록 해 주리라.
***
간밤에 황제께서 친히 월화궁으로 걸음하셨다는 소문은 모든 후궁부를 비롯해 황후궁까지 삽시간에 퍼졌다. 그 소문을 물고 온 배 상궁은 옆에서 안절부절하였으나 황후 민씨는 태연하기만 했다.
"정신 사나우니 그리 안달하지 말거라. 고까짓 년 찾아가 보았자 황손 품을 나를 어찌하실 것이냐?"
"영 감이 좋지 않습니다, 마마. 무사히 황자를 생산하시기 전에는 몸을 사리시어요."
저리 기가 약해서야. 민씨는 쯧, 하고 혀를 찼다. 태후는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 저를 태후궁 구석에 처박아두고 물 한 모금 마음대로 먹지 못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그마저 없다. 벌써 동그랗게 불러오는 배에 손을 얹고 있노라면 세상 그 어느 것도 두렵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그의 양부가 이미 살생부에 이름을 올렸음을 꿈에도 몰랐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나 그 시각, 정전에서는 이미 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였는가?"
"예, 폐하."
평소와 다름없이 등청한 대신들은 평소보다 훨씬 냉랭한 황제의 태도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나다를까, 모든 대신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추풍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문을 잠그거라!"
철컥, 밖에서 문이 잠기는 소리와 함께 소리없이 나타난 그림자들이 대신들의 뒤편을 차지했다. 금방이라도 그들의 검이 제 등을 베어낼 것 같은 기분은 대신들로 하여금 한 마디도 내어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조강을 시작하지."
이 상황에 조강이라니.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대신들과는 대조적으로, 붉은 비단이 덧씌워진 두루마리를 펼쳐든 현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국구인 민씨가 반역에 가담했다는 정보가 들어왔소. 이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가?"
우승상의 명부에 수결을 올린 이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새파래졌다. 하나가 잡히면 모두 잡힌다. 황후 민씨와 복중 용종이야말로 그들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다. 뒤에서 검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있는 그림자들이 무척이나 두려우나 민 대감이 끊어지는 일만은 막아야 했다.
"모함이옵니다, 폐하! 어찌 국구가 반역을 꾀할 수 있단 말이옵니까!"
"모함이옵니다, 폐하!"
"그래? 모함이란 말이지."
현은 피식 웃으며 두루마리를 옆으로 밀었다
"상서령."
"예? 예, 폐하!"
"그대 또한 국구 민씨에 관한 발고가 모함이라 보는가?"
우승상이 없는 지금, 그들의 수장은 다름아닌 민 대감이었다. 우승상이 처형 대신 유배를 간 것으로 미루어 그들이 계획에 가담한 일은 황상께서 알지 못하리라. 상서령은 침을 꿀꺽 삼키고 속에서 쥐어짜낸 목소리로 외쳤다.
"모함이옵니다, 폐하! 어찌 제대로 된 증좌 하나 없이...!"
상서령의 말은 채 끝나지 못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그림자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려그은 칼은 목소리뿐 아니라 목숨조차 잘라버렸으므로. 담담한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지는 상서령을 내려다본 현은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내어 서안 위에 올려놓았다.
"증좌를 미리 내놓았어야 했는데, 짐이 정신이 없었군. 다시 의견을 나누도록 하지. 어사대부?"
느닷없이 지목당한 어사대부의 수염이 파르르 떨린다. 황제는 지금 확실한 패를 가지고 그를 시험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황제의 패는 아마도 우승상의 달콤한 꼬임과 겁박으로 홀리듯 수결을 남긴 바로 그 책이리라.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빠르게 상황 파악을 마친 그는 노련한 대신답게 대처에 들어갔다.
"소신이 불민하여 그 서책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나, 모함이든 아니든 발고가 들어오고 증좌가 있는 이상 국구 민씨를 추포하여 엄밀히 조사해야 한다고 보옵니다."
"소신의 생각 또한 어사대부 영감과 같사옵니다, 폐하."
그와 마찬가지로 재빨리 방향을 튼 대신들이 언제 반대하였냐는 듯 국구를 추포하라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 샌님 자식이 꽤나 유용한 물건을 주었단 말이지. 현이 천천히 책을 다시 집어넣자 정전에 소리없는 안도감이 흘렀다.
"금위대장."
"예, 폐하."
"국구 민씨와 그 식솔들을 모조리 잡아들여라. 태감."
"예, 폐하."
"황후궁의 모든 궁인들을 모조리 하옥하고 상궁 하나만 남겨라. 세끼 식사 또한 그 안에서 해결하도록 하고, 쥐새끼 한 마리 드나드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황명을 받드나이다."
이리 압박하여 휘두르면 이다지도 편한 것을. 대신들이 바득바득 버틸 때를 대비하여 정전 문까지 걸어 잠갔는데 꽤나 싱겁게 되었다. 현은 아직도 흉흉한 살기를 흘리고 있는 그림자들을 손짓으로 치운 다음 평소보다 곱절은 더 평화로운 어조로 다음 안건을 꺼내들었다.
"다음은 인재 등용이오. 등용이라 하여 거창한 것은 아니고."
현이 싱글싱글 웃으며 필두가 건네는 빈 두루마리를 받아 그 누구도 동의하지 않은 교지를 적어 내려갔다.
"조금 전에 상서령 자리가 비어버렸지 않소이까. 전 태자태사 표 유현을 현재 공석인 정3품 상서령에 봉하겠소. 이의 있으신가?"
"폐하, 그이는 태자태사 시절 능력이 부족하다 하여 스스로 사직서를 제출한 인물이옵니다."
기다렸다는 듯 병부상서 측에서 즉각 반발에 나섰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정전에서 저 정도로 반발을 하고 나설 수 있다니, 참으로 용기가 가상한 이였다.
"그 태자태사가 맡아 가르친 태자가 바로 짐이오. 스승이 부족하면 그 제자 또한 부족한 법, 그대는 지금 짐을 부족하다 말하는 것인가?"
아차, 말을 잘못 꺼내었구나. 괜히 앞으로 나섰다는 생각에 순식간에 똥 씹은 표정이 된다. 현은 그 얼굴이 상당히 고깝다 생각하며 능글능글 말을 이었다.
"답이 없음을 보니 정녕 그리 생각하나 보군."
"황공하옵니다, 폐하! 신이 어찌 그런 망극한 생각을 품겠나이까!"
"허면 태자태사의 능력이 부족하지 않다는 말로 알고, 또 이의있으신가?"
이의가 있을리가. 열을 지어 선 대신들은 그 허리가 수그러든 각도만치 다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황제는 이제 조금만 수틀려도 그들의 목을 베어버릴 수 있다는 것. 지금까지 귀찮은 분쟁들을 극도로 피해오던 그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칼을 뽑아들었다. 마치 성군이기를 포기하였다는 듯.
**